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시 100년, 명품 6점 뒷얘기

Fact/역사-고전 · 2010. 2. 11. 18:57



고미술계에는 ‘명물유주(名物有主)’라는 말이 내려온다. 흔히 일품(逸品)이나 명품(名品)으로 일컬어지는 문화재는 물건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좋은 물건을 손에 넣은 자랑 겸 정당화에 갈음하는 얘기이면서, 또 한편으로 그 물건이 언제 제 품을 떠나 다른 이에게 갈지 모른다는 푸념이기도 하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한국 문화재 역사는 인생유전처럼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1909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 도굴품으로 ‘청자전(靑磁展)’이 열린 지 올해로 꼭 100년. 자칫 사라질 뻔했던 국보와 보물급 명품이 흘러온 뒷얘기를 주요 유물 여섯 점의 예로 살펴본다.

 

 

집 열 채 값 주고 간송이 구한 걸작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

 

바다 건너 고려청자에 넋을 빼앗겨 야단스레 수집 붐을 일으킨 건 일본인이다. 일찍이 중국인도 고려청자에 찬사를 보냈지만 일제강점기에 개성 일대 고분을 파헤쳐가면서까지 난리를 떤 일본인이 이 나라에 최초로 컬렉션 바람을 몰고 왔다. 고미술계에서 통하는 용어와 은어 가운데 유난히 일본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천학매병(千鶴梅甁)’이란 별칭이 있는데 한때 이 물건의 주인이었던 일본인 마에다 사이이치로가 붙였다. 원래 새겨진 학은 69마리지만 매병 속 창공을 날아가는 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백~수천 마리 학이 비상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에서 손꼽는 골동계를 형성하고 있던 대구 손님에게 먼저 넘어갔던 이 명품은 곧 서울로 올라왔고, 일본인 손을 거쳐 1935년 한국인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에게 낙점됐다. 당시 서울에서 반반한 집 열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을 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미술계에는 ‘큰 물건은 새끼를 친다’는 속설이 있다. 내로라하는 일본인 수집가를 제치고 그들 손아귀에서 ‘천학매병’을 구한 간송은 이듬해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청화백자진사철사국화문병(국보 제294호)’을 다시 한번 구하는 쾌거를 올렸다.

 

 

장택상 청장, 피란 가며 품에 안고 떠나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문호

 

명품은 돈과 권력을 좇는다는 말이 있다. 거꾸로 보면 돈과 권력이 있어야 명품도 붙는다는 말이다. 역대 권력자나 재벌 중에 문화재급 서화와 도자기를 대거 소장한 이가 많았던 건 당연지사다.

 

조선 영·정조 시대 일품 백자 항아리로 손꼽히는 ‘백자철사포도문’ 항아리는 원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철도국 기사였던 시미즈 고지 것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황급히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시미즈는 가까운 한국인에게 이 물건을 넘겼고, 마침내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창랑(滄浪) 장택상(1893~1969)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창랑은 이미 이름난 수장가로서 해방이 되자 사람을 여럿 풀어 일본인이 놓고 간 물건 중 명품을 쓸어모으던 중이었다. 하지만 창랑도 전란은 어쩔 수 없었다.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면서 당시 노량진 별장에 소장품을 깊이 갈무리했으나 이곳에 직격탄이 떨어져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이 항아리는 창랑이 몸에 지니고 떠나 목숨을 구했지만 어려운 시절 새 주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 이화여대박물관을 새로 꾸미던 당시 김활란 총장이 창랑의 시흥 별장에서 이 명품을 만났고, 선거자금이 급했던 창랑으로부터 넘겨받아 이대 도자기컬렉션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다.

 

 

진도 갑부 손에서 1960년대 호암미술관으로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겸재 정선(1676~1759)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를 완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올해는 겸재 탄신 333주년, 타계 250주년이다. 겸재 그림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서 그의 화풍 연구로 일가를 이룬 곳이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 큰일을 했던 간송 전형필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이 미술관은 1년에 두 차례 봄(5월)과 가을(10월)에 소장품 연구 발표 성격의 정기전을 연다. 무료 전시인 데다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 요즘은 미술관 들머리 도로까지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5월 1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간송미술관 올봄 정기전은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화파전’이다. 모처럼 겸재 그림을 즐기는 안복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5세 되던 1751년 그린 걸작이다.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의 장한 모습을 일필휘지로 표현했다. 거인의 중량감이 느껴지는 대담한 암벽 배치, 비가 걷히면서 산 아래 깔린 구름의 미묘함, 화면 밖으로 봉우리 윗면을 과감하게 잘라낸 현대적 감각 등 겸재의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은 이 명품을 1940년 개성 이호섭 댁에서 처음 봤다고 증언했는데 그 뒤 소전 손재형의 손에 들어갔다가 60년대 후반 호암미술관(지금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됐다.

 

 

명품은 일부종사 못하는 기생 같다는데 …

국보 제180호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1786~1856)가 59세 때 그린 ‘세한도’는 조선 문인화 가운데 으뜸으로 평가받는 걸작이다. 한겨울 추위를 이기고 곧게 늘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대부의 상징으로 칭송받아 왔다. 선 몇 개로 표현한 담박한 화면 구성은 추사가 꿈꾼 정갈하고 꼿꼿한 삶을 상징하고 있다.

 

‘세한도’가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고등보통학교용 한문독본 교재 제5권에 실리면서부터다. 주로 중국 학자의 문장과 시인의 글이 실린 이 교재에 한국인으로는 퇴계 이황의 글과 추사의 ‘세한도’ 도판과 편지글만이 담겼다고 한다. 당시 이 그림 소장자는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인 후지스카. 진도 갑부이자 서예가였던 소전(素筌) 손재형(1903~81)은 일찌감치 ‘세한도’의 행방을 좇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 넘겨줄 것을 청했지만 후지스카는 이런 말을 남기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추사는 한국이 낳았지만 그는 동양적 인물이니 같은 동양인이 소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물러설 소전이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이 악화돼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르는 도쿄로 찾아가 병으로 누운 후지스카를 매일 문안하며 석 달 열흘을 묵묵히 기다렸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결국 ‘세한도’는 소전에게 넘어와 다시 조국땅으로 돌아오게 됐다. 하지만 이런 ‘세한도’도 소전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개성 부자 손세기 집안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명품은 일부종사를 못하는 기생과 같다’는 이 바닥 정설이 나온다.

 

 

이 작품만 빼고 모두 기증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단원(檀園) 김홍도(1745~?)는 조선시대가 낳은 걸출한 화원이다. 궁정에 소속된 직업 화가로서 단원은 화목(畵目), 요즘 말로 장르를 가리지 않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수많은 후배 화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그림 솜씨로는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장승업이 ‘나도 (단)원이다’는 뜻으로 호를 오원(吾園)이라 했을 정도니 당대 단원의 기세를 짐작할 뿐이다.

 

단원이 남긴 좋은 그림이 한둘일까마는 이 조촐한 소품은 단원이 평소 그리워한 풍류 생활을 엿보게 해 느껍다. 편안한 일상복에 사방관을 쓰고 비파를 타고 있는 선비는 유유자적 아름답다. 주변에 둔 물목도 평소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문방사우는 기본이요, 고서와 파초, 생황과 검 등 평소 단원이 즐기던 취향을 저절로 드러내고 있다. 말하자면 단원의 자화상이라 할 이 그림은 걸맞은 화제로 마무리된다. “흙벽에 아름다운 창을 내고 여생을 야인으로 묻혀 시가나 읊으며 살리라.”

 

이런 그림이라면 한 점쯤 곁에 두고 그 마음을 나누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포의풍류도’는 원래 빼어난 감식안으로 이름났던 근대 서화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 소장품이었다. 1930년대부터 위창에게 자문을 구하고 교우한 박병래(전 성모병원장) 박사는 위창으로부터 이 그림을 구한 뒤 늘 품고 지냈고, 수십 년 모은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서도 이 작품만은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때로 애첩보다 더 소중한 인연으로 묶이는 애물이 있는 것이다.

 

 

발굴한 농부, 광복 때까지 땅속에 묻어

보물 제416호 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

 

‘로또’가 이 시대의 횡재를 상징하듯, 한때 골동 발굴은 한몫 잡을 수 있는 호기였다. 해방 전 황해도 개성 고려동에 살던 농부 김씨도 일생 한 번 찾아온다는 기회를 잡은 인물이다. 살기가 팍팍해 콩나물 장사라도 할 요량으로 마당 한구석에 움을 파던 김씨는 삽 끝에 뭔가 둔탁하게 걸리는 걸 느끼고 삽질을 멈췄다. 그가 살살 파낸 물건이 바로 이 ‘청자투각돈’이었다. ‘청자돈’은 고려 귀족 집안에서 애용하던 기물로 여름에는 야외에 내놓고 의자로 쓰고, 겨울에는 화분 받침 등으로 활용하던 다용도 물건이었다. 4개 1조로 완벽한 모양새를 한 이 골동을 본 순간, ‘큰 거다’ 싶었던 김씨는 일단 ‘청자돈’을 다시 땅에 묻었다. 일본인이 무조건 빼앗아 가던 시절인 데다 소문이 나면 이놈 저놈 후려치려 몰려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해방이 될 때까지 입단속을 하면서 이곳저곳에서 귀동냥을 해 청자 시세 정보를 챙겼다. 마침내 해방이 돼 이듬해인 1946년, 김씨는 ‘청자돈’을 파내 당시 개성에 유일하던 골동 가계인 ‘조일상회’에 가져갔다. 신중한 농부 김씨가 이렇게 해서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얘기다. ‘청자투각돈’은 그 뒤 몇 사람의 손을 거치며 뿔뿔이 흩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4개 1조로 온전히 이대박물관에 모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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