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글쟁이들/① 역사 저술가 이덕일
한국 출판계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책’만으로 살아가는 글쟁이, 곧 프로 저술가는 극소수다. 문학쪽은 오히려 더욱 전업작가가 적고, 인문·사회·경제쪽, 그리고 실용서쪽에서 최근들어 분야별로 한두명씩 서서히 저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역사 전문 저술가 이덕일(45)씨는 가장 성공한 글쟁이로 꼽힌다. 책 이름에 ‘이덕일의~’라고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개인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역사쪽에서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는 저술가, 특히 ‘대학교수’란 배경도 없이 책만으로 승부하는 저술가는 그가 유일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이 늦었던 ‘늦깎이 사학자’ 이씨는 1997년 서른일곱살이란 나이에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을 쓰면서 저술가로 데뷔한 뒤 꼭 10년 동안 30여권의 책을 쓰면서 역사쪽에서 최고의 인기저자로 자리잡았다.
역사쪽에서 대중적인 인문서 쓰기를 시도한 이가 이씨 혼자만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한국역사연구회 등이 ‘역사 대중화’를 시도한 뒤 여러 소장학자들이 대중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히지만 현재까지 남아 출판시장에서 통하는 이는 이씨뿐이다. 그만큼 이씨의 등장은 90년대 이후 출판계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이씨가 저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때로는 지금까지도, 받았던 가장 큰 오해가 ‘재야 사학자’란 호칭이란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 역사분야에서 ‘재야’란 말은 정식으로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 홀로 공부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학과(숭실대)를 졸업했고 <동북항일군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정통 역사학 연구자인 이씨는 ‘재야’가 아닌데도 이씨처럼 저술활동만 전념하는 전공자가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씨를 재야일 것으로로 넘겨짚은 것이다.
저술가로서 이씨는 올해 경력의 절정을 맞고 있다. 1999년 나왔던 <누가 왕을 죽였는가>를 개정한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난해 다시 나온 뒤 10만부 넘게 팔리고 있고, 최근 펴낸 <조선 최대 갑부 역관>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씨 책 두 권이 동시에 상위 순위에 올라있다. 또 <~역관>이 이씨의 책으로는 처음으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씨를 향한 출판사들의 구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출판계에서 추산하는 이씨의 시장가치는 ‘5만부’. 올해 출판시장에서 이씨의 가치를 환산한 수치로, 이씨의 이름으로 5만명까지는 끌어올 수 있다는 의미다. 5000부를 넘기기가 쉽지 않은 인문·교양쪽에서 5만부란 수치는 다른 분야의 10만부 수준이다. 이씨는 30~40대 남성들을 고정팬으로 거느리고 있어 최소 1만부는 기본으로 넘긴다. 이런 점 때문에 이씨는 대형 종합출판사 김영사의 ‘빅4’ 필자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다른 3명이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 교수, <식객>의 허영만 화백, <토익, 답이 보인다> 시리즈로 토익시장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인 김대균씨인 점을 보면 이씨의 힘을 알 수 있다.
김영사 ‘빅4’ 필자 중 한명
이씨가 저술가로 성공한 최고의 강점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인 ‘글쓰기’에서 나온다고 출판계는 분석한다. 학자풍의 딱딱한 글을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이씨는 실제 역사소설 <운부>를 쓰기도 했다)답게 이씨의 책들은 소설처럼 술술 읽을 수 있는 게 매력이자 장점이다. 김영사 신은영 실장은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에만 빠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기 때문에 독자들이 머릿속에 극적인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책 내용을 차별화하는 틈새 주제 포착능력도 강점으로 꼽힌다. 누구나 아는 방향으로 책을 쓰지 않고 책마다 반드시 새로운 보여주는 게 있다는 말이다. 논쟁이 일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처럼 책마다 ‘걸고 넘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인데, 이는 출판사나 편집자가 가장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이씨의 글은 이야기가 맛깔진 반면 전하는 메시지가 약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모르겠다는 평도 듣는다. 너무 글 ‘테크닉’에만 의존한다는 평도 있다. 이는 이씨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지만, 이씨의 철학과 전략에 따른 선택이기도 하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책은 오래 못가는 것 같아요. 전에는 제 주관과 판단을 글에 집어넣기도 했는데 몇년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 부분들이 꼭 목에 딱딱하게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 전개에는 주관을 넣어도 마지막 결론은 독자들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이걸 어기면 독자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요.”
직장인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철저한 자기관리도 이씨의 성공비결 가운데 하나.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일하고, 가끔 야근도 합니다. 일이 되든 안되든 앉아서 글을 쓰든지 책을 보면서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게 원칙입니다.” 이씨는 술마시는 시간을 빼면 항상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마감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마련인 대부분의 필자들과 달리 원고 기한을 어기는 법이 없다. 자기 일정과 작업량을 잘 감안해 합리적으로 마감을 정하기 때문이다. “책도 상품인데 아이스크림을 겨울에 낼 수는 없잖느냐”고 이씨는 웃었다.
지금은 ‘역사 저술가’로 이름을 굳혔지만 그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도 “늘 어렵게 살았던 터여서 ‘라면 세 개에 소주 한 병이면 하루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던 것”이라며 “아마 온실에서 도전한 사람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 아닌 그가 대학교수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긴 했기에 저술가를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시장)으로 일찌감치 정하고 도전해 거둔 성과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씨는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이 대학 기웃대지 않고 잘먹고 살면서 전문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준 점”을 자부심으로 꼽는다.
불행하게 가신 분 한풀어줘 보람
역사 저술가로서의 보람을 물었다.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추구하다 불행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정이 많이 가는 편입니다. 책으로 그런 분들의 한을 풀어준다고나 할까, 그게 보람입니다.” 이씨는 저술가로서 앞으로의 방향을‘평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바라보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씨는 평전 쓸 대상으로 우선 3명을 정해두었다. 이순신을 발탁한 정치가 유성룡,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학자 윤휴, 그리고 정조 임금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② 미술 전문 저술가 노성두씨
출판과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예술 장르는 단연 미술이다. 책에 작품 그림이 실리면 보기에도 좋고, 수천년 세월 미술속에 쌓인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해 책으로 쓸 소재도 많다. 사진도 같은 시각예술이지만 출판 측면에서는 미술과는 비교가 안된다. 최근 ‘교양’ 바람과 맞물리면서 출판시장에는 대중적 미술책이 1년에 수십종씩 쏟아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처럼 미술이 출판으로 대중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도 채 안된다. 1990년대 이후 미술책을 전문적으로 쓰는 저술가들이 등장해 교양미술책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미술책은 출판의 중요한 새 분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미술전문 저술가 노성두(48)씨다.
노씨는 국내 미술교양서 필자를 대표하는 1세대 전문 저술가다. 미술저술가들을 나눌때 교양인 차원에서 출발해 대중적으로 알기 쉽게 미술을 소개하는 ‘저널리즘 기반의 저술가’와, 미술사와 비평을 전공한 연구자 출신의 ‘아카데미즘 기반의 저술가’로 구분한다면 이주헌씨는 전자를, 노성두씨는 후자를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씨는 신문사 문화부 미술담당 기자 출신, 노씨는 미술사학자 출신으로 서로 기반과 출발점은 다르지만 오로지 책만으로 승부하는 프로 저술가로 나선 첫세대 미술저술가란 점에서 같다.
인천 노씨의 아파트는 안방이 작은 방이고 원래 안방인 가장 큰 방은 자료실이다. 책과 도록이 자료실 네 벽을 차지한 것은 물론 방바닥까지 점령해 중간 중간 발디딜 틈만 남겨놓고 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 드리는데요, 지금 이 상태가 치운 겁니다.” 워낙 작업량이 많다보니 책상위가 정돈될 틈이 없다. 그래도 이 복잡한 자료더미 안에서 노씨는 원하는 그림이 들어 있는 도록을 10초면 척척 찾아낸다.
노씨는 99년 첫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모두 61종의 성인·어린이용 미술책을 짓거나 번역했다. 해마다 8~10권씩을 펴낸 셈이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도판해석 능력은 다른 미술저술가들이 부러워하는 노씨의 자산이다. 미술가와 그림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술가들은 여럿이어도 노씨처럼 서양 미술 도판을 직접 보면서 그림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미술저술가는 없었다. 또한 미술사 주요 1차자료를 직접 원전해석할 수 있는 저술가도 노씨가 처음이었다. 독일어는 물론 르네상스 미술로 박사학위를 딴만큼 이탈리아어, 그리고 고전미술의 공식언어랄 수 있는 라틴어, 영어와 불어를 번역할 수 있는 어학능력도 노씨만의 트레이드마크다. 영어판을 통해 2차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원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미술저술가는 지금도 드물다. 고정팬들은 노씨의 문장이 미문이란 점을 첫번째 매력으로 꼽는다.
99년 첫책 이후 61종 짓거나 번역
노씨가 저술가로 나선 것은 교수자리를 얻지 못한 게 계기가 됐다.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던 노씨는 독일로 유학가서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10여년 공부한 뒤 94년 귀국했다. 그러나 교수자리는 그에게 오지 않았다. 96년 결혼 직후 노씨는 아내에게 “다 때려치우고 글을 써서 먹고 살테니 앞으로 1년만 버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노씨는 자신을 저술가로 ‘재부팅’하는 체질개선작업에 돌입했다.
이 기간에 노씨가 전범으로 삼은 ‘글스승’은 2명이다. 첫번째가 고은 시인이다. “땀냄새 나는 현장감이 일품”이어서 고은 시인의 시를 거듭 음미하며 읽었다. 다음 글쓰기 모델은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씨. “검은돌 흰돌 두개만 가지고 우주처럼 써대는 수사에 감탄해” 문장을 곱씹었다. 그렇게 자기 문체를 만들면서 번역할 책 목록을 뽑아 여행가방에 책을 넣고 무작정 출판사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역서가 <알베르티의 회화론>(사계절)이었다. “원래는 고전번역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금방 깨달았죠. 번역, 그것도 고전번역은 정말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술에 모든 활동을 맞췄고, 그의 이름을 알린 첫 본격 저술서로 나온 책이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사계절·99년)다.
노씨가 세운 저술 원칙 1번은 ‘신뢰성’이다. 노씨가 보기에 우리 미술책의 문제점은 비전공자들이 쓴 미술책이 많아 너무 오류가 많고, 그런 오류가 정설처럼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7년쯤 전 어린이책 베스트 1위에 오른 미술책을 들춰봤다가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맞는 내용보다 틀리는 내용이 더 많았습니다.” 이후 노씨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술책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성인용 정통 미술단행본은 잘 안팔리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내린 선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야 겠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밀로의 비너스가 ‘8등신’ 기준으로 만들었다고 미술책에 흔히 나오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인체 비례의 기준은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이었어요. 머리 기준은 15세기 이후 등장한 것인데도 검증도 않고 인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검 60구를 해부해 인체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는 것도 대표적인 오류다. “다빈치가 쓴 수기를 직접 번역해보니 30구였습니다. 왜 60구란 수치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믿을만한 책을 쓴다는 자부심을 잘 보여주는 책이 최근 나온 청소년용 미술책 <춤추는 세상을 껴안은 화가 브뢰겔>이다. 브뢰겔 그림을 이해하려면 16세기 네덜란드 속담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그림에 숨어있는 당시 네덜란드 속담 126개를 모두 번역해 부록을 실었을 정도다.
미술저술가의 길을 연 개척자로서의 위상과는 달리 그의 실제 수입은 의외다 싶을 만큼 적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본격 저술가로, 그것도 미술저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동시에 우리나라 미술출판의 현실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해마다 8권 이상 책을 내는데 그가 ‘책’만으로 버는 수입은 한 해 2000만원 안팎. 노씨가 쓴 책을 보면 번역서를 뺀 일반인용 책은 의외로 적고, 그나마 나오는 기간도 1~2년에 한 권 정도다. 그리고 이 책들은 대부분 말랑말랑한 에세이류가 많아 ‘노성두의 주 저’란 이름을 내걸 만한 책은 없다는 비판도 듣는다. “죄짓는 기분이죠. 그런데 도무지 조금이라도 학문적인 책은 내고 싶어도 낼 엄두가 안나요. 언론에서도 크게 다룬 책이 3000부도 안팔린 경우도 있습니다.”
저술 원칙은 ‘믿을만한 책’
우리 출판시장에서 교양미술책은 팔리는 주제만 중복출판된다. 인상파, 특히 고흐에 대한 책만 계속 나온다. 노씨가 다루는 근대 이전 고전미술들은 아직 대중들에겐 어려운 미술이란 관념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 간극이 메워질 때까지 저술가로서 노씨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
한국의 글쟁이들/③ 강호동양학 문필가 조용헌씨
“문필가를 알려면 그 서재를 봐야지요.”
하지만 문외한인 기자에게 그 차이가 쉽게 보일리야. 그저 ‘정신’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는 집안 곳곳 가구 대신 책장이 놓여있는 게 여늬 집들과 가장 달라보였다. 글쟁이 조용헌씨가 사는 전북 익산시 어양동의 복층식 아파트는 집안 곳곳이 서재였다. ‘진짜 서재’는 아랫층인 지하층 전체였는데, 마루 벽 전체가 책꽂이였다. 맞은 편에 놓인 커다란 화이트보드에는 유명 학자며 책이름 같은 명사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마루 바닥 가운데 있는 둥그런 나무틀. “글쓰다가 이렇게 누워서 몸을 펴는 겁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쓰는 것을 본떠 판다는 ‘기지개용 도구’였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를 놓은 책상이며 가구들이 앉은뱅이다. 동양학 전문 저술가니 좌식생활을 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할텐데도 무척이나 새로워 보였다.
“난 저술가라고 안하고 문필가라고 해요. 풍수에 문필봉이란 게 있는데, 집터 앞에 삼각형으로 솟은 문필봉이 있는 걸 최고로 쳐요. 조지훈 종택이나 영랑 생가에 가보면 문필봉이 앞에 있지요. 옛말에 문필봉은 있어도 저술봉은 없으니 문필가라 하는게 맞지요.”(막상 조씨의 아파트 앞에는 문필봉이 없었다. 대신 양쪽에 어양중과 영등중 두 중학교를 거느리고 있어 어느 정도 문기(文氣)를 전해받는 듯했다.)
조씨는 문필가의 본질을 논어에 나오는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 곧 ‘공부를 하면 녹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을 약간 바꿔 ‘필야녹재기중’(筆也祿在其中)이라고 설명한다. 글 써서 먹고 산다는 이야기다. 이 문필가란 요즘 말로 ‘1인기업가’이며, ‘시대의 스토리텔러’란 게 그의 지론이다. 펜 하나 달랑 들고 홀로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정작 그가 문필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은 3년 전이었다고 한다. 1999년 첫 책을 낸 뒤로 한 참 지나서였다. “그 때는 직장에서 월급받았으니까. 책은 뭐 그냥 낸거지. (인생의) 승부는 안걸어요. 재미로 하는 거지.” 말투는 의뭉한듯 한데 거침이 없다. 출판가에는 조씨가 출판사 사장과 담당 편집자의 관상이며, 출판사 건물의 풍수를 보고 계약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물었는데 그건 아니란다. “서로의 아이덴티티를 따져요. ‘전통 플러스 동양적 팬터지’ 이게 내 아이덴티티인데 이게 출판사의 출판방향과 맞는지 보는 거죠.”
글감에 ‘전통+동양적 판타지’ 가미
조씨가 첫 책을 낸 지 이제 7년, 쓴 책은 아직 10권에 못미친다. 그런데도 조용헌씨의 책 제목에는 ‘조용헌의~’라는 브랜드가 붙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저술가로서 또렷하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 덕분이다. 조씨는 자기가 글쓰는 장르를 직접 만들어냈다. 이름하야 ‘강호동양학’.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면서도 정식 학문이나 제도권 지식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동양학’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주명리학이며 풍수, 그리고 도사들의 이야기 등 우리 생활속에서는 하나의 문화와 전통으로 살아 있지만 정색을 하고 책으로 다루지는 않았던 것들을 책으로 펴냈다. 그가 말하는 강호동양학은 동양문화의 열쇳말들인 문·사·철과 유·불·선, 그리고 천문·지리·인사라는 아홉가지를 구궁(九宮)으로 한다. 이 아홉가지 열쇠로 풀어내는 동양학, 정통 제도권 동양학을 둘러싼 더 넓은 의미의 동양학, 그게 강호동양학이다. 이 강호동양학이 저술가로써 조씨의 강점이자 차별화 요소요, 매력이다.
조씨는 불교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잠깐 직장생활도 했지만 샐러리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혼자 전국을 누볐다고 한다. 10년 이상 전국 이름난 절집이며 명문가, 산속에 사는 아웃사이더들들 찾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이 그만의 컨텐츠다. 조씨는 이 글감들을 동양학 지식에 버무려 ‘전통’과 ‘동양적 팬터지’란 두가지를 들려주는 책을 쓰는 데 주력한다.
조씨는 2000년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란 책으로 그 이름을 알린다. 전국 명문가들의 가훈과 교육철학, 그리고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의 전통을 들여다본 책이었는데,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5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후 <조용헌의 사주명리학>(2002·생각의나무), <방외지사>와 <고수기행> 등의 책을 해마다 펴내면서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고, 종합일간지와 시사잡지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연수입은 1억원 이상인데, 원고료:인세:강연료의 비율이 각각 4:2:4다.
저술가로서 조씨 최대의 무기는 역시 차별화한 ‘동양학’이란 소재다. 그가 주로 취재하는 대상은 “컨텐츠를 지닌 사람들”이다. 찾기도 힘들고 말 트기도 힘들지만 오래하니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양반들이 꼭 점조직 같아서 오대산 사람을 만나면 지리산 사람을 소개해주고 지리산에 가면 계룡산 사람을 알려줘요. 어려운 것은 명문가 후손들처럼 자존심 센 분들 인터뷰하는 거지요. 처음 만나면 쉽게 말씀을 안해요. 그럴 때는 풍수나 보학, 한시 같은 것들로 이야기 한 자락 슬쩍 운을 떼 관심을 끌어서 말문을 틔워야 해요.”
조씨는 “책을 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이나 샐러리맨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함을 달래주는 글을 썼을 때 독자들이 남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펴낸 책들이 평범한 삶의 규칙을 벗어나 독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방외지사>나 독특한 자기 분야를 일군 사람들을 소개하는 <고수기행>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꾼인 자신 역시 이런 사람들과 통하는 탓도 크다. “이야기꾼은 삐딱해야해. 평범한 사람들 만나면 상상력이 줄어요. 문필업은 반항적 기질이 있어야 해요.”
이야기꾼으로서의 ‘글발’도 조씨의 강점으로 꼽힌다. 조씨의 글은 단문이 특징이다. ‘한 문장에 하나의 생각’(one idea one sentence), ‘문어와 구어의 일치’가 그의 글쓰기 철학이다. 좋아하는 글쟁이는 언론인 박권상, 그리고 외국작가 오스카 와일드다. 오스카 와일드는 문장이 짧고 관계대명사가 없어 읽으면서 헷갈리지 않기 때문에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쓸것 많은데 몸 안 좋아 ‘운기조식’
조씨의 책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비교적 크게 엇갈리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으며, 막연하게만 알던 동양학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준다는 것이 긍정적 평가의 축을 이룬다. 반면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어디까지가 객관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있다. 조씨 자신은 자신이 학자라기보다는 ‘이야기꾼’이란 점을 강조한다. 학문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했어도 구전된 부분 등을 다루는 것은 작가적 허용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이야기’로 보아달란 주문이다.
조씨는 앞으로 불교의 명찰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쓸 계획이다. 명문가 이야기의 후속편도 준비중이다. 쓸 것은 많은 데 몸이 다소 안좋아 현재는 운기조식 중이라고 한다. “주화입마가 풀리면 글쓰는 속도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조씨는 웃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④ 한비야
“제가 저술가라고는 저~언혀 생각 안해요. 저술가라면 타이틀이 너무너무 엄청나요. 어느 때는 작가라고 해도 민망해요.”
본인이 프로 글쟁이라고 생각 안하는 사람. 자기가 글을 잘 못쓴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책이 왜 잘 팔리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사람. 그게 한비야(48)씨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저술가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씨는 꼭 10년전 <바람의 딸 한비야 걸어서 지구를 세바퀴 반>이란 책으로 처음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혈혈단신으로 6년 넘게 전세계를 걸어서 돌아다닌 여자. 다음에는 우리나라를 걸어서 종단한 이야기(<바람의 딸, 우리 땅에서 서다>를 들려줬다. 역시 바람의 딸 답다. 그러다 어느날 중국어를 배우러 떠나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쓰더니, 이번에는 세계 곳곳 긴급구호현장을 누비고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를 썼다. 이건 매번 진화해댄다. 그리고 진화의 결과를 몇년 만에 한 번씩 들려준다.
4종, 7권. 지금까지 한씨가 쓴 책은 그게 전부다. 그러나 한씨의 책이 이끌어낸 호응은 실로 ‘경이적’이다. 실패한 책 하나 없고, 낸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학, 비문학을 통틀어 한씨만큼 확실하게 독자를 거느린 글쟁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책 <~세바퀴 반> 4권이 100만부 이상, <~우리 땅에 서다>가 20만부, <~중국견문록> 48만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41만부. 책을 낼수록 판매부수가 늘고 생명력도 길어지고 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출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2~3위권을 지키고 있다.
판매부수가 50만부에 이른다는 것은 상업적으로 볼 때 작가의 차원이 일반 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과 여 양쪽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야 가능하고, 좌와 우를 막론해야 가능하다. 청년층과 장년층 어느 한쪽에게만 인기가 좋아서도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모든 연령, 모든 성별, 모든 성향을 뛰어넘는 호응을 얻어야 가능한 수치다. 곧 한씨가 남녀노소 모든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다.
자기책 외울정도…편집자는 죽을맛
독자들이 꼽는 한씨의 최대 매력은 바로 ‘건강함’이다. 한씨의 책을 읽으면 ‘씩씩바이러스’나 ‘행복바이러스’ 그리고 ‘봉사바이러스’에 옮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매력은 한씨의 모든 책이 공통적이다. 하지만 저술가로서 한씨는 세번째 책 <중국견문록> 이후 한단계 변신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두 책에서 한씨는 ‘여행가’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와는 다른 생생한 표현, 그리고 한씨만의 독특한 유머가 묻어났다. 그런데 <중국견문록>부터는 ‘사회적 역할모델’로 거듭났다. ’정력적이고 호기심 많은 드센 여성 여행가’가 긴급구호활동가가 되면서 ‘닮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팬층은 더 넓어졌다.
실제 한씨의 사인회에는 30~40대 직장 남성들이 딸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한씨의 책을 편집했던 지평님 황소자리 대표는 “아버지들이 동년배로서 자기가 못해본 것을 해내는 이 여성을 자기 역할모델로 여기는 동시에 딸에게도 역할모델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행복하자, 부자가 되자 그런 구호들이 넘쳐나는데 한비야를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10만원만 내면 각 대륙별로 한 사람씩을 구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삶이 제대로 가고 있나 불안할때, 모호하고 불안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 한비야의 목소리가 있다는 거에요.”
이런 당위적 메시지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역시 저술가로서 한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씨 글의 특징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술술 읽히는 점이다. 미사여구로 글을 꾸미는 법도 없다. 대신 생생한 비유를 곁들인다. 그래서 한비야 최고의 장점을 그래서 ‘전달력’으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씨의 글이 이렇게 쉽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도 술술 쓸 듯하지만, 실은 그 정반대다. 한씨는 원고를 자기 마음에 꼭 들 때까지 수십번씩 퇴고한다. 그래서 교정지가 ‘딸기밭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불바다가 되어’버린 듯 새빨개진다. 한씨는 또 자기 책의 목차는 물론, 목차의 순서, 각 항목별 쪽수와 분량을 모두 스스로 정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책 본문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로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소재로 왜 이정도 밖에 못쓰냐며 자학하는 스타일이다.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수만명이 죽어가는 현장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는 연시이건, 글이란 것은 운율이고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호흡이 짧아지거나 거칠다 싶으면 다 고쳐요. 입으로 읽어서 거칠면 눈으로 읽어서도 거칠다고 생각해요.” 한밤중에 글을 쓰고는 친구며 편집자에게 전화해서 무조건 읽어주면서 점검해댄다. 좋은 아이디어나 표현이 떠올라도 전화를 한다. 당연히 편집자들은 ‘죽을 노릇’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장의 호흡은 물론 한권 전체의 강약중강약 호흡도 따진다. 그러다보니 거의 자기책을 외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투를 써야 독자들이 나를 느껴요. 독자들은 결국 글쓴이의 오감을 빌어 내 호흡을 같이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현장을 전하는 리포터에 가깝다고 봐요. 긴급구호 현장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전해야 하잖아요.”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한씨 자신의 ‘일기’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그토록 일기를 많이 써야 문장력도 늘고 생각도 깊어진다고 했던 이야기의 모델이 있다면 바로 한비야다. 한씨의 일기장은 취재수첩 같이 생긴 작은 스프링노트. ‘그날 하루 느끼고 떠올린 모든 것들’을 적는다.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수시로 메모를 해서 누가 취재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취재 중에도 수시로 메모
한씨는 요즘 피 흐름이 좋지 않아 잠시 휴식중이다. 북한산 줄기를 바라보는 한씨 아파트 내부는 글과 관련된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파에도 책상에도 화장실에도 안경과 책들이 있었다. 몸은 안좋다면서도 이 에너지덩어리 같은 글쟁이는 온갖 아이디어와 꿈을 받아적기 힘들 정도로 쏟아냈다. 자연히 다음 책이 궁금해졌다. “정한 것은 없지만, 어떤 방향이 될지는 알지요. 말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차서 도저히 토해내지 않으면 못견딜 때까지 기다렸다가 써야해요.” 아, 이번 책도 4년만에 나왔지. 한씨 팬들은 이미 기다리는 데 익숙할 듯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⑤ 과학저술가 이인식
이인식(61)씨는 오로지 책으로 승부를 거는 직업 저술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찍 저술가로 나선 축에 드는 이다. 90년대 중후반 전업 저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과학저술가로 글을 써왔고, 과학책을 쓴 것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87년부터다. 올해로 그가 과학저술가로 활동한 꼭 20년째를 맞았고, 그동안 펴낸 책이 스무 권을 넘어섰다.
이씨는 이달 펴낸 최신작 <미래교양사전>으로 국내 과학책 시장에서 자신이 개인 브랜드로 통하는 드문 필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냈다. 600쪽 가까운 두께(576쪽), 3만원에 육박하는 가격(2만9000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간 2주만에 5000부 넘게 팔렸다. 과학책들이 보통 2000~3000부를 넘기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판매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씨는 자신이 “아직 진정한 저술가가 아니”며, “우리나라에 아직 과학저술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진정한 저술은 온전히 책으로 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데, 자신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책으로 낸 것이 많기 때문에 아직도 저술가라기 보다는 칼럼니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칼럼을 묶어 낸 거에요. 지금까지는 책을 위한 저술만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책이란 안읽히면 끝입니다. 하지만 칼럼은 원고료도 나오고 기본적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위험부담이 적은 편이니까 칼럼으로 써서 책으로 내온 것이죠.”
이씨의 자평은 그만큼 국내에서 ‘과학 출판’이 열악한 분야이고 그래서 ‘과학저술가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지금까지 신문, 잡지에 쓴 원고지 1만매 이상의 칼럼들은 이인식이란 이름을 알린 1등 공신이었던 동시에 저술가이면서도 책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의 산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번 <미래교양사전>은 모처럼 처음부터 책으로만 기획해 쓴 책이다. 이씨는 앞으로 칼럼 연재보다는 책 저술에만 전념할 계획이다. 글쟁이 생활 20년, 나이 환갑에 저술가로서 제2의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석사 학위도 없지만 저서 20권 넘어
이씨가 책 저술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이제 지명도나 수입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기 때문다. 이는 반대로 지금까지는 버텨내듯 글쓰기를 해올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씨 스스로도 지난 세월에 대해 “저술가로서 어느 정도 보상은 받았다고 본다”면서도 “폄훼당해 좌절하고 섭섭해하며 살아야 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쨋든 과학책으로 이렇게 먹고 살 수 있으니 보상받은 것이고, 국가 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으니 또한 보상받은 것 아니겠냐”는 설명이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는 그가, 그것도 가장 엄밀성과 학문적 권위를 요구하는 과학 저술에 뛰어든 이상 이겨내야만 했던 마음고생의 대가일 것이다.
이씨가 과학저술가로 나선 것은 개인적인 꿈이기도 했지만 생활인으로서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40대 중반까지 이씨는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오른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짬짬이 전자공학이란 전공과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전문성을 살려 컴퓨터 잡지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필자로도 활동했다. 글쓰기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 이씨는 결국 “태어나서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고 죽자”는 생각에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92년 8월 <정보기술>이란 과학잡지를 창간했다. 좋아하는 과학잡지도 만들고 과학 저술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퇴직금에 빌린 돈까지 더해 털어넣은 잡지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년 반만에 잡지를 폐간한 뒤, 이씨는 과학저술가란 미지의 길에 승부를 걸었다. 고시생들 다니는 독서실에서 혼자 수험생처럼 과학공부를 하면서 글쓰기 수련에 돌입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집중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면서 이씨는 94년부터 <한겨레> 등 주요 일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씨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과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글쟁이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 김정흠 교수 등 과학대중화에 관심을 가진 몇몇 대학교수들이 시간을 쪼개 대중적이고 짧은 칼럼을 간간이 쓰는 정도였다. 이씨는 대학교수란 타이틀도, 박사학위도 없었지만 대중적 글쓰기와 저널리즘 감각을 무기로 재미와 정보를 함께 주는 과학칼럼을 지향하고 나섰다. 과학이란 분야가 일반인들에게는 책은 물론 신문기사조차 어렵게 느껴지던 터였기에 알기 쉽게 ‘핵심 정리’를 해주는 듯한 이씨의 칼럼은 금세 호응을 얻었다. 언론은 이씨에게 ‘과학칼럼니스트’란 호칭을 붙여주며 환영했다. 이후 이씨는 1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일급 필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씨가 과학기술을 논하면서도 운전면허도 없고, 휴대폰도 안쓰며, 글도 원고지에 펜으로 쓴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최신 과학정보나 흐름에는 누구보다도 빠르다는 평을 듣는다. “과학저술가는 과학지식의 얼리어답터(초기 수용자)이자 전파자여야 한다”는 철학 덕분이기도 하지만 최신 과학기술이란 게 누가 먼저 관심을 갖고 다루느냐가 승부처이기 때문에 늘 최신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운 결과다. “테크놀로지는 정보전쟁이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교수들도 몰라요. 늘 먼저 보고 공부하는 게 ‘장땡’입니다.” ‘최신’ 못잖게 이씨를 짓누르는 단어가 ‘정확’이다. “과학저술의 기본은 ‘학문적 정확성’과 ‘언론의 민첩성’이고, 프로 과학저술가로서의 기본은 ‘자기 것에 대한 책임’과 ‘완벽’뿐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글에 오류가 있으면 개망신을 당해요. 그래서 항상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찾는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씨의 글쓰기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는 누가 이미 쓴 주제나 소재는 쓰지 않는 것. 무엇이든 처음으로 써야 ‘독창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섞지 않기. “개똥철학은 피한다”는 취향에 따라 글에 사적 경험담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이씨가 주력하는 분야가 ‘공학’과 ‘미래’ 두 분야다. 자신이 공학도 출신에 기업에 근무했던 탓도 있지만 “한국을 먹여살릴 미래산업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내 과학출판 풍토에 대한 불만도 작용한다. 이씨가 보기에 현재 국내 과학책 출판의 문제점은 △기초과학 중심 △과거 지향 △생물학 치중 풍토다. 이런 분야도 중요하지만 이쪽 책만 나오는 것은 분명 문제라는 것이다.
“다윈을 지금 떠들어봤자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거죠. 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을 또 중언부언할 필요가 있나요? 지금 현재 과학계의 살아있는 이슈나 기술 문제가 중요한데 국내 과학책들은 죽은 옛 과학자들의 전기나 한가한 동물이야기만 중복출판되고 있어요.”
‘생활속 공학’ 문학처럼 풀어내고파
저술가로서 이씨의 바람은 ‘한국의 헨리 페트로스키’로 불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공학기술 저술가로 생활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공학기술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설명하는 페트로스키처럼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이공계 학생들에게 공학의 재미를 가르쳐주는 책을 쓰는 것. 이게 저술가로서 그가 갖고 있는 소명의식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⑦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씨
21세기 대한민국 독서가들이 책으로 만나게 되는 ‘허균’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누구나 아는 그 허균, 바로 <홍길동전>을 쓴 조선시대 허균이다. 또 한 명의 허균을 이미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전통문화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59·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씨가 두번째 허균이다.
전통미술 저술가 허균이란 이름은 아직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민화나 고궁, 우리 옛그림, 다양한 전통문화의 상징 등 다양한 우리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책을 읽어보려 한다면 허씨의 책을 피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 출판계에서 대중들을 위한 알기 쉬운 전통미술책을 쓰는 가장 대표적인 저술가가 바로 허씨다. 서양미술에 대한 책을 쓰는 국내 저술가는 여럿이어도 우리 전통미술 책을 쓰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 오주석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 현재 전통미술 분야쪽에서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는 전문가는 허씨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의 책들은 전통미술이란 주제의 성격상 판매부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허씨의 책들은 나온지 몇년 이상 지난 것들도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며 고르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통미술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며, 또한 우리 것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주는 동시에 한단계 더 나아가 “옛 사람들의 마음을 읽게 해준다”는 것이 독자들이 꼽는 허씨 책의 매력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씨 자신은 자신이 ‘저술가’로서 ‘책’이란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아니란 점이다. 책이란 것은 그가 고른 수단으로 책 자체가 목적은 아니란 설명이다. “책 쓰는 것은 내 생각, 그리고 일반인들이 알아야할 것들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지 책 자체를 저술하는게 목적은 아니”라고 허씨는 말한다. ‘하다 보니’ 책을 쓰게 된 것이며, 수입 측면에서도 “책으로는 별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한다. “8, 9쇄를 찍고 1만권이 넘어가는 책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수입이 있는지 모를 정도에요.”
허씨가 책을 쓰는 것은 대중들에게 전문가들만 알고 넘어가기 쉬운 전통미술 분야의 재미와 진면목을 알려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인문교양서 분야에서는 책이 1만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불리지만 정작 1만원짜리 책이 1만부 팔렸을 때 지은이가 받은 인세는 1000만원에 불과하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고 이 분야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다.
비록 실정은 이렇다해도, 저술가로서 허씨는 분명 ‘프로 저술가’라는 평을 듣는다. 허씨의 책들은 허씨 자신이 기획한 <한국의 정원…> 등도 있지만 출판사쪽의 요청을 받아들여 쓴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출판사의 처지에서는 출판사의 품위와 이미지를 세우는데 전통미술 책만한 것이 없고, 이 분야 필자를 섭외한다면 당연 허씨가 최우선 섭외 대상이다. 전통미술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허씨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출판사쪽 필자 섭외 0순위
허씨가 책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지만 진정 홀로 글쟁이로 살기 시작한 것은 꼭 20년 동안 몸담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을 나온 2002년부터다. 허씨가 저술가가 된 모든 철학과 밑천이 평생 직장이었던 정문연 생활 20년, 그리고 그 세월을 쏟아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작업에서 나온다. 잠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학교생활이 싫어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뒤 허씨는 정문연에 들어갔고, 그 뒤 정문연 최대의 사업이었던 이 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책임편수연구원으로 참여해 청춘을 바쳤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전통미술이란 한국인들에게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전문가로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주고받았다. ‘전문가의 편협함’ 또는 ‘전문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도 평생의 고민거리였다.
“전공에만 너무 천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걸 실감했어요. 백과사전에 들어갈 항목을 전문가들로부터 글을 받으면 자기 분야의 관점과 관심사로만 써오는 거에요. 미술사쪽은 특히 더 그래서 너무 양식사에만 치중하고, 바로 인근 분야조차도 아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화현상이란 것은 성립요소가 굉장히 다양한데, 주변 문화요소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거죠. 백과사전 작업을 하면서 사물을 여러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어요.”
최대한 다각적으로 문화현상을 바라보려는 자세는 이후 그대로 그의 저술 원칙이 된다. 2002년 정문연을 떠난 뒤 허씨는 이 때 느꼈던 문제의식을 저술작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전공은 회회사였지만 점점 관심범위를 넓혀갔고, 이후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우리 전통미술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대표작인 <한국의 정원…>은 이같은 허씨의 강점과 차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허씨가 이 책을 낸 뒤 전국 여러대학 조경학과에서 잇따라 특강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우리 전통 정원에 담긴 철학과 미의식을 정리한 책을 쓴 이가 조경학계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만 빠지는 함정을 벗어나 대중들의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접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것도 허씨가 이뤄낸 성과라고 평할만하다. 특히 우리 전통미술을 주요 ‘상징’의 코드로 들려준 것은 그가 처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접근방식일 수 있지만 이를 독자에 맞춰 책으로 처음 써낸 것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작업이었다. 1999년 펴낸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이 전통문화의 다양한 상징과 그 의미에 대한 필독서가 되고, 이후 대중서임에도 이분야 참고문헌으로 자주 인용되는 점은 그의 저널리즘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전통 이해의 단초 ‘문양’ 쓸 예정
앞으로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문양’이다. 우선 우리 문양부터 시작해 외국의 문양까지 아울러 포괄적으로 들여다볼 작정이다. “전 문양이란 게 꼭 난자 같아요. 그 단세포가 분할해 사람을 만들잖아요. 문양이란게 꼭 그래요. 전통을 이해하는데에는 외형보다 그 배후와 의미가 더 중요한데, 문화현상을 다방면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문양입니다.” 문양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활속에서 흔히 보고 접하면서도 그 진면목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령 태극문양 같은 거에요. 너무나 친숙한데도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문득 허를 찔른 듯했다. 앞으로 나올 허씨의 책이 그런 무지를 어느 정도 메워 줄 것 같다.
------------------------------------------------------------------------------------
한국의 글쟁이들/⑧ 민족문화 저술가 주강현씨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⑨ 동양철학 저술가 도올 김용옥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아노였다. 도올의 집필공간인 통나무 출판사 1층 마루에는 피아노가 주인공처럼 정면에 놓여 있었다. “손을 자꾸 움직여야 노화를 막는다고 해서 취미로 배우는 거지 뭐.” 도올은 다소 쑥스러운듯 웃어넘겼다. 그러나 계속 묻자 관심사가 드러났다. “재즈를 공부하고 있거든. 방송 강의가 아니라 이젠 음악으로 강의를 하겠다는 거야. 가령 ‘도올 재즈콘서트’를 하면서 동학 같은 것을 강의하면 젊은 애들이 더 쉽게 들을 수 있지 않겠어?”
설명을 듣자 오히려 더욱 궁금해졌다. 학자가, 그것도 도올 김용옥이 재즈에 빠진 데에는 취미 이상의 학문적 관심이 있을 듯했다. 재즈에 심취했던 역사학자 홉스봄이 떠오른다고 운을 떼니 드디어 도올의 재즈론이 나온다. “나는 재즈의 역사가 20세기 미국사에서 가장 진실된 측면이라고 봐요. 그런데 흑인들이 인간의 존엄을 찾는 독립의 역사인 재즈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20세기 역사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거지. 요즘 한류를 다시 점검해보려 하는데 한류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재즈가 굉장한 가교가 되요.”
그러면 마당에 있는 평행봉은 또 뭘까? ‘건강관리’, 궁극적으로는 ‘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이야말로 프로 저술가의 기본이라고 도올은 설명했다. 쉰여덟 나이에도 그는 평행봉에 올라가 거꾸로 서더니 부담없이 여러차례 스윙을 해보였다.
피아노와 평행봉은 ‘저술가 김용옥’을 보여주는 두가지 상징과도 같다. 평행봉은 프로저술가로서 항상 몸을 단련하는 도올의 직업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피아노는 항상 새로운 것을 향하는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도올은 분명 학자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확실한 ‘저술가’다. 1986년 고려대를 그만두면서 아마도 교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지적인 행위로 먹고사는 ‘프로 지식인’이 된 뒤 올해로 꼭 20년째 프로 글쟁이로 확실한 위치를 지켜왔다.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저술가들과 가장 구별되는 것은 자기만의 ‘저술 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이다. 연구를 하고, 그 성과를 책으로 쓰고, 통나무란 전속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방송에서 강의한다. 특히 독특한 점이 전속 출판사인 통나무의 존재다. “세미나도 하고 공부를 하려면 지속적인 자금이 필요하더라고. 그래서 당대의 출판사들을 찾아가서 당시 돈으로 50만원을 달라, 앞으로 내 책이 많이 팔릴텐데 전속으로 책을 내겠다, 그렇게 제안을 했어. 그런데 아무도 그 구라를 안믿는거야(웃음). 모두 거절했어요. 그런 제안하는 이도 없었을테고 그런 발상도 생소했겠지.”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차린 출판사가 통나무다. 이후 그는 모든 책을 통나무에서 내고 있다.
인문학책 41종 내 250만부 넘겨
저술가로서 도올이 거둔 대중적 성과는 일반인들의 예상 이상이다. 지금까지 모두 41종 52권을 펴냈고, 총 판매부수는 250만부를 넘겼다. 80년대 그의 이름을 알린 <여자란 무엇인가>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각각 40만부와 20만부, 방송강의로 화제가 된 <노자와 21세기>(전 3권)가 50만부 넘게 팔렸다. 이 밖에도 10만부를 넘긴 책이 여럿이다. 인문학자의 인문학책으로는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저술가로서 그가 대단한 점은 판매부수보다도 20년 동안 활동을 계속해 온 생명력, 그리고 꾸준히 변화해온 데에 있다. <여자란…> <동양학…> 등 도올의 초기 책들은 인기는 높았지만 일반 교양서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도올의 책은 점점 그만의 사유를 담으며 일관성을 갖고 진화해갔다. 그의 관심은 동양철학에서 시작해 조선사상사를 훑은 뒤 동학과 개화기 독립운동사를 거쳐 최근에는 현대사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민족주의를 매개로 한반도와 민족문제를 다루며 고유의 목소리로 비전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강점으로는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는 ‘강력한 문체’가 꼽힌다. 단번에 써내려가는 집필 스타일이 더해져 흡인력이 더욱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도올의 글쓰기 스타일은 전형적인 ‘몰아쓰기’에 ‘일필휘지’형. 스스로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진다”며 “문장을 시작하면 글로 써달라고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쳐서 귀찮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져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체상의 강점은 바로 대중성이다. 도올의 글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만 소화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이처럼 자기 사유를 알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로 펼쳐보이는 학자는 무척 드물다. “저술의 기본 대상을 항상 25~35살로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에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끈을 놓치지 않느냐는 것이 내 삶에서 끊임없이 벌여야만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지요.”
저술가로서 도올의 최대 승부처는 바로 ‘시간과의 싸움’. 자신이 정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자리가 아니면 참석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저술세계가 신이 되는 것, 원고를 쓰는 게 신에 대한 경배가 되는 것이 중요해요. 권력이나 명예도 저술을 위해서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프라이드가 없으면 저술가가 못되.” 이는 동시에 학자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학자는 곧 저술가에요. 궁극적으로 학자의 사명은 책을 쓰는 데 있지 강의하는 게 아니야. 그 시대에 결국 남는 것은 강의가 아니라 책이에요. 강의는 사람의 마음속에 남겠지만, 그건 듣는 이들이에게 밑거름을 주는 것이지 내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올은 그러나 “프로 지식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해본 사람은 상상 못한다”고 강조한다. 요즘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겹쳐 더욱 상황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립대 교수 연봉이 한 7000만원쯤 될거에요. 내가 그 정도 벌려면 1만원짜리 책을 7만권을 팔아야 해요. 요새는 책이 안나가서 일반 교수들 정도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뭔가 끊임없이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인거지. 그나마 나는 방송하고 연계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척해왔는데도 요즘에는 불가항력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저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방송은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토록 ‘튀던’ 그도 이제 환갑을 앞두면서 바뀌는 듯하다. 요즘에는 특유의 ‘잘난척’과 ‘오버’, 그리고 ‘공격성’이 많이 덜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가 지금 내 책을 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수용해준 사회에 감사해요. 사실 내가 그렇게 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까대고 뭉개려는 인간들에 대해 ‘너희들이 그래도 도올은 사라질 수 없다’는 생명력을 보여주려는 과시이자 생명력의 표출이었어요. 이젠 정갈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올 생명력 보여주려 ‘오버’했지
앞으로 그가 진화할 방향은 어느쪽일까? 분야로는 ‘현대사’, 구체적 주제로는 ‘재즈’와 ‘동학’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요즘 현대사를 다루는 것은 현대사에서 모든 학문이 출발해야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고 이념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관찰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동학이란 주제도 급해요. 동학의 마지막 세대들과의 작업이 필요한데 이젠 워낙 나이 드신 분들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요.”
------------------------------------------------------------------------------------
한국의 글쟁이들/⑩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씨
1998년, 지은이 이름은 생소하지만 눈을 확 잡아끄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지은이는 한국IBM의 경영혁신팀장인 회사원 구본형씨. 40대에 접어들면서 문득 자신은 누구인지, 지금까지 무엇을 해놓았는지 고민에 빠져 구씨 스스로 답을 찾고 삶을 바꿔보기로 결심해 쓴 책이었다. 일상 속에서 변화할 것을 역설한 이 책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이후 20만부 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00년, 구본형씨는 20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난다. 당시 나이 마흔여섯. 직장인 생활을 마치면서 구씨는 자기 자신과 세가지를 약속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기로,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의 양의 늘리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을 통해 누군가를 돕기로. 이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고른 새 직업은 바로 ‘변화경영전문가’인 전업 저술가였다. 경영과 자기계발 두 분야를 대표하는 저술가 구본형(52)씨는 그렇게 등장했다.
2000년대 이후 출판 각 분야에 저술가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경영과 자기계발 분야에는 그 수가 매우 드물다. 구씨와 공병호(46·공병호경영연구소장)씨 정도만이 손꼽힌다. 대신 이 두 사람의 지위는 확고하다. 인터넷 서점들이 저술가 개인의 이름을 내걸어 따로 코너를 마련하는 필자는 구씨와 공씨뿐이다. 변화의 전도사로서 구씨 스스로 변화를 시도해 도전한 대가로 거둔 성과다. 전업 저술가가 된 지 올해로 만 6년. 예상보다 짧은 기간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구씨가 이미 첫 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3년 뒤에 비로소 저술가로 나섰음을 알 수 있다. 10만부 넘게 팔린 두번째 책 <낯선 곳에서의 아침>과 세 번째 책 <월드클래스를 향하여>를 쓴 다음에야 사표를 내고 독립한 것이다. “과연 내가 책을 써서 살 수 있는가, 1년에 책 1권씩을 쓸 수 있는가를 시험한 거죠. 아내를 설득하는 기간이기도 했구요. 실제 1년에 1권씩 3년을 쓴 다음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경영컨설턴트는 많지만 ‘변화경영’ 전문은 적다는 점, 그리고 이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더 적다는 점, 자신이 이미 14년 동안 변화경영을 담당한 전문성이 있다는 점, 이런 점들 때문에 후발 경쟁자들의 진입이 어려울 것으로 먼저 판단한 것은 물론이다.
저술가가 된 뒤 구씨는 정확히 2년에 3권꼴로 책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펴낸 책은 모두 12권.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와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 등 개인들의 삶속에서의 변화를 다루는 책들이 주를 이루는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변화를 다루는 <공익을 경영하라> <코리아니티 경영> 등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경영·자기계발서 시장에서 공병호씨가 세상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해 구체적 방법론을 내세워 보다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면서 노골적일 정도로 실용성을 추구하는 트렌드를 대표한다면, 구씨는 보다 본질적인 분야를 다루면서 현실생활도 잘하면서 삶도 충만하고자 하는 성향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책 내는 스타일도 공씨가 일년에도 책을 몇 권씩 몰아서 내기도 하는 다작형인 반면 구씨는 규칙적이고 주기적으로 생산하는 형이다. 여기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아침형 인간>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부자 열풍과 기능위주의 자기계발 일색의 흐름을 비판하는 등 자기 색깔과 지향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1년 한권씩 스스로 ‘저술가 테스트’
출판계에서 꼽는 구씨는 능력은 ‘새로운 주제를 끌어가는 힘’이다. 동시에 똑떨어지는 카피와 제목을 뽑아내는 감각까지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휴머니스트 한필훈 편집장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익히 잘 알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엄청난 독서로 얻어낸 근거로 정리하기 때문에 내용이 상투적이거나 뻔하지 않으면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고 분석했다.
독자들은 구씨의 책에서 확실한 자극을 얻을 수 있다고 평한다. 이는 구씨가 설득하는 방법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구씨는 “내게 책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과도 같다”고 말한다. “남을 설득하려면 가장 간단한 질문부터 일단 자기가 증명해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제 케이스로 설득하는게 제 스타일이죠. 처음 저술가로 나설 때에는 제가 박사도 아니고, 대단한 경력도 없고 그저 20년 직장인일뿐이란 사실이 핸디캡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이, 제 경력이 곧 독자란 것을 깨달았어요. 직장인들이 왜 좌절하고 왜 힘들어하며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희망을 갖는지 잘 알 수 있는 훌륭한 배경이더란 거에요.”
구씨는 저술가로서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다. 관련 분야가 아니면 글을 쓰지 않으며, 책을 낼 때도 지나치게 실용서 위주로 내는 출판사를 가리는 등 자기 브랜드를 훼손시키지 않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 원고도 매일 일정양을 규칙적으로 쓰고, 거의 완성이 된 다음에야 출판사를 정한다.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약속을 최소화하고, 강연 요청도 월 10회 정도로 제한한다. 주 7일 가운데 3일만 이런 ‘비즈니스’에 배분하며 남은 4일 중 2일은 완전히 자유롭게 활용하고, 또 다른 2일은 가족과 보낸다는 것이 생활의 원칙이다.
구씨는 “내 관련 영역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작가라는 위상을 갖춰 변화경영이란 분야에서 적절한 조언이 가능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업성으로 보면 당장 책이 많이 팔릴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변화 추이에 따라 그에 걸맞는 전문적 조언이 필요한 분야를 골라 책을 쓰는 작업을 병행한다. 공익부문의 변화경영 필요성을 다룬 <공익경영>이 대표적이다.
시류 편승하지 않는 한국형 계발서
최근들어 구씨의 책 판매량은 초기보다는 다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시장을 따르기보다는 시장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고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구씨 책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그래서 극복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시장 반응이 미지근하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제 이런 것에 관심 없나하는 고민도 들지요. 그래서 콘텐츠를 어떻게 재조합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구체적인 것에 목말라 있으니 직장인들이 직장안에서 생계형 월급쟁이로 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직업인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시장 흐름에 편승하지는 않되 실용적이면서 한국적 현실에 맞는, 그래서 번역서들이 가지지 못한 우리 문화적 요소를 고려한 책을 쓰는 것. 그가 요즘 세운 목표이자 차별화 방안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⑪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씨
이 시대 자기계발 및 경영 전문 저술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글쟁이가 ‘공병호’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실용서 시장에서 공병호(46·공병호경영연구소장)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다. 대표적인 보수 자유주의자, 그리고 시장주의자로 등장했던 공씨는 이제 ‘성공학의 전도사’가 됐다. 그리고 성공을 권하는 책으로 그 역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믿을 것은 자기자신뿐’인 시대가 낳은 스타가 바로 공씨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공씨가 저술가로 변신한 것은 불과 5년여 밖에 안된다. 자기 이름을 딴 개인연구소를 열고 곧이어 책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를 펴냈던 것이 2001년, 이후 공씨는 해마다 거의 여남은 종의 책을 쓰거나 번역해 선보이면서 순식간에 자신을 브랜드로 굳혔다. 책의 소재 역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 넓어졌다. 아들을 조기유학 보낸 경험을 살려 책을 펴내기도 했고, 스케줄과 목표를 관리하는 <자기경영 다이어리>도 펴냈다. 프리랜서 선언 이후 지금까지 번역하거나 쓴 책은 모두 60여종. 5년만에!
공씨의 이런 다산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비결은 바로 다른 저술가들과 공씨의 차이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공씨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 저술인 것은 분명해도 자신을 전업 저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규정짓는 자기 정체성은 ‘고객 성공을 위한 가치창조자’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그가 추구하는 원칙은 ‘효율성’이다. ‘효율성’과 ‘고객’은 그를 지배하는 두가지 화두다.
효율성은 공씨가 자기를 둘러썬 환경과 작업과정을 구성하는 원칙이다. 거의 도서관 수준인 그의 연구실 겸 자택인 서울 가양동의 넓은 아파트는 모든 것을 공씨의 콘텐츠 생산에 맞춰 꾸몄다. 집안은 침실을 뺀 거실이며 모든 방을 책장으로 채웠고, 책은 ‘공병호식 분류법’에 따라 ‘자서전’ ‘자기계발’ ‘경영학’ 등으로 나눠 놓았다. 집필공간은 안방에 딸린 내실이다. 마치 고치속처럼 아늑한 골방풍인데, 넓은 집 넓은 방을 놔두고 가장 작은 방에서 글을 쓴다는 점이 독특하다.
집필도 효율성으로 극대화한다. 가장 생산성이 좋은 새벽 시간은 가장 중요한 활동인 책 쓰기에 배정한다. 이후 집중도가 떨어지는 곡선에 따라 하는 일의 중요도도 맞춰 낮춘다. 새벽 3시부터 8시까지 책을 쓰고, 낮에는 강연을 하거나 잡문을 쓰다가 피곤해지면 정신적 수동 모드로 가능한 작업인 독서를 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후 9시께. 좋아하는 간식은 이른 아침 뇌에 포도당을 빨리 제공해줘 머리가 돌아가게 도와주는 초콜릿이다.
글쓰기, 골프와 비슷…욕심은 금물
공씨는 글쓰기 자체에는 지나치게 높은 목표수준을 내걸지 않는다. 그래서 완성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비난도 듣는다. “글쓰기는 골프와 비슷해요. 너무 잘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땅을 때리기 쉽습니다. 제 글쓰기 원칙이 있다면 대화하듯 편안하게 풀자는 거에요. 책이 무게가 떨어진다고 비난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비난을 두려워하는 순간 책은 나올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완성한 원고는 미련을 두지 않고 편집자의 재량에 맡겨버린다. 이 역시 다른 저술가들에게선 좀처럼 찾기 힘든 태도다. 최대한 빨리 원고를 써서 넘겨 편집자들이 매만지게 하고 그 사이 바로 다른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기회비용의 원칙과 전문성에 비춰볼 때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효율성으로 짜낸 모든 것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고객’이다. 공씨는 독자를 철두철미하게 ‘고객’으로 본다. “고객들이 책을 선택했을 때 반드시 지불하는 가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 곧 값어치를 해주자는 것”이 저술 철학이다. “고객에게 확실히 가치를 제공하는 주제라면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쓸겁니다. 다음달에는 부모를 위한 영어에 대한 책이 나옵니다.” 자기 아이디어가 아닌 편집자들의 기획 제안에도 흔쾌히 응한다. 시장이 원하고 자신이 쓰고 싶다면 어떤 주제든 달려든다. “외연을 넓히는 게 좋아요. 제 아이덴티티를 확정하지 않고 만들고 허물고, 또 만들고 없애고… 평생 그럴것 같아요.”
이런 태도와 철학은 실은 일찌감치 그가 마련해놓고 오랫동안 가다듬은 것이었다. 90년대 초 연구소에 다니던 30대 초반에 공씨는 “박사학위가 끝이 아니고 시작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는 곧 “지속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시장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이란 깨달음이었다. “그 때는 너무나 절박했어요. 그래서 평생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남들과 뭔가 달라져야겠어서 향후 좌표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중간’을 골랐어요. 학자가 할 수 없고 기자가 할 수 없는 것, 그걸 하려고 한 거죠.” 이후 공씨는 주말에도 출근하면서 독서하고 글을 쓰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언론에 기고하며 이름 알리기에 나섰다. 투고 기회는 자신이 언론들에 먼저 제안해서 따냈다. “주말마다 글을 썼는데 남들은 비웃었죠. 그거 돈 몇푼 하냐고.”
그런 과정으로 공씨는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갔다. “개인브랜드는 알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제 능력과 이름을 적극적으로 세일즈하는 건데, 지식인 풍토에선 그런 사람이 드물었죠. 본래 성향이 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을 좋아해요.” 2001년 전까지 그기 지금의 공병호란 브랜드를 위해 준비한 과정은 그렇게 예상 이상으로 길었고, 덕분에 독립하자마자 왕성하게 콘텐츠 생산에 나설 수 있었다고 공씨는 설명한다.
최근들어 공씨의 생산속도는 더 빨라졌고 시장에서 브랜드의 힘은 더 커졌다. 초기 ‘2만부 사이즈 작가’였던 공씨는 2004년 낸 <10년후 한국>이 40만부 넘게 팔리면서 ‘10만부 사이즈 작가’로 한단계 뛰어올랐다. 이런 상승세는 연간 300회 가까이 펼치는 강연에서 얻는 아이디어의 덕분이다. 강연에서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얻고 이를 다시 강연 아이템으로 바꿔 가다듬어 책으로 낸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 예측력을이 강해지고 다시 책이 인기를 얻어 강연요청도 늘어나면서 공씨의 수입도 초기보다 몇배나 늘어났다.
동시에 다른 저술가들에는 많지 않은 ‘안티’들도 많아졌다. 이 역시 그가 다른 저술가들과는 다른 점이다. 지나치게 경제적 성공만을 부르짖는 차가운 성공지상주의자라는 비난이 그를 따라다닌다. “모든 성공의 요인을 개인의 노력 여부로 돌리고, 약자에 대한 사회적 맥락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공씨는 이에 대해 조금 달리 생각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도 삶의 진실에 대해서는 교과서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걸 강자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고 자기들끼리 이어갑니다. 저는 그걸 <부자의 생각 빈자의 생각> 같은 책으로 알려준는 것이고, 그게 애정일 수 있어요. 섭섭하게 보이겠지만 당신들 이거 알아야한다, 알아야 안당한다고 말하는거죠. 그게 제가 사회적으로 배려하는 방법으로 이해해주세요.”
------------------------------------------------------------------------------------
한국의 글쟁이들/⑫ 우리고전 저술가 정민 교수
인문학은 정말 위기일까? 아니면 인문학 바깥에서 비꼬듯 ‘인문학자들의 위기’인 것일까? 적어도 출판 저술의 측면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 증거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콘텐츠 시대를 맞아 인문학적 콘텐츠의 쓰임새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고, 인문학 콘텐츠에 대한 사회경제적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정반대로 최고의 기회를 맞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정민 교수는 이처럼 인문학이 호기를 맞고 있음을 책으로 입증해내는 저술가다.
정 교수가 처음으로 독서대중들과 만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이었다. 한시와 미학이라는 요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법한 두 가지를, 그것도 500쪽에 그림 하나 없는 책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는 보여줬다. 곧 고전이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도전해보고자하는 분야이므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면 고전이 얼마든지 읽히는 장르로 부활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당시 나이 불과 서른 여섯. 이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껏 이 책은 한시 입문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정 교수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책을 쏟아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 같은 잠언 소품집부터 <비슷한 것은 가짜다>같은 묵직한 에세이, 교과서속 암기대상이었던 위인들이 생생한 우리 이웃처럼 살아서 등장하는 <미쳐야 미친다>, 고전 속 문장을 곱씹어 들려주는 <죽비소리> 등 내는 책마다 한결같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고전길잡이책도 썼다. 이처럼 모든 연령대를 위한 책, 다양한 버전의 책을 펼쳐보이는 저술가는 실로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한자와 한문과 멀어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정민 교수를 통해 고전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다는 점이다.
정 교수가 사람을 놀래키는 점은 저술 작업량도 많지만 항상 책의 수준을 유지하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가 다루는 주제의 폭이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장 고리타분할 것 같은 전공을 가진 고전학자가 가장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인문학자들과 달리 정 교수가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아니 그 이전에 그는 왜 이렇게 저술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정 교수에게 묻자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거보다 더 즐거운 게 없으니까.”
정 교수는 지금껏 골프를 쳐본 적도, 스키를 타본 적도 없다. 지식을 탐구하고 글쓰는게 재미있어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한 창조의 욕구는 묘한 쾌감을 동반해요.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있는 대목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럴 때는 소름이 쫙 끼쳐요.”
의료차트에 자료 빼곡 ‘씨앗창고로’
정 교수는 궁금한 것, 재미난 것이 생기면 거의 자동적으로 뇌가 작동을 시작한다. 요즘 구상중인 ‘조선의 여행문화’란 주제도 그렇다. 어느날 우연히 근대 일본의 여행문화를 다룬 <에도의 여행자들>이란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우리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그러면 곧바로 메모가 시작된다. 제목을 정하고, 논문이되건 책이되건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야 할 지 목록을 짠다. 여행의 준비물은? 경비와 규모는? 놀러갔을 때 놀이의 규칙은?…. 다시 며칠 뒤 2차 메모에 들어가 전체 목차의 얼개를 마련한다. 관련된 스크랩이나 복사물도 덧끼운다. 이렇게 매일매일 정리한 파일을 연구실 곳곳에 비치한다.
정 교수의 한양대 연구실은 한마디로 거대한 파일의 성채다. 이 곳에는 다른 교수 연구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수백개의 의료차트를 둥그렇게 꽂아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만든 차트 보관대다. 자료 정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우연히 보고는 ‘저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그자리에서 산 것으로, 정교수 일생에서 가장 성공한 쇼핑이 됐다. ‘조선의 여행문화’처럼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정 교수는 이 물건을 ‘씨앗창고’라고 부르는데,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차서 더이상 끼울 칸이 없는 상태다.
정교수가 이렇게 뽑아낸 아이디어를 글로 쓰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소통’이다. “<한시미학산책>을 펴낸 다음에 시인들이 잘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왔는데 예상 이상이어서 놀랐어요. 그 다음부터 ‘소통을 염두에 둔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논문을 쓰면 우리 분야 여남은명 정도가 읽어보는데,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쓰면 수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무엇이 더 가치있냐가 아니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정 교수는 내용과 문체에서 모두 ‘전달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대중들은 정교수의 문체가 유려하다고 평하지만, 정작 정교수는 글쓰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접속사를 피해 문장을 나눈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글의 리듬,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다. 아무리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퇴고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도려낸다. 그럴수록 전달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면 3번 소리 내서 읽어요. 제가 읽고 고치고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아내가 읽어가다 멈추는 곳이 있으면 그건 문장이 잘못된 거에요. 그런 곳들을 한번 더 고칩니다.”
연암 다산이 ‘지식 정보화’ 스승
더 큰 차원에서는 문체의 힘이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의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주제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는 곧 문학을 통해 문화를 지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사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런 철학을 심어준 사람은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스승 연암 박지원이다. 정 교수는 “연암을 만나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습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콘텐츠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고 말한다. 연암에 이은 요즘 스승은 다산 정약용. 그가 보기에 다산은 “진정한 지식과 정보의 기획편집자”이며,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새 스승이다. 새 스승에게 배운 바는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 제목은 <다산의 지식경영>. 다산이 어떻게 당대의 지식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기획, 편집했는지 살펴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작업’의 고갱이를 탐구하는 책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⑬‘먼나라 이웃나라’ 만화가 이원복 교수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만화가 이원복(60·덕성여대 예술학부) 교수의 서울 테헤란로 작업실은 벽 한쪽에 캐비넷이 줄지어 있는 것 말고는 온갖 잡다한 것이 일체 없었다. “사실은 오히려 어지르는 편이에요. 이것 저것 늘어놓으면 찾지를 못해서 꼭 필요한 것만 꺼내놓아 깨끗해 보이는 겁니다. 대신 집은 완전 난장판이에요. 집은 제 놀이공간이거든요.”
이 교수는 뜻밖에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놀기’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 교수의 1년 작업량은 책 2권 정도. 쪽수로는 500쪽 안팎이므로 하루 작업량은 대략 2쪽 분량이니 실제 작업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인맥이니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해서 사교 모임에 나가지도 않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널널’합니다. 실컷 놀고 남는 시간에 즐겁게 일하면 되요. 창조적 휴식을 갖는 거죠. 그게 확대재생산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노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으랴. 놀려면 돈·시간·건강이 필요한데, 대부분 사람들에겐 늘 이 셋 중 한두가지가 없기 마련이다. 이 교수는 그런 점에서 선택받은 사람이다. 저술가로 거둔 성공, 그리고 교수란 직업이 그에게 경제적 여유와 시간을 확보해준다. 휴식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여행을 떠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9년 동안 유학했던 독일. 해마다 두 세번씩 간다. “행복해요. 만화 그리면서 대접 받고, 내 시간 즐길 수 있고, 남는 시간에 일할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남들 염장 지르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니까…. 제 보기에 돈은 생존 개념만 넘어가면 자유의 의미에요. 여행 떠나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 그게 돈이고 자유죠.”
분명 이 교수의 말이 듣는 사람을 배아프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가 44년 동안 만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이다. 올해 환갑인 이 교수의 일정은 언제나 집-학교-작업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교양 만화’라는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44년 개척한 ‘블루오션’ 교양만화
이 교수가 만화를 그린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1962년 우연히 후배 아버지가 다니는 소년신문에 놀러갔다가 후배 아버지가 그가 만화를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고는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라”고 권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필명을 쓰면서 미국 만화를 트레이싱지로 베껴가며 만화를 그렸다. 일찍 부모가 돌아가셨고, 7남매 중 막내여서 별다는 간섭을 받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했다. 대학에 들어간 197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풍은 일본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최대 전환점이 왔다. 바로 독일 유학이었다.
유학을 결심한 것은 만화를 제대로 배우고 싶고, 또한 그림체도 바꾸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유럽에도 만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어서 가장 비슷한 일러스트레이션을 골랐다. 유학 생활 6년에 접어들 즈음 그동안 유럽 생활속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유럽만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스테릭스>에서 영향 받은 새 그림체와 구성방식으로 시작한 만화가 <먼나라 이웃나라>다. 유럽 문명에 대해 알아야 할 각종 교양 상식을 알기쉽게 들려주는 새로운 방식의 만화였다. “만화에도 전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우영, 허영만씨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는 없겠고…, 그래서 제게 맞을 것 같은 저만의 장르로 찾은 게 ‘교양’이었어요.”
<먼나라 이웃나라>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미국편으로 끝나기까지 20년 넘게 이어온 이 만화는 지금까지 100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여전히 이 교수의 만화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다. 또한 이 만화는 ‘이원복 만화’의 틀을 완성했다. 이후 이 교수의 만화는 이 만화에서 세운 틀을 벗어나지 앟는다. 어려워보이는 지식을 이 교수식으로 객관화, 일반화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 교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주제 선정이다. “세상을 싸돌아 다니다 보면 뭔가 보이는 게 있어요. 우리 사회에 지금 이게 빠져있구나, 이게 부족하구나 느껴지는 것들이 주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자료 차례. 외국 이야기면 현지에 가서 실제 ‘분위기’를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본다. 나머지 자료는 물론 책과 인터넷으로 구한다. “인터넷은 신이 내린 선물이에요. 예전에는 외국 신문·잡지 구독료로 월 100만원씩 썼는데, 요즘에는 실시간으로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나라에선 인터넷 신문이 왜 공짜냐는 거에요. 외국은 다 유료인데 말이죠.”
이렇게 모은 지식은 백과사전을 기본으로 해서 가공한다. 정확성과 중립성을 위해서다. 그 다음 콘티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연필 밑그림까지는 그가 그리고, 펜 작업은 제자들에게 맡긴다.
세상 모든 것엔 ‘키워드’가 존재
이 교수는 자신을 콘텐츠 생산자라기 보다는 콘텐츠 전달자라고 본다. 교양만화는 ‘콘텐츠 70, 그림 30’이며 당연히 그 핵심은 콘텐츠 전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가 하는 작업을 오만하게 이야기하면 문화 통역인 것 같아요. 문화라는 것을 만화라는 언어로 통역하는 겁니다.”
이 콘텐츠란 것의 기본 원리는 ‘단순명료’란 네 글자다. 지식이나 정보 자체는 단순·명료한 것인데 이걸 어렵게 해석해서 그 위에 덧씌웠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므로, 다시 이런 해석을 벗겨내 단순명료한 본래 알맹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해보이는 여러가지를 묶어 명쾌하게 일반화하는 것인데, 말은 쉬워도 상당한 지적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에는 키워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이교수는 말한다.
난 만화가…교수는 직업일뿐
이런 일반화 능력에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아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를 모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독일에 자주 찾아가는 것도 유럽식 사고를 수시로 접하기 위해섭니다.”
실제 이 교수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합리성이다. “만화는 과학이에요. 결정적인 순간에 웃기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을 통한 결정적 반전이 필요해요. 그걸 짜내는 데에는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합리적 사고를 깰 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니까 합리적 사고를 알아야 역발상이 나오는 거죠. 그 역발상이 과학입니다.”
한국 만화사에서 이 교수는 자신이 의도한 이상의 의미와 위상을 지닌다. 만화가 저질문화로 취급받던 시절 그처럼 학벌좋은 교수가 만화를 그린다는 점 자체가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 그가 처음 한 인터뷰의 주제는 어떻게 교수가 만화를 그렸냐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저를 뽑았던 대학 재단 이사장께서 몇년 뒤 웃으면서 ‘당신 본질이 만화가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교수로 안뽑았을 것’이라고 하신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이 교수는 요즘 덕성여대 학교 모델이다.
세상이 바뀌고 만화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이 교수의 대답이다. “제 정체성이요? 당연히 만화가죠. 교수는 제 직업일뿐입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⑭‘국가대표 만화작가’ 김세영
“만화작가는 만화에서 어디까지 합니까?”
지난 여름,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 <타짜>를 제작하기로 한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는 원작 만화의 작가 김세영(53)씨를 만난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김씨가 “콘티까지 짜서 넘긴다”고 말하자 차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한마디로 감독이네요? 만화가가 배우인 것이고.”
관객 670여만명을 동원하면서 올 하반기 최고 흥행작이 된 영화 <타짜>는 만화가 왜 ‘원 소스 멀티 유즈’ 시대의 총아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리고 모든 문화상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란 것도 입증했다. 그러나 이처럼 만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작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 <타짜>만해도 원작자를 만화가 허영만씨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원작자는 분명 이야기를 지어낸 만화작가 김세영씨다.
만화작가들이 만화 스토리를 쓰는 방식은 크게 시나리오식과 콘티식 두가지. 김씨는 늘 콘티 형태로 쓴다. 칸을 나누고 말풍선에 대사를 넣고 지문도 넣으며, 개별 장면의 이미지 배치까지 직접 연출한다. 그렇게 원고를 넘기면 만화가가 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만화작가가 작품의 아이디어 등 초기 단계까지만 맡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만화 구성의 상당 부분-김씨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것이다. 차승재 대표의 질문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대신하는 물음이었고, 김씨의 설명을 들은 차씨가 “만화작가란 ‘영화감독’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은 만화작가가 하는 일에 대한 명쾌하고 정확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화작가계에서 김세영씨가 가지는 상징성은 실로 크다. 만화판에서 만화가가 아닌 만화작가가 개인 브랜드를 지닌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김씨는 스무살 만화가 지망생이던 1973년 우연히 만화 스토리를 보고 ‘나도 써볼 수 있겠다’ 싶어 한 번 지어본 습작이 작품으로 채택되면서 만화작가가 됐다. 올해로 33년째, 지금까지 5만~6만쪽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
33년째…5만~6만쪽 이야기 써
김씨가 필명을 얻은 것은 허영만씨와 같이 한 첫 작품인 <카멜레온의 시>(1986)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다. 이 만화에서 인용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복간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후 김씨는 허영만씨와 명콤비를 이뤄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미스터Q>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만화작가계의 간판스타가 된다.
그러나 만화작가의 위상은 항상 열악했다. 출세작 <카멜레온의 시>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오! 한강>이 잡지에 연재될 때 처음 이름이 들어갔지만 단행본에서는 이름이 다시 빠졌다. 만화계의 관행 탓이었다. 허영만씨와 <사랑해> <타짜>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내 건 조건은 “이름 좀 알아볼 수 있게 내달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타짜>에서도 그의 이름은 표지 한 구석에 숨은 그림처럼 작게 들어갔다. 최근 다시 나온 <타짜>에서야 마침내 김씨의 이름 석자가 알아 볼 수 있게 표지에 나왔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딸에게 “이 책이 아빠가 쓴 거야”라고 보여줬는데 “그런데 왜 아빠 이름은 없어?”라고 되물었을 때였다. 오랜 세월 쌓인 이런 상처 때문에 그는 더욱 ‘만화스토리작가’라는 말 대신 ‘만화작가’란 이름을 강조한다. 스토리 작가란 말 자체가 실제 역할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처럼 ‘아무개 지음, 아무개 그림’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만화계에서 김씨는 철저하게 집안에 틀어박혀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여권은 한번도 쓴 적이 없다. 대신 집안은 모두 그가 즐기는 것들로 꾸며놓고 산다. 넓은 마루벽 전체가 영화 디브이디이고, 음악시디와 책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정작 만화는 잘 보지 않아 거의 없다. 20대에는 소설에, 30대에는 시에 빠져 살았는데 지금은 ‘잡독형’ 독서를 한다. “그냥 좋아서 영화보고 책봐요. 목적을 갖고 보면 재미가 없잖아요. 작품 쓸 때도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이고. 모르면 못쓰니까.”
김씨의 서재에는 항상 한 가운데에 요가 깔려 있다. 그 위에 엎드려 누워 구상도 하고 손으로 원고를 쓴다. “수평 자세일 때 가장 창조성이 샘솟는 듯하다”고 웃는다. “콘티는 칸 변화가 많고 말풍선이 다양해 컴퓨터보다는 수작업이 편해요. 의성어 넣거나 하기에도 효과적이구요.”
작업 특성상 만화 스토리를 쓰는 것은 이야기와 영상을 동시에 생각하며 화연 연출까지 구상 해야 한다. 치밀한 구상이 필요할 듯한데 정작 김씨는 “그때 그때 생각 나는대로 쓴다”고 답했다. 심지어 작품 전체 구성도 미리 짜지 않는다고 한다. 치밀한 전개와 반전이 돋보이는 <타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작품이 구상하지 않고 시작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취재? “<타짜>를 준비할 때 전문도박사를 이틀 동안 만난 것이 일생 동안 처음 해본 취재였어요.”
누운 수평자세일 때 창조성 샘솟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샘물 퍼내듯 써내는 것일까. “그릇에 물이 있다고 쳐요. 물을 쏟아서 흘러가는 것을 저는 쫓아가는 거에요.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 하나를 고르는 거죠. 쏟을 물을 채우는게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거에요.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일 하는지 정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이야기를 푸는 한가지 요령이 더 있다면 “사실은 거짓처럼, 거짓은 사실처럼, 없었던 일은 있었던 것처럼,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만화작가란 직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도 아니다. 만화작가가 된 것도 “쉽게 돈벌 수 있어서, 조금 일하고 계속 놀 수 있어서”였다고 털어놓는다. 허영만 화백이 그에게 가장 불만스러워했던 것도 김씨가 만화를 생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주업은 없고 알바하는 기분으로 일했어요. 물론 할 때는 잘하려고 했지만. 지금도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나올 때는 내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빠져들어 허우적 대지 않는 그런 방식이 그의 성공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화계가 꼽는 김세영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의 완결성을 유지하는 뚝심이다. 용두사미가 일반적인 한국 만화판에서 극히 드문 경우다. 이런 뚝심은 바둑에서 배웠다고 한다. 백수 시절, 김씨는 도피하는 심정으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살았다. 1급이긴 했지만 책보고 배운 김씨의 바둑은 온실속 화초였고, 그래서 모양을 잘 만들어놓고도 급소 한방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악을 쓰고 실전에 매달려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바둑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이야기를 쓸 때는 기승전결에서 ‘전’이 가장 어려워요. 전에서 뚝심을 잃지 않고 밀어붙이는 데 바둑에서 버티는 허리힘을 익힌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해진만큼 경제적으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한 분야를 대표하는 위상에 견줘보면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다. <타짜> 이전에는 이름을 알렸어도 빚쟁이로 살았다. <타짜> 하나로 10억원 넘게 벌면서 비로소 살림에 볕이 들었다고 한다.
만화팬들이 김씨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히트 보증수표인 파트너 허영만 화백과 헤어진 점이다. 김씨는 “서로 나름대로 일해보려고 헤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설명한다. “이번이 세 번째 헤어진 건데요? 영화감독과 배우도 찍고나면 헤어지는 거과 비슷한 거에요.”
이름을 얻고, 허영만 화백과 떨어져 홀로 서기에 나서면서 그의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앞에 세우고 신예작가를 기용해 만화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그의 만화인생에서는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실험적인 만화 해보고 싶어
출판사들이 그에게 신예급을 붙이는 것은 고료는 정해져 있는데 김씨가 유명하니 비용이 싼 만화가로 생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타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재미는 확실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완성도면에서는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공전의 히트작 <타짜>도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매체들과 출판사는 도박만화만을 집요하게 요구해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의 브랜드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걸 잘 알지만 열악한 한국 만화시장 현실속에서 뾰족한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세영의 현실은 곧 한국 만화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국가대표 만화작가’의 행보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만화를 해보고 싶은데, 생업을 떠난 작품은 발표할 지면도 없어요.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
한국의 글쟁이들⑮ /서양사 저술 주경철 교수
이른바 교수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 특히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인문학에 종사하는 지식인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전공에서의 연구성과를 꾸준히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중들과 자기가 연구하는 학문을 이어주는 책을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 두가지에 이어 한가지가 더 있다면 다른 문화권의 중요한 지식을 번역해 소개하는 일이다. 그 시대 자신이 몸담은 분야 전문가로서 지게 되는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이 이 세가지 일에 모두 충실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세가지 사항의 필요성에 모두 동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풍토에서는 학자가 논문을 열심히 써야지 대중들과 호흡하는 책을 펴내는 것은 잡스러운 일이라고 폄하는 교수들이 아직도 훨씬 많다. 그래서 대중들이 읽고 싶어해도 읽을만한 인문학책은 잘 나오지 않고 어린 학생들이 인문학의 참맛을 느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이끌어줄만한 길잡이 책은 드물다. 반면 학자들은 거꾸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짖고 있다.
주경철 교수(46·서울대 서양사학과)는 학자 또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이 세가지 항목에 가장 충실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만한 이다. 곧 이 시대 지식인들 가운데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당연한 책무인 전공 연구에 충실한 동시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을 꾸준히 쓰고 있고, 주요한 외국 서양사책을 꾸준히 번역해오고 있다.
책에서 역사 분야는 누구나 좋아하는 장르처럼 보이지만 실제 역사 관련 글쟁이라고 선뜻 꼽을 수 있는 국내 필자는 오히려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계가 가장 주목할 필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주 교수다. 높은 학문적 배경, 탄탄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체계 등 모든 면에서 출판사들이 탐낼 만한 필자라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4년 걸려 6권 완역
저술가로서 주 교수의 데뷔작은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1999)다. 역사란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부담없으면서도 전문가가 썼다는 신뢰성을 지닌 역사에세이풍의 책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책을 주로 읽는 독서가들에게 주경철이란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책은 이보다 2년 앞서 나온 번역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다. 페르낭 브로델이란 역사가를 국내에 제대로 알린 계기가 된 6권짜리 방대한 이 책을 번역하는데 주 교수는 꼬박 4년을 바쳤다.
그러나 일반 독서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책은 역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2002)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만나게 해주는 교양역사서로 스테디셀러 자리에 오른 이 책은 주 교수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렸다. 이어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처럼 비슷한 구조의 민담이나 설화가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책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 교수의 책 목록을 보면 이런 역사, 문명 교류와 관련한 인문학책들만이 아니라 독특하고 새로운 책들, 그리고 ‘근엄하신’ 인문학자들은 잘 쓰지 않는 책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와 어학능력에 대한 길잡이성 에세이집인 <언어 사중주>을 다른 분야 교수들과 같이 쓰기도 했고, 청소년용 책 <문화로 본 세계사>도 썼다. 네덜란드란 나라에 대한 설명서랄 수 있는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은 우리 출판계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이런 다양한 책들을 통해 주 교수는 왕조 중심의 기존 역사서술방식이 아니라 프랑스 아날학파 등이 내세우는 것처럼 문화와 일상으로 보는 역사도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다. 일단 독자들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린다. 특히 <문화로 본 세계사>는 문화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해주는 점에서 신선하며, 내용면에서도 청소년용이 아니라 성인용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서구중심의 시각으로 유럽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교정시켜주는 점도 주 교수의 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 교수 책의 판매량은 기존 베스트셀러들의 수준에 한참 처져 있는 실정이다. 가장 많이 팔린 책도 2만부에 못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주 교수의 전공인 ‘서양사’란 분야 자체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리 친숙한 분야가 아닌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출판시장에서 역사서는 고대사나 근대사에만 집중된다. 특히 서양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2만부 가까이 팔린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등의 부수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주 교수가는 이 서양사 분야에서 ‘독보적이면서 유일한’ 필자인 셈이다.
주 교수가 대중들과 호흡하는 책을 최우선으로 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책의 필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강한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해마다 한 두권씩 꾸준히 서양사 관련 책들을 번역해오고 있고, 전공분야 책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여러 언론매체들의 요구에 가능한 한 응하는 것도 이런 철학의 소산이다. 책과 서평에 대한 질문에 주 교수는 스승 라종일 교수가 역시 다른 학자에 들었다며 자신에게 들려주었다는 “가장 좋은 공부가 바로 서평”이라는 말로 답했다. “서평을 쓰려면 책을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읽고, 생각하고, 써보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죠.” 그래서 주 교수는 학교에서도 1학기 동안 6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수업을 진행한다. <유토피아>같은 명저들과 <분노의 포도>같은 문학작품도 포함시켜 학생들에게 서평을 쓰게 한다.
16~18세기 해양 교류사 준비중
비록 아직까지는 판매가 책에 대한 평가 수준에 못 미치지만 주 교수의 책들이 독자들과 전문가 양쪽에서 좋은 평을 듣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펴내는 책들이 모두 그의 전공학문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전공연구의 부산물이자 수업의 연장이란 점이다. 학술적 글과 대중적 글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전문적인 내용이라도 보편적 교훈을 담고 있으면 독자들은 호응한다는 것을 주 교수의 책은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 교수 스스로 인정하듯 ‘주저’라고 할만한 묵직한 대표작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전공인 서양근대 문명교류사 분야에서 자신을 입증할 책은 아직 없다. 조만간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올 책이 이제 전공 연구분야의 주저로 평가받을 것으로 보인다. 16~18세기 해양을 통한 경제와 문화의 교류사를 다루는 책인데, 열강-식민지의 체제가 만들어지기 전 세계의 모습을 큰 틀에서 살펴보는 책이라고 한다. 출간 이후에는 이 책에서 다루는 개별 주제들-노예제, 생태 및 환경의 역사-등을 더욱 심화해나갈 계획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16) 과학 저술 정재승 교수
“내 할일은 과학 안내자 ”
단 2권만으로 이렇게 주목받은 필자가 또 있을까? 정재승(34·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가 쓴 책은 데뷔작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1999년·동아시아 펴냄)과 후속작 <정재승의 과학콘서트>(2001년동아시아 펴냄)뿐이다. 이 두 권으로 정교수는 최고의 ‘블루칩’ 필자로 떠올랐다. 2004년 9월 <국민일보>가 출판전문가들을 상대로 국내 필자들의 브랜드가치를 조사한 결과 정교수는 과학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2005년에는 출판전문지 <기획회의>가 청소년출판 편집자들을 상대로 벌인 ‘청소년 출판의 전범이 될만한 저자’ 조사에서는 과학을 넘어 전부문 통틀어 1위로 뽑혔다. 청소년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는데도.
세월이 다소 지난 지금, 정교수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출판계는 보고 있다. 지금 우리 출판계가 가장 탐내는 필자가 바로 그다. 정교수의 책들이 거둔 반응을 보면 그만한 과학 저술가, 아니 교양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첫 책 <물리학자는…>가 15만부 이상, 방송프로그램 ‘느낌표’ 선정도서가 되기도 했던 출세작 <…과학콘서트>가 35만부 가량 팔렸다. 교양 과학책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힌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제목에 ‘정재승의~’라고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국내 출판시장에서 이름을 내걸 정도의 필자는 실로 극소수인데도, 과학책 시장이 조그만데도, 책 한권 낸 필자인데도 제목에 이름이 들어갔다.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는 “당시 앞 책 <물리학자~>로 인지도가 충분하다 생각했고, 두번째는 의도적으로 젊은 과학저술가인 정 교수를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신예 필자를 앞세운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독자들은 지은이 정교수 자체에 호감을 나타냈다.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나온 20대 박사, 27살에 교수가 된 당시 스물아홉살 과학자. 누가 보더라도 이공계 지망생들이 역할모델로 삼을만한 이력이다. “그의 이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올린 한 독자의 인터넷 서평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씨가 독자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책의 내용과 정재승식 글쓰기였다. 정교수는 물감을 흩뿌리는 현대화가 잭슨 폴록의 그림으로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고, 통계학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오제이 심슨 사건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물리학자들이 경제 영역에 뛰어든다든 등 당시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과학을 설명하는 소재로 등장했다. 문화와 과학, 경제와 과학을 연결해 과학을 설명하는 책은 그동안 없었기에 독자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과학적 범죄수사’ 후속작 소재로
두 책 이후 정교수는 이후 필자보다는 오히려 ‘책 전도사’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에 고정출연해 좋은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역할을 계속해왔고, <한겨레>에 과학책 서평 칼럼을 쓰고 있다. 도서관 운동 등에도 힘을 보태왔다. 하지만 책이나 과학과 관련없는 프로그램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고, 이벤트성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 원칙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지명도에 비해 인터뷰도 극구 사양한다. 실제 정재승 교수가 인터뷰에 응한 것이 이 ‘한국의 글쟁이’ 시리즈로 <한겨레>와 한 것이 처음이다.
정교수의 글은 책이든 짧은 서평이든 칼럼이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가지 지식을 종횡으로 엮어 내는 것이 특징이자 최대 매력이다. 이는 정교수가 학창시절부터 오랫 동안 영화와 음악, 폭넓은 독서를 즐겨온 덕분이다.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결국 한 우물만 파는게 아니라 우물을 두 세 곳을 파고, 그 우물 사이에 지류를 내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책읽기에요.”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정씨의 특징을 한마디로 ‘명민함과 기동성’으로 평가한다. 다양한 분야의 신간들은 물론 외국 잡지에 나오는 논문이나 기사들을 꾸준히 파악해 신속하게 글쓰기감으로 활용하는 ‘기동성’,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정보를 엮어 완결된 글로 만들어내는 ‘명민함’을 갖췄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교수의 저널리즘 감각과 기획력, 그리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읽어내는 판단력도 빼놓을 수 없다. 김형보 웅진지식하우스 편집장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아는 점”을 정교수의 힘으로 꼽는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아닌 작가의 차이는 글쓰기 능력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독자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 시기에 무엇을 작가 말해주어야 하는지를 알고 책으로 쓰는 기획적 사고에 달려있다”며 정교수가 바로 그런 필자라고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 과학책들은 과학대중화가 어려운 과학을 쉽게 설명하고 일반 독자들이 꺼리는 숫자를 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정교수는 달랐다. 과학이 인문학, 사회학, 문학과도 통한다는 이야기를 쉽고 풍부하게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뽑아낸 것이다.”
네이처 논문도 베스트셀러도 도전
정교수 본인도 “첫책 <물리학자…>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남들이 쓰지 않아 스스로 글을 썼던 것이고, <과학콘서트>는 사람들이 정말 읽고 싶어하는 책이 이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해 쓴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교향곡 이야기로 출발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전혀 상관 없어보이는 두가지를 이어서 뒤통수를 치는 글을 좋아하고, 쓰고 싶어요. 동떨어져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잘 묶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거죠.”
정교수는 “과학자는 자기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만큼 뒤로 돌아서서 일반인들에게 지금 과학계가 어디까지 와있고 어디로 가려 하는지 말하는게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 외에 자기 일의 10~20% 정도는 자신이 받고 있는 지식과 혜택을 일반인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원칙을 설명했다. 그런 소통방법이 비단 책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정교수가 관심갖고 있는 것은 과학과 문화를 접목시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정교수는 실제 언젠가는 미국의 과학자이자 저술가 칼 세이건처럼 다큐멘터리로 대중들에게 과학을 알리는 날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독자들의 뜨거운 ‘독촉’이 집중되는 차기작을 출간하는 것이 당면 과제다. <과학콘서트>가 나온 지 4년 넘게 지났는데, 새 책이 늦어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정교수의 왕성한 지적 도전정신과 대중들과의 소통욕구 때문이다. 그의 활동폭이 넓어진 결과다. 그가 살짝 밝힌 후속작은 뜻밖에도 ‘범죄수사’에 대한 책이라고 한다. “추리소설을 보면 탐정들은 논리추리나 심리추리를 하잖아요. 그러면 똑같은 사건을 과학수사 요원은 어떻게 범인을 잡는지 살펴보는 거죠. 제 전공(뇌 연구)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쫓기는자인 범인, 쫓는자인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의 심리를 각각 나눠 다루는 책이 될 겁니다.”
이 책은 그의 올해 목표의 한 축이다. 정교수가 세운 올해의 목표는 ‘<네이처> 게재 논문과 베스트셀러를 모두 쓰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계 후배들은 물론 이공계 지망생들을 위한 목표이기도 하다. 정교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자 우리 시대 과학자의 역할모델로 이런 유형도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책 집필과 함께 책 기획도 꾸준하게 계속해나갈 작정이다. 정교수는 지난해 이미 기획자로서도 첫 책을 선보였다. 여성 예비과학자 5명이 각 분야에게 성공한 선배 여성과학자들을 인터뷰한 책 <과학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거창하게 기획이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제가 안쓰더라도 누군가가 써서 나왔으면 하는 책 아이디어들이죠.”
글쓰기 공동체 ‘꿈꾸는 과학’ 운영
이런 후배들과의 기획작업은 그가 남들 모르게 오랫동안 진행해온 ‘글쓰기 공부’ 프로젝트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정교수는 2002년 ‘꿈꾸는 과학’이란 글쓰기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대중적인 과학 글쓰기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의 연합 동아리인데, <과학콘서트>로 받은 상찬을 사회에 환원하고픈 생각으로 시작한 일로, 국내 과학 필자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것이 취지다. 전국 여러 대학에 다니는 40여명이 이 모임에서 글쓰기 강연을 듣고 토론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과학계에서 이런 일을 아직 하시는 분이 없는게 제가 하라고 남겨둔 몫 같았어요. 즐겁게 자기 분야에 대해 자기 의사표현을 잘하는 글쓰기를 같이 공부하자는 겁니다. 제가 글쟁이가 되고 대중들과 소통하게 된 것처럼 후배들이 대학시절에라도 글쓰기를 생각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절친한 벗 강금실도 애독자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
------------------------------------------------------------------------------------
한국의 글쟁이들 (18) /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출판 전시회 기획도 단골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클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
‘노하우’보다는 ‘노웨어’ 강점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 담겨 있으면서 쉽게 쓰기 지향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19) 건축저술가 임석재 교수
‘글쟁이 팔자’란 것이 있다면 건축사학자 임석재(46·이화여대 건축과) 교수가 꼭 거기 해당되지 않을까. 1995년 첫 책 <추상과 감흥>을 낸 뒤 지금까지 12년 동안 임교수는 번역한 책을 빼고도 모두 28권의 책을 썼다. 지금 우리 출판계에서 건축책을 주기적으로 쓰는 필자는 많이 잡아야 서너명 수준. 건축에 대한 우리 저자의 책을 읽고자 한다면 임 교수의 책을 피해가기란 쉽지 않다. 이런 성과가 모두 임 교수 특유의 글쟁이 기질의 소산이다. 미국 유학시절 스승들이 대부분 건축저술가인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뒤로 임 교수는 마치 글쓰는 기계를 연상시키듯 책을 쓰는데 매진하고 있다.
임 교수처럼 학문적 글을 쓰는 저술가들은 자신이 직접 분류, 정리한 자료라야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는 어려움 때문에 자신만의 도서관을 홀로 만들게 된다. 임 교수는 특히나 그런 학자들의 숙명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다. 임교수가 서울 근교에 따로 마련한 자료실 겸 집필실인 방 다섯개짜리 아파트는 부엌과 자는 방을 뺀 모든 공간을 책들이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벽면을 모두 책이 둘러싼 마루 가운데에는 소파 대신 큼직한 책상이 자리잡고 있다. 슬라이드 사진 필름도 방 하나를 차지한다. 거의 원서가 대부분인 책들이 약 1만권, 슬라이드필름이 20만장이다. 역사자료는 시대순으로, 인물자료는 알파벳순으로 정리해 놓았다. 본인 스스로도 “모은 책이 아까워서 딸에게 건축을 전공해보라고 꾀고 있다”고 할 정도다. 바보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료가 많이 필요하냐고.
“건축 자체가 종합학문이에요. 그래서 책을 쓰는 것도 종합적인 시각을 필요로 합니다. 건축현상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배경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와 공학기술도 알아야 하구요. 그리고 예술적 심미안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건축책은 글과 이미지를 함께 다룰 수 있어야 쓸 수가 있어요. 필자가 직접 이미지를 해결하지 못하면 글과 이미지가 잘 조화를 이루는 책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축은 종합학문…자료 불을 수밖에
자료가 많아야 하는 이유는 고스란히 건축책 쓰는 어려움에도 해당된다. 다른 인문학과 달리 노트에 볼펜만 들고 책을 쓸 수 없어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나가야 하고, 수많은 관련지식과 시각 가운데 무엇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머리에서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도록 평소 많은 것을 읽고 생각해놓는 수밖에 없다. “자료란 눈덩어리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굴러가요. 물론 사놓고 평생 안볼 책도 있지요. 그런데 그걸 버리면 나머지 자료들도 같이 죽어요. 경영효율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학문적으로는 그래요. 자료가 많아지면 생각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어요. 자료가 오히려 연구주제를 넓혀주기도 하는거죠.”
하지만 그런 당위성과 의무감보다도 오히려 자료정리를 취미처럼 즐기는 ‘체질’이 더 필요해보였다. 실제 임 교수의 자료정리를 보면 거의 ‘애정’ 수준이다. 슬라이드 20만장을 따로 보관한 방에는 필름 보호를 위해 곳곳에 습기제거용품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슬라이드철 사이에 끼우려고 크기를 맞춰 자른 신문지 1만장을 따로 준비해놓았다. “습기 제거에는 신문지가 최고거든요. 제가 동네 돌아다니면서 신문지를 모아와 제자들 도움받아 자른 겁니다.” 그 말을 듣고나니 자료철 하나하나 손글씨로 써붙인 항목 인덱스와 책장에 붙인 자료 구분표는 차라리 대단치도 않아 보였다.
임 교수의 일상은 모든 것이 글쓰기에 맞춰져 있다. 방학이면 해외로 취재를 가고, 평상시에는 전국 답사를 한다. 요즘처럼 방학을 맞아 집중적으로 책을 쓸 때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운동시간 1시간과 낮잠 20분을 빼고 오로지 글을 쓴다. 대신 글쓰는 장소는 자주 바뀐다. 노트북들고 거리로 나가 카페에서, 다른 대학 식당에서, 때론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 원고를 쓴다. 약간 트이고 약간 소음이 웅웅거리는 공간이 머리에 더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도 멋적은듯 웃는다. “저도 왜 이러고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10여년만에 28권의 책을 써서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줄 수 있었던 비결은 실로 단순했지만 대신 확실했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고급학술지부터 서민들 골목길 풍경까지 훑고 다니다 보면 생각이 범벅이 되면서 책 쓸 주제는 절로 떠오른다고 한다. 일단 주제를 정하면 2~3일 다른 작업을 쉬고 기획을 한다. 그 다음 항목별로 노트북에 바로 풀어쓰면서 인용도 집어넣은 다음에 정밀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처음부터 다시 손을 본다. 그 다음 사진자료를 가져와 내용을 고치는 3단계를 거쳐 책을 쓴다.
임 교수는 “교수라는 직업과 학술저술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학술저술을 고를 것”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그가 이렇게 책을 많이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덕이 크다. 해외취재만해도 경비 600만~700만원에 필름현상비만 300만원 넘게 든다. 이를 포함한 1년 연구비는 대략 2000만~3000만원 선. 반면 들어오는 수입은 훨씬 못미친다. 건축책은 대중적인 것이라도 1만부는커녕 3천~4천부를 넘기기도 힘들다.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임 교수는 더욱 쓰는 책의 종류와 폭을 넓히고 있다. 초기 정통 학술서에서 시작했지만 대중건축서로도 <건축 우리의 자화상>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 등을 냈고, 전통건축책도 7권을 냈다. 서울 달동네 골목길들을 답사한 <서울 골목길 풍경>같은 독특한 책도 있다.
독특한 사관 깃든 ‘서양건축사’
그렇지만 역시 가장 주가 되는 작업은 역시 전공인 서양건축사 책들이다. ‘임석재 서양건축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5권짜리 시리즈가 현재 <땅과 인간> 등 3권까지 나와 있다. 한국학자가 서양건축사 통사를 쓴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노작이다. 여기에 모두 30여권으로 기획해 9권까지 펴낸 ‘서양근현대건축사 시리즈’가 있다. 그의 건축사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학자인 그의 독특한 ‘사관’이다. 그는 건축사를 ‘중층변증법’이란 자기만의 개념으로 풀이한다. 해양성과 대륙성, 남성성과 여성성, 정주성과 유목성 등 대립되는 수백가지의 쌍개념들의 복합작용으로 건축을 분석하고 이를 겹겹이 교직해 특성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건축가 주인공인 소설도 계획중
앞으로 쓸 책 계획에는 사진집 같은 예상 가능한 것들과 함께 뜻밖에도 ‘미스터리 소설’이 들어 있다. 이탈리아의 천재 건축가로 라이벌 관계였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이탈리아 가톨릭 문명을 총괄해 알려주는 책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거의 건축을 소재로 하면서 책의 십진분류법 모두에 저자 이름을 올리겠다는 태세다. 글쟁이 팔자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새로운 건축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은 임 교수의 새 시도를 더욱 부추길 듯하다.
------------------------------------------------------------------------------------
한국 출판계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책’만으로 살아가는 글쟁이, 곧 프로 저술가는 극소수다. 문학쪽은 오히려 더욱 전업작가가 적고, 인문·사회·경제쪽, 그리고 실용서쪽에서 최근들어 분야별로 한두명씩 서서히 저술가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역사 전문 저술가 이덕일(45)씨는 가장 성공한 글쟁이로 꼽힌다. 책 이름에 ‘이덕일의~’라고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개인브랜드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역사쪽에서 대중들과 직접 호흡하는 저술가, 특히 ‘대학교수’란 배경도 없이 책만으로 승부하는 저술가는 그가 유일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이 늦었던 ‘늦깎이 사학자’ 이씨는 1997년 서른일곱살이란 나이에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석필)을 쓰면서 저술가로 데뷔한 뒤 꼭 10년 동안 30여권의 책을 쓰면서 역사쪽에서 최고의 인기저자로 자리잡았다.
역사쪽에서 대중적인 인문서 쓰기를 시도한 이가 이씨 혼자만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한국역사연구회 등이 ‘역사 대중화’를 시도한 뒤 여러 소장학자들이 대중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히지만 현재까지 남아 출판시장에서 통하는 이는 이씨뿐이다. 그만큼 이씨의 등장은 90년대 이후 출판계의 새로운 변화를 상징한다. 이씨가 저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 때로는 지금까지도, 받았던 가장 큰 오해가 ‘재야 사학자’란 호칭이란 점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 역사분야에서 ‘재야’란 말은 정식으로 역사를 전공하지 않고 홀로 공부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학과(숭실대)를 졸업했고 <동북항일군연구>로 박사학위를 딴 정통 역사학 연구자인 이씨는 ‘재야’가 아닌데도 이씨처럼 저술활동만 전념하는 전공자가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씨를 재야일 것으로로 넘겨짚은 것이다.
저술가로서 이씨는 올해 경력의 절정을 맞고 있다. 1999년 나왔던 <누가 왕을 죽였는가>를 개정한 <조선왕 독살사건>이 지난해 다시 나온 뒤 10만부 넘게 팔리고 있고, 최근 펴낸 <조선 최대 갑부 역관>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씨 책 두 권이 동시에 상위 순위에 올라있다. 또 <~역관>이 이씨의 책으로는 처음으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씨를 향한 출판사들의 구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출판계에서 추산하는 이씨의 시장가치는 ‘5만부’. 올해 출판시장에서 이씨의 가치를 환산한 수치로, 이씨의 이름으로 5만명까지는 끌어올 수 있다는 의미다. 5000부를 넘기기가 쉽지 않은 인문·교양쪽에서 5만부란 수치는 다른 분야의 10만부 수준이다. 이씨는 30~40대 남성들을 고정팬으로 거느리고 있어 최소 1만부는 기본으로 넘긴다. 이런 점 때문에 이씨는 대형 종합출판사 김영사의 ‘빅4’ 필자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다른 3명이 <먼나라 이웃나라>의 이원복 교수, <식객>의 허영만 화백, <토익, 답이 보인다> 시리즈로 토익시장 최고의 베스트셀러 저자인 김대균씨인 점을 보면 이씨의 힘을 알 수 있다.
김영사 ‘빅4’ 필자 중 한명
이씨가 저술가로 성공한 최고의 강점은 가장 기본적인 능력인 ‘글쓰기’에서 나온다고 출판계는 분석한다. 학자풍의 딱딱한 글을 쓰지 않는 수준을 넘어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이씨는 실제 역사소설 <운부>를 쓰기도 했다)답게 이씨의 책들은 소설처럼 술술 읽을 수 있는 게 매력이자 장점이다. 김영사 신은영 실장은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 이야기에만 빠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기 때문에 독자들이 머릿속에 극적인 장면을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책 내용을 차별화하는 틈새 주제 포착능력도 강점으로 꼽힌다. 누구나 아는 방향으로 책을 쓰지 않고 책마다 반드시 새로운 보여주는 게 있다는 말이다. 논쟁이 일었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처럼 책마다 ‘걸고 넘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인데, 이는 출판사나 편집자가 가장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이씨의 글은 이야기가 맛깔진 반면 전하는 메시지가 약해 주장하는 바를 명확히 모르겠다는 평도 듣는다. 너무 글 ‘테크닉’에만 의존한다는 평도 있다. 이는 이씨의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지만, 이씨의 철학과 전략에 따른 선택이기도 하다. “독자를 가르치려는 책은 오래 못가는 것 같아요. 전에는 제 주관과 판단을 글에 집어넣기도 했는데 몇년 지나 다시 읽어보니 그 부분들이 꼭 목에 딱딱하게 걸리더라구요. 그래서 이야기 전개에는 주관을 넣어도 마지막 결론은 독자들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이걸 어기면 독자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요.”
직장인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철저한 자기관리도 이씨의 성공비결 가운데 하나.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까지 일하고, 가끔 야근도 합니다. 일이 되든 안되든 앉아서 글을 쓰든지 책을 보면서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게 원칙입니다.” 이씨는 술마시는 시간을 빼면 항상 글을 쓰거나 공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마감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기 마련인 대부분의 필자들과 달리 원고 기한을 어기는 법이 없다. 자기 일정과 작업량을 잘 감안해 합리적으로 마감을 정하기 때문이다. “책도 상품인데 아이스크림을 겨울에 낼 수는 없잖느냐”고 이씨는 웃었다.
지금은 ‘역사 저술가’로 이름을 굳혔지만 그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도 “늘 어렵게 살았던 터여서 ‘라면 세 개에 소주 한 병이면 하루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던 것”이라며 “아마 온실에서 도전한 사람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른바 ‘일류대’ 출신이 아닌 그가 대학교수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긴 했기에 저술가를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시장)으로 일찌감치 정하고 도전해 거둔 성과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씨는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이 대학 기웃대지 않고 잘먹고 살면서 전문가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준 점”을 자부심으로 꼽는다.
불행하게 가신 분 한풀어줘 보람
역사 저술가로서의 보람을 물었다. “한 시대의 시대정신을 추구하다 불행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정이 많이 가는 편입니다. 책으로 그런 분들의 한을 풀어준다고나 할까, 그게 보람입니다.” 이씨는 저술가로서 앞으로의 방향을‘평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바라보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씨는 평전 쓸 대상으로 우선 3명을 정해두었다. 이순신을 발탁한 정치가 유성룡,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학자 윤휴, 그리고 정조 임금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② 미술 전문 저술가 노성두씨
출판과 궁합이 가장 잘 맞는 예술 장르는 단연 미술이다. 책에 작품 그림이 실리면 보기에도 좋고, 수천년 세월 미술속에 쌓인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해 책으로 쓸 소재도 많다. 사진도 같은 시각예술이지만 출판 측면에서는 미술과는 비교가 안된다. 최근 ‘교양’ 바람과 맞물리면서 출판시장에는 대중적 미술책이 1년에 수십종씩 쏟아져 나올 정도다.
하지만 이처럼 미술이 출판으로 대중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도 채 안된다. 1990년대 이후 미술책을 전문적으로 쓰는 저술가들이 등장해 교양미술책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미술책은 출판의 중요한 새 분야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미술전문 저술가 노성두(48)씨다.
노씨는 국내 미술교양서 필자를 대표하는 1세대 전문 저술가다. 미술저술가들을 나눌때 교양인 차원에서 출발해 대중적으로 알기 쉽게 미술을 소개하는 ‘저널리즘 기반의 저술가’와, 미술사와 비평을 전공한 연구자 출신의 ‘아카데미즘 기반의 저술가’로 구분한다면 이주헌씨는 전자를, 노성두씨는 후자를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씨는 신문사 문화부 미술담당 기자 출신, 노씨는 미술사학자 출신으로 서로 기반과 출발점은 다르지만 오로지 책만으로 승부하는 프로 저술가로 나선 첫세대 미술저술가란 점에서 같다.
인천 노씨의 아파트는 안방이 작은 방이고 원래 안방인 가장 큰 방은 자료실이다. 책과 도록이 자료실 네 벽을 차지한 것은 물론 방바닥까지 점령해 중간 중간 발디딜 틈만 남겨놓고 있다. “오해하실까봐 말씀 드리는데요, 지금 이 상태가 치운 겁니다.” 워낙 작업량이 많다보니 책상위가 정돈될 틈이 없다. 그래도 이 복잡한 자료더미 안에서 노씨는 원하는 그림이 들어 있는 도록을 10초면 척척 찾아낸다.
노씨는 99년 첫 책을 낸 이후 지금까지 모두 61종의 성인·어린이용 미술책을 짓거나 번역했다. 해마다 8~10권씩을 펴낸 셈이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과 도판해석 능력은 다른 미술저술가들이 부러워하는 노씨의 자산이다. 미술가와 그림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술가들은 여럿이어도 노씨처럼 서양 미술 도판을 직접 보면서 그림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미술저술가는 없었다. 또한 미술사 주요 1차자료를 직접 원전해석할 수 있는 저술가도 노씨가 처음이었다. 독일어는 물론 르네상스 미술로 박사학위를 딴만큼 이탈리아어, 그리고 고전미술의 공식언어랄 수 있는 라틴어, 영어와 불어를 번역할 수 있는 어학능력도 노씨만의 트레이드마크다. 영어판을 통해 2차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원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미술저술가는 지금도 드물다. 고정팬들은 노씨의 문장이 미문이란 점을 첫번째 매력으로 꼽는다.
99년 첫책 이후 61종 짓거나 번역
노씨가 저술가로 나선 것은 교수자리를 얻지 못한 게 계기가 됐다.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던 노씨는 독일로 유학가서 미술사학으로 전공을 바꿔 10여년 공부한 뒤 94년 귀국했다. 그러나 교수자리는 그에게 오지 않았다. 96년 결혼 직후 노씨는 아내에게 “다 때려치우고 글을 써서 먹고 살테니 앞으로 1년만 버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노씨는 자신을 저술가로 ‘재부팅’하는 체질개선작업에 돌입했다.
이 기간에 노씨가 전범으로 삼은 ‘글스승’은 2명이다. 첫번째가 고은 시인이다. “땀냄새 나는 현장감이 일품”이어서 고은 시인의 시를 거듭 음미하며 읽었다. 다음 글쓰기 모델은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씨. “검은돌 흰돌 두개만 가지고 우주처럼 써대는 수사에 감탄해” 문장을 곱씹었다. 그렇게 자기 문체를 만들면서 번역할 책 목록을 뽑아 여행가방에 책을 넣고 무작정 출판사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역서가 <알베르티의 회화론>(사계절)이었다. “원래는 고전번역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금방 깨달았죠. 번역, 그것도 고전번역은 정말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술에 모든 활동을 맞췄고, 그의 이름을 알린 첫 본격 저술서로 나온 책이 <보티첼리가 만난 호메로스>(사계절·99년)다.
노씨가 세운 저술 원칙 1번은 ‘신뢰성’이다. 노씨가 보기에 우리 미술책의 문제점은 비전공자들이 쓴 미술책이 많아 너무 오류가 많고, 그런 오류가 정설처럼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7년쯤 전 어린이책 베스트 1위에 오른 미술책을 들춰봤다가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맞는 내용보다 틀리는 내용이 더 많았습니다.” 이후 노씨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미술책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성인용 정통 미술단행본은 잘 안팔리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내린 선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야 겠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밀로의 비너스가 ‘8등신’ 기준으로 만들었다고 미술책에 흔히 나오지요.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인체 비례의 기준은 머리가 아니라 발바닥이었어요. 머리 기준은 15세기 이후 등장한 것인데도 검증도 않고 인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검 60구를 해부해 인체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는 것도 대표적인 오류다. “다빈치가 쓴 수기를 직접 번역해보니 30구였습니다. 왜 60구란 수치가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믿을만한 책을 쓴다는 자부심을 잘 보여주는 책이 최근 나온 청소년용 미술책 <춤추는 세상을 껴안은 화가 브뢰겔>이다. 브뢰겔 그림을 이해하려면 16세기 네덜란드 속담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그림에 숨어있는 당시 네덜란드 속담 126개를 모두 번역해 부록을 실었을 정도다.
미술저술가의 길을 연 개척자로서의 위상과는 달리 그의 실제 수입은 의외다 싶을 만큼 적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본격 저술가로, 그것도 미술저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동시에 우리나라 미술출판의 현실과 한계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해마다 8권 이상 책을 내는데 그가 ‘책’만으로 버는 수입은 한 해 2000만원 안팎. 노씨가 쓴 책을 보면 번역서를 뺀 일반인용 책은 의외로 적고, 그나마 나오는 기간도 1~2년에 한 권 정도다. 그리고 이 책들은 대부분 말랑말랑한 에세이류가 많아 ‘노성두의 주 저’란 이름을 내걸 만한 책은 없다는 비판도 듣는다. “죄짓는 기분이죠. 그런데 도무지 조금이라도 학문적인 책은 내고 싶어도 낼 엄두가 안나요. 언론에서도 크게 다룬 책이 3000부도 안팔린 경우도 있습니다.”
저술 원칙은 ‘믿을만한 책’
우리 출판시장에서 교양미술책은 팔리는 주제만 중복출판된다. 인상파, 특히 고흐에 대한 책만 계속 나온다. 노씨가 다루는 근대 이전 고전미술들은 아직 대중들에겐 어려운 미술이란 관념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 간극이 메워질 때까지 저술가로서 노씨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
한국의 글쟁이들/③ 강호동양학 문필가 조용헌씨
“문필가를 알려면 그 서재를 봐야지요.”
하지만 문외한인 기자에게 그 차이가 쉽게 보일리야. 그저 ‘정신’과 ‘역사’에 관한 책들이 많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는 집안 곳곳 가구 대신 책장이 놓여있는 게 여늬 집들과 가장 달라보였다. 글쟁이 조용헌씨가 사는 전북 익산시 어양동의 복층식 아파트는 집안 곳곳이 서재였다. ‘진짜 서재’는 아랫층인 지하층 전체였는데, 마루 벽 전체가 책꽂이였다. 맞은 편에 놓인 커다란 화이트보드에는 유명 학자며 책이름 같은 명사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마루 바닥 가운데 있는 둥그런 나무틀. “글쓰다가 이렇게 누워서 몸을 펴는 겁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쓰는 것을 본떠 판다는 ‘기지개용 도구’였다. 그러고 보니 컴퓨터를 놓은 책상이며 가구들이 앉은뱅이다. 동양학 전문 저술가니 좌식생활을 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할텐데도 무척이나 새로워 보였다.
“난 저술가라고 안하고 문필가라고 해요. 풍수에 문필봉이란 게 있는데, 집터 앞에 삼각형으로 솟은 문필봉이 있는 걸 최고로 쳐요. 조지훈 종택이나 영랑 생가에 가보면 문필봉이 앞에 있지요. 옛말에 문필봉은 있어도 저술봉은 없으니 문필가라 하는게 맞지요.”(막상 조씨의 아파트 앞에는 문필봉이 없었다. 대신 양쪽에 어양중과 영등중 두 중학교를 거느리고 있어 어느 정도 문기(文氣)를 전해받는 듯했다.)
조씨는 문필가의 본질을 논어에 나오는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 곧 ‘공부를 하면 녹이 그 안에 있다’는 말을 약간 바꿔 ‘필야녹재기중’(筆也祿在其中)이라고 설명한다. 글 써서 먹고 산다는 이야기다. 이 문필가란 요즘 말로 ‘1인기업가’이며, ‘시대의 스토리텔러’란 게 그의 지론이다. 펜 하나 달랑 들고 홀로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정작 그가 문필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은 3년 전이었다고 한다. 1999년 첫 책을 낸 뒤로 한 참 지나서였다. “그 때는 직장에서 월급받았으니까. 책은 뭐 그냥 낸거지. (인생의) 승부는 안걸어요. 재미로 하는 거지.” 말투는 의뭉한듯 한데 거침이 없다. 출판가에는 조씨가 출판사 사장과 담당 편집자의 관상이며, 출판사 건물의 풍수를 보고 계약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물었는데 그건 아니란다. “서로의 아이덴티티를 따져요. ‘전통 플러스 동양적 팬터지’ 이게 내 아이덴티티인데 이게 출판사의 출판방향과 맞는지 보는 거죠.”
글감에 ‘전통+동양적 판타지’ 가미
조씨가 첫 책을 낸 지 이제 7년, 쓴 책은 아직 10권에 못미친다. 그런데도 조용헌씨의 책 제목에는 ‘조용헌의~’라는 브랜드가 붙는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저술가로서 또렷하게 자기 존재를 각인시킨 덕분이다. 조씨는 자기가 글쓰는 장르를 직접 만들어냈다. 이름하야 ‘강호동양학’.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면서도 정식 학문이나 제도권 지식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동양학’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주명리학이며 풍수, 그리고 도사들의 이야기 등 우리 생활속에서는 하나의 문화와 전통으로 살아 있지만 정색을 하고 책으로 다루지는 않았던 것들을 책으로 펴냈다. 그가 말하는 강호동양학은 동양문화의 열쇳말들인 문·사·철과 유·불·선, 그리고 천문·지리·인사라는 아홉가지를 구궁(九宮)으로 한다. 이 아홉가지 열쇠로 풀어내는 동양학, 정통 제도권 동양학을 둘러싼 더 넓은 의미의 동양학, 그게 강호동양학이다. 이 강호동양학이 저술가로써 조씨의 강점이자 차별화 요소요, 매력이다.
조씨는 불교민속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뒤 잠깐 직장생활도 했지만 샐러리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혼자 전국을 누볐다고 한다. 10년 이상 전국 이름난 절집이며 명문가, 산속에 사는 아웃사이더들들 찾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들이 그만의 컨텐츠다. 조씨는 이 글감들을 동양학 지식에 버무려 ‘전통’과 ‘동양적 팬터지’란 두가지를 들려주는 책을 쓰는 데 주력한다.
조씨는 2000년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란 책으로 그 이름을 알린다. 전국 명문가들의 가훈과 교육철학, 그리고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의 전통을 들여다본 책이었는데,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5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후 <조용헌의 사주명리학>(2002·생각의나무), <방외지사>와 <고수기행> 등의 책을 해마다 펴내면서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고, 종합일간지와 시사잡지 칼럼니스트로도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연수입은 1억원 이상인데, 원고료:인세:강연료의 비율이 각각 4:2:4다.
저술가로서 조씨 최대의 무기는 역시 차별화한 ‘동양학’이란 소재다. 그가 주로 취재하는 대상은 “컨텐츠를 지닌 사람들”이다. 찾기도 힘들고 말 트기도 힘들지만 오래하니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양반들이 꼭 점조직 같아서 오대산 사람을 만나면 지리산 사람을 소개해주고 지리산에 가면 계룡산 사람을 알려줘요. 어려운 것은 명문가 후손들처럼 자존심 센 분들 인터뷰하는 거지요. 처음 만나면 쉽게 말씀을 안해요. 그럴 때는 풍수나 보학, 한시 같은 것들로 이야기 한 자락 슬쩍 운을 떼 관심을 끌어서 말문을 틔워야 해요.”
조씨는 “책을 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이나 샐러리맨들이 느끼게 되는 공허함을 달래주는 글을 썼을 때 독자들이 남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펴낸 책들이 평범한 삶의 규칙을 벗어나 독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방외지사>나 독특한 자기 분야를 일군 사람들을 소개하는 <고수기행>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꾼인 자신 역시 이런 사람들과 통하는 탓도 크다. “이야기꾼은 삐딱해야해. 평범한 사람들 만나면 상상력이 줄어요. 문필업은 반항적 기질이 있어야 해요.”
이야기꾼으로서의 ‘글발’도 조씨의 강점으로 꼽힌다. 조씨의 글은 단문이 특징이다. ‘한 문장에 하나의 생각’(one idea one sentence), ‘문어와 구어의 일치’가 그의 글쓰기 철학이다. 좋아하는 글쟁이는 언론인 박권상, 그리고 외국작가 오스카 와일드다. 오스카 와일드는 문장이 짧고 관계대명사가 없어 읽으면서 헷갈리지 않기 때문에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쓸것 많은데 몸 안 좋아 ‘운기조식’
조씨의 책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비교적 크게 엇갈리는 편이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으며, 막연하게만 알던 동양학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준다는 것이 긍정적 평가의 축을 이룬다. 반면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어디까지가 객관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있다. 조씨 자신은 자신이 학자라기보다는 ‘이야기꾼’이란 점을 강조한다. 학문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했어도 구전된 부분 등을 다루는 것은 작가적 허용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이야기’로 보아달란 주문이다.
조씨는 앞으로 불교의 명찰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쓸 계획이다. 명문가 이야기의 후속편도 준비중이다. 쓸 것은 많은 데 몸이 다소 안좋아 현재는 운기조식 중이라고 한다. “주화입마가 풀리면 글쓰는 속도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조씨는 웃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④ 한비야
“제가 저술가라고는 저~언혀 생각 안해요. 저술가라면 타이틀이 너무너무 엄청나요. 어느 때는 작가라고 해도 민망해요.”
본인이 프로 글쟁이라고 생각 안하는 사람. 자기가 글을 잘 못쓴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책이 왜 잘 팔리는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사람. 그게 한비야(48)씨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분명 저술가다.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한씨는 꼭 10년전 <바람의 딸 한비야 걸어서 지구를 세바퀴 반>이란 책으로 처음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혈혈단신으로 6년 넘게 전세계를 걸어서 돌아다닌 여자. 다음에는 우리나라를 걸어서 종단한 이야기(<바람의 딸, 우리 땅에서 서다>를 들려줬다. 역시 바람의 딸 답다. 그러다 어느날 중국어를 배우러 떠나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쓰더니, 이번에는 세계 곳곳 긴급구호현장을 누비고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를 썼다. 이건 매번 진화해댄다. 그리고 진화의 결과를 몇년 만에 한 번씩 들려준다.
4종, 7권. 지금까지 한씨가 쓴 책은 그게 전부다. 그러나 한씨의 책이 이끌어낸 호응은 실로 ‘경이적’이다. 실패한 책 하나 없고, 낸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학, 비문학을 통틀어 한씨만큼 확실하게 독자를 거느린 글쟁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책 <~세바퀴 반> 4권이 100만부 이상, <~우리 땅에 서다>가 20만부, <~중국견문록> 48만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가 41만부. 책을 낼수록 판매부수가 늘고 생명력도 길어지고 있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출간 1년이 지난 지금도 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2~3위권을 지키고 있다.
판매부수가 50만부에 이른다는 것은 상업적으로 볼 때 작가의 차원이 일반 저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과 여 양쪽 모두에게 인기가 있어야 가능하고, 좌와 우를 막론해야 가능하다. 청년층과 장년층 어느 한쪽에게만 인기가 좋아서도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모든 연령, 모든 성별, 모든 성향을 뛰어넘는 호응을 얻어야 가능한 수치다. 곧 한씨가 남녀노소 모든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뜻이다.
자기책 외울정도…편집자는 죽을맛
독자들이 꼽는 한씨의 최대 매력은 바로 ‘건강함’이다. 한씨의 책을 읽으면 ‘씩씩바이러스’나 ‘행복바이러스’ 그리고 ‘봉사바이러스’에 옮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매력은 한씨의 모든 책이 공통적이다. 하지만 저술가로서 한씨는 세번째 책 <중국견문록> 이후 한단계 변신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두 책에서 한씨는 ‘여행가’를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와는 다른 생생한 표현, 그리고 한씨만의 독특한 유머가 묻어났다. 그런데 <중국견문록>부터는 ‘사회적 역할모델’로 거듭났다. ’정력적이고 호기심 많은 드센 여성 여행가’가 긴급구호활동가가 되면서 ‘닮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팬층은 더 넓어졌다.
실제 한씨의 사인회에는 30~40대 직장 남성들이 딸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한씨의 책을 편집했던 지평님 황소자리 대표는 “아버지들이 동년배로서 자기가 못해본 것을 해내는 이 여성을 자기 역할모델로 여기는 동시에 딸에게도 역할모델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행복하자, 부자가 되자 그런 구호들이 넘쳐나는데 한비야를 만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10만원만 내면 각 대륙별로 한 사람씩을 구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삶이 제대로 가고 있나 불안할때, 모호하고 불안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 한비야의 목소리가 있다는 거에요.”
이런 당위적 메시지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역시 저술가로서 한씨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한씨 글의 특징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술술 읽히는 점이다. 미사여구로 글을 꾸미는 법도 없다. 대신 생생한 비유를 곁들인다. 그래서 한비야 최고의 장점을 그래서 ‘전달력’으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한씨의 글이 이렇게 쉽기 때문에 책을 쓰는 것도 술술 쓸 듯하지만, 실은 그 정반대다. 한씨는 원고를 자기 마음에 꼭 들 때까지 수십번씩 퇴고한다. 그래서 교정지가 ‘딸기밭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불바다가 되어’버린 듯 새빨개진다. 한씨는 또 자기 책의 목차는 물론, 목차의 순서, 각 항목별 쪽수와 분량을 모두 스스로 정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책 본문을 거의 외우다시피한다. “저는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로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좋은 소재로 왜 이정도 밖에 못쓰냐며 자학하는 스타일이다.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본다. “긴급구호 현장에서 수만명이 죽어가는 현장이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는 연시이건, 글이란 것은 운율이고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호흡이 짧아지거나 거칠다 싶으면 다 고쳐요. 입으로 읽어서 거칠면 눈으로 읽어서도 거칠다고 생각해요.” 한밤중에 글을 쓰고는 친구며 편집자에게 전화해서 무조건 읽어주면서 점검해댄다. 좋은 아이디어나 표현이 떠올라도 전화를 한다. 당연히 편집자들은 ‘죽을 노릇’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장의 호흡은 물론 한권 전체의 강약중강약 호흡도 따진다. 그러다보니 거의 자기책을 외우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투를 써야 독자들이 나를 느껴요. 독자들은 결국 글쓴이의 오감을 빌어 내 호흡을 같이하고 싶어하는 거잖아요. 저는 제가 현장을 전하는 리포터에 가깝다고 봐요. 긴급구호 현장을 본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든 전해야 하잖아요.”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한씨 자신의 ‘일기’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그토록 일기를 많이 써야 문장력도 늘고 생각도 깊어진다고 했던 이야기의 모델이 있다면 바로 한비야다. 한씨의 일기장은 취재수첩 같이 생긴 작은 스프링노트. ‘그날 하루 느끼고 떠올린 모든 것들’을 적는다. 기자와 인터뷰하면서도 수시로 메모를 해서 누가 취재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취재 중에도 수시로 메모
한씨는 요즘 피 흐름이 좋지 않아 잠시 휴식중이다. 북한산 줄기를 바라보는 한씨 아파트 내부는 글과 관련된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파에도 책상에도 화장실에도 안경과 책들이 있었다. 몸은 안좋다면서도 이 에너지덩어리 같은 글쟁이는 온갖 아이디어와 꿈을 받아적기 힘들 정도로 쏟아냈다. 자연히 다음 책이 궁금해졌다. “정한 것은 없지만, 어떤 방향이 될지는 알지요. 말하고 싶은 게 목구멍까지 차서 도저히 토해내지 않으면 못견딜 때까지 기다렸다가 써야해요.” 아, 이번 책도 4년만에 나왔지. 한씨 팬들은 이미 기다리는 데 익숙할 듯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⑤ 과학저술가 이인식
이인식(61)씨는 오로지 책으로 승부를 거는 직업 저술가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일찍 저술가로 나선 축에 드는 이다. 90년대 중후반 전업 저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90년대 초반부터 과학저술가로 글을 써왔고, 과학책을 쓴 것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1987년부터다. 올해로 그가 과학저술가로 활동한 꼭 20년째를 맞았고, 그동안 펴낸 책이 스무 권을 넘어섰다.
이씨는 이달 펴낸 최신작 <미래교양사전>으로 국내 과학책 시장에서 자신이 개인 브랜드로 통하는 드문 필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냈다. 600쪽 가까운 두께(576쪽), 3만원에 육박하는 가격(2만9000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간 2주만에 5000부 넘게 팔렸다. 과학책들이 보통 2000~3000부를 넘기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판매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씨는 자신이 “아직 진정한 저술가가 아니”며, “우리나라에 아직 과학저술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진정한 저술은 온전히 책으로 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데, 자신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한 것들을 책으로 낸 것이 많기 때문에 아직도 저술가라기 보다는 칼럼니스트에 그친다는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칼럼을 묶어 낸 거에요. 지금까지는 책을 위한 저술만을 할 시간이 없었어요. 책이란 안읽히면 끝입니다. 하지만 칼럼은 원고료도 나오고 기본적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 위험부담이 적은 편이니까 칼럼으로 써서 책으로 내온 것이죠.”
이씨의 자평은 그만큼 국내에서 ‘과학 출판’이 열악한 분야이고 그래서 ‘과학저술가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지금까지 신문, 잡지에 쓴 원고지 1만매 이상의 칼럼들은 이인식이란 이름을 알린 1등 공신이었던 동시에 저술가이면서도 책에만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의 산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번 <미래교양사전>은 모처럼 처음부터 책으로만 기획해 쓴 책이다. 이씨는 앞으로 칼럼 연재보다는 책 저술에만 전념할 계획이다. 글쟁이 생활 20년, 나이 환갑에 저술가로서 제2의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석사 학위도 없지만 저서 20권 넘어
이씨가 책 저술에 전념하기로 한 것은 이제 지명도나 수입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기 때문다. 이는 반대로 지금까지는 버텨내듯 글쓰기를 해올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이씨 스스로도 지난 세월에 대해 “저술가로서 어느 정도 보상은 받았다고 본다”면서도 “폄훼당해 좌절하고 섭섭해하며 살아야 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쨋든 과학책으로 이렇게 먹고 살 수 있으니 보상받은 것이고, 국가 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으니 또한 보상받은 것 아니겠냐”는 설명이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는 그가, 그것도 가장 엄밀성과 학문적 권위를 요구하는 과학 저술에 뛰어든 이상 이겨내야만 했던 마음고생의 대가일 것이다.
이씨가 과학저술가로 나선 것은 개인적인 꿈이기도 했지만 생활인으로서 피치 못할 선택이기도 했다. 40대 중반까지 이씨는 대기업에서 이사까지 오른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짬짬이 전자공학이란 전공과 전자업체에 근무하는 전문성을 살려 컴퓨터 잡지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필자로도 활동했다. 글쓰기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 이씨는 결국 “태어나서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고 죽자”는 생각에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92년 8월 <정보기술>이란 과학잡지를 창간했다. 좋아하는 과학잡지도 만들고 과학 저술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퇴직금에 빌린 돈까지 더해 털어넣은 잡지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년 반만에 잡지를 폐간한 뒤, 이씨는 과학저술가란 미지의 길에 승부를 걸었다. 고시생들 다니는 독서실에서 혼자 수험생처럼 과학공부를 하면서 글쓰기 수련에 돌입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집중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면서 이씨는 94년부터 <한겨레> 등 주요 일간지에 과학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씨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과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글쟁이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고 김정흠 교수 등 과학대중화에 관심을 가진 몇몇 대학교수들이 시간을 쪼개 대중적이고 짧은 칼럼을 간간이 쓰는 정도였다. 이씨는 대학교수란 타이틀도, 박사학위도 없었지만 대중적 글쓰기와 저널리즘 감각을 무기로 재미와 정보를 함께 주는 과학칼럼을 지향하고 나섰다. 과학이란 분야가 일반인들에게는 책은 물론 신문기사조차 어렵게 느껴지던 터였기에 알기 쉽게 ‘핵심 정리’를 해주는 듯한 이씨의 칼럼은 금세 호응을 얻었다. 언론은 이씨에게 ‘과학칼럼니스트’란 호칭을 붙여주며 환영했다. 이후 이씨는 10년 넘게 이 분야에서 일급 필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씨가 과학기술을 논하면서도 운전면허도 없고, 휴대폰도 안쓰며, 글도 원고지에 펜으로 쓴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최신 과학정보나 흐름에는 누구보다도 빠르다는 평을 듣는다. “과학저술가는 과학지식의 얼리어답터(초기 수용자)이자 전파자여야 한다”는 철학 덕분이기도 하지만 최신 과학기술이란 게 누가 먼저 관심을 갖고 다루느냐가 승부처이기 때문에 늘 최신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운 결과다. “테크놀로지는 정보전쟁이어서 공부를 하지 않으면 교수들도 몰라요. 늘 먼저 보고 공부하는 게 ‘장땡’입니다.” ‘최신’ 못잖게 이씨를 짓누르는 단어가 ‘정확’이다. “과학저술의 기본은 ‘학문적 정확성’과 ‘언론의 민첩성’이고, 프로 과학저술가로서의 기본은 ‘자기 것에 대한 책임’과 ‘완벽’뿐이라고 생각해요. 과학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글에 오류가 있으면 개망신을 당해요. 그래서 항상 책임질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찾는게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씨의 글쓰기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는 누가 이미 쓴 주제나 소재는 쓰지 않는 것. 무엇이든 처음으로 써야 ‘독창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신의 개인적 이야기를 섞지 않기. “개똥철학은 피한다”는 취향에 따라 글에 사적 경험담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런 원칙을 바탕으로 이씨가 주력하는 분야가 ‘공학’과 ‘미래’ 두 분야다. 자신이 공학도 출신에 기업에 근무했던 탓도 있지만 “한국을 먹여살릴 미래산업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내 과학출판 풍토에 대한 불만도 작용한다. 이씨가 보기에 현재 국내 과학책 출판의 문제점은 △기초과학 중심 △과거 지향 △생물학 치중 풍토다. 이런 분야도 중요하지만 이쪽 책만 나오는 것은 분명 문제라는 것이다.
“다윈을 지금 떠들어봤자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거죠. 학교에서 다 배우는 것을 또 중언부언할 필요가 있나요? 지금 현재 과학계의 살아있는 이슈나 기술 문제가 중요한데 국내 과학책들은 죽은 옛 과학자들의 전기나 한가한 동물이야기만 중복출판되고 있어요.”
‘생활속 공학’ 문학처럼 풀어내고파
저술가로서 이씨의 바람은 ‘한국의 헨리 페트로스키’로 불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공학기술 저술가로 생활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공학기술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설명하는 페트로스키처럼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이공계 학생들에게 공학의 재미를 가르쳐주는 책을 쓰는 것. 이게 저술가로서 그가 갖고 있는 소명의식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⑦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씨
21세기 대한민국 독서가들이 책으로 만나게 되는 ‘허균’은 두 명이다. 한 명은 누구나 아는 그 허균, 바로 <홍길동전>을 쓴 조선시대 허균이다. 또 한 명의 허균을 이미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전통문화와 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전통미술 전문 저술가 허균(59·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씨가 두번째 허균이다.
전통미술 저술가 허균이란 이름은 아직 일반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민화나 고궁, 우리 옛그림, 다양한 전통문화의 상징 등 다양한 우리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고 이 분야 책을 읽어보려 한다면 허씨의 책을 피할 수는 없다. 현재 우리 출판계에서 대중들을 위한 알기 쉬운 전통미술책을 쓰는 가장 대표적인 저술가가 바로 허씨다. 서양미술에 대한 책을 쓰는 국내 저술가는 여럿이어도 우리 전통미술 책을 쓰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 오주석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 현재 전통미술 분야쪽에서 대중들과 같이 호흡하는 전문가는 허씨가 거의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의 책들은 전통미술이란 주제의 성격상 판매부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허씨의 책들은 나온지 몇년 이상 지난 것들도 꾸준히 생명력을 이어가며 고르게 인기를 누리고 있다. “전통미술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며, 또한 우리 것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주는 동시에 한단계 더 나아가 “옛 사람들의 마음을 읽게 해준다”는 것이 독자들이 꼽는 허씨 책의 매력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씨 자신은 자신이 ‘저술가’로서 ‘책’이란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이가 아니란 점이다. 책이란 것은 그가 고른 수단으로 책 자체가 목적은 아니란 설명이다. “책 쓰는 것은 내 생각, 그리고 일반인들이 알아야할 것들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지 책 자체를 저술하는게 목적은 아니”라고 허씨는 말한다. ‘하다 보니’ 책을 쓰게 된 것이며, 수입 측면에서도 “책으로는 별 기대를 걸지 않”는다고 한다. “8, 9쇄를 찍고 1만권이 넘어가는 책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수입이 있는지 모를 정도에요.”
허씨가 책을 쓰는 것은 대중들에게 전문가들만 알고 넘어가기 쉬운 전통미술 분야의 재미와 진면목을 알려려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인문교양서 분야에서는 책이 1만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로 불리지만 정작 1만원짜리 책이 1만부 팔렸을 때 지은이가 받은 인세는 1000만원에 불과하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고 이 분야에서 책을 쓴다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다.
비록 실정은 이렇다해도, 저술가로서 허씨는 분명 ‘프로 저술가’라는 평을 듣는다. 허씨의 책들은 허씨 자신이 기획한 <한국의 정원…> 등도 있지만 출판사쪽의 요청을 받아들여 쓴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출판사의 처지에서는 출판사의 품위와 이미지를 세우는데 전통미술 책만한 것이 없고, 이 분야 필자를 섭외한다면 당연 허씨가 최우선 섭외 대상이다. 전통미술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허씨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출판사쪽 필자 섭외 0순위
허씨가 책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97년부터지만 진정 홀로 글쟁이로 살기 시작한 것은 꼭 20년 동안 몸담았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을 나온 2002년부터다. 허씨가 저술가가 된 모든 철학과 밑천이 평생 직장이었던 정문연 생활 20년, 그리고 그 세월을 쏟아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작업에서 나온다. 잠시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학교생활이 싫어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뒤 허씨는 정문연에 들어갔고, 그 뒤 정문연 최대의 사업이었던 이 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책임편수연구원으로 참여해 청춘을 바쳤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전통미술이란 한국인들에게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전문가로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주고받았다. ‘전문가의 편협함’ 또는 ‘전문가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도 평생의 고민거리였다.
“전공에만 너무 천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걸 실감했어요. 백과사전에 들어갈 항목을 전문가들로부터 글을 받으면 자기 분야의 관점과 관심사로만 써오는 거에요. 미술사쪽은 특히 더 그래서 너무 양식사에만 치중하고, 바로 인근 분야조차도 아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화현상이란 것은 성립요소가 굉장히 다양한데, 주변 문화요소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거죠. 백과사전 작업을 하면서 사물을 여러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절실해졌어요.”
최대한 다각적으로 문화현상을 바라보려는 자세는 이후 그대로 그의 저술 원칙이 된다. 2002년 정문연을 떠난 뒤 허씨는 이 때 느꼈던 문제의식을 저술작업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전공은 회회사였지만 점점 관심범위를 넓혀갔고, 이후 다양한 소재를 다루며 우리 전통미술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대표작인 <한국의 정원…>은 이같은 허씨의 강점과 차별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허씨가 이 책을 낸 뒤 전국 여러대학 조경학과에서 잇따라 특강요청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우리 전통 정원에 담긴 철학과 미의식을 정리한 책을 쓴 이가 조경학계에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만 빠지는 함정을 벗어나 대중들의 관점에서 전통문화를 접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 것도 허씨가 이뤄낸 성과라고 평할만하다. 특히 우리 전통미술을 주요 ‘상징’의 코드로 들려준 것은 그가 처음이다. 너무나 당연한 접근방식일 수 있지만 이를 독자에 맞춰 책으로 처음 써낸 것은 ‘콜럼버스의 달걀’같은 작업이었다. 1999년 펴낸 <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이 전통문화의 다양한 상징과 그 의미에 대한 필독서가 되고, 이후 대중서임에도 이분야 참고문헌으로 자주 인용되는 점은 그의 저널리즘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전통 이해의 단초 ‘문양’ 쓸 예정
앞으로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문양’이다. 우선 우리 문양부터 시작해 외국의 문양까지 아울러 포괄적으로 들여다볼 작정이다. “전 문양이란 게 꼭 난자 같아요. 그 단세포가 분할해 사람을 만들잖아요. 문양이란게 꼭 그래요. 전통을 이해하는데에는 외형보다 그 배후와 의미가 더 중요한데, 문화현상을 다방면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문양입니다.” 문양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활속에서 흔히 보고 접하면서도 그 진면목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가령 태극문양 같은 거에요. 너무나 친숙한데도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문득 허를 찔른 듯했다. 앞으로 나올 허씨의 책이 그런 무지를 어느 정도 메워 줄 것 같다.
------------------------------------------------------------------------------------
한국의 글쟁이들/⑧ 민족문화 저술가 주강현씨
창조는 자료에서 나온다. 자료 자체는 과거의 흔적일 뿐이지만, 자료가 쌓이고 엮여 발효가 되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글이 익는다. 수없이 자료를 모으고, 그 속에 담긴 공통의 씨앗을 골라내 새 싹을 틔우는 사람, 자료들을 잇는 생각의 고리를 찾는 사람. 저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씨는 그런 점에서 가장 ‘아키비스트(기록관리전문가)’적인 저술가라고 할 수 있다. 주씨는 자신이 관심갖는 분야에 관한 한 모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또 모은다. 자료란 쌓이면서 생명력을 갖는 법. 당시에 한번 쓰고 버려지던 것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때 자료는 진정 자료가 된다. 주씨는 그렇게 자료에서 책을 뽑아내는 저술가다. 그 자신도 스스로 아키비스트란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5년 전통 미륵사상을 다룬 책 <마을로 간 미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주씨는 그 해 <한겨레>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란 시리즈를 1년 동안 연재하면서 이름을 알린다. 이듬해 이 시리즈를 묶어 나온 같은 이름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팔리며 판매부수 30만부를 넘겼다. 이후 주씨는 <조기에 대한 명상>(1998) <왼손과 오른손>(2002) <개고기와 문화제국주의>(2002) 등 전통문화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은 저작들을 이어 펴냈다. 2003, 4년 동안 잠시 책이 뜸하나 싶더니 지난해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올해에는 <독살><두레><관해기1·2·3> 등 무려 5권의 책을 펴내며 예전보다 더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펼지고 있다.
주씨의 이런 왕성한 생산력이 바로 자료에서 나온다. “생각해보세요, 신문에 전면으로 1년을 연재하려면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불가능한거죠. 사람들은 제가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로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오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왔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최근 다시 활발하게 책을 내는 것 보고 일부에서는 ‘다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언제나 학술분야 책을 쓰고 자료를 모으는 기본작업을 물밑에서 계속 해온 것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주씨의 출세작은 1996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지만, 첫 책은 1987년 <민족과 굿>(공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이전에 쓴 책만 10여권으로 학술서와 대중서를 꾸준히 내왔다. 그리고 <우리문화~>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3~4권을 써 저서가 40여권을 넘는다.
실제 주씨의 연구실인 일산 ‘정발학연’은 자료실 수준을 넘어 개인이 만들어낸 도서관에 가깝다. 책 2만여권, 녹음테이프 2000여개, 사진 20만장이 한치의 틈을 용납하지 않고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이 곳에는 집필용 컴퓨터말고 사진용 컴퓨터가 따로 있다. 혹시 바이러스 때문에 자료가 날아갈 수 있어 인터넷을 연결하지 않고 사진만 보관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제본기. 주씨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보면 당장 필요가 없어도 그 자리에서 출력한다. “나중에 언제 다시 검색해서 찾아보겠습니까. 봐서 쓸만하다 싶으면 그 때 뽑는 게 더 시간을 절약해줍니다.” 이런 출력지들, 각종 다른 자료를 항목별로, 또는 시기별로 모아서 제본한다. 메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입력하고, 원본은 따로 메모함에 보관한다.
출장이나 여행길에는 반드시 빈 바인더나 클리어파일을 가지고 간다. 현지에서 거저 구할 수 있는 모든 서류-관광안내서, 교통시간표, 홍보용 전단, 어촌계 서류 따위-를 모조리 집어넣는다. 여기에 여행에서 적은 메모까지 넣어 여행에서 돌아오면 자료철 1권이 새로 생긴다.
올해만 5권…저서 무려 40여권
주씨의 이런 자료정리는 출판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주씨 책을 다뤄본 편집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주씨의 강점은 3가지. 어떤 것을 책으로 써야할지 아는 기획력, 답사와 취재 열정, 그리고 방대한 자료다. 특히 자료에서 사진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책에 들어가는 시각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사진을 단순하게 책에 집어넣는 컷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 자체가 중요한 자료라는 점을 인식해서 오래전부터 중시해왔습니다. 민속학의 특성상 그 순간 찍어놓지 않으면 사라지거든요. 이미 제가 찍은 뒤 사라진 것들이 허다합니다.”
주씨는 “자료가 공부의 반”이라고 말한다. 기본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모으는 과정 자체가 연구와 저술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며,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자료가 진정 자신만의 자료로 변한다는 게 주씨의 지론이다. 또한 자료는 ‘아이디어의 소산’이라고 강조한다. 연구하고 쓸 거리가 많다보니 모을 것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주씨가 모으고 있는 자료에는 80년대 민중집회·연희 등의 자료도 있다. 당시 ‘대동제’ 행사 진행 및 준비자료들, 팸플릿, 심지어 기획회의록 등을 보관중이다. 앞으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란 생각에 그때부터 모아놓았던 것들이다. 이런 자료의 힘은 주씨 저술의 핵심이자 강점이지만, 반대로 문체나 구성면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료를 풍성하게 다루다보니 내용이 장황해지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을 주며, 산만하다는 평도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출판시장에서 주씨의 자리는 확고해보인다. 민속문화란 분야에서 대중들과 직접 소통하고 있는 글쟁이는 주씨가 유일하다. 이는 주씨 개인에겐 아픔을 겪은 대가이기도 하다. 주씨는 80년대 초반부터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농촌 문화와 해양문화를 취재하고 주민을 인터뷰해 녹음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렇게 10년을 보낸 뒤 저술가로 이름을 알렸고 책으로는 성공했지만, 교수가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주씨는 “교수들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한다”는 각오로 저술활동에 더욱 매달려왔고, 자신이 교수들보다 민속학을 알리는 데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바다’ 화두로 세계 항구 답사중
최근 몇년새 주씨는 ‘바다’를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다. 조기라는 물고기 한 마리로 서해안을 조망한 책 <조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한 바다 연구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를 거쳐 올해 나온 <관해기>로 기본틀을 갖췄다. ‘바다에 대한 온갖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관해기>는 앞으로 주씨가 연구하고 글 쓸 것들의 단초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주씨가 바다를 자신의 분야로 미리 잡은 것은 오랜 관심에서 나온 것인 동시에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블루오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주씨가 매달리는 일은 아시아 주요 나라의 항구 답사를 통해 제국주의사와 해양교류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푸념하면서도 주씨는 매달 어김없이 해외 현장을 찾아간다. 조만간 그 결과가 또 다른 책으로 선보일 것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⑨ 동양철학 저술가 도올 김용옥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아노였다. 도올의 집필공간인 통나무 출판사 1층 마루에는 피아노가 주인공처럼 정면에 놓여 있었다. “손을 자꾸 움직여야 노화를 막는다고 해서 취미로 배우는 거지 뭐.” 도올은 다소 쑥스러운듯 웃어넘겼다. 그러나 계속 묻자 관심사가 드러났다. “재즈를 공부하고 있거든. 방송 강의가 아니라 이젠 음악으로 강의를 하겠다는 거야. 가령 ‘도올 재즈콘서트’를 하면서 동학 같은 것을 강의하면 젊은 애들이 더 쉽게 들을 수 있지 않겠어?”
설명을 듣자 오히려 더욱 궁금해졌다. 학자가, 그것도 도올 김용옥이 재즈에 빠진 데에는 취미 이상의 학문적 관심이 있을 듯했다. 재즈에 심취했던 역사학자 홉스봄이 떠오른다고 운을 떼니 드디어 도올의 재즈론이 나온다. “나는 재즈의 역사가 20세기 미국사에서 가장 진실된 측면이라고 봐요. 그런데 흑인들이 인간의 존엄을 찾는 독립의 역사인 재즈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20세기 역사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거지. 요즘 한류를 다시 점검해보려 하는데 한류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재즈가 굉장한 가교가 되요.”
그러면 마당에 있는 평행봉은 또 뭘까? ‘건강관리’, 궁극적으로는 ‘자기 몸이 젊어지는 것’이야말로 프로 저술가의 기본이라고 도올은 설명했다. 쉰여덟 나이에도 그는 평행봉에 올라가 거꾸로 서더니 부담없이 여러차례 스윙을 해보였다.
피아노와 평행봉은 ‘저술가 김용옥’을 보여주는 두가지 상징과도 같다. 평행봉은 프로저술가로서 항상 몸을 단련하는 도올의 직업의식을 상징한다. 반면 피아노는 항상 새로운 것을 향하는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 도올은 분명 학자이면서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확실한 ‘저술가’다. 1986년 고려대를 그만두면서 아마도 교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지적인 행위로 먹고사는 ‘프로 지식인’이 된 뒤 올해로 꼭 20년째 프로 글쟁이로 확실한 위치를 지켜왔다.
무엇보다도 그가 다른 저술가들과 가장 구별되는 것은 자기만의 ‘저술 시스템’을 갖췄다는 점이다. 연구를 하고, 그 성과를 책으로 쓰고, 통나무란 전속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방송에서 강의한다. 특히 독특한 점이 전속 출판사인 통나무의 존재다. “세미나도 하고 공부를 하려면 지속적인 자금이 필요하더라고. 그래서 당대의 출판사들을 찾아가서 당시 돈으로 50만원을 달라, 앞으로 내 책이 많이 팔릴텐데 전속으로 책을 내겠다, 그렇게 제안을 했어. 그런데 아무도 그 구라를 안믿는거야(웃음). 모두 거절했어요. 그런 제안하는 이도 없었을테고 그런 발상도 생소했겠지.”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차린 출판사가 통나무다. 이후 그는 모든 책을 통나무에서 내고 있다.
인문학책 41종 내 250만부 넘겨
저술가로서 도올이 거둔 대중적 성과는 일반인들의 예상 이상이다. 지금까지 모두 41종 52권을 펴냈고, 총 판매부수는 250만부를 넘겼다. 80년대 그의 이름을 알린 <여자란 무엇인가>와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가 각각 40만부와 20만부, 방송강의로 화제가 된 <노자와 21세기>(전 3권)가 50만부 넘게 팔렸다. 이 밖에도 10만부를 넘긴 책이 여럿이다. 인문학자의 인문학책으로는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저술가로서 그가 대단한 점은 판매부수보다도 20년 동안 활동을 계속해 온 생명력, 그리고 꾸준히 변화해온 데에 있다. <여자란…> <동양학…> 등 도올의 초기 책들은 인기는 높았지만 일반 교양서 차원이었다. 하지만 이후 도올의 책은 점점 그만의 사유를 담으며 일관성을 갖고 진화해갔다. 그의 관심은 동양철학에서 시작해 조선사상사를 훑은 뒤 동학과 개화기 독립운동사를 거쳐 최근에는 현대사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민족주의를 매개로 한반도와 민족문제를 다루며 고유의 목소리로 비전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강점으로는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엇갈리는 ‘강력한 문체’가 꼽힌다. 단번에 써내려가는 집필 스타일이 더해져 흡인력이 더욱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도올의 글쓰기 스타일은 전형적인 ‘몰아쓰기’에 ‘일필휘지’형. 스스로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진다”며 “문장을 시작하면 글로 써달라고 아이디어들이 머릿속에서 아우성을 쳐서 귀찮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나는 항상 글이 잘 써져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체상의 강점은 바로 대중성이다. 도올의 글은 어려운 용어를 쓰지만 소화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는 편이다. 이처럼 자기 사유를 알기 쉬운 대중적인 언어로 펼쳐보이는 학자는 무척 드물다. “저술의 기본 대상을 항상 25~35살로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에요. 어떻게 하면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끈을 놓치지 않느냐는 것이 내 삶에서 끊임없이 벌여야만 하는 사투라고 할 수 있지요.”
저술가로서 도올의 최대 승부처는 바로 ‘시간과의 싸움’. 자신이 정말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자리가 아니면 참석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 “저술세계가 신이 되는 것, 원고를 쓰는 게 신에 대한 경배가 되는 것이 중요해요. 권력이나 명예도 저술을 위해서는 뭉개버릴 수 있다는 프라이드가 없으면 저술가가 못되.” 이는 동시에 학자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학자는 곧 저술가에요. 궁극적으로 학자의 사명은 책을 쓰는 데 있지 강의하는 게 아니야. 그 시대에 결국 남는 것은 강의가 아니라 책이에요. 강의는 사람의 마음속에 남겠지만, 그건 듣는 이들이에게 밑거름을 주는 것이지 내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올은 그러나 “프로 지식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해본 사람은 상상 못한다”고 강조한다. 요즘에는 인문학의 위기가 겹쳐 더욱 상황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사립대 교수 연봉이 한 7000만원쯤 될거에요. 내가 그 정도 벌려면 1만원짜리 책을 7만권을 팔아야 해요. 요새는 책이 안나가서 일반 교수들 정도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뭔가 끊임없이 지적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인거지. 그나마 나는 방송하고 연계하는 등 새로운 방식을 개척해왔는데도 요즘에는 불가항력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내가 저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다면 방송은 안해도 되는 거에요.”
그토록 ‘튀던’ 그도 이제 환갑을 앞두면서 바뀌는 듯하다. 요즘에는 특유의 ‘잘난척’과 ‘오버’, 그리고 ‘공격성’이 많이 덜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내가 지금 내 책을 봐도 과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수용해준 사회에 감사해요. 사실 내가 그렇게 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나를 까대고 뭉개려는 인간들에 대해 ‘너희들이 그래도 도올은 사라질 수 없다’는 생명력을 보여주려는 과시이자 생명력의 표출이었어요. 이젠 정갈한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도올 생명력 보여주려 ‘오버’했지
앞으로 그가 진화할 방향은 어느쪽일까? 분야로는 ‘현대사’, 구체적 주제로는 ‘재즈’와 ‘동학’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가 요즘 현대사를 다루는 것은 현대사에서 모든 학문이 출발해야겠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고 이념을 만들어내야 되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우리가 관찰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히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동학이란 주제도 급해요. 동학의 마지막 세대들과의 작업이 필요한데 이젠 워낙 나이 드신 분들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요.”
------------------------------------------------------------------------------------
한국의 글쟁이들/⑩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씨
1998년, 지은이 이름은 생소하지만 눈을 확 잡아끄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지은이는 한국IBM의 경영혁신팀장인 회사원 구본형씨. 40대에 접어들면서 문득 자신은 누구인지, 지금까지 무엇을 해놓았는지 고민에 빠져 구씨 스스로 답을 찾고 삶을 바꿔보기로 결심해 쓴 책이었다. 일상 속에서 변화할 것을 역설한 이 책은 상당한 인기를 누렸고, 이후 20만부 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2000년, 구본형씨는 20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난다. 당시 나이 마흔여섯. 직장인 생활을 마치면서 구씨는 자기 자신과 세가지를 약속한다. 앞으로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기로,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의 양의 늘리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을 통해 누군가를 돕기로. 이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고른 새 직업은 바로 ‘변화경영전문가’인 전업 저술가였다. 경영과 자기계발 두 분야를 대표하는 저술가 구본형(52)씨는 그렇게 등장했다.
2000년대 이후 출판 각 분야에 저술가들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경영과 자기계발 분야에는 그 수가 매우 드물다. 구씨와 공병호(46·공병호경영연구소장)씨 정도만이 손꼽힌다. 대신 이 두 사람의 지위는 확고하다. 인터넷 서점들이 저술가 개인의 이름을 내걸어 따로 코너를 마련하는 필자는 구씨와 공씨뿐이다. 변화의 전도사로서 구씨 스스로 변화를 시도해 도전한 대가로 거둔 성과다. 전업 저술가가 된 지 올해로 만 6년. 예상보다 짧은 기간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구씨가 이미 첫 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3년 뒤에 비로소 저술가로 나섰음을 알 수 있다. 10만부 넘게 팔린 두번째 책 <낯선 곳에서의 아침>과 세 번째 책 <월드클래스를 향하여>를 쓴 다음에야 사표를 내고 독립한 것이다. “과연 내가 책을 써서 살 수 있는가, 1년에 책 1권씩을 쓸 수 있는가를 시험한 거죠. 아내를 설득하는 기간이기도 했구요. 실제 1년에 1권씩 3년을 쓴 다음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경영컨설턴트는 많지만 ‘변화경영’ 전문은 적다는 점, 그리고 이를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더 적다는 점, 자신이 이미 14년 동안 변화경영을 담당한 전문성이 있다는 점, 이런 점들 때문에 후발 경쟁자들의 진입이 어려울 것으로 먼저 판단한 것은 물론이다.
저술가가 된 뒤 구씨는 정확히 2년에 3권꼴로 책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 펴낸 책은 모두 12권.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와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 등 개인들의 삶속에서의 변화를 다루는 책들이 주를 이루는 동시에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와 변화를 다루는 <공익을 경영하라> <코리아니티 경영> 등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경영·자기계발서 시장에서 공병호씨가 세상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해 구체적 방법론을 내세워 보다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면서 노골적일 정도로 실용성을 추구하는 트렌드를 대표한다면, 구씨는 보다 본질적인 분야를 다루면서 현실생활도 잘하면서 삶도 충만하고자 하는 성향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책 내는 스타일도 공씨가 일년에도 책을 몇 권씩 몰아서 내기도 하는 다작형인 반면 구씨는 규칙적이고 주기적으로 생산하는 형이다. 여기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와 <아침형 인간>으로 대표되는 지나친 부자 열풍과 기능위주의 자기계발 일색의 흐름을 비판하는 등 자기 색깔과 지향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1년 한권씩 스스로 ‘저술가 테스트’
출판계에서 꼽는 구씨는 능력은 ‘새로운 주제를 끌어가는 힘’이다. 동시에 똑떨어지는 카피와 제목을 뽑아내는 감각까지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휴머니스트 한필훈 편집장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익히 잘 알만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엄청난 독서로 얻어낸 근거로 정리하기 때문에 내용이 상투적이거나 뻔하지 않으면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고 분석했다.
독자들은 구씨의 책에서 확실한 자극을 얻을 수 있다고 평한다. 이는 구씨가 설득하는 방법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구씨는 “내게 책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과도 같다”고 말한다. “남을 설득하려면 가장 간단한 질문부터 일단 자기가 증명해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제 케이스로 설득하는게 제 스타일이죠. 처음 저술가로 나설 때에는 제가 박사도 아니고, 대단한 경력도 없고 그저 20년 직장인일뿐이란 사실이 핸디캡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 마음이, 제 경력이 곧 독자란 것을 깨달았어요. 직장인들이 왜 좌절하고 왜 힘들어하며 무엇 때문에 즐거워하고 희망을 갖는지 잘 알 수 있는 훌륭한 배경이더란 거에요.”
구씨는 저술가로서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다. 관련 분야가 아니면 글을 쓰지 않으며, 책을 낼 때도 지나치게 실용서 위주로 내는 출판사를 가리는 등 자기 브랜드를 훼손시키지 않는데 많은 신경을 쓴다. 원고도 매일 일정양을 규칙적으로 쓰고, 거의 완성이 된 다음에야 출판사를 정한다. 글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약속을 최소화하고, 강연 요청도 월 10회 정도로 제한한다. 주 7일 가운데 3일만 이런 ‘비즈니스’에 배분하며 남은 4일 중 2일은 완전히 자유롭게 활용하고, 또 다른 2일은 가족과 보낸다는 것이 생활의 원칙이다.
구씨는 “내 관련 영역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작가라는 위상을 갖춰 변화경영이란 분야에서 적절한 조언이 가능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상업성으로 보면 당장 책이 많이 팔릴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변화 추이에 따라 그에 걸맞는 전문적 조언이 필요한 분야를 골라 책을 쓰는 작업을 병행한다. 공익부문의 변화경영 필요성을 다룬 <공익경영>이 대표적이다.
시류 편승하지 않는 한국형 계발서
최근들어 구씨의 책 판매량은 초기보다는 다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시장을 따르기보다는 시장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다”고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구씨 책이 누적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그래서 극복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시장 반응이 미지근하면 실망스럽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제 이런 것에 관심 없나하는 고민도 들지요. 그래서 콘텐츠를 어떻게 재조합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구체적인 것에 목말라 있으니 직장인들이 직장안에서 생계형 월급쟁이로 살지 않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직업인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시장 흐름에 편승하지는 않되 실용적이면서 한국적 현실에 맞는, 그래서 번역서들이 가지지 못한 우리 문화적 요소를 고려한 책을 쓰는 것. 그가 요즘 세운 목표이자 차별화 방안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⑪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씨
이 시대 자기계발 및 경영 전문 저술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글쟁이가 ‘공병호’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실용서 시장에서 공병호(46·공병호경영연구소장)의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다. 대표적인 보수 자유주의자, 그리고 시장주의자로 등장했던 공씨는 이제 ‘성공학의 전도사’가 됐다. 그리고 성공을 권하는 책으로 그 역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믿을 것은 자기자신뿐’인 시대가 낳은 스타가 바로 공씨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공씨가 저술가로 변신한 것은 불과 5년여 밖에 안된다. 자기 이름을 딴 개인연구소를 열고 곧이어 책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를 펴냈던 것이 2001년, 이후 공씨는 해마다 거의 여남은 종의 책을 쓰거나 번역해 선보이면서 순식간에 자신을 브랜드로 굳혔다. 책의 소재 역시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 넓어졌다. 아들을 조기유학 보낸 경험을 살려 책을 펴내기도 했고, 스케줄과 목표를 관리하는 <자기경영 다이어리>도 펴냈다. 프리랜서 선언 이후 지금까지 번역하거나 쓴 책은 모두 60여종. 5년만에!
공씨의 이런 다산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비결은 바로 다른 저술가들과 공씨의 차이에서 엿볼 수 있다. 우선 공씨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 저술인 것은 분명해도 자신을 전업 저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스스로 규정짓는 자기 정체성은 ‘고객 성공을 위한 가치창조자’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그가 추구하는 원칙은 ‘효율성’이다. ‘효율성’과 ‘고객’은 그를 지배하는 두가지 화두다.
효율성은 공씨가 자기를 둘러썬 환경과 작업과정을 구성하는 원칙이다. 거의 도서관 수준인 그의 연구실 겸 자택인 서울 가양동의 넓은 아파트는 모든 것을 공씨의 콘텐츠 생산에 맞춰 꾸몄다. 집안은 침실을 뺀 거실이며 모든 방을 책장으로 채웠고, 책은 ‘공병호식 분류법’에 따라 ‘자서전’ ‘자기계발’ ‘경영학’ 등으로 나눠 놓았다. 집필공간은 안방에 딸린 내실이다. 마치 고치속처럼 아늑한 골방풍인데, 넓은 집 넓은 방을 놔두고 가장 작은 방에서 글을 쓴다는 점이 독특하다.
집필도 효율성으로 극대화한다. 가장 생산성이 좋은 새벽 시간은 가장 중요한 활동인 책 쓰기에 배정한다. 이후 집중도가 떨어지는 곡선에 따라 하는 일의 중요도도 맞춰 낮춘다. 새벽 3시부터 8시까지 책을 쓰고, 낮에는 강연을 하거나 잡문을 쓰다가 피곤해지면 정신적 수동 모드로 가능한 작업인 독서를 한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오후 9시께. 좋아하는 간식은 이른 아침 뇌에 포도당을 빨리 제공해줘 머리가 돌아가게 도와주는 초콜릿이다.
글쓰기, 골프와 비슷…욕심은 금물
공씨는 글쓰기 자체에는 지나치게 높은 목표수준을 내걸지 않는다. 그래서 완성도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비난도 듣는다. “글쓰기는 골프와 비슷해요. 너무 잘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땅을 때리기 쉽습니다. 제 글쓰기 원칙이 있다면 대화하듯 편안하게 풀자는 거에요. 책이 무게가 떨어진다고 비난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비난을 두려워하는 순간 책은 나올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완성한 원고는 미련을 두지 않고 편집자의 재량에 맡겨버린다. 이 역시 다른 저술가들에게선 좀처럼 찾기 힘든 태도다. 최대한 빨리 원고를 써서 넘겨 편집자들이 매만지게 하고 그 사이 바로 다른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기회비용의 원칙과 전문성에 비춰볼 때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효율성으로 짜낸 모든 것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고객’이다. 공씨는 독자를 철두철미하게 ‘고객’으로 본다. “고객들이 책을 선택했을 때 반드시 지불하는 가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 곧 값어치를 해주자는 것”이 저술 철학이다. “고객에게 확실히 가치를 제공하는 주제라면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쓸겁니다. 다음달에는 부모를 위한 영어에 대한 책이 나옵니다.” 자기 아이디어가 아닌 편집자들의 기획 제안에도 흔쾌히 응한다. 시장이 원하고 자신이 쓰고 싶다면 어떤 주제든 달려든다. “외연을 넓히는 게 좋아요. 제 아이덴티티를 확정하지 않고 만들고 허물고, 또 만들고 없애고… 평생 그럴것 같아요.”
이런 태도와 철학은 실은 일찌감치 그가 마련해놓고 오랫동안 가다듬은 것이었다. 90년대 초 연구소에 다니던 30대 초반에 공씨는 “박사학위가 끝이 아니고 시작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는 곧 “지속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면 시장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겠다는 것”이란 깨달음이었다. “그 때는 너무나 절박했어요. 그래서 평생 시장에서 생존하려면 남들과 뭔가 달라져야겠어서 향후 좌표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중간’을 골랐어요. 학자가 할 수 없고 기자가 할 수 없는 것, 그걸 하려고 한 거죠.” 이후 공씨는 주말에도 출근하면서 독서하고 글을 쓰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글을 언론에 기고하며 이름 알리기에 나섰다. 투고 기회는 자신이 언론들에 먼저 제안해서 따냈다. “주말마다 글을 썼는데 남들은 비웃었죠. 그거 돈 몇푼 하냐고.”
그런 과정으로 공씨는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갔다. “개인브랜드는 알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제 능력과 이름을 적극적으로 세일즈하는 건데, 지식인 풍토에선 그런 사람이 드물었죠. 본래 성향이 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것을 좋아해요.” 2001년 전까지 그기 지금의 공병호란 브랜드를 위해 준비한 과정은 그렇게 예상 이상으로 길었고, 덕분에 독립하자마자 왕성하게 콘텐츠 생산에 나설 수 있었다고 공씨는 설명한다.
최근들어 공씨의 생산속도는 더 빨라졌고 시장에서 브랜드의 힘은 더 커졌다. 초기 ‘2만부 사이즈 작가’였던 공씨는 2004년 낸 <10년후 한국>이 40만부 넘게 팔리면서 ‘10만부 사이즈 작가’로 한단계 뛰어올랐다. 이런 상승세는 연간 300회 가까이 펼치는 강연에서 얻는 아이디어의 덕분이다. 강연에서 아이디어와 아이템을 얻고 이를 다시 강연 아이템으로 바꿔 가다듬어 책으로 낸다. 이런 과정에서 시장 예측력을이 강해지고 다시 책이 인기를 얻어 강연요청도 늘어나면서 공씨의 수입도 초기보다 몇배나 늘어났다.
동시에 다른 저술가들에는 많지 않은 ‘안티’들도 많아졌다. 이 역시 그가 다른 저술가들과는 다른 점이다. 지나치게 경제적 성공만을 부르짖는 차가운 성공지상주의자라는 비난이 그를 따라다닌다. “모든 성공의 요인을 개인의 노력 여부로 돌리고, 약자에 대한 사회적 맥락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공씨는 이에 대해 조금 달리 생각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도 삶의 진실에 대해서는 교과서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걸 강자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고 자기들끼리 이어갑니다. 저는 그걸 <부자의 생각 빈자의 생각> 같은 책으로 알려준는 것이고, 그게 애정일 수 있어요. 섭섭하게 보이겠지만 당신들 이거 알아야한다, 알아야 안당한다고 말하는거죠. 그게 제가 사회적으로 배려하는 방법으로 이해해주세요.”
------------------------------------------------------------------------------------
한국의 글쟁이들/⑫ 우리고전 저술가 정민 교수
인문학은 정말 위기일까? 아니면 인문학 바깥에서 비꼬듯 ‘인문학자들의 위기’인 것일까? 적어도 출판 저술의 측면에서 보면 둘 다 아니다. 정민(46)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그 증거다. 이른바 지식기반사회, 콘텐츠 시대를 맞아 인문학적 콘텐츠의 쓰임새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고, 인문학 콘텐츠에 대한 사회경제적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인문학이 위기가 아니라 정반대로 최고의 기회를 맞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정민 교수는 이처럼 인문학이 호기를 맞고 있음을 책으로 입증해내는 저술가다.
정 교수가 처음으로 독서대중들과 만난 것은 1996년 <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이었다. 한시와 미학이라는 요즘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법한 두 가지를, 그것도 500쪽에 그림 하나 없는 책으로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정 교수는 보여줬다. 곧 고전이란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도전해보고자하는 분야이므로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소통하면 고전이 얼마든지 읽히는 장르로 부활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당시 나이 불과 서른 여섯. 이후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껏 이 책은 한시 입문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후 정 교수는 그야말로 물을 만난 고기처럼 책을 쏟아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 같은 잠언 소품집부터 <비슷한 것은 가짜다>같은 묵직한 에세이, 교과서속 암기대상이었던 위인들이 생생한 우리 이웃처럼 살아서 등장하는 <미쳐야 미친다>, 고전 속 문장을 곱씹어 들려주는 <죽비소리> 등 내는 책마다 한결같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여기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고전길잡이책도 썼다. 이처럼 모든 연령대를 위한 책, 다양한 버전의 책을 펼쳐보이는 저술가는 실로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한자와 한문과 멀어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정민 교수를 통해 고전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다는 점이다.
정 교수가 사람을 놀래키는 점은 저술 작업량도 많지만 항상 책의 수준을 유지하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그가 다루는 주제의 폭이 문학을 넘어 문화사 전반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가장 고리타분할 것 같은 전공을 가진 고전학자가 가장 모던한 감각으로 무장하고 독자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인문학자들과 달리 정 교수가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이유는 뭘까. 아니 그 이전에 그는 왜 이렇게 저술작업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정 교수에게 묻자 너무나 간단하고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그거보다 더 즐거운 게 없으니까.”
정 교수는 지금껏 골프를 쳐본 적도, 스키를 타본 적도 없다. 지식을 탐구하고 글쓰는게 재미있어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한 창조의 욕구는 묘한 쾌감을 동반해요. 어떤 정보 하나를 찾으면 그 뒤로 연관 정보들이 줄서서 대령하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나와요. 심지어 글쓰다가 피곤해서 무심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 펼쳤는데 논문과 관련된 페이지나 막힌 생각을 뚫어주는 힌트가 들어있는 대목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자주. 그럴 때는 소름이 쫙 끼쳐요.”
의료차트에 자료 빼곡 ‘씨앗창고로’
정 교수는 궁금한 것, 재미난 것이 생기면 거의 자동적으로 뇌가 작동을 시작한다. 요즘 구상중인 ‘조선의 여행문화’란 주제도 그렇다. 어느날 우연히 근대 일본의 여행문화를 다룬 <에도의 여행자들>이란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 우리 조선 선비들은 어떻게 여행을 다녔을까?’ 그러면 곧바로 메모가 시작된다. 제목을 정하고, 논문이되건 책이되건 어떤 내용들이 들어가야 할 지 목록을 짠다. 여행의 준비물은? 경비와 규모는? 놀러갔을 때 놀이의 규칙은?…. 다시 며칠 뒤 2차 메모에 들어가 전체 목차의 얼개를 마련한다. 관련된 스크랩이나 복사물도 덧끼운다. 이렇게 매일매일 정리한 파일을 연구실 곳곳에 비치한다.
정 교수의 한양대 연구실은 한마디로 거대한 파일의 성채다. 이 곳에는 다른 교수 연구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수백개의 의료차트를 둥그렇게 꽂아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만든 차트 보관대다. 자료 정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우연히 보고는 ‘저거다’ 싶어 거금을 주고 그자리에서 산 것으로, 정교수 일생에서 가장 성공한 쇼핑이 됐다. ‘조선의 여행문화’처럼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정 교수는 이 물건을 ‘씨앗창고’라고 부르는데,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차서 더이상 끼울 칸이 없는 상태다.
정교수가 이렇게 뽑아낸 아이디어를 글로 쓰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소통’이다. “<한시미학산책>을 펴낸 다음에 시인들이 잘 읽었다며 편지를 보내왔는데 예상 이상이어서 놀랐어요. 그 다음부터 ‘소통을 염두에 둔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제가 논문을 쓰면 우리 분야 여남은명 정도가 읽어보는데,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쓰면 수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무엇이 더 가치있냐가 아니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정 교수는 내용과 문체에서 모두 ‘전달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대중들은 정교수의 문체가 유려하다고 평하지만, 정작 정교수는 글쓰기에 있어 아름다움을 전혀 중시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줄이고, 접속사를 피해 문장을 나눈다. 가장 중시하는 것은 글의 리듬, 그리고 언어의 경제성이다. 아무리 공들여 쓴 표현이라도 퇴고과정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도려낸다. 그럴수록 전달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나면 3번 소리 내서 읽어요. 제가 읽고 고치고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아내가 읽어가다 멈추는 곳이 있으면 그건 문장이 잘못된 거에요. 그런 곳들을 한번 더 고칩니다.”
연암 다산이 ‘지식 정보화’ 스승
더 큰 차원에서는 문체의 힘이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의 힘으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주제란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는 곧 문학을 통해 문화를 지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늘 변하지만 사실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에게 이런 철학을 심어준 사람은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스승 연암 박지원이다. 정 교수는 “연암을 만나 생각하는 방식, 글쓰기 습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콘텐츠에 대한 이해를 배웠다”고 말한다. 연암에 이은 요즘 스승은 다산 정약용. 그가 보기에 다산은 “진정한 지식과 정보의 기획편집자”이며,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주는 새 스승이다. 새 스승에게 배운 바는 조만간 책으로 나온다. 제목은 <다산의 지식경영>. 다산이 어떻게 당대의 지식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책으로 기획, 편집했는지 살펴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통할 수 있는 ‘지식 정보화 작업’의 고갱이를 탐구하는 책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⑬‘먼나라 이웃나라’ 만화가 이원복 교수
깔끔해도 너무 깔끔했다. 만화가 이원복(60·덕성여대 예술학부) 교수의 서울 테헤란로 작업실은 벽 한쪽에 캐비넷이 줄지어 있는 것 말고는 온갖 잡다한 것이 일체 없었다. “사실은 오히려 어지르는 편이에요. 이것 저것 늘어놓으면 찾지를 못해서 꼭 필요한 것만 꺼내놓아 깨끗해 보이는 겁니다. 대신 집은 완전 난장판이에요. 집은 제 놀이공간이거든요.”
이 교수는 뜻밖에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놀기’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 교수의 1년 작업량은 책 2권 정도. 쪽수로는 500쪽 안팎이므로 하루 작업량은 대략 2쪽 분량이니 실제 작업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인맥이니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해서 사교 모임에 나가지도 않으니까 시간은 언제나 ‘널널’합니다. 실컷 놀고 남는 시간에 즐겁게 일하면 되요. 창조적 휴식을 갖는 거죠. 그게 확대재생산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노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으랴. 놀려면 돈·시간·건강이 필요한데, 대부분 사람들에겐 늘 이 셋 중 한두가지가 없기 마련이다. 이 교수는 그런 점에서 선택받은 사람이다. 저술가로 거둔 성공, 그리고 교수란 직업이 그에게 경제적 여유와 시간을 확보해준다. 휴식이 필요하면 과감하게 여행을 떠난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은 9년 동안 유학했던 독일. 해마다 두 세번씩 간다. “행복해요. 만화 그리면서 대접 받고, 내 시간 즐길 수 있고, 남는 시간에 일할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으면 이상한 거죠. 남들 염장 지르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니까…. 제 보기에 돈은 생존 개념만 넘어가면 자유의 의미에요. 여행 떠나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것, 그게 돈이고 자유죠.”
분명 이 교수의 말이 듣는 사람을 배아프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가 44년 동안 만화를 그려왔다는 사실이다. 올해 환갑인 이 교수의 일정은 언제나 집-학교-작업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교양 만화’라는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44년 개척한 ‘블루오션’ 교양만화
이 교수가 만화를 그린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1962년 우연히 후배 아버지가 다니는 소년신문에 놀러갔다가 후배 아버지가 그가 만화를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고는 “아르바이트 한번 해보라”고 권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필명을 쓰면서 미국 만화를 트레이싱지로 베껴가며 만화를 그렸다. 일찍 부모가 돌아가셨고, 7남매 중 막내여서 별다는 간섭을 받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했다. 대학에 들어간 197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풍은 일본것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던 그의 인생에 최대 전환점이 왔다. 바로 독일 유학이었다.
유학을 결심한 것은 만화를 제대로 배우고 싶고, 또한 그림체도 바꾸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유럽에도 만화를 가르치는 대학은 없어서 가장 비슷한 일러스트레이션을 골랐다. 유학 생활 6년에 접어들 즈음 그동안 유럽 생활속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유럽만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스테릭스>에서 영향 받은 새 그림체와 구성방식으로 시작한 만화가 <먼나라 이웃나라>다. 유럽 문명에 대해 알아야 할 각종 교양 상식을 알기쉽게 들려주는 새로운 방식의 만화였다. “만화에도 전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우영, 허영만씨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는 없겠고…, 그래서 제게 맞을 것 같은 저만의 장르로 찾은 게 ‘교양’이었어요.”
<먼나라 이웃나라>는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미국편으로 끝나기까지 20년 넘게 이어온 이 만화는 지금까지 100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여전히 이 교수의 만화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다. 또한 이 만화는 ‘이원복 만화’의 틀을 완성했다. 이후 이 교수의 만화는 이 만화에서 세운 틀을 벗어나지 앟는다. 어려워보이는 지식을 이 교수식으로 객관화, 일반화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 교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주제 선정이다. “세상을 싸돌아 다니다 보면 뭔가 보이는 게 있어요. 우리 사회에 지금 이게 빠져있구나, 이게 부족하구나 느껴지는 것들이 주제가 됩니다.” 그 다음은 자료 차례. 외국 이야기면 현지에 가서 실제 ‘분위기’를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본다. 나머지 자료는 물론 책과 인터넷으로 구한다. “인터넷은 신이 내린 선물이에요. 예전에는 외국 신문·잡지 구독료로 월 100만원씩 썼는데, 요즘에는 실시간으로 다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게 우리나라에선 인터넷 신문이 왜 공짜냐는 거에요. 외국은 다 유료인데 말이죠.”
이렇게 모은 지식은 백과사전을 기본으로 해서 가공한다. 정확성과 중립성을 위해서다. 그 다음 콘티를 짜고 그림을 그린다. 연필 밑그림까지는 그가 그리고, 펜 작업은 제자들에게 맡긴다.
세상 모든 것엔 ‘키워드’가 존재
이 교수는 자신을 콘텐츠 생산자라기 보다는 콘텐츠 전달자라고 본다. 교양만화는 ‘콘텐츠 70, 그림 30’이며 당연히 그 핵심은 콘텐츠 전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가 하는 작업을 오만하게 이야기하면 문화 통역인 것 같아요. 문화라는 것을 만화라는 언어로 통역하는 겁니다.”
이 콘텐츠란 것의 기본 원리는 ‘단순명료’란 네 글자다. 지식이나 정보 자체는 단순·명료한 것인데 이걸 어렵게 해석해서 그 위에 덧씌웠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는 것이므로, 다시 이런 해석을 벗겨내 단순명료한 본래 알맹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잡해보이는 여러가지를 묶어 명쾌하게 일반화하는 것인데, 말은 쉬워도 상당한 지적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에는 키워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는 신앙이 필요하다”고 이교수는 말한다.
난 만화가…교수는 직업일뿐
이런 일반화 능력에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독일에서 유학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외국에서 10년 가까이 살아봐서 동양과 서양의 사고를 모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독일에 자주 찾아가는 것도 유럽식 사고를 수시로 접하기 위해섭니다.”
실제 이 교수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가 합리성이다. “만화는 과학이에요. 결정적인 순간에 웃기기 위해서는 기승전결을 통한 결정적 반전이 필요해요. 그걸 짜내는 데에는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합리적 사고를 깰 때 웃음이 나오는 것이니까 합리적 사고를 알아야 역발상이 나오는 거죠. 그 역발상이 과학입니다.”
한국 만화사에서 이 교수는 자신이 의도한 이상의 의미와 위상을 지닌다. 만화가 저질문화로 취급받던 시절 그처럼 학벌좋은 교수가 만화를 그린다는 점 자체가 만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 그가 처음 한 인터뷰의 주제는 어떻게 교수가 만화를 그렸냐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저를 뽑았던 대학 재단 이사장께서 몇년 뒤 웃으면서 ‘당신 본질이 만화가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교수로 안뽑았을 것’이라고 하신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이 교수는 요즘 덕성여대 학교 모델이다.
세상이 바뀌고 만화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이 교수의 대답이다. “제 정체성이요? 당연히 만화가죠. 교수는 제 직업일뿐입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⑭‘국가대표 만화작가’ 김세영
“만화작가는 만화에서 어디까지 합니까?”
지난 여름,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 <타짜>를 제작하기로 한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는 원작 만화의 작가 김세영(53)씨를 만난 자리에서 질문을 던졌다. 김씨가 “콘티까지 짜서 넘긴다”고 말하자 차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면 한마디로 감독이네요? 만화가가 배우인 것이고.”
관객 670여만명을 동원하면서 올 하반기 최고 흥행작이 된 영화 <타짜>는 만화가 왜 ‘원 소스 멀티 유즈’ 시대의 총아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그리고 모든 문화상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야기’의 힘이란 것도 입증했다. 그러나 이처럼 만화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작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모르는 이들이 많다. <타짜>만해도 원작자를 만화가 허영만씨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원작자는 분명 이야기를 지어낸 만화작가 김세영씨다.
만화작가들이 만화 스토리를 쓰는 방식은 크게 시나리오식과 콘티식 두가지. 김씨는 늘 콘티 형태로 쓴다. 칸을 나누고 말풍선에 대사를 넣고 지문도 넣으며, 개별 장면의 이미지 배치까지 직접 연출한다. 그렇게 원고를 넘기면 만화가가 칸 안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만화작가가 작품의 아이디어 등 초기 단계까지만 맡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만화 구성의 상당 부분-김씨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것이다. 차승재 대표의 질문은 이런 일반적인 인식을 대신하는 물음이었고, 김씨의 설명을 들은 차씨가 “만화작가란 ‘영화감독’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한 것은 만화작가가 하는 일에 대한 명쾌하고 정확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만화작가계에서 김세영씨가 가지는 상징성은 실로 크다. 만화판에서 만화가가 아닌 만화작가가 개인 브랜드를 지닌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김씨는 스무살 만화가 지망생이던 1973년 우연히 만화 스토리를 보고 ‘나도 써볼 수 있겠다’ 싶어 한 번 지어본 습작이 작품으로 채택되면서 만화작가가 됐다. 올해로 33년째, 지금까지 5만~6만쪽 분량의 이야기를 썼다.
33년째…5만~6만쪽 이야기 써
김씨가 필명을 얻은 것은 허영만씨와 같이 한 첫 작품인 <카멜레온의 시>(1986)이 인기를 얻으면서 부터다. 이 만화에서 인용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집이 복간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후 김씨는 허영만씨와 명콤비를 이뤄 <고독한 기타맨> <오! 한강> <사랑해> <미스터Q> 등 히트작을 줄줄이 내놓으면서 만화작가계의 간판스타가 된다.
그러나 만화작가의 위상은 항상 열악했다. 출세작 <카멜레온의 시>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었다. <오! 한강>이 잡지에 연재될 때 처음 이름이 들어갔지만 단행본에서는 이름이 다시 빠졌다. 만화계의 관행 탓이었다. 허영만씨와 <사랑해> <타짜>로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내 건 조건은 “이름 좀 알아볼 수 있게 내달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타짜>에서도 그의 이름은 표지 한 구석에 숨은 그림처럼 작게 들어갔다. 최근 다시 나온 <타짜>에서야 마침내 김씨의 이름 석자가 알아 볼 수 있게 표지에 나왔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딸에게 “이 책이 아빠가 쓴 거야”라고 보여줬는데 “그런데 왜 아빠 이름은 없어?”라고 되물었을 때였다. 오랜 세월 쌓인 이런 상처 때문에 그는 더욱 ‘만화스토리작가’라는 말 대신 ‘만화작가’란 이름을 강조한다. 스토리 작가란 말 자체가 실제 역할을 축소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처럼 ‘아무개 지음, 아무개 그림’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다.
만화계에서 김씨는 철저하게 집안에 틀어박혀 작업하기로 유명하다. 여권은 한번도 쓴 적이 없다. 대신 집안은 모두 그가 즐기는 것들로 꾸며놓고 산다. 넓은 마루벽 전체가 영화 디브이디이고, 음악시디와 책이 곳곳을 채우고 있다. 정작 만화는 잘 보지 않아 거의 없다. 20대에는 소설에, 30대에는 시에 빠져 살았는데 지금은 ‘잡독형’ 독서를 한다. “그냥 좋아서 영화보고 책봐요. 목적을 갖고 보면 재미가 없잖아요. 작품 쓸 때도 내가 좋아하는 걸 쓰는 것이고. 모르면 못쓰니까.”
김씨의 서재에는 항상 한 가운데에 요가 깔려 있다. 그 위에 엎드려 누워 구상도 하고 손으로 원고를 쓴다. “수평 자세일 때 가장 창조성이 샘솟는 듯하다”고 웃는다. “콘티는 칸 변화가 많고 말풍선이 다양해 컴퓨터보다는 수작업이 편해요. 의성어 넣거나 하기에도 효과적이구요.”
작업 특성상 만화 스토리를 쓰는 것은 이야기와 영상을 동시에 생각하며 화연 연출까지 구상 해야 한다. 치밀한 구상이 필요할 듯한데 정작 김씨는 “그때 그때 생각 나는대로 쓴다”고 답했다. 심지어 작품 전체 구성도 미리 짜지 않는다고 한다. 치밀한 전개와 반전이 돋보이는 <타짜>를 비롯해 거의 모든 작품이 구상하지 않고 시작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취재? “<타짜>를 준비할 때 전문도박사를 이틀 동안 만난 것이 일생 동안 처음 해본 취재였어요.”
누운 수평자세일 때 창조성 샘솟아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샘물 퍼내듯 써내는 것일까. “그릇에 물이 있다고 쳐요. 물을 쏟아서 흘러가는 것을 저는 쫓아가는 거에요.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 하나를 고르는 거죠. 쏟을 물을 채우는게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거에요. 어떤 성격인지 어떤 일 하는지 정하면 그 다음에 이야기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이야기를 푸는 한가지 요령이 더 있다면 “사실은 거짓처럼, 거짓은 사실처럼, 없었던 일은 있었던 것처럼, 있었던 일은 없었던 것처럼” 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만화작가란 직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도 아니다. 만화작가가 된 것도 “쉽게 돈벌 수 있어서, 조금 일하고 계속 놀 수 있어서”였다고 털어놓는다. 허영만 화백이 그에게 가장 불만스러워했던 것도 김씨가 만화를 생업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실 주업은 없고 알바하는 기분으로 일했어요. 물론 할 때는 잘하려고 했지만. 지금도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림이 안나올 때는 내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빠져들어 허우적 대지 않는 그런 방식이 그의 성공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화계가 꼽는 김세영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스토리의 완결성을 유지하는 뚝심이다. 용두사미가 일반적인 한국 만화판에서 극히 드문 경우다. 이런 뚝심은 바둑에서 배웠다고 한다. 백수 시절, 김씨는 도피하는 심정으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살았다. 1급이긴 했지만 책보고 배운 김씨의 바둑은 온실속 화초였고, 그래서 모양을 잘 만들어놓고도 급소 한방에 무너지기 일쑤였다. 악을 쓰고 실전에 매달려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나는 바둑으로 스타일을 바꿨다. “이야기를 쓸 때는 기승전결에서 ‘전’이 가장 어려워요. 전에서 뚝심을 잃지 않고 밀어붙이는 데 바둑에서 버티는 허리힘을 익힌게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해진만큼 경제적으로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한 분야를 대표하는 위상에 견줘보면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니다. <타짜> 이전에는 이름을 알렸어도 빚쟁이로 살았다. <타짜> 하나로 10억원 넘게 벌면서 비로소 살림에 볕이 들었다고 한다.
만화팬들이 김씨에게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히트 보증수표인 파트너 허영만 화백과 헤어진 점이다. 김씨는 “서로 나름대로 일해보려고 헤어진 것”이라고 웃으며 설명한다. “이번이 세 번째 헤어진 건데요? 영화감독과 배우도 찍고나면 헤어지는 거과 비슷한 거에요.”
이름을 얻고, 허영만 화백과 떨어져 홀로 서기에 나서면서 그의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그의 이름을 앞에 세우고 신예작가를 기용해 만화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그의 만화인생에서는 중대한 고비가 될 전망이다.
실험적인 만화 해보고 싶어
출판사들이 그에게 신예급을 붙이는 것은 고료는 정해져 있는데 김씨가 유명하니 비용이 싼 만화가로 생산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타짜> 이후 그의 작품들은 “재미는 확실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완성도면에서는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공전의 히트작 <타짜>도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매체들과 출판사는 도박만화만을 집요하게 요구해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의 브랜드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그걸 잘 알지만 열악한 한국 만화시장 현실속에서 뾰족한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세영의 현실은 곧 한국 만화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국가대표 만화작가’의 행보는 눈여겨 볼 수 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실험적인 만화를 해보고 싶은데, 생업을 떠난 작품은 발표할 지면도 없어요.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
한국의 글쟁이들⑮ /서양사 저술 주경철 교수
이른바 교수들로 대표되는 지식인들, 특히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인문학에 종사하는 지식인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전공에서의 연구성과를 꾸준히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중들과 자기가 연구하는 학문을 이어주는 책을 쓰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이 두가지에 이어 한가지가 더 있다면 다른 문화권의 중요한 지식을 번역해 소개하는 일이다. 그 시대 자신이 몸담은 분야 전문가로서 지게 되는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이 이 세가지 일에 모두 충실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 세가지 사항의 필요성에 모두 동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풍토에서는 학자가 논문을 열심히 써야지 대중들과 호흡하는 책을 펴내는 것은 잡스러운 일이라고 폄하는 교수들이 아직도 훨씬 많다. 그래서 대중들이 읽고 싶어해도 읽을만한 인문학책은 잘 나오지 않고 어린 학생들이 인문학의 참맛을 느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이끌어줄만한 길잡이 책은 드물다. 반면 학자들은 거꾸로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짖고 있다.
주경철 교수(46·서울대 서양사학과)는 학자 또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이 세가지 항목에 가장 충실한 교수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만한 이다. 곧 이 시대 지식인들 가운데 자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모범 사례로 꼽힌다. 당연한 책무인 전공 연구에 충실한 동시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을 꾸준히 쓰고 있고, 주요한 외국 서양사책을 꾸준히 번역해오고 있다.
책에서 역사 분야는 누구나 좋아하는 장르처럼 보이지만 실제 역사 관련 글쟁이라고 선뜻 꼽을 수 있는 국내 필자는 오히려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계가 가장 주목할 필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주 교수다. 높은 학문적 배경, 탄탄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체계 등 모든 면에서 출판사들이 탐낼 만한 필자라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4년 걸려 6권 완역
저술가로서 주 교수의 데뷔작은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1999)다. 역사란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부담없으면서도 전문가가 썼다는 신뢰성을 지닌 역사에세이풍의 책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책을 주로 읽는 독서가들에게 주경철이란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책은 이보다 2년 앞서 나온 번역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다. 페르낭 브로델이란 역사가를 국내에 제대로 알린 계기가 된 6권짜리 방대한 이 책을 번역하는데 주 교수는 꼬박 4년을 바쳤다.
그러나 일반 독서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책은 역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2002)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만나게 해주는 교양역사서로 스테디셀러 자리에 오른 이 책은 주 교수의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렸다. 이어 ‘신데렐라’와 ‘콩쥐팥쥐’처럼 비슷한 구조의 민담이나 설화가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책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주 교수의 책 목록을 보면 이런 역사, 문명 교류와 관련한 인문학책들만이 아니라 독특하고 새로운 책들, 그리고 ‘근엄하신’ 인문학자들은 잘 쓰지 않는 책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어와 어학능력에 대한 길잡이성 에세이집인 <언어 사중주>을 다른 분야 교수들과 같이 쓰기도 했고, 청소년용 책 <문화로 본 세계사>도 썼다. 네덜란드란 나라에 대한 설명서랄 수 있는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은 우리 출판계에서 거의 처음으로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기 쉽게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
이런 다양한 책들을 통해 주 교수는 왕조 중심의 기존 역사서술방식이 아니라 프랑스 아날학파 등이 내세우는 것처럼 문화와 일상으로 보는 역사도 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다. 일단 독자들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내린다. 특히 <문화로 본 세계사>는 문화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해주는 점에서 신선하며, 내용면에서도 청소년용이 아니라 성인용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서구중심의 시각으로 유럽과 세계를 보는 시각을 교정시켜주는 점도 주 교수의 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 교수 책의 판매량은 기존 베스트셀러들의 수준에 한참 처져 있는 실정이다. 가장 많이 팔린 책도 2만부에 못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아무래도 주 교수의 전공인 ‘서양사’란 분야 자체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는 그리 친숙한 분야가 아닌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출판시장에서 역사서는 고대사나 근대사에만 집중된다. 특히 서양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이런 점에 비춰보면 2만부 가까이 팔린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등의 부수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주 교수가는 이 서양사 분야에서 ‘독보적이면서 유일한’ 필자인 셈이다.
주 교수가 대중들과 호흡하는 책을 최우선으로 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책의 필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고,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강한 의무감을 지니고 있다. 해마다 한 두권씩 꾸준히 서양사 관련 책들을 번역해오고 있고, 전공분야 책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여러 언론매체들의 요구에 가능한 한 응하는 것도 이런 철학의 소산이다. 책과 서평에 대한 질문에 주 교수는 스승 라종일 교수가 역시 다른 학자에 들었다며 자신에게 들려주었다는 “가장 좋은 공부가 바로 서평”이라는 말로 답했다. “서평을 쓰려면 책을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읽고, 생각하고, 써보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죠.” 그래서 주 교수는 학교에서도 1학기 동안 6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수업을 진행한다. <유토피아>같은 명저들과 <분노의 포도>같은 문학작품도 포함시켜 학생들에게 서평을 쓰게 한다.
16~18세기 해양 교류사 준비중
비록 아직까지는 판매가 책에 대한 평가 수준에 못 미치지만 주 교수의 책들이 독자들과 전문가 양쪽에서 좋은 평을 듣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펴내는 책들이 모두 그의 전공학문과 별개의 것이 아니며 전공연구의 부산물이자 수업의 연장이란 점이다. 학술적 글과 대중적 글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전문적인 내용이라도 보편적 교훈을 담고 있으면 독자들은 호응한다는 것을 주 교수의 책은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 교수 스스로 인정하듯 ‘주저’라고 할만한 묵직한 대표작은 없다고 봐야 한다. 전공인 서양근대 문명교류사 분야에서 자신을 입증할 책은 아직 없다. 조만간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올 책이 이제 전공 연구분야의 주저로 평가받을 것으로 보인다. 16~18세기 해양을 통한 경제와 문화의 교류사를 다루는 책인데, 열강-식민지의 체제가 만들어지기 전 세계의 모습을 큰 틀에서 살펴보는 책이라고 한다. 출간 이후에는 이 책에서 다루는 개별 주제들-노예제, 생태 및 환경의 역사-등을 더욱 심화해나갈 계획이다.
------------------------------------------------------------------------------------
한국의 글쟁이들/(16) 과학 저술 정재승 교수
“내 할일은 과학 안내자 ”
단 2권만으로 이렇게 주목받은 필자가 또 있을까? 정재승(34·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가 쓴 책은 데뷔작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1999년·동아시아 펴냄)과 후속작 <정재승의 과학콘서트>(2001년동아시아 펴냄)뿐이다. 이 두 권으로 정교수는 최고의 ‘블루칩’ 필자로 떠올랐다. 2004년 9월 <국민일보>가 출판전문가들을 상대로 국내 필자들의 브랜드가치를 조사한 결과 정교수는 과학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2005년에는 출판전문지 <기획회의>가 청소년출판 편집자들을 상대로 벌인 ‘청소년 출판의 전범이 될만한 저자’ 조사에서는 과학을 넘어 전부문 통틀어 1위로 뽑혔다. 청소년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는데도.
세월이 다소 지난 지금, 정교수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졌을 것으로 출판계는 보고 있다. 지금 우리 출판계가 가장 탐내는 필자가 바로 그다. 정교수의 책들이 거둔 반응을 보면 그만한 과학 저술가, 아니 교양저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첫 책 <물리학자는…>가 15만부 이상, 방송프로그램 ‘느낌표’ 선정도서가 되기도 했던 출세작 <…과학콘서트>가 35만부 가량 팔렸다. 교양 과학책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힌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제목에 ‘정재승의~’라고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국내 출판시장에서 이름을 내걸 정도의 필자는 실로 극소수인데도, 과학책 시장이 조그만데도, 책 한권 낸 필자인데도 제목에 이름이 들어갔다. 한성봉 동아시아 대표는 “당시 앞 책 <물리학자~>로 인지도가 충분하다 생각했고, 두번째는 의도적으로 젊은 과학저술가인 정 교수를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신예 필자를 앞세운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독자들은 지은이 정교수 자체에 호감을 나타냈다.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나온 20대 박사, 27살에 교수가 된 당시 스물아홉살 과학자. 누가 보더라도 이공계 지망생들이 역할모델로 삼을만한 이력이다. “그의 이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올린 한 독자의 인터넷 서평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씨가 독자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요인은 역시 책의 내용과 정재승식 글쓰기였다. 정교수는 물감을 흩뿌리는 현대화가 잭슨 폴록의 그림으로 카오스 이론을 설명하고, 통계학이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오제이 심슨 사건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물리학자들이 경제 영역에 뛰어든다든 등 당시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과학을 설명하는 소재로 등장했다. 문화와 과학, 경제와 과학을 연결해 과학을 설명하는 책은 그동안 없었기에 독자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과학적 범죄수사’ 후속작 소재로
두 책 이후 정교수는 이후 필자보다는 오히려 ‘책 전도사’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에 고정출연해 좋은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역할을 계속해왔고, <한겨레>에 과학책 서평 칼럼을 쓰고 있다. 도서관 운동 등에도 힘을 보태왔다. 하지만 책이나 과학과 관련없는 프로그램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고, 이벤트성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 원칙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 지명도에 비해 인터뷰도 극구 사양한다. 실제 정재승 교수가 인터뷰에 응한 것이 이 ‘한국의 글쟁이’ 시리즈로 <한겨레>와 한 것이 처음이다.
정교수의 글은 책이든 짧은 서평이든 칼럼이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가지 지식을 종횡으로 엮어 내는 것이 특징이자 최대 매력이다. 이는 정교수가 학창시절부터 오랫 동안 영화와 음악, 폭넓은 독서를 즐겨온 덕분이다.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결국 한 우물만 파는게 아니라 우물을 두 세 곳을 파고, 그 우물 사이에 지류를 내는 사람일 겁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책읽기에요.”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정씨의 특징을 한마디로 ‘명민함과 기동성’으로 평가한다. 다양한 분야의 신간들은 물론 외국 잡지에 나오는 논문이나 기사들을 꾸준히 파악해 신속하게 글쓰기감으로 활용하는 ‘기동성’, 그리고 이런 여러가지 정보를 엮어 완결된 글로 만들어내는 ‘명민함’을 갖췄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교수의 저널리즘 감각과 기획력, 그리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읽어내는 판단력도 빼놓을 수 없다. 김형보 웅진지식하우스 편집장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아는 점”을 정교수의 힘으로 꼽는다. “베스트셀러 작가와 아닌 작가의 차이는 글쓰기 능력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독자들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 시기에 무엇을 작가 말해주어야 하는지를 알고 책으로 쓰는 기획적 사고에 달려있다”며 정교수가 바로 그런 필자라고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 과학책들은 과학대중화가 어려운 과학을 쉽게 설명하고 일반 독자들이 꺼리는 숫자를 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정교수는 달랐다. 과학이 인문학, 사회학, 문학과도 통한다는 이야기를 쉽고 풍부하게 보여주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뽑아낸 것이다.”
네이처 논문도 베스트셀러도 도전
정교수 본인도 “첫책 <물리학자…>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남들이 쓰지 않아 스스로 글을 썼던 것이고, <과학콘서트>는 사람들이 정말 읽고 싶어하는 책이 이런 책일 것이라고 생각해 쓴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대성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교향곡 이야기로 출발한다든지 하는 것처럼 전혀 상관 없어보이는 두가지를 이어서 뒤통수를 치는 글을 좋아하고, 쓰고 싶어요. 동떨어져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굉장히 잘 묶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기쁨을 공유하고 싶은거죠.”
정교수는 “과학자는 자기 분야의 최전선에 있는만큼 뒤로 돌아서서 일반인들에게 지금 과학계가 어디까지 와있고 어디로 가려 하는지 말하는게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연구 외에 자기 일의 10~20% 정도는 자신이 받고 있는 지식과 혜택을 일반인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원칙을 설명했다. 그런 소통방법이 비단 책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정교수가 관심갖고 있는 것은 과학과 문화를 접목시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정교수는 실제 언젠가는 미국의 과학자이자 저술가 칼 세이건처럼 다큐멘터리로 대중들에게 과학을 알리는 날도 꿈꾸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독자들의 뜨거운 ‘독촉’이 집중되는 차기작을 출간하는 것이 당면 과제다. <과학콘서트>가 나온 지 4년 넘게 지났는데, 새 책이 늦어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정교수의 왕성한 지적 도전정신과 대중들과의 소통욕구 때문이다. 그의 활동폭이 넓어진 결과다. 그가 살짝 밝힌 후속작은 뜻밖에도 ‘범죄수사’에 대한 책이라고 한다. “추리소설을 보면 탐정들은 논리추리나 심리추리를 하잖아요. 그러면 똑같은 사건을 과학수사 요원은 어떻게 범인을 잡는지 살펴보는 거죠. 제 전공(뇌 연구)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쫓기는자인 범인, 쫓는자인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의 심리를 각각 나눠 다루는 책이 될 겁니다.”
이 책은 그의 올해 목표의 한 축이다. 정교수가 세운 올해의 목표는 ‘<네이처> 게재 논문과 베스트셀러를 모두 쓰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과학계 후배들은 물론 이공계 지망생들을 위한 목표이기도 하다. 정교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자 우리 시대 과학자의 역할모델로 이런 유형도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책 집필과 함께 책 기획도 꾸준하게 계속해나갈 작정이다. 정교수는 지난해 이미 기획자로서도 첫 책을 선보였다. 여성 예비과학자 5명이 각 분야에게 성공한 선배 여성과학자들을 인터뷰한 책 <과학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거창하게 기획이라고 말하기는 그렇고, 제가 안쓰더라도 누군가가 써서 나왔으면 하는 책 아이디어들이죠.”
글쓰기 공동체 ‘꿈꾸는 과학’ 운영
이런 후배들과의 기획작업은 그가 남들 모르게 오랫동안 진행해온 ‘글쓰기 공부’ 프로젝트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정교수는 2002년 ‘꿈꾸는 과학’이란 글쓰기 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대중적인 과학 글쓰기에 관심있는 대학생들의 연합 동아리인데, <과학콘서트>로 받은 상찬을 사회에 환원하고픈 생각으로 시작한 일로, 국내 과학 필자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것이 취지다. 전국 여러 대학에 다니는 40여명이 이 모임에서 글쓰기 강연을 듣고 토론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과학계에서 이런 일을 아직 하시는 분이 없는게 제가 하라고 남겨둔 몫 같았어요. 즐겁게 자기 분야에 대해 자기 의사표현을 잘하는 글쓰기를 같이 공부하자는 겁니다. 제가 글쟁이가 되고 대중들과 소통하게 된 것처럼 후배들이 대학시절에라도 글쓰기를 생각하고 그 경험을 공유하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절친한 벗 강금실도 애독자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
------------------------------------------------------------------------------------
한국의 글쟁이들 (18) /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출판 전시회 기획도 단골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클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
‘노하우’보다는 ‘노웨어’ 강점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 담겨 있으면서 쉽게 쓰기 지향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
------------------------------------------------------------------------------------
한국의 글쟁이들/(19) 건축저술가 임석재 교수
‘글쟁이 팔자’란 것이 있다면 건축사학자 임석재(46·이화여대 건축과) 교수가 꼭 거기 해당되지 않을까. 1995년 첫 책 <추상과 감흥>을 낸 뒤 지금까지 12년 동안 임교수는 번역한 책을 빼고도 모두 28권의 책을 썼다. 지금 우리 출판계에서 건축책을 주기적으로 쓰는 필자는 많이 잡아야 서너명 수준. 건축에 대한 우리 저자의 책을 읽고자 한다면 임 교수의 책을 피해가기란 쉽지 않다. 이런 성과가 모두 임 교수 특유의 글쟁이 기질의 소산이다. 미국 유학시절 스승들이 대부분 건축저술가인 것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뒤로 임 교수는 마치 글쓰는 기계를 연상시키듯 책을 쓰는데 매진하고 있다.
임 교수처럼 학문적 글을 쓰는 저술가들은 자신이 직접 분류, 정리한 자료라야 자료로서 활용할 수 있는 어려움 때문에 자신만의 도서관을 홀로 만들게 된다. 임 교수는 특히나 그런 학자들의 숙명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이다. 임교수가 서울 근교에 따로 마련한 자료실 겸 집필실인 방 다섯개짜리 아파트는 부엌과 자는 방을 뺀 모든 공간을 책들이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벽면을 모두 책이 둘러싼 마루 가운데에는 소파 대신 큼직한 책상이 자리잡고 있다. 슬라이드 사진 필름도 방 하나를 차지한다. 거의 원서가 대부분인 책들이 약 1만권, 슬라이드필름이 20만장이다. 역사자료는 시대순으로, 인물자료는 알파벳순으로 정리해 놓았다. 본인 스스로도 “모은 책이 아까워서 딸에게 건축을 전공해보라고 꾀고 있다”고 할 정도다. 바보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자료가 많이 필요하냐고.
“건축 자체가 종합학문이에요. 그래서 책을 쓰는 것도 종합적인 시각을 필요로 합니다. 건축현상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배경역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경제와 공학기술도 알아야 하구요. 그리고 예술적 심미안이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건축책은 글과 이미지를 함께 다룰 수 있어야 쓸 수가 있어요. 필자가 직접 이미지를 해결하지 못하면 글과 이미지가 잘 조화를 이루는 책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축은 종합학문…자료 불을 수밖에
자료가 많아야 하는 이유는 고스란히 건축책 쓰는 어려움에도 해당된다. 다른 인문학과 달리 노트에 볼펜만 들고 책을 쓸 수 없어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나가야 하고, 수많은 관련지식과 시각 가운데 무엇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머리에서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도록 평소 많은 것을 읽고 생각해놓는 수밖에 없다. “자료란 눈덩어리 같아서 어느 정도 규모가 되어야 굴러가요. 물론 사놓고 평생 안볼 책도 있지요. 그런데 그걸 버리면 나머지 자료들도 같이 죽어요. 경영효율로는 설명이 안되는데 학문적으로는 그래요. 자료가 많아지면 생각이 넓어지는 효과도 있어요. 자료가 오히려 연구주제를 넓혀주기도 하는거죠.”
하지만 그런 당위성과 의무감보다도 오히려 자료정리를 취미처럼 즐기는 ‘체질’이 더 필요해보였다. 실제 임 교수의 자료정리를 보면 거의 ‘애정’ 수준이다. 슬라이드 20만장을 따로 보관한 방에는 필름 보호를 위해 곳곳에 습기제거용품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슬라이드철 사이에 끼우려고 크기를 맞춰 자른 신문지 1만장을 따로 준비해놓았다. “습기 제거에는 신문지가 최고거든요. 제가 동네 돌아다니면서 신문지를 모아와 제자들 도움받아 자른 겁니다.” 그 말을 듣고나니 자료철 하나하나 손글씨로 써붙인 항목 인덱스와 책장에 붙인 자료 구분표는 차라리 대단치도 않아 보였다.
임 교수의 일상은 모든 것이 글쓰기에 맞춰져 있다. 방학이면 해외로 취재를 가고, 평상시에는 전국 답사를 한다. 요즘처럼 방학을 맞아 집중적으로 책을 쓸 때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운동시간 1시간과 낮잠 20분을 빼고 오로지 글을 쓴다. 대신 글쓰는 장소는 자주 바뀐다. 노트북들고 거리로 나가 카페에서, 다른 대학 식당에서, 때론 패스트푸드점에서 혼자 원고를 쓴다. 약간 트이고 약간 소음이 웅웅거리는 공간이 머리에 더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도 멋적은듯 웃는다. “저도 왜 이러고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10여년만에 28권의 책을 써서 독자들과 건축을 이어줄 수 있었던 비결은 실로 단순했지만 대신 확실했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고급학술지부터 서민들 골목길 풍경까지 훑고 다니다 보면 생각이 범벅이 되면서 책 쓸 주제는 절로 떠오른다고 한다. 일단 주제를 정하면 2~3일 다른 작업을 쉬고 기획을 한다. 그 다음 항목별로 노트북에 바로 풀어쓰면서 인용도 집어넣은 다음에 정밀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처음부터 다시 손을 본다. 그 다음 사진자료를 가져와 내용을 고치는 3단계를 거쳐 책을 쓴다.
임 교수는 “교수라는 직업과 학술저술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학술저술을 고를 것”이라고 잘라 말하지만, 그가 이렇게 책을 많이 쓸 수 있는 것은 물론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덕이 크다. 해외취재만해도 경비 600만~700만원에 필름현상비만 300만원 넘게 든다. 이를 포함한 1년 연구비는 대략 2000만~3000만원 선. 반면 들어오는 수입은 훨씬 못미친다. 건축책은 대중적인 것이라도 1만부는커녕 3천~4천부를 넘기기도 힘들다.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임 교수는 더욱 쓰는 책의 종류와 폭을 넓히고 있다. 초기 정통 학술서에서 시작했지만 대중건축서로도 <건축 우리의 자화상> <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 등을 냈고, 전통건축책도 7권을 냈다. 서울 달동네 골목길들을 답사한 <서울 골목길 풍경>같은 독특한 책도 있다.
독특한 사관 깃든 ‘서양건축사’
그렇지만 역시 가장 주가 되는 작업은 역시 전공인 서양건축사 책들이다. ‘임석재 서양건축사’란 부제를 달고 있는 5권짜리 시리즈가 현재 <땅과 인간> 등 3권까지 나와 있다. 한국학자가 서양건축사 통사를 쓴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노작이다. 여기에 모두 30여권으로 기획해 9권까지 펴낸 ‘서양근현대건축사 시리즈’가 있다. 그의 건축사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학자인 그의 독특한 ‘사관’이다. 그는 건축사를 ‘중층변증법’이란 자기만의 개념으로 풀이한다. 해양성과 대륙성, 남성성과 여성성, 정주성과 유목성 등 대립되는 수백가지의 쌍개념들의 복합작용으로 건축을 분석하고 이를 겹겹이 교직해 특성을 파악하는 방식이다.
건축가 주인공인 소설도 계획중
앞으로 쓸 책 계획에는 사진집 같은 예상 가능한 것들과 함께 뜻밖에도 ‘미스터리 소설’이 들어 있다. 이탈리아의 천재 건축가로 라이벌 관계였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이탈리아 가톨릭 문명을 총괄해 알려주는 책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거의 건축을 소재로 하면서 책의 십진분류법 모두에 저자 이름을 올리겠다는 태세다. 글쟁이 팔자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새로운 건축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은 임 교수의 새 시도를 더욱 부추길 듯하다.
------------------------------------------------------------------------------------
'Fact >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부처님의 근본교설 (0) | 2009.12.04 |
|---|---|
| 불교의 기초교리 강좌 (0) | 2009.12.04 |
| 불교의 체계적 이해 (0) | 2009.12.04 |
| 영어는 쉽다 (0) | 2009.12.04 |
| 한국의 책쟁이들 (0) | 2009.12.03 |
| 여행중 필요한 일본어 회화 (0) | 2009.12.03 |
| 한국의 미스테리 9가지 (0) | 2009.12.03 |
|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영어 (0) | 2009.12.03 |
| 파워포인트 제작의 10대 원칙 (0) | 2009.12.03 |
| 한국 vs 일본 해군력 비교 (0) | 2009.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