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살 넘은 도쿄 맛집 이야기

Fact/여행-음식 · 2009. 12. 4. 01:12

초밥에서 돈가스까지 6개의 열쇳말로 풀어보는 일본요리 냠냠사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나 같은 미식가에 대해서, 주위 세상에 신경 쓰지 않는 이기적인 식탐쟁이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그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 식품 생산에 대한 지식을 망라하는 미식가의 폭넓은 기술은 오히려 미식가가 자기를 둘러싼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여유식(슬로푸드) 운동의 창시자 카를로 페트리니는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이후)에서 이렇게 썼다. <esc>가 취재한 시니세가 만드는 음식들은 이미 많은 한국인이 즐기는 요리가 됐다. 초밥(스시), 메밀국수(소바), 튀김(덴푸라)이 없는 식생활이 상상 가능한가? 그러나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음식을 즐기면서 그 음식의 맛이 가진 역사와 비밀을 하나도 모른다면 당신은 ‘이기적인 식탐쟁이’다. 공부하면서 먹을 필요는 없지만, ‘아, 이런 비밀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먹는다면 미식의 즐거움은 더 커진다. 그래서 만든 일본 요리 대형 냠냠사전. 여섯 개의 열쇳말 속에 일본 요리의 역사가 숨어 있다.


⊙ 초밥(스시) 튀김과 함께 에도시대의 대표적인 ‘즉석식’. 에도는 도쿄의 옛이름이며 18세기부터 상공업이 화려하게 꽃핀다. 에도 막부 시절 화재 때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고자 곳곳에 빈터가 조성됐다. 이 빈터들은 서민들의 ‘만남의 광장’이 됐고 스시·덴푸라·소바 등을 파는 포장마차(야타이)가 즐비했다. 스시의 기원은 ‘나레즈시’다. 생선 뱃속을 손질해 그 속을 밥으로 채워 무거운 돌로 눌렀다가 3개월~1년 발효시켜 생선살만 먹었다. 절이는 기간이 생선 종류와 절이는 조건에 따라 3~4일로 점점 짧아진다. 에도의 서민들은 발효하는 데 걸리는 단 며칠을 못 참고 현재처럼 즉석에서 생선살을 밥 위에 얹은 ‘니기리즈시’를 포장마차에서 즐겼다. 일종의 패스트푸드인 셈이다.


⊙ 메밀국수(소바) 메밀을 국수로 만들어 먹은 것은 에도시대부터다. 소바는 밀가루와 달리 차진 성분이 없어 면으로 뽑으려면 엄청난 기술이 필요했다. 간장과 가다랑어포 국물이 발달하면서 국물 있는 먹거리 가운데서 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게 됐다.


⊙ 튀김(덴푸라) 원래 일본 음식은 기름을 많이 쓰지 않는다. ‘덴푸라’는 나가사키에 전래된 남만(오늘날 베트남 지역) 요리에서 유래한다. 기름을 이용한 요리는 중국 승려와 유학승 등 소수만 즐겼다. 16세기 무렵 기름 생산이 늘고 남만의 기름 요리가 전래되면서 비로소 서민들도 널리 애용하는 튀김이 탄생했다. 에도의 포장마차에서 파는 튀김은 대표적인 패스트푸드였다.


⊙ 장어 우나기(장어) 가바야키(꼬치구이) 역시 에도시대 일본 서민들의 인기 요리였다. 가바야키는 장어를 반으로 갈라 구운 것이다. 간장과 설탕이 서민들 사이에 보편화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장어는 특별한 먹거리다. 이달 1일치 영어판 <요미우리신문>은 중국산 장어가 일본산으로 산지 표시가 잘못된 사건을 1면 기사로 실을 정도다.


⊙ 닭요리 나라시대의 덴무 천황은 7세기에 칙령을 선포해 소·말·개·닭고기를 금지했다. 닭은 시간을 알리고 알을 낳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불교의 영향도 컸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일본이 ‘미식의 천국’이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육식을 선포한 메이지 유신 이후 100여년에 불과하다. 닭고기 스키야키는 쇠고기 스키야키보다 나중에 나왔다.


⊙ 돈가스 돈가스는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독특한 ‘발명품’이다. 발전 경로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의 코틀레트→비프가쓰레쓰·닭고기가쓰레쓰→포크가쓰레쓰→돈가스. 메이지 왕이 육식을 해금한 것은 1872년이고, 이후 돈가스가 출현한 것은 20세기 초다. 코틀레트는 고운 빵가루를 쓰며 고기가 얇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부쳐 튀긴다. 또 나이프와 포크로 먹으며 양배추를 곁들이지 않는다. 반면 일본식 돈가스는 알갱이 큰 빵가루로 튀기며, 팬에 부치는 것이 아니라 튀김처럼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는 ‘디프 프라잉’으로 익힌다. 이 덕분에 호라이야에서 만드는 두꺼운 돈가스가 가능해졌다. 또 코틀레트와 달리 양배추 채를 곁들이고 된장국·쌀밥과 함께 젓가락을 이용해 먹는다. 미리 잘라내는 것도 돈가스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미리 썰지 않고 나이프와 포크와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 먹으며 쌀밥과 함께 양배추 채를 곁들인’ 한국의 돈가스는 새로운 발명일까?


※ 참고 〈돈가스의 탄생-튀김옷을 입은 일본 근대사〉(오카다 데쓰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에도의 패스트푸드〉(오쿠보 히로코 지음, 청어람미디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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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자 덴쿠니


튀김 120년, 비밀의 기름이 끓는구나
포장마차로 시작해 3대 때부터 전담 요리사 고용… 경영자도 간장은 함께 담궈


120여년 된 맛이란 과연 어떤 맛일까?

지난 6월30일 오후 4시. 긴자 한복판에 자리잡은 ‘긴자 덴쿠니’(銀座 天國) 본점(혼텐)의 주방은 후텁지근했다. 처진 눈이 “나 사람 좋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요리장 다카하시 슈헤이(60)의 얼굴에 갑자기 긴장감이 돈다. 능숙하지만 조금 긴장된 손놀림으로 재료를 끓는 기름에 넣은 뒤 땀을 훔친다. 1885년(메이지 18년) 처음 이 튀김집을 연 쓰유키 구니마쓰도 아마 똑같이 소매로 땀을 훔쳤을 게다.


초벌 튀김 뒤 다시 튀기는 건 상상도 못해


긴자 덴쿠니는 헤이닌(평민)이던 26살의 쓰유키 구니마쓰가 부인과 함께 연 튀김(튀김) 포장마차에서 유래한다. 막부정치가 끝나고 메이지유신이 벌어지던 격변기에 그는 다른 평민들처럼 먹고살기 위해 포장마차를 했다. 튀김은 18세기 상공업이 화려하게 꽃폈던 에도(현재 도쿄)의 서민들이 누구나 즐기던 일종의 ‘패스트푸드’였다. 18세기 막부 시절부터 에도의 번화가 곳곳에는 튀김·초밥(스시) 포장마차가 즐비했다. 쓰유키 구니마쓰는 현재 본점이 있는 긴자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신바시에서 처음 튀김을 팔았다.

긴자 덴쿠니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3대 손인 쓰유키 나오히코부터다. 쓰유키 나오히코는 도쿄가 ‘한국전쟁 특수’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던 1952년 사업을 물려받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쓰유키 나오히코는 긴자에서 포장마차가 아닌 정식 건물에서 처음 식당을 차렸다. 지점도 냈다. 대대로 경영자가 요리를 했던 긴자 덴쿠니는 이때부터 전담 요리사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현 경영자는 창업자의 4대손인 쓰유키 모토히로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17살 되던 66년부터 긴자 덴쿠니에서 일했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100년 넘은 긴자 덴쿠니의 맛을 지키는, 신문사로 치면 논조를 책임지는 편집국장이다. 처진 눈초리는 선량함을 숨길 수 없지만 기자에게 답변하는 느릿한 말투에서 자존심이 묻어났다. 그는 기후현 출신으로 건축자재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몸이 허약해 학업도, 공장일도 포기해야 했다. 일정한 장소에서 서서 일하는 직업을 찾다 덴쿠니를 찾았다. 콘크리트를 섞던 두 손은 뜻밖에 튀김을 건져올리는 일에 천재적이었다. 10년 만에 요리장이 됐다.


[긴자 덴쿠니 전경]

대체 ‘일개 튀김집’이 120년을 지속한 비결은 뭘까? 다카하시 요리장 옆에서 답변을 거들던 시미즈 가오루 실장에게서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은 그 맛 때문”이란다. 다른 시니세의 경우 높은 상속세나 신세대 후손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해 고생하지만, 다행히 긴자 덴쿠니에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3대손부터 후손들은 경영에만 전념했지만, 맛의 비밀을 간직한 간장(쓰유)을 담그는 일만큼은 요리사와 함께 했다.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마치고 난 오후 4시. 다카하시 요리장이 미리 준비해놓은 싱싱한 생선살과 새우·야채 등에 튀김옷을 입히고 기름에 넣었다. 초벌로 튀겨놓고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튀기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1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튀김옷에 있지 않다. 튀김옷의 재료는 다른 튀김집처럼 그저 달걀·밀가루·물뿐이다. 비밀은 기름이다. 참기름과 보통 식용유(샐러드유)를 섞어 만든다. 그냥 섞는 게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맞춰야 한다. “당연히 비율은 비밀”이라고 말하며 다카하시 주방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게 웃었다. 그뿐만 아니라 튀길 때마다 냄비의 기름을 계속 바꿔 준다. 그래야 재료의 신선한 맛을 살릴 수 있다.

두번째는 불 조절과 튀겨진 재료를 건져 올리는 시점이다. 긴자 덴쿠니의 대표 메뉴 가운데 하나는 가키아게(여러 재료를 동시에 튀긴 것)다. 생선·새우 등 서로 다른 재료를 한꺼번에 튀겨야 한다. 재료마다 속까지 익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잠깐 한눈을 팔면 설익거나 타버린다.


덴돈과 모둠튀김의 눅눅하되 구수한 맛


설익지도 타지도 않은 덴돈과 모둠튀김(덴푸라 모리아와세)을 맛봤다. 한국의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바삭함이 없이, 외려 부드러운 식감이 독특했다. ‘눅눅하다’고 표현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구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뒷맛이 좋았다. 흡사 한국의 평양냉면이 주는 맛이라고 할까? 처음 먹을 땐 심심하지만 자꾸 먹으면 빠져드는 그 맛 말이다.

맛집의 기본 조건이라 할 재료 엄선은 그 다음 조건이다. 다카하시 요리장은 요즘도 새벽마다 일본의 노량진 시장인 쓰키지 시장을 찾는다. 그날 쓸 새우·오징어·생선 따위를 직접 고른다. 100년 넘은 맛이라고 1년 된 튀김집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할 수는 없다. 보람 있지만 동시에 지겨웠을 매일의 이 노동이 결국 긴자 덴쿠니의 맛이 100년 세월을 견뎌내게 한 힘이었을 게다.



[긴자 덴쿠니·렌가테이·스시코 혼텐 지도]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 하치-규-주이치 긴자도리 핫초메카도(東京都 中央區 銀座 8-9-11 銀座通り 8丁目角).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 03-3571-1092. www.tenkuni.com.

■ 대표 메뉴·가격 : 튀김덮밥(덴돈) 1100엔(1만1000원). 그 외 야채튀김(야사이 덴푸라), 어패류 튀김, 모둠튀김(덴푸라 모리아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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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코 혼텐


메뉴판이 없는 희한한 맞춤초밥집… 나이·성별·국적 따라 크기·모양이 달라


주토로(참치 옆구리살)가 길게 밥을 덮고 있다.

밥의 양이 턱없이 많기 십상인 한국의 초밥과 다르다. 입에 넣자 주위는 금세 명품거리 긴자가 아니라 도쿄만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스시코 혼텐(壽司幸 本店)의 점심 코스는 요리사가 서로 다른 재료로 직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으로 이어졌다. 가자미, 오징어 초밥으로 이어진 코스는 성게 초밥에서 금세 절정에 달했다. 혀는 개펄이었고 개펄로 밀물이 몰려왔다. 흰새우, 아나고(붕장어), 고히다(중간 크기 전어), 다마고야키(달걀), 표고버섯, 참치살 마구로가 심처럼 박힌 데카마키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1인분이었지만, 조금 더 달라고 말하자 이쿠라(연어알), 새우, 가다랑어 초밥이 더 나왔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이 스시코 혼텐에 별 하나를 주며 “에도마에 스시(에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고 찬양한 맛이다.


까다롭고 까다로운 최상급 쌀 확보작전


창업자의 4대손인 스기야마 마모루(55)에게 요리 비법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쉰 살 남성과 그의 20대 딸과, 여든 살 할머니가 가게를 찾았다. 초밥의 크기가 똑같을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기야마 마모루는 날카로운 학자 인상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50대 남자의 초밥이 이 정도 크기라면 20대 여성에게는 그것의 3분의 2 정도로, 할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작게 만들어 준다고 설명했다. 손님에 따라 고추냉이의 양, 밥의 양, 생선 크기도 다 달라진다. 여성 가운데 고추냉이에 약한 손님이 올 땐 그 양을 줄인다. 이런 ‘맞춤 요리’는 서양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러 초밥이 부스러지기 쉬우므로 밥을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지어 생선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이 ‘맞춤 요리 철학’에서 따로 가격표를 만들지 않는 스시코 혼텐의 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니 〈esc〉를 따라 시니세 여행을 온 독자는 스시코 혼텐에 갔을 때 메뉴판이 없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달 2일 스시코 혼텐을 방문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지만, 내부의 조도는 낮아 아늑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재료도 전시하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왔는데 메뉴판도, 전시된 음식도 없다면 손님은 어떻게 주문할까? 그냥 ‘알아서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처음 온 분도, 열 번 이상 온 분도 그날 먹고 싶은 게 다를 수 있고,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1대 창업자부터 가격표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 초밥’에 질 좋은 생선은 기본이다. 같은 업자로부터 50년 넘게 생선을 공급받고 있다. 최상급 쌀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한 쌀 산지의 농가 서너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그해 가장 작황이 좋은 쌀을 공급받는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손님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 코스가 일인당 약 9000엔(약 9만원)이니 싸지는 않다.


[가게 앞에 선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

1885년(메이지 18년) 스시코 혼텐을 창업한 1대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월급이 사라진 하급 무사였다. 하급 무사는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칼을 놓고, 사람을 먹이는 칼을 잡았다. 첫 자리는 긴자가 아닌 신바시였다. 1952년 긴자로 옮겼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삼형제 중 막내여서 자신이 가업을 이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돈 많이 드는 골프 동아리 활동비를 대려고 주방에서 잠깐씩 일했을 따름이었다. ‘예정대로’ 장남인 큰형이 초밥을 만들었지만, 덜컥 몸이 아파 드러누웠다. 둘째형은 이미 취직해 직장인이었다. 아버지 스기야마 야스조는 셋째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랐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그는 2대손의 사위였다. 가업을 잇길 바라는 장인의 뜻에 따라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양자가 됐다.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스기야마 마모루는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서른여섯 되던 90년대 초반부터 경영을 책임졌다.


재산은 다 타버려도 손님은 남더라


53년생인 그는 단카이 세대(47~49년 태어나 60년대 후반 격렬한 좌파운동을 경험한 세대)에 가깝다.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다르다. 딸만 둘인 그는 “아버지는 ‘내가 양자니까 여기를 망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본류(아들)니까 상황이 안 되면 끝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어도 된다.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니세가 지속되는 비결을 물었다. “23년 간토(관동)대지진, 전쟁,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물게 된 엄청난 상속세.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시련이었다. 90년대 초 상속세를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내게 남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손님들이었다. 손님들은 간토대지진 뒤에도 일부는 살아남았고 전쟁 뒤에도 예전 손님의 3분의 1은 찾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손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중심적인 손님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와준다는 건 맛도 있겠지만 우리 집을 신용해주는 것이도 하다. 재산이 타버린다 하더라도 손님은 남아 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칼을 잡았다.



[긴자 덴쿠니·렌가테이·스시코 혼텐 지도]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산반 하치고(東京都 中央區 銀座6丁目 3番8호).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30분. 03-3571-1968.

■ 대표 메뉴와 가격 : 일인당 점심 약 9000엔(9만원), 저녁식사 2만5000엔(25만원). 정해진 메뉴판이 없어 가격에 변동이 있으며, 대개 이보다 덜 나온다. 1만엔(10만원) 수준의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리스트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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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가테이


맛 유지 위해 마요네즈도 직접 만드는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 전문점



[가게 앞에 선 기타 아키토시 사장]

돈가스는 음식이 아니다. 먹을 수 있는 역사책이다.
돈가스는 프랑스 요리인 코틀레트(영어로 커틀릿)가 변형된 독특한 음식이다. 중국·한국도 똑같이 서양 요리를 접했지만, 돈가스 같은 ‘변형된 양식’을 개발하지 않았다. 오직 일본만이 서양의 음식을 자기 음식으로 변형시켰다.


64년 도쿄올림픽 뒤 인테리어 안 바꿔


코틀레트를 일본인들은 가쓰레쓰라고 불렀다. 원래 프랑스 코틀레트는 송아지나 양, 돼지의 등심과 등심 형태로 자른 고기를 튀긴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 코틀레트를 변형시켜 닭이나 쇠고기로 가쓰레쓰를 만들었다. 그 뒤 돼지고기를 쓴 포크가쓰레쓰가 나왔고, 20년 뒤 포크가쓰레쓰가 돈가스가 된다. 일본 음식사가 오카다 데쓰는 저서 <돈가스의 탄생>(뿌리와이파리)에서 일본 최초의 포크가쓰레쓰가 이달 3일 찾은 렌가테이(煉瓦亭)에서 첫선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렌가테이는 ‘돈가스의 성지’인 셈이다.

렌가테이는 19세기 사회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났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거대한 혁명이었다. 농경사회에서 급격하게 산업사회로 변하는 과정은 구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무라이(무사)계급에게는 재난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무라이들의 월급을 가차없이 끊어버렸다. 세상의 중심은 생산이어야 했다. 도쿄 아사쿠사의 가난한 하급 무사 기타 모토지로도 역사의 무한궤도를 피할 수 없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난생처음 노동으로 살아가야 했다. 당시 일본인들이 체격이 작은 이유가 서양인과 달리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메이지 정부도 육식을 장려했다. 기타 모토지로는 ‘고기 요리’가 유행임을 직감했다. 그는 혈혈단신 서양인이 모여 살던 요코하마의 프랑스인 클럽 주방 문을 두드렸다. 프랑스인 클럽은 일본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고 음식을 먹던 연회장이었다. 기타 모토지로는 중국·조선인 동료와 접시를 닦으며 코틀레트를 익혔다. 때마침 요코하마에서 긴자 근처 신바시까지 전차 노선이 생겼고, 1895년(메이지 28년) 기타 모토지로는 렌가테이를 열었다.

렌가테이는 가스등 거리를 뜻한다. 실제로 렌가테이의 조그만 간판에는 창업 1년 뒤 서양화가 손님이 그려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스등이 켜진 긴자 거리에 마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64년 도쿄 올림픽 뒤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았다는 고풍스런 내부가 인상적이다. 도쿄올림픽 때 샀다는 스웨덴제 ‘스웨다’ 계산기가 여전히 계산대를 지킨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의 취재를 경험했다는 3대손 기타 아키토시(74)가 역사 강의를 하듯 능숙하게 레스토랑의 긴 역사를 들려줬다.

2차대전 패전은 렌가테이에도 시련이었다. 긴자 근처에 있던 지점은 미군정에 사무실로 무상 접수 당했다. 주식인 밀가루와 쌀이 배급제라 암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어릴 적 물장구 치던 주변 신바시와 니혼바시(바시는 ‘다리’) 주변 하천이 복개되는 것을 기타 아키토시는 묵묵히 지켜봤다. 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의 부동산 버블(거품)은 가게를 팔 생각이 없는 시니세에게는 되레 재앙이었다. 요즘 한국인이라면 천정부지로 솟은 땅값에 얼른 식당을 팔고 차익을 챙기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시니세에게 땅값 상승은 재앙이었다. 오른 땅값 때문에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물어야 했다.

기타 아키토시는 중학생이던 열두살 때부터 주방일을 도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혼쭐나 가며 돈가스 요리를 배웠다. 패전 뒤 가스가 없어 코크스(석탄을 정제한 연료)와 석탄을 섞어 땐 불 조절에 진땀을 뺀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여러 대에 걸쳐 후손들이 식당을 잇는 것은 한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문화다. 일본인들은 ‘장인 유전자’라도 타고나는 것일까? 기타 아키토시에게 “다른 일을 꿈꿔보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며 “그런 게 왜 없었겠냐. 그런데 결국 뒤를 잇게 되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장남이 가업을 잇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대신 형제들은 다른 길을 갔다. 동생은 <요미우리신문> 기자였다. 그는 외아들인 4대 기타 고이치로와 손자가 계속 가게를 이어가길 바란다.


돼지기름과 샐러드유 반반씩 섞어 사용


시니세에서는 전통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맛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이 전통만 먹으러 시니세를 찾진 않는다. 렌가테이에서 여전히 마요네즈를 직접 만드는 이유다. 렌가테이의 1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기름에 있다. 렌가테이에서는 돼지기름(라드)과 샐러드유를 반반씩 섞어 사용한다. 질 좋은 돼지기름을 사서 매일 아침 이를 녹여 돈가스 튀길 기름을 직접 만든다. 엄선한 돼지고기를 쓰는 것은 기본이다. 렌가테이는 50년째 같은 가게에서 돼지고기를 공급받는다. 한 입 베어 물자 ‘바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고 촉촉한 돼지고기가 씹혔다. 육즙이 풍성했다. 고슈 지역에서 양조된 ‘렌가테이’ 레이블 와인을 곁들였다. 당도가 낮고 산미 높은 맛이 돼지고기 육즙과 섞여 입 안을 풍성하게 채웠다.



[긴자 덴쿠니·렌가테이·스시코 혼텐 지도]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산초메 고반 주로쿠고(東京都 中央區 銀座3丁目 5番16호) 03-3561-3882·7258.

■ 대표 메뉴와 가격 : 점심메뉴 포크커틀릿 1250엔(1만2500원), 밥·빵 추가 200엔(2000원). 스페셜 포크커틀릿 1450엔(1만4500원). 렌가테이 와인 작은 병 800엔(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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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마쓰야


100년 인테리어 분위기 속에 먹는 100년 소바…“사위·딸에겐 절대 가업 못 물려줘”



[간다 마쓰야 전경]


일본으로 떠나오기 전 머릿속에 상상했던 시니세.
6월30일 저녁 8시 땅거미 진 거리에서 바라본 소바(메밀국수)집 간다 마쓰야(紳田 まつや)의 이미지가 딱 그랬다. 농구선수 사이에 선 일반인처럼 현대식 빌딩 사이에 끼인 듯 서 있는 건물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연방 흘러나왔다. 고동색 색감의 목조건물에서 시간과 유행에 완강하게 버티는 고집이 느껴졌다.


상상 속의 시니세와 딱 떨어지는 느낌


상상의 시니세와 현실의 시니세 이미지의 놀라운 일치는 6대손에 해당하는 고다카 다카유키(43)의 외모에도 이어졌다. 앙다문 입술과 180㎝에 90㎏이 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에는 ‘듬직하다’는 형용사가 잘 어울렸다. 식당 주방 옆에 1평이 채 안 되는 작업실에서 고다카 다카유키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밀가루 반죽을 쾅쾅 도마에 내리친다. 작업실 사방은 나무칸막이로 막혀 있지만 손님들이 수타면을 만드는 광경을 볼 수 있도록 위쪽은 유리로 돼 있다. 반죽을 내리칠 때마다 삼두박근과 상완근이 꿈틀거렸다. 짙은 눈썹의 사내는 내리친 반죽을 봉으로 밀어 얇게 편 뒤 다시 말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조심조심 손바닥만한 철판 모양의 소바칼(소바보초)로 반죽을 썰 때마다 간다 마쓰야의 전매특허인 수타소바가 탄생했다.

왜 시니세를 물려받았느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고다카 다카유키의 대답 역시 교과서적이다. 그는 “어느새 (소바 만드는 게) 내 일이 돼 있었다. 내 갈 길이 정해져 있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버지가 ‘너 이거 해야 된다’ ‘이 길을 가라’ ‘요리사가 되어라’ 이런 말은 한 번도 안 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 일을 돕게 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다.” 그는 대학 졸업 뒤 3년 정도 다른 일을 경험해볼까도 생각해봤고, 다른 소바집에서 요리 수련을 쌓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만뒀다. “본격적으로 하려면 대학 졸업 직후 바로 시작하라”는 아버지 고다카 도시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내친김에 자식에게도 가업을 잇게 할 것인지 물었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여전히 웃음 없이 무덤덤하게 “3녀1남인데 아직 누가 이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이 원하면 이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속으로는 먼저 말해주길 바란다. 자발적으로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다. 아마 한다고 할 것 같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도쿄의 시니세는 서로 알고 지내는 곳이 많다. 고다카 다카유키는 스시코 혼텐의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과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러나 가족 외 다른 사람이 시니세를 이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고다카 다카유키와 스기야마 마모루 사장의 철학은 다르다. 고다카 사장이 ‘강경파’라면 스기야마 사장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거울과 계산기까지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


고다카 다카유키는 아들이 가업 잇기를 거부한다면 간다 마쓰야 간판을 내릴 생각이다. 수타면을 직접 만들고 가게를 경영하는 일은 딸들이 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스시코 혼텐처럼 사위에게 가업을 잇게 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사위가 계승한다고 해도 맛은 그렇게 쉽게 계승되는 게 아니다. 맛이 달라질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리고 손님들한테 ‘맛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그걸 그대로 용납할 순 없다”고 말했다. 딸과 사위가 소바집을 연다면 맛에 대한 도움은 주겠지만 간다 마쓰야란 이름은 쓰지 못하게 할 것이란다.

간다 마쓰야는 1884년 후쿠시마라는 성을 가진 평민이 처음 열었다. 23년 간토대지진으로 건물이 다 무너지고 일대가 폐허가 됐다. 간다 마쓰야도 문을 닫을 처지가 됐는데, 당시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고다카 다카유키의 증조할아버지가 이를 인수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고다카 다카유키는 인수자의 4대손이며, 연대기상 간다 마쓰야 창업자와의 나이차를 계산하면 약 6대째에 해당한다.

가업을 잇는 데는 게이오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한 아버지 고다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도 장남이었다. 대신 동생들은 회계사와 판사가 됐다. 고다카 도시는 “다른 소바집은 일하는 게 힘들어서 장남들이 많이 도망가 차남이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집은 운이 좋아 계속 장남이 가업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의자와 탁자가 모두 오래된 질감의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입구에 걸린 거울은 소바집을 인수한 증조할아버지가 술집을 운영할 때 쓰던 100년 가까이 된 ‘보물’이다. 고즈넉하다. 소바를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지금 당신은 100년 넘은 소바집에서 100년 넘은 맛을 먹고 있습니다’라고 일깨워주는 느낌이랄까? 계산대의 독일제 젠마크 계산기 역시 고풍스런 분위기에 한몫한다. 쇼와 5년(1930년)부터 썼다는 계산기를 아직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고다카 도시는 심드렁하게 “그냥 버리지 않아서 쓴다”고 답했다.

고다카 다카유키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성스레 만든 모리소바(찬 소바)는 본가다랑어 국물로 만든 쓰유(간장)에 적셔 먹었다. 짭짤하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온면에 해당하는 가시와 난반 국물을 떠넣었다. 첫맛은 약간 비릿했지만, 뒷맛은 구수했다. 가시와 난반의 국물은 ‘고등어 부시’(고등어를 말려 가루로 낸 것) 등 세 종류의 서로 다른 부시(가루)로 맛을 낸다. 자극적이지 않고 웅숭깊었다.


메밀 공급하는 가게와 5대째 관계


100년 넘은 맛의 비결에 대해 고다카 다카유키는 좋은 재료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타법 기술은 면을 기계로 뽑는 다른 소바집과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간다 마쓰야는 소바 시니세 연합에 속해 있다. 소바집 가운데 3대 넘게 이어진 가게들이 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시니세 연합 안에서도 수타면을 고집하는 곳은 간다 마쓰야를 포함해 서너 곳뿐이라고 고다카 도시는 설명했다. 고다카 다카유키를 포함한 요리사 5명은 손님이 몰리는 토요일엔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1천인분의 소바를 만들어낸다. 좋은 재료는 이번에 취재한 모든 시니세의 기본 덕목이었다. 간다 마쓰야도 메밀을 공급받는 가게와 5대째 관계를 이어간다.

밤 10시.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강경파’들은 어느새 이웃집 아저씨·할아버지로 변해 있다. 고다카 도시는 “시니세 하면 교토다. 도쿄는 시니세가 적다. 교토에서는 100년 됐다고 시니세에 안 끼워준다. 300~400년은 돼야지”라고 말하며 웃는다. 그 옆에서 험상궂은 고다카 다카유키도 그제야 입가에 보일락 말락 웃음을 띤다. “돈가스 시니세 ‘호라이야’도 취재한다고? 거기 우리도 종종 간다. 고기가 아주 두껍지. 스시코 혼텐에 가면 아들 고다카 다카유키 안부 전해주고, 다마히데(玉ひで)에 가면 내 소식 전해줘!” 떠나는 취재진에게 고다카 도시가 손을 흔들며 부탁했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간다스다초 이치-주산(東京都 神田須田町 1-13). 영업시간 오전 11시~저녁 8시. 토요일 축일(휴일)은 저녁 7시까지. 일요일 정기휴무. 03-3251-1556. www.kanda-matsuya.jp. 기치조지의 도큐백화점에 지점이 있다.

⊙ 대표 메뉴와 가격 : 모리소바(찬 소바) 600엔(6000원), 가시와 난반 950엔(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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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히데


200년 전통 닭요리집의 그 전설적 메뉴,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200년 넘은 닭요리집 다마히데(玉ひで)는, 장어(우나기)를 요리하는 이즈에이 혼텐(伊豆榮 本店)과 함께 가 취재한 시니세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다마히데는 18세기 막부 시절 도쿠가와가를 수행하던 하급 무사 야마다 데쓰에몬이 ‘투잡’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야마다 데쓰에몬은 도쿠가와 가문이 사냥에 앞서 학의 목을 치던 의식을 담당하던 하급 무사였다. 학의 긴 목을 칼로 내리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하급 무사의 봉록만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그는 1760년 다마히데를 창업했다. 8대손인 야마다 고노스케(47)는 “아마 학을 죽일 때 칼을 쓰셨던 분이니까 닭요리를 하는 게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의 목을 치던 무사의 후손이 닭을 치다


애초 다마히데는 현재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1883년(메이지 16년) 무렵 4대손이 본점을 유지한 채 현재의 위치에 지점을 만들어 5대손에게 물려줬다. 2차대전 때 미군이 도쿄 공습을 감행할 당시 원래 자리에 있던 본점은 불탔고 5대손이 경영하던 지점이 외려 본점이 됐다.

어쨌거나 반경 300미터 안에서 200년 넘는 세월 똑같은 식당이 한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한국의 수원화성도 비슷한 시기인 18세기 말에 지어졌다. 그 뒤부터 수원 토박이라면 몇 세대에 걸쳐 “○시에 수원화성 앞에서 만나자”고 말해 왔을 것이며, 몇 세대에 걸쳐 할머니와 어머니와 손녀가 수원화성에 나들이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게다. 지역주민의 피부와 일상에 각인된 존재인 셈이다. 마치 수원화성처럼 지역주민들의 입맛을 책임진 시니세 다마히데의 존재감은 ‘참을 수 없게’ 큰 게 아니었을까?



[야마다 코우노스케 사장이 식당 앞에 선 모습]


야마다 고노스케 사장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전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보이지 않는다. “언제 처음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느냐”고 묻자 대뜸 “이야이야 주산사이”라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싫어, 열세 살”이라는 말이다. 가업을 잇기 너무 싫었지만 할 수 없이 중학교 때 일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직업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뒤. 대학 땐 요리와 무관한 매스미디어 이론과 노동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공부는 안 하고 마작만 했다. 졸업하고 할 게 없어서 가업을 이었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가업을 잇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표현을 반복했다. 결정은 누가 했을까? 주어를 알 수 없는 수동태의 문장에 스스로의 우유부단을 감춘 것이 아닌가 못된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하느냐”고 짐짓 추궁하듯 질문을 던졌다. 얼굴에 장난기를 거둔 야마다 사장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어릴 때 왜 내가 가게를 이어야 하는지 몰랐다. 내 주변에 가부키 배우의 자식인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나는 우리 집 가업 잇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업을 이었냐?’고 물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정말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자식들이 태어났다. 첫딸을 낳았을 땐 주위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그저 ‘축하합니다’라고만 했는데 아들이 태어나니 주변에서 던진 첫마디는 ‘아, 이제 얘가 9대째가 되는군요?’였다. 하루는 아버지(야마다 고지)가 손자를 안고 동네를 돌았다. 닌교초 거리의 사람마다 아버지를 보고 ‘아~ 이 아이가 9대째군요?’라고 묻더라.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더니 유치원 선생님도 아들을 보고는 ‘아, 네가 다마히데의 9대손이구나’라고 말하더라.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나도 어릴 때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에서 다마히데 가업을 잇도록 만든 거구나라고 말이다. 그걸 내 아이를 보며 알게 됐다.”


‘에도시대의 맛’으로만 굳어질까 두려워


그러나 그는 자식에게 가업을 잇도록 강요할 생각은 없는 ‘신세대’ 아버지다. 아들이 물려받기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아들이 가업을 이을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건 자신의 능력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솔직히 가업 이어받으면 편하다. 계승하는 순간 유명인이 된다. ‘네가 이걸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식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가게를 잘 운영하지 못하면 그건 내 책임이다.”

야마다 고노스케는 “내 자식이 가업 잇기를 거부할 땐 내 여동생의 자식이나 다른 친척이 가업을 이어도 좋다. 다마히데라는 것만 계속되면 된다”고 말을 이었다. 그러나 다른 친척도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을 땐 다마히데의 간판을 내릴 계획이라고 그는 말했다.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손님에게 얽힌 추억이 없을 수 없다. 기타노 다케시가 다시 영화화한 영화 <자토이치>의 원작에서 주연을 맡았던 가쓰 신타로라는 영화배우는 1990년대 초 범죄에 연루돼 교도소에서 잠시 복역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집에 가는 대신 다마히데로 달려왔다. 도쿄 시내를 곡예 주행하며 교도소 앞에서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자들을 뿌리쳤다. 현관에서 야마다 사장과 눈이 딱 마주친 가쓰 신타로는 웃으며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며 오야코돈부리(닭고기덮밥)를 욱여넣었다.

야마다 사장은 요리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에서 별 세 개를 받은 최고급 일본요릿집 하마다야 등 여러 요릿집에서 3년 넘게 요리 수행을 했다. 요리를 하면서 그가 겪는 어려움은 무게감이다. 다마히데가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이기 때문에 ‘다마히데의 맛=에도시대의 맛’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다마히데의 맛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는 게 힘들다고 그는 털어놨다. 사람들은 오로지 전통만 먹으러 식당을 찾지 않는다.

200년 넘은 맛의 비밀은 와리시타에 숨어 있다. 와리시타는 오야코돈부리나 닭고기전골(스키야키)에 사용되는 소스다. 미림(소주에다 찐 찹쌀과 쌀 누룩을 넣어 양조한 조미료)과 쓰유(간장)를 어떻게 섞느냐를 가지고 다마히데의 독자적인 맛을 표현해야 한다.


영계 대신 170일 넘은 투계만 사용


신선한 닭고기를 쓰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80년부터 도쿄도 내의 한 축산장과 공동개발 협약을 맺고 닭을 직접 기른다. 달걀은 한 가게에서 35년째 공급받고 있다. 축산 개발한 닭 외에 닭고기를 구입할 땐 거래관계가 100년 넘은 업체에서 공급받는다. 한국인이 ‘영계’를 좋아하는 것과 달리, 다마히데의 닭은 170일 넘은 투계 품종을 쓴다. 쫄깃한 질감이 닭고기의 생명이라 믿는 까닭이다.

오야코의 ‘오야’는 어머니이고 ‘코’는 아들이란 뜻이다. 달걀이 닭의 자식이므로 닭고기와 달걀이 함께 들어가는 덮밥을 오야코돈부리라고 일컫게 됐다. 오야코돈부리를 한 입 떠넣자 기자와 사진기자, 통역 모두 입 맞춰 “한국에서 장사하면 대박 나겠다”는 말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적당히 달큼하고 적당히 짭조름한 고기를 씹으며 기자는 ‘인간적인 맛’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닌교초 이치-주시치-주(東京都 中央區 日本橋 人形町 1-17-10).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오후 1시, 오후 5~9시. 토요일은 오후 4~8시. 일요일·휴일 휴무. 03-3668-7651.

⊙ 대표 메뉴와 가격 : 오야코돈부리 1300엔(1만3000원). 단, 오야코돈부리만 단품으로 주문할 수 있는 것은 점심때뿐이다. 이 밖에는 모두 코스요리다. 투계 스키야키 코스요리는 5800엔(5만8000원)인데, 오야코돈부리는 포함돼 있지 않으므로 원하면 따로 주문해야 한다. 처음부터 오야코돈부리가 포함된 코스요리는 1만1000엔(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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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에이 혼텐


간장회사에서도 복제 실패한 장어구이 맛의 원천… ‘좌우상하’ 초월하는 단골들이 즐겨



[식당에서 바라본 거리]


요리사는 조심스레 장어 꼬치를 집어든다.
껍질이 잘 발라진 장어 한 마리가 두 덩이로 나뉘어 4개의 꼬치에 꿰어져 있다. 요리사는 숯불 바로 옆 항아리에 장어 꼬치를 적신다. 항아리에는 검붉은 액체가 가득하다. 장어구이에 맛을 낼 다레소스(일종의 양념소스)다. 다레소스에 재워진 장어 꼬치는 숯불 위에 오른다. 요리사는 부채질로 숯불의 화력을 조절한다. 요리사는 이런 식으로 앞뒷면을 고루 굽는다. 장어 살이 부스러질지도 몰라 직접 손으로 뒤집어야 한다. 이즈에이 혼텐(伊豆榮 本店)의 대표 메뉴인 가바야키(장어꼬치구이)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도쿄공습과 간토대지진도 피해 간 행운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슬로푸드 운동은 지금 ‘맛의 방주’(The arch of taste) 사업을 벌인다. 산업화된 농업과 환경오염, 맛의 획일화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보존하자는 운동이다. 미식적으로 뛰어날 것, 지역과 관계될 것, 장인에 의해 만들어질 것 등 몇 가지 선정기준이 있다. 장어는 멸종 위기에 처한 음식도 아니고 이즈에이 혼텐의 도이 가즈오(65) 사장이 정치적으로 딱히 올바른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300년 가까이 전통의 맛을 간직한 이즈에이 혼텐의 우나기 요리는 ‘맛의 획일화’라는 대홍수를 피해 방주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이달 1일 오후 3시께 이즈에이 혼텐의 2층 객실. 도이 가즈오 사장의 재촉에 따라 먼저 장어덮밥을 맛봤다. 대대로 비전된다는 다레소스는 짠맛과 단맛의 풍미가 좋았다. 기분좋은 맛이라고 부를 만할까?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도쿄의 햇살에 비친 색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붉은색 그릇이 식욕을 자극한 탓이다.

이즈에이 혼텐은 18세기 중반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수행하던 하급 무사가 창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8대손인 도이 가즈오 사장도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 다만 도이 가문의 비석 비문을 통해 대략 260여년 전으로 창업 시기를 추측할 따름이다. 에도 막부 초기에는 아사쿠사에 있었다. 그 뒤 현재의 우에노 연못 근처 포장마차로 이어졌다. 취재했던 시니세 대부분 2차대전 당시 도쿄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이즈에이 혼텐은 예외다. 심지어 23년 간토(관동)대지진 때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즈에이 혼텐의 역사는 사위들의 역사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니다. 1대부터 5대까지는 아들이 가업을 이었으나 6대부터는 딸과 결혼해 집안에 들어온 사위가 성을 바꿔 양자가 돼 가업을 이었다. 도이 가즈오 사장의 원래 이름은 사카와키 가즈오다. 그는 71년 결혼 뒤에도 한동안 사카와키란 성을 그대로 썼다. 사위로 들어와 성을 도이로 바꾸고 양자가 된 장인(7대손)이 89년 “가업을 이어달라”고 하자 그제야 성을 바꿨다.

설명을 잇는 도이 가즈오 사장의 중저음 말투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깃이 없는 재킷에 흰 구두를 신은 외모도 예사롭지 않다. 젊은이가 아니면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노 칼라 재킷을 시도한 데서 도전정신이 엿보인다. 그런 도전정신 덕분인지 그가 사업을 떠맡았을 때 18명뿐이던 종업원은 현재 250여명으로 늘었고 지점도 1개에서 5개로 늘었다.


아들을 버리고 사위에게 물려준 장인


한 식당이 무려 260년 지속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능력 있는 자에게 가업을 잇게 한다는 이즈에이 혼텐의 가풍도 한몫했다. 도이 가즈오 사장의 부인에게는 다른 남자형제가 있었음에도 장인(7대손)은 사업 수완의 싹이 보였던 도이 가즈오에게 가업을 잇게 했다. 아들을 ‘버린’ 셈이다. 도이 가즈오 사장에게는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다. 딸은 결혼해서 이미 아이가 넷이다. 도이 가즈오 사장은 “아들보다 사위가 낫다 싶으면 사위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고 잘라 말한다.

도이 가즈오 사장의 맛에 대한 철학은 완강하고 단순하다. “선대에서 해오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다레소스를 바르는 방법부터 굽는 정도까지 선대부터 내려오는 방법을 충실히 따른다고 설명했다.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는 쉽지 않다. 장어집 주방에선 “꼬치 꽂는 데 3년, 다레소스 바르는 데 8년, 굽는 데는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도이 가즈오 사장은 “우리 집 가훈은 요즘 사람들이 단맛을 좋아한다고 해서 우리의 맛을 바꾸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걸 유지하자는 것이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전통만 보고 식당을 찾지 않는다. “맛의 유행을 따라가면 장사는 더 잘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우리 집은 우리 집대로 우리 집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됐다. 유행을 따르면 우리는 끝”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60년 된 맛의 비결은 불 조절인지, 다레소스인지, 아니면 싱싱한 장어 원재료인지 물었다. 도이 가즈오 사장과 옆에 앉은 조리장 나카야마 히데미쓰의 입에서 동시에 “다레소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미 30년 넘게 함께 일하는 사이다. 이즈에이 혼텐의 비전의 다레소스는 미림, 간장, 다마리조유를 섞어 만든다. 다마리조유는 간장의 하나로 성근 콩에 누룩을 섞어 만든 진간장이다. 설탕을 쓰지 않는 것도 원칙 중의 하나다. 일본 유수의 간장회사가 이즈에이 혼텐의 다레소스를 분석했지만 똑같이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도이 가즈오 사장은 말했다. “그들이 와서 우리 다레소스를 분석해보고 ‘우리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혀 아는 것과 다르다.” 도이 가즈오 사장은 장어구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독일 하면 훈제, 프랑스 하면 졸이는 음식, 가바야키는 일본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바야키가 독일 훈제나 프랑스 요리와 같은 반열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독일에 훈제가 있다면 일본엔 가바야키


이런 자부심이 아마 장어를 잘 먹지 않는 서양인들의 잡지 <미슐랭 가이드>에서조차 별 하나 레스토랑에 장어집을 포함(지쿠요테이)시킨 힘일 게다. 일본인은 자신들의 전통을 돈 되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손님이 없으면 시니세는 존재할 수 없다. “기자 때려치우고 사업하게 돈 버는 비법을 알려달라고”고 묻자 도이 가즈오 사장이 껄껄 웃으며 “인맥이 중요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손님은 ‘상하좌우’를 막론한다. 헤이세이 천황에게만큼은 도이 가즈오 사장이 직접 배달했다. 자민당의 숙적인 민주당도 싸움을 멈출 땐 둘 다 이즈에이 혼텐의 장어덮밥으로 식사를 한다. 우에노 지역에 한국인이 많아 한국 기업의 직원들도 종종 이즈에이 혼텐을 찾는다. 총련 소속으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 재일동포 ㅇ아무개씨와 일본 파크사이드 호텔 소유주로 제주지역 일간지 회장을 지냈던 고 ㄱ아무개씨도 도이 가즈오 사장의 단골이다. “인맥이 중요하다.” 아래 눈두덩에 주름잡히게 웃으며 도이 가즈오 사장은 껄껄 웃었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니초메 주니-니주니(東京都 台東區 上野 2丁目 12-22). 영업시간 오전 11시~밤 9시30분. 무휴. 03-3831-0954.

⊙ 대표 메뉴와 가격 : 장어덮밥 2625엔(2만6250원). 장어꼬치구이 3150엔(3만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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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야


날씬한 긴자 렌가테이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 3㎝ 두께에도 이토록 부드럽다니


일본은 불교국이었으므로 육식을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일본인의 식생활도 ‘유신’시켰다. 서양인의 큰 체격이 육식 덕분이라고 생각한 당시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육식을 장려했다. 한국인도 흔히 먹는 전골(스키야키)과 돈가스가 이때 탄생했다. 이 때문에 일본 사가들은 메이지 유신을 ‘요리 유신’이라고 비유한다. 포크가쓰레쓰는 일종의 ‘1세대 돈가스’다. 돈가스는 포크가쓰레쓰가 나온 뒤 2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등장한다.

육즙이 흥건한 딤섬을 먹는 기분



[호라이야 전경]


이번 〈esc〉 취재 대상에는 돈가스 시니세가 두 곳 포함돼 있다. 렌가테이(연와정)와 호라이야(봉래옥)다. 긴자의 렌가테이는 최초로 포크가쓰레쓰를 선보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렌가테이 돈가스는 원형인 프랑스 요리 커틀릿과 닮은 포크가쓰레쓰의 특징을 그대로 고수한다. 나이프와 포크로 먹으며 된장국(미소시루)은 서비스하지 않는다. 고기도 좀더 얇다.

그러므로 렌가테이 돈가스를 먼저 맛본 독자라면 혀가 그리 예민하지 않아도 호라이야 돈가스와의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라이야의 히레가스를 처음 본 순간 두께에 놀랐다. 렌가테이 돈가스와 달리 미리 잘려 나온 3㎝ 가까운 돼지 살코기를 베어 물자 육즙이 터져나왔다. 부드러운 식감에 두 번 놀랐다. 육즙이 흥건한 딤섬을 먹는 것과 비슷할 정도였다. ‘저토록 두꺼운 고기를 속까지 익히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의문이 단박에 솟아올랐다. 빵가루는 입자가 고왔고, 튀김옷은 그리 두껍지 않았다. 젓가락이 나오고 된장국이 함께 곁들여졌다.

호라이야는 1915년 실패한 사업가인 야마오카 마사토루가 도쿄에 와 먹고살기 위해 문을 연 포장마차(야타이)에서 유래한다. 현재 위치 바로 근처다. 그때도 주력 요리는 돼지 살코기로 만든 히레가스였다. 3대손인 야마오카 요시타카(山岡吉孝·72) 사장은 창업자인 야마오카 마사토루의 손녀사위에 해당한다. 64년 도쿄 올림픽의 흥분 속에서 결혼식을 올린 야마오카 요시타카도 스시코 혼텐이나 이즈에이 혼텐의 후손들처럼, 가업을 잇고자 부인의 성인 야마오카로 바꾸고 장인의 양자가 됐다.

야마오카 요시타카는 요리와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진공관을 생산하던 전자기기 회사의 영업사원이었다. 결혼 뒤에도 직장일을 계속하던 야마오카 요시타카는 가업을 잇기로 마음먹은 72년 주방 문을 열고 10평 남짓한 ‘성공과 실패의 세계’로 들어왔다. “원래 이 세계는 엄청나게 엄격하다. 못하면 혼난다. 그러나 내게는 요리를 딱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주방에서 장인이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배웠다. 보는 것이 큰 공부였다. 창업자의 부인 야마오카 미코시는 내게 항상 ‘돈가스 만드는 걸 지켜보라’고 말했다.” 깡마른 학자풍의 야마오카 요시타카는 처음 봤을 때 무척 온화해 보였지만, 대화를 조금 나누자 날카로운 ‘의식의 날’이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얼굴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다”며 끝까지 사진 촬영을 거부한 탓에 기자에게 그 엄격함은 불편하기도 했다.

그 엄격함은 특히 맛에서 단호했다. “맛의 유행을 따르고 싶은 유혹은 없었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걸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그는 “중요한 것은 좋은 재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가게와 상관없이 우리들의 방식으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나는 손님과 함께 우리의 맛을 지켜왔다. 다른 곳에서 어떻게 하건 우린 우리 방식으로 해 왔다. 외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재료 엄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다음은 애정이다. 열심히 만드는 애정.” 야마오카 요시타카 사장은 아키야마라는 업체로부터 50년째 돼지고기를 공급받고 있다. 취재했던 시니세들은 모두 오랜 기간에 걸쳐 식재료를 공급받는 곳을 두고 있었다. 신뢰는 시니세의 힘이다.

튀김요리인 만큼, 기름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기름에 대해서 묻자, 대뜸 야마오카 요시타카 사장은 냉장고에서 소기름 부위가 가득 담긴 그릇을 보여줬다. 질 좋은 기름 부위를 사와서 매일 필요한 만큼 기름을 직접 녹여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렌가테이와 공통점이다. 호라이야는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만든다.

야마오카 요시타카 사장은 70대지만 가업을 잇는 문제에서만큼은 ‘청년’이다. 자식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호라이야의 맛만 유지할 수 있다면 누가 후계자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간판을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그 역시 호라이야의 명성이 계속되길 바란다. “지금 이 상태로 해 나갈 수 있다면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이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자이니치’는 물론 촛불시위에도 큰 관심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은 외부인에게 너그럽다. 그 너그러움이 일본 사회의 사회적 소수자인 자이니치(재일동포)에 대한 후원사업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그래서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이 가게의 단골이 많다. 자연스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정치에 관심 없다”면서도 그는 “‘투쟁하는 신문’ <한겨레>를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감명받았다. 반면 일본인의 정치의식은 죽었다”고 말해 취재진을 놀라게 했다. 미식학적으로 올바른 사람.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 취재진은 지난 1일 저녁 7시께 인터뷰를 마치고 문을 나섰다. 갓등이 매달린 일본풍의 고즈넉한 호라이야 건물에서 엄격함과 푸근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 주소·연락처: 도쿄도 다이토구 우에노 산-니주하치-고(東京都 台東區 上野3-28-5).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오후 1시30분, 오후 5시~7시30분. 일요일·휴일은 오후 4~7시. 수요일 휴무. 03-3831-5783.

⊙ 대표 메뉴와 가격: 히레가스 2900엔(2만9000원). 구시가스 정식 1900엔(1만9000원). 히레가스는 기름 없는 살코기로 만들며, 구시가스는 꼬치에 끼워 튀긴 돈가스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