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이야기

Fact/역사-고전 · 2010. 2. 11. 19:19


국보를 보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 국보의 절반(156종)이 서울에 있다. 310호까지 지정된 국보는 해제된 1종을 제외하면 309종이 있다. 그중 소장처가 두 곳으로 나뉜 게 4종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체 국보 다섯 중 하나(59종)를 관리하고 있다. 3대 사립박물관으로 통하는 리움미술관(34종)·간송미술관(12종)·호림박물관(8종)에도 상당수의 국보가 있다. 경북에 서울 다음으로 많은 53종(17%)이 소장돼 있다. 그중 경주에만 28종이 몰려 있다. 충남(9%)·전남(6%)이 뒤를 이었다. 제주도엔 국보가 하나도 없었고, 인천의 국보는 가천박물관에서 관리 중인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 제 53’(276호)이 유일했다. 국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1~10위를 소개한다.

 

 

1위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보 창고’

 

국립중앙박물관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78호)을 비롯해 경천사십층석탑(86호), 이제현 초상(110호), 청자상감모란국화문과형병(114호) 등 탑과 불상·도자기·토기 등 다양한 국보급 유물 59종을 관리한다. 그중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유권자인 유물은 44종이다. 국유 재산 중 이전이 불가능한 건축물을 빼고는 상당수의 유물이 이곳에 있다. 불국사가 소유권을 가진 ‘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 유물 일괄’(126호) 등 15종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한다.

 

 

2위 리움미술관엔 명품 수두룩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국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리움미술관에선 겸재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216호)와 금강전도(217호)가 먼저 눈에 띈다. 소유권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있다. 이 전 회장이 갖고 있는 국보는 모두 24종. 개인 소장가 중에는 최다 보유자다. 청자·백자·불상은 물론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241호), 전충남출토청동방울일괄(255호) 등 목록이 다채롭다. 금동관음보살입상(128호) 등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둔 2점을 제외하고 이 전 회장의 소장품은 모두 리움미술관에서 관리한다. 삼성문화재단이 소장한 국보 12점 중 11점도 리움미술관에 있다.

 

 

3, 4위 왕릉이 살린 국립 공주·경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14종 중 12종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왕과 왕비가 쓰던 금·은 장신구, 청동거울, 관에 시신을 안치할 때 목과 발을 받치는 도구인 두침(164호)과 족좌(165호) 등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국보 13점 중엔 천마총금관(188호)을 비롯한 천마총 출토 유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 신라시대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비중이 높다. 출토 유물이 아닌 것으론 성덕대왕신종(29호, 일명 에밀레종)이 유명하다.

 

 

5위 그림 보려면 간송미술관

 

삼성가 다음으로 국보를 많이 소유한 개인 소장자는 전성우 화백이다. 전 화백은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의 설립자 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장남이다.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71호) 등 중요 고문서와 혜원 신윤복(1758∼?)이 그린 ‘단오풍정’ ‘월하정인’(사진) 등 연작 풍속화 30여 점이 담긴 화첩 혜원풍속도(135호)가 간송미술관에 있다. 전 화백의 소장품 12점 청자상감운학문매병(68호) 등 청자가 4점에 달해 그 비중이 가장 크다.

 

 

6위 ‘탑·탑·탑’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을 제외하고도 경주시에는 국보가 9점이 있다. 첨성대(31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25호)와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199호)을 제외하면 모두 탑이다. 감은사지삼층석탑(112호)과 경주구황리삼층석탑(37호) 등 국보급 탑만 6점이다.

 

 

7위 백자가 아름다운 호림박물관

 

호림박물관은 호림 윤장섭 선생이 출연한 기금과 유물을 바탕으로 1982년 개관했다. 도자기와 토기 등 문화재 1만여 점 중 국보가 8점, 보물이 46점이다. 도자기 전문 박물관답게 청화백자매죽문호(222호·사진) 등 백자 2점과 분청사기 1점이 국보로 지정됐다. 화엄종 근본 경전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266호) 등 고려 초기 대장경 4종도 소장하고 있다. 소유자는 모두 성보문화재단으로 돼 있다.

 

 

8, 9, 10위 문서의 보고 규장각, 국보급 사찰 불국사·부석사

 

서울대 규장각에는 조선왕조실록(151호·사진)과 승정원일기(303호), 삼국유사(306호) 등 국보급 고문서만 7종이 모여 있다. 모두 연구자들에게 긴요한 사료들이다. 불국사에는 국보가 총 6점이 있다. 다보탑(20호)과 삼층석탑(21호) 등 탑 2점, 교량 2점, 불상 2점이 일찌감치 국보로 지정됐다. 부석사는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18호)은 물론, 그 앞에 있는 무량수전앞석등(17호)도 국보다. 부석사의 국보는 모두 5점으로 불국사보다 1점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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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팔 수 있지만 해외 판매는 안 돼

 

Q&A

 

 

몇 호까지 있나

 

국보는 310호까지 지정됐다. 숭례문(1호)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백자대호(310호)까지다. 310호까지의 국보 중 국보에서 지정 해제된 제274호 귀함별황자총통을 제외하면 총 309종의 국보가 있다. 참고로 보물은 1613호까지 있다.

 

 

문화재 1개당 번호가 하나씩 붙나

 

숭례문처럼 단일 건물일 경우에는 그렇다. 여러 권이 묶인 책이나 목판본 등은 수량이 얼마가 되든 한 세트에 한 개의 번호가 붙는다. 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 유물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축과 금동제 사리외함 1개, 동경 2개, 유향 3봉과 유리구슬 등 총 28종이 한꺼번에 국보 126호로 지정됐다. 다만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관리하기 위해 126호-1~28까지 관리번호를 붙여 구분한다. 해인사고려판각(206호)도 묘법연화경(206호-1)부터 십문화쟁론(206호-28)까지 모두 28개의 관리번호로 식별한다.

 

같은 판본이라도 소장처가 다를 경우엔 ‘가지번호’를 붙여 구분한다. 개인이 소장한 삼국유사를 306호로, 서울대규장각에서 소장한 삼국유사는 306-2호로 표시하는 식이다.

 

 

왜 숭례문이 1호가 됐나

 

국보 번호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지정된 순서대로 번호를 붙인다. 우리 문화재를 국보로 지정하기 시작한 것은 1955년부터다. 이에 앞서 일제가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을 발표하고 보물을 지정하기 시작했으나 국보 호칭은 일본 문화재에만 적용했다. 국권을 잃은 조선은 국가가 아니어서 국보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 지정된 보물은 340건, 고적 101건, 천연기념물 146건이었다. 그중 남대문(일제가 숭례문 대신 붙인 이름)이 보물 1호였다.

 

광복 후인 55년 정부는 일제가 지정한 보물 중 북한에 있는 것을 빼고 모두 국보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일부 문화재의 이름을 바꾸고 등급을 재조정했다. 이때 국보 1호인 남대문은 숭례문으로 본래 이름을 회복했다. 이런 이유로 일제가 1호로 매긴 숭례문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문화재를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국보 1호 재지정 논란’이 96년과 2005년 등 몇 차례 있었다. 96년에는 국민과 전문가들을 상대로 설문조사까지 벌인 끝에 “당분간 현행대로 유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제일 가치 있는 국보는 뭔가

 

답하기 좀 어렵다. 워낙 의견이 분분하다. 연구자들의 판단과 국민의 정서, 문화재청에서 관리를 맡는 담당자들이 느끼는 것과 예술적인 가치 판단 기준 등이 달라서다. 국보 1호 재지정 논란 당시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훈민정음(70호)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78호), 석굴암(24호)이었다. 공교롭게도 숭례문은 화마를 입은 뒤 되레 ‘국민정서법’상 진정한 국보 1호로 자리 잡은 듯하다.

 

 

사고팔 수 있나

 

국보도 소유물, 즉 재산으로 인정된다. 국유인 경우에는 해당사항이 없지만 기본적으로 재산이기에 매매가 가능하다. 매매로 인해 소유자가 바뀌거나 소재지에 변동이 있으면 문화재청에 신고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과태료가 부가된다. 단, 해외 판매는 불가능하다. 해외에서 전시할 경우만 문화재위원회의 조사·심의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반출이 승인된다. 국립박물관·지자체 등이 소장한 국보까지 포함하면 전체 국보의 절반가량이 국유 재산이다. 개인이나 재단·대학이 소유한 국보는 전체 국보의 약 30%를 차지한다. 사찰에 소유권이 있는 국보는 60여 종으로 전체 국보의 약 20%에 해당한다.

 

 

얼마에 매매되나

 

국보의 매매는 흔치 않은 일이라 그 시가를 알기는 어렵다. 국보도 국보 나름이라 그 값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청자라도 크기나 완성도, 용도와 희귀성, 예술성에 따라 수백억원부터 몇 만원까지 다르듯 말이다. 보물 903호인 고려청자상감매죽조무늬매병은 2004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10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유사한 작품이라면 국보가 더 높은 값으로 불리리라 짐작할 뿐이다. 최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93호)와 보물 2점을 포함한 백자 10점을 임대 전시하면서 가입한 유물수송 보험가액만 100억원이었다. 이렇게 보험가액으로 대략의 가치를 추정할 수는 있으나 그 역시 일종의 위험수당일 뿐 국보의 정가라 보긴 어렵다. 건축문화재의 경우 그 위험 부담 때문에 보험사에서 아예 가입을 받아주지 않기도 한다. 산정된 보험가도 터무니없이 낮다. 가령 경복궁 경회루(224호)의 보험가액은 30억원을 상회하는 수준에 그친다. 얼마 전 그 내용이 공개돼 큰 화제가 된 정조어찰의 경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음에도 소장자가 30억원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국보의 이름이 너무 어렵다, 어떻게 읽어야 하나

 

국보 이름은 모두 한자로 돼 있어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한글로 풀어 쓸 경우 그 이름이 너무 길어 복잡해지는 문제가 있다. 가령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을 풀면 ‘상감 기법으로 구름과 학의 무늬를 새긴, 아가리는 좁고 어깨는 넓으며 밑이 홀쭉하게 생긴 푸른 빛깔의 자기 병’이 된다. 게다가 상감 기법마저 한글로 설명하려 들면 끝이 없다.

 

한자로 된 문화재의 이름도 아직 완전히 통일되진 않아 들쑥날쑥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일관성은 있다. 가령 불상은 사찰명-재료명-존명-자세 순으로 이름을 짓는다. 국보 제26호 ‘불국사금동비로자좌상’을 뜯어 보자. 불국사(사찰명)-금동(재료명)-비로자(존명)-좌상(자세)의 순이다. 풀면 ‘불국사에 있는 금동으로 된 비로자부처의 앉은 상’이다.

 

청자나 분청사기도 읽는 방법이 있다. 주로 청자냐 백자냐 등 자기의 구분을 맨 앞에 쓴 뒤 기법-문양-형태의 순으로 이름을 짓는다. 앞서 예를 든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청자-상감(기법)-운학문(문양)-매병(형태)의 순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기법과 자기의 구분이 뒤바뀐 경우도 있다. 국보 263호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花鳥文大壺)는 청화(기법)-백자-산수화조문(문양)-대호(형태)의 순이다. 이를 풀이하면 푸른 안료(청화)로 산과 물과 꽃과 새의 그림(산수화조문)을 그린 커다란 항아리형 백자가 된다. 뚜껑이 있는 경우 청자기린유개향로(65호)처럼 ‘유개(有蓋)’를 넣어 별도로 구분한다. 교령(敎令)은 왕이 내린 벼슬아치 임명장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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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불상 도난 사건

 

1967년 10월 24일 오전 11시. 국립박물관에서 빌려 와 덕수궁미술관 2층에서 전시 중이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119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6세기 후반의 대표적 고구려 불상이다. 불상이 있어야 할 유리 전열장 속에는 메모만 한 장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국장님에게 직접 알리시오. 24시간 안에 반환한다고 하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을 벌여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식으로 되지 말라고. 이따가 11시경 알리시오. 지문을 채취하지 마시오.”

 

문화재관리국과 경찰이 발칵 뒤집혔다. 경찰은 미술관 2층 경비원과 수위, 미술관 직원 등 4명을 붙들고 신문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경찰은 미술관 직원 18명 전원의 지문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고, 골동품 거래처 등지에 도난 국보 사진을 뿌려 수배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불상이 사라진지 12시간째인 밤 11시 무렵, 문화재관리국장의 집 전화벨이 울렸다. “국장님, 불상은 한강 철교 제3교각 16,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십시오.” 박물관 관계자들이 비상 출동해 모래밭에서 불상을 찾았다. 국보는 도난 13시간37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불상을 훔쳐간 이유도 알아내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미술품 도난 사건 중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은 일이다.


비운의 경천사 십층석탑

 

서울 용산 국립중앙방물관 전시동 내 역사의 길 중앙에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86호).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탑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모델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이 탑은 110t이란 육중한 몸으로 수차례 이전됐다. 수난이 시작된 건 조선시대. 탑의 기단부는 물론 1층부터 3층까지 각 면에 이어진 불교 관련 도상이 심하게 훼손됐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밀반출된 채 표류하던 탑은 영국 언론인 E 베델과 미국 선교사 호머 베잘렐 헐버트에 의해 침탈 12년 만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해체된 채 방치되다 59년 시멘트로 땜질되고, 62년 국보로 지정됐다. 비바람에 깎이고 쓸리던 탑은 95년부터 해체·복원 과정을 거친 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 잡았다.

 

 

국내 최대 문화재 밀매단

 

2001년 4월 24일 서울지검 형사 7부는 사찰 주지, 전 고미술협회장, 현직 경찰관 등이 개입된 문화재 밀매단 24명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이 압수한 문화재만 용비어천가 진본(조선중기 간행본), 해인사 판당고(팔만대장경 보관) 중수발원문, 능엄경언해본, 묘법연화경(천태종 근본경전), 대반야바라밀경(보물급 불경), 익안대군(태조의 셋째 아들) 영정 등 국보 및 보물급 1000여 점에 달했다. 문화재 전문 털이범들은 전국 사찰의 불상 안에 놓인 문화재 등을 닥치는 대로 훔치거나 빼돌렸다. 이들은 국내에선 거래될 수 없는 도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한 뒤 일본에서 정상적으로 구입한 것으로 속여 국내로 들여오는 ‘문화재 세탁’도 했다. 사찰 주지와 고미술협회 관계자 등은 장물을 사들인 혐의로 붙잡혔다.

 

 

국립박물관의 국보도 털렸다

 

2003년 5월 15일 밤, 국립공주박물관에 30대 초반 남성 2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당직 직원을 묶은 채 국보 1점을 비롯해 총 4점의 유물을 훔쳐 달아났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가 털리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11일 뒤인 2003년 5월 26일 오전 1시20분. 국보 247호 공주 의당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경기도 용인시 명지대 인근 한 우유 대리점 출입문 앞 빈 화분 속에서 수건에 싸인 채로 발견됐다. 일행 중 한 명이 장물취득 혐의로 먼저 검거돼 범행을 자백한 뒤 공범을 설득해 국보를 돌려주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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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왜 국보 274호는 없나

 

A. 통영 발굴 ‘거북선 대포’

가짜로 밝혀져 국보 해제

 

 

어떤 것이 국보가 되나

 

유형문화재 중 역사·학술·예술·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보물’로 지정하는데, 거기서 특별히 뛰어난 것을 골라 지정한 문화재가 국보다. 즉 ‘보물 중의 보물’로 보면 된다. 국보는 건축물·책·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 등 다양하다. 국보를 정할 때는 ‘그 유례가 희귀한 것,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는 것, 우수하며 예술성이 높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는 조선시대 남쪽 문이었던 숭례문과 동쪽 문이었던 흥인지문을 비교하면 뚜렷이 드러난다. 두 문은 모양과 용도가 비슷하나 숭례문은 조선 초기(1398년) 건립돼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으며 절제미와 균형미가 있다. 이에 비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1869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장식과 기교가 과도해 우리 고유의 전통 건축미를 숭례문만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도 국보가 될 수 있나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 소재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없다. 즉, 문화재보호법 자체가 국내에서만 해당되는 법이다.

 

 

국보로 지정되면 뭐가 달라지나

 

국보가 훼손돼 수리할 필요가 있다거나, 보존 처리를 해야 할 경우 국고와 지자체 예산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국립박물관 등에 관리를 위탁할 수도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44조에는 국가지정문화재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자는 그 문화재를 공개하는 경우 관람자로부터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도록 했다. 위헌 논란이 불거진 사찰의 ‘문화재관람료’ 징수는 그 조항에 근거를 둔 것이다.

 

 

어떤 경우에 국보에서 해제되나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거나 그 밖에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그 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

 

 

국보에서 해제된 것이 있나

 

딱 한 건이다. 1992년 국보 274호로 지정된 ‘귀함(龜艦)별황자총통’은 4년 뒤인 96년 위작으로 밝혀져 국보에서 해제됐다. 해군 대령과 골동품상이 손잡고 가짜 유물을 거북선에서 사용한 대포로 둔갑시킨 사건이었다. 골동품상이 자신의 주물공장에서 대포를 정교하게 제작한 뒤 부식작업을 하고, 이를 경남 통영시 앞바다에 빠뜨린 뒤 해군 충무공해저유물발굴단이 이를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래서 국보 총 목록에는 274호가 비어 있다.

 

 

해제된 번호는 다시 사용하지 않는가

 

해제되면 영구 결번이 된다. 국보 목록 중 결번은 딱 하나지만 보물에는 결번이 많다. 일단 보물로 지정된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국보로 승격시키기 때문에 국보가 되는 순간 보물에서 해제되며, 그 보물 번호는 결번으로 남는다. 가령 가장 최근에 지정된 국보 309호와 310호 백자대호는 각각 보물 1424호와 1440호였다. 즉, 보물 1424호와 1440호는 결번이다.

 

 

숭례문은 왜 국보에서 해제되지 않았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는 경우가 있다.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이 2005년 화재로 완전히 녹아 버려 보물에서 해제된 게 대표적이다. 숭례문은 불에 타기는 했으나 석축 등의 뼈대가 남아 있었다. 그런 건축의 골조까지도 보물로 인정했던 것이기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국보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숭례문 복구의 한 과정으로 현장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숭례문 화재 1주년이던 2월, 일반에 공개된 복구 현장에는 아스팔트에 묻혔던 옛 도로와 하수도 시설 등이 드러나 있었다.

 

 

국보 중 제일 오래된 건

 

국보 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로 추정된다.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 암반에 여러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암각화)이다.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멧돼지 등을 사냥하는 장면 총 75종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기법으로 볼 때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산문화재 중에선 0.03㎜ 간격의 선 1만3000여 가닥을 새겨 태양을 형상화한 청동거울 다뉴세문경(141호)과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방울일괄(146호) 등이 오래됐다.

 

 

국보 중 가장 큰 것은

 

여수진남관(304호)으로 추정된다. 1598년(선조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이 건물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의 중심 기지였다.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건물 면적만 총 240평에 달한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종묘정전(227호)은 19칸(101m)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길다. 경복궁 근정전(223호)은 높이 34m의 2층 건물로, 그 높이로 따지자면 가장 큰 국보라 할 수 있다.

 

 

국보 중 제일 작은 건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126호) 등 각종 사리장치에 들어 있는 구슬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작으리라 추정된다. 직경 5㎜ 안팎의 구슬이다. 사리장치에 있는 다른 유물들과 함께 국보로 일괄 지정되기에 이 작은 것들도 국보는 국보다.

 

 

국보 목록에 서민이 쓰던 것도 있나

 

왕실의 자료나 역사가 오래된 불교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문헌 자료든 유물이든 지배계층의 것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도 높게 매겨지는 게 사실이다. 서민들의 유물은 민속자료로 지정해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