행복은 없다, 찰나의 충만만 있을 뿐

Private/자기개발 · 2017. 5. 27. 20:25

우리는 왜 불행하고 또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을 주제로 한 김현철 정신과 전문의 인터뷰



‘행복’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은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울랄라 심리 카페>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을 통해 촌철살인 심리 분석과 해법을 제시해온 김현철 정신과 전문의(대구 공감과성장클리닉 원장)다. 김 원장은 “행복은 없다”고 단언하며, 대신 “개인적 비극을 보편적 불행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을 제안했다. 인생이 생채기라는 걸 받아들이고, 선택은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세상엔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걸 받아들이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그나마 고통의 바다를 덜 고통스럽게 건너는 법이었다. 너무나 슬픈 진실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때부터 자유가 생기는 것이었다.


“타인의 반응을 거울로 삼지 말아야”


인터뷰 준비를 위해 쓰신 책(9권)과 라디오 방송을 다 확인했다. 인터뷰할 때마다 인터뷰 대상의 모든 것을 알고 나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준비 과정이 불안하고 버겁다. 나는 왜 그런가.


완벽주의는 성취 위주, 결과 위주의 한국 교육 환경 탓이 크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의 반응에 의존하는데, 우리나라의 반응의존성은 특히 심하다. 인터뷰 대상자에게 어떻게 보일지, 즉 대상자의 반응에 민감하다. 어떻게든 인간의 삶에서 생채기는 나게 돼 있다. 그런데 생채기가 하나도 안 나고 살려 하니까 그런 거다.


회사나 조직 내에서 늘 불만과 괴로움이 많은 사람은 대체로 인정욕구가 강한 듯하다. 과도한 인정욕구는 왜 발생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정신 건강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밸런스(균형)가 중요하다. 한쪽이 과하게 발달하거나 과민해지는 게 문제다. 인정욕구는 상대방의 반응을 거울 삼기 때문이다. 타인의 반응을 거울 삼아, 상대의 반응으로 내가 잘났거나 못났다고 판단한다. 백설공주나 마귀할멈처럼 반응을 거울로 삼지 말아야 한다.


늘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비판이 심한 사람들은 모순 또한 심하다. 자기모순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렇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데, 그걸 수용하기 싫은 것이다. 과거에 모순된 것을 강하게 겪은 트라우마가 있거나, 부모가 응당 해줘야 하는 최소한의 것을 해주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반골 기질이 생긴 것이다.


동정심이 과한 사람이 있다. 좌판 행상을 하는 할머니,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 등에게 고통스러울 정도의 동정심을 느낀다면?


속죄인데, 허상의 죄에 대한 속죄이다. 예를 들어 집에서 자기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다른 형제는 공부를 못하고 부모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평생 이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게 바로 허상의 죄다. 허상의 죄가 있는 사람들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한다.


남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건 왜 그럴까.


앞서 말한 반응의존적 상태다. 상대방의 반응을 거울 삼아 자신을 보는 것이다.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트루 셀프(true self·진짜 자기)를 존중받지 못한 경험이 있으면, 항상 부모든 타자든 그가 바라는 대로 하게 돼 있다. 그래서 회사나 조직에서 바라는 대로 하니까 일은 잘한다. 하지만 내가 없다. 이런 사람은 40대가 되면 위기가 온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마찬가지로 반응중독이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사랑받을 만한가’(Am I lovable?)라는 의구심에서 출발한다. 그런 불안이 강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겐 칭찬이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고, 그래서 계속 착한 사람으로 살려 한다.


“과도한 과시는 병리적인 나르시시즘”


지나치게 도덕적 기준이 높은 사람, 그래서 늘 “그것은 옳지 않아”를 외치는 사람은 왜 그럴까.


경멸이 많아서 그렇다. 경멸이 많은 이유는 상처가 많아서다. 그런데 경멸은 부메랑처럼 자기에게 오게 돼 있다. 규율이 많으면 거기에 말리게 된다. 어떤 가치나 명제가 사람보다 앞서면 안 된다.


이분법적 세계관- 착한/못된, 옳고/그름, 좋고/나쁜- 이 강한 사람은?


어떤 인간도 완벽하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없는데, 흑백논리를 선호하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면, 나의 다양한 모습을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도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하는 게 좋은놈/나쁜놈으로 구분하고 그렇게 구분해야지만 자기가 편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에게 더 잘하고 ‘예스’를 외치는 심리는?


반동형성이다. 쉽게 말해 자신의 화를 들킬까봐다. 그 상사 자체가 겁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올라오는 화가 겁나서다. 그 화를 진화하기 위해 리액션을 반대로 한다. 다른 사람이 그 상사에게 45도로 인사할 때 이 사람은 90도로 인사한다. 그래야 내 화를 억압하고 숨길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자기 알맹이, 심지가 있는 사람은 남에게 자랑할 필요가 없다. 과도한 과시는 병리적인 나르시시즘(자기애)이다. 그 특징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대개 초라하고 민낯의 본인은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언증처럼 오버한다. 그게 발달한 게 과시성 SNS들이다. 근본적으로 자존감이 없고 껍질만 있는 상태다.


끊임없이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은 왜 그럴까.


자기 과시랑 뿌리가 같다. 가학증과 피학증이 뿌리가 같고, 열등감과 우월감이 뿌리가 같듯이.


화를 못 내고 억누르는 사람은 왜 그럴까.


모든 감정은 타당한데 우리 사회에서 희로애락 중 ‘노’와 ‘애’가 금기시된다. 강박증, 결벽증 등 대부분의 정서 질환은 분노에서 온다. 분노가 없으면 서울 광화문광장의 촛불도 없었다. 감정에 대한 선입견이 문제다.


일중독, 알코올중독 등 중독 현상은 어떻게 보나.


중독은, 내가 집착하는, 나를 안달하게 하는 누군가의 대체재다. 중독은 관계의 결핍을 보상하는 다른 수단이다. 그 대상들은 ‘안달 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애가 잘 안 될 때 폭식·폭음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가


결정장애, 쉽게 말해 팔랑귀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은 왜 그런가.


이런 사람은 팔랑귀가 아니라 사실은 신중한 거다. 왜 신중하냐면,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다. 모든 선택도 잃는 게 있다. 그 명제를 잊어서다. 내 개인적인 이론은 만약 사람이 무인도에 있다면 결정을 미루지 않을 거다. 내 결정에 아무도 뭐라고 안 하니까.


인터넷을 보면 나랑 전혀 상관없는 톱스타, 성공한 유명인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악성 댓글이 많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상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인격적으로 존중할 때 시기심이 치유된다고 했다. 이는 이상적인 해법이다. 그게 안 되면 체념해야 한다. 이른바 ‘할 수 없지, 뭐’다. 많은 책에서 ‘하면 된다’는 희망고문을 하는데, 체념도 굉장히 중요하다.


분노, 모멸감, 수치심 등 고통스러운 감정의 근원은 열등감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다. 모든 감정의 원초적 단계는 존재 불안이다. 우리는 자궁 안에 있을 때 편했다. 세상에 나오니까 너무 버겁다. 자궁 내 환경과 너무 다른 거다. 정신분석가 오토 랭크는 “출생 자체가 트라우마”라고 했다. 즉 생존 불안, 존재 불안, 거기서 모든 게 출발한다.


인간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건 뭔가.


인간이다. 그런데 그나마 인간을 치유해주는 것도 인간이다.


좀더 행복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반전이지만, 행복은 없다. 프로이트도 말했다.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개인적 비극을 보편적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행복이 없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다.


행복은 없지만 찰나의 충만이 있다. 그러려면 관념을 지워나가야 한다. 보편성 대신 자기만의 색깔로 살면 된다. 그리고 생채기를 겁내지 말고.


심리학에서 행복의 주요 조건으로 자존감을 얘기하고, 자존감의 주요 조건으론 양육 환경을 많이 말한다. 양육 환경을 바꿀 수 없는 성인들의 자존감은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나.


30∼40세대가 이제 결핍이 보이는 거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문학 열풍과 멘토 열풍이다. 다행히 멘토는 사람일 필요가 없다. 책이나 영화,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서적 고통과 결핍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게 아니라, 발달이 정체된 상태다. 그 정체된 부분은 이런 것들로 촉진된다.


인간이 느끼는 부정적 감정(열등감, 수치심 등)과 긍정적 감정(즐거움, 기쁨 등)의 비율은 어떻게 되나.


감정에 긍정, 부정을 매기면서 불행이 시작되는 거다. 감정에 부정과 긍정의 꼬리표를 달아선 안 된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다. 마리화나를 왜 금지한 줄 아나? 대마초는 담배보다 덜 해롭다. 그런데 다 피우면 일을 안 한다. 편하니까. 그러면 나라경제의 생산성이 저하된다. 그것처럼 감정을 임의로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고 터부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노가 많아지면 사람들이 봉기하니까.


그럼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모멸감, 수치심, 굴욕감 등의 감정도 모두 필요한 것인가.


당연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그걸 못 느낀다면 시스템상 바로 교도소에 가게 된다. 텔레비전을 보면 범죄자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나오는데, 대부분은 부끄럽거나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껴서 그렇다.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다음 범죄를 위해 얼굴을 숨기려고 모자를 쓴다. 수치심, 죄책감 등의 감정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삶의 방향만 있다, ‘인간적으로’”


선생님처럼 마음의 구조와 원리에 대해 알면 남들보다 행복할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넓어져서 좋다. 진정으로 울 수 있고 화낼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하다. 어차피 불안이 생존의 본질이고 그 보편성을 알게 되니까, 긴장을 덜 하고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생채기가 난다는 것을 아니까 별로 두려울 것도 없다.


삶의 좌우명이 없는 사람이 건강하다, 삶의 원칙이 많지 않을수록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제한을 당한다. 나이에 따라, 경험에 따라 삶의 관점이 넓어지는데 계속 좌우명은 ‘꿈을 가져라’ 이러면 안 된다. 삶의 큰 방향성만 가지고 유연하게 바꿔나가야 한다.


그럼 선생님은 삶의 원칙이나 좌우명이 없나.


전혀 없다. 오로지 방향만 있다. 방향은 하나다. ‘인간적으로’.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59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