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통 역사서 ‘24사’

Fact/역사-고전 · 2010. 2. 11. 19:07


중국 역대 왕조가 공인한 정사는 ‘이십사사(二十四史. 표 참조)’다. 『사기』부터 『명사(明史)』까지 총 3223권, 약 4683만 자에 이른다. 여기에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정사로 인정한 『신원사(新元史)』를 보태 ‘25사’로, 또 1928년 초고 형태로 나온 『청사고(淸史稿)』까지 합쳐 ‘26사’로 부르기도 하지만 정사라 함은 보통 24사를 일컫는다.

 

‘24사’는 판본이 많다. 현재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중화서국본이다. 중국에서 한 해 평균 5000질 가까이 팔린다. 이 중화서국본 ‘24사’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파란만장한 비사를 갖고 있다.

 

49년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원전 대신 역대 황제들의 통치 이야기가 담긴 『자치통감』을 챙겨 베이징 중난하이의 국향서옥(國香書屋)에 들어갔을 정도로 역사광이었다. 그는 역사 정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문 원서는 구두점을 찍는 방법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그래서 엄밀한 표점이 필요하다.

 

56년 정전둬(鄭振鐸) 당시 문화부 차관은 새롭게 비교 정리한 중화인민공화국판 ‘24사’ 출판을 건의했다. 58년 7월 마오쩌둥은 우선 ‘전4사’라 불리는 『사기』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의 표점본 출판을 지시했다. 이에 우한(吳?) 베이징 부시장과 판원란(范文瀾) 중국사학회 회장은 나머지 정사도 중화서국에서 정리할 것을 제안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계획이 매우 좋다. 이 제안에 비추어 실행하라”고 허가했다. 59년 구제강(顧詰剛)이 표점한 중화서국본 『사기』 교점본이 첫 출판됐다. 하지만 역대 정사 정리 작업은 베이징의 전문가만으로는 벅찼다. 이에 중앙선전부는 63년 8월 전국의 역사학자 총동원령을 내렸다. 베이징 중화서국 건물에 전국의 역사가들이 모여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 65년 전4사가 모두 출판됐다.

그러나 66년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많은 역사가가 공개비판 집회에 끌려나가 수모를 당했다. 요금(遼金)사 전문가 푸러환(傅樂煥)은 49년 대만으로 간 푸쓰녠(傅斯年)의 조카라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뒤 자살했다. 역사 정리 작업도 정지됐다.

 

71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구제강 선생 책임하에 작업을 완수하시오”라며 작업 재개를 지시한다. 73년 말 교점 작업은 일단락됐다. 78년 가장 많은 분량의 『송사(宋史)』를 끝으로 작업 기간 20년에 연인원 300여 명이 동원된 중화서국본 ‘24사’가 마침내 완성됐다.

 

정사의 원조인 ‘사기(史記)’

 

“짐은 네가 쓴 책(사기)을 보았다. 너는 내가 너를 죽이길 원하겠지. 천추만대가 모두 너의 충성과 절개를 찬양하고, 짐을 폭군이라 욕하게끔 말이다. 하지만 너는 이 책을 가지고 가도 좋다…. 어떤 이들은 짐에게 너의 책을 태워 버리라고 말했지만, 짐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짐이 너의 책을 국가의 정사로 삼을 수는 없지만 한 사관(史官)의 말로 남길 것이다.” 2004년 중국 CC-TV를 통해 인기리에 방영된 58부작 대하 사극 ‘한무대제(漢武大帝)’의 첫 장면이다. 말년의 한무제 유철(劉徹)이 옥좌에서 사마천에게 한 말이다.

 

『사기』는 당대에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불렸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사기』라는 이름을 얻었다. 삼황오제의 황제(黃帝) 헌원(軒轅)부터 한 무제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오늘날의 정치사에 속하는 역대 제왕의 연대기는 본기(本紀) 12권에, 제후의 흥망과 제후국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은 표(表) 10권에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정치사뿐 아니라 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구체적인 문물제도의 변화를 8편의 서(書)로 정리했다. 봉건시대 개별 국가의 역사는 세가(世家) 30권에서 정리하고, 열전(列傳) 70권에서는 역사의 주체인 인간들의 전기를 다뤘다. 이 가운데 본기와 열전을 핵심으로 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역사 서술 형식을 세웠다. 총 130권 52만 6500자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