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책쟁이들

Fact/상식 · 2009. 12. 3. 23:57
한국의 책쟁이들/① 프랑스 유학 1세대 불문학자 민희식 선생


청계천 복개판 위에 세워진 삼선시장. 격한 구호에서 철거를 둘러싼 의견충돌이 드러난다. 삼선서림은 불이 켜진채 문이 잠겼다. 삼선로터리에서 성북동 방향. 구의원 선거원들이 기호와 이름을 합창으로 반복하는 행길. 90도를 꺾어 골목으로 들면 갑자기 한적한 주택가로 변한다.

‘고향떡집’ 맞은 편 이층 집. 성성한 백발의 노인이 막 대문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지난 여름 삼선서림에서 스치지 않았다면 그냥 슈퍼에라도 들를 참인 주민일 터다. 민희식(73) 선생. 해방 뒤 프랑스에 유학한 1세대 불문학자.

그는 요즘 간다라 불교에 흠뻑 빠져 ‘인생 이모작’ 중이다. 지난 화요일에는 마라난타 기념관 준공식에 초대되어 영광 법성포에 다녀왔다. 백제에 불교를 전한 승려로만 알려진 마라난타. 파키스탄 초타 라홀에서 나 승려가 된 그가 페사발, 스와트, 길기트 훈자를 거쳐 텐산산맥을 넘어 구자국에서 수행을 하고 둔황을 거쳐 중국 동진에 이르고, 다시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배를 타고 백제의 법성포에 이르러 불법을 전한 경로를 밝혀냈다. 법성포를 도래지로 지목한 것은 아무포, 부용포에 이은 불교적 지명, 함께 가져왔다고 전하는 불두, 매향비가 남은 까닭이다.

간다라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 유학 때부터. 그동안 불문학 전공에 몰두해 묻어둔 화두를 퇴임 뒤 본격적으로 꺼내 들었다. 마라난타 연구를 위해 파키스탄 현지를 답사한 게 일곱 차례. 문헌조사와 도서구입을 위해 일본 3번, 프랑스·중국에 다녀왔다. 파키스탄 정부의 의뢰를 받아 관련 책 3권을 썼다. 불교방송에서 1년반 간다라 미술을 강의했다. 퇴임하면서 한 트럭의 책을 정리해 숨통이 틘 집안이 다시 책으로 넘쳐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는 간다라 미술이 실크로드를 거쳐 한국으로 오면서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불상 양식의 변화는 물론 사상의 변화까지.

25년 동안 한 번도 이사하지 않은 집안에는 세월이 고였다. 쌓이고 쌓인 책은 줄잡아 7만권. 다섯 개의 방에 흩어져 보관돼 있다. 이층에 둘, 일층에 하나, 지하실에 둘. 그가 주로 머무는 곳은 이층의 오른쪽 방. 사방이 책이고 가운데는 책상이 셋, 복사기 한대. 비집고 책꽂이로 다가가 책을 뽑은 뒤 책상에 앉아 읽거나 쓸 수 있을 뿐이다. 편한대로 안락, 등나무, 보통,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번갈아 이용한다. 천장은 빠꼼할 줄 알았는데, 전등과 함께 스피커가 매달렸다. 한차례 다과를 바꿔가면서 무려 다섯 시간동안 노 교수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현지 답사…불교방송 강의도


조선어 사용금지, 창씨개명 등 엄혹한 유소년기를 거친 그한테 일본어는 사실상 모국어였다. 해방 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영어와 함께 한글 자모를 익혔다. 혼란스런 해방과 전쟁통. 제대로 교육받은 기억이 없다. 일본인들이 빠져나간 대학과 학과는 껍데기였다. 10~20년 전 기초프랑스어를 배운 이가 하루아침에 교수가 되었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배우는 셈이었다. 강의는 대부분 휴강. 게다가 그는 대학입학 전후 군대를 이중으로 다녀와야 했다.

프랑스 유학 때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 59~64년 프랑스 정부장학금으로 5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렀다. 책, 여행, 박물관, 공연관람을 통해 그동안의 갈증을 채웠다. 박사논문은 플로베르. 발자크의 <인간희극>을 영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보려다 방향을 바꿨다. 지도교수는 1년을 지켜보다가 “건너편 육지가 보일 때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한 우물만 깊이 파는 대신 널리 그리고 이질적이고 대비적인 부문을 함께 공부할 것을 권했다. 거기서 공통점을 찾아내면 자기 것이 된다면서. 논문 주제는 <보바리 부인>. 쉽게 이뤄지는 것에는 무관심하고 될듯말듯 벅찬 것에 몰두하는 사람 이야기. 병리가 규명되니 묘사의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이 쉬워졌다. 두집 짓고 난 뒤의 행마처럼.

입국해서 그가 펼친 프랑스어 교수법은 획기적이었다. 당시 외국어 교육은 관사, 형용사 변화 등 문법을 외우게 하는 구태의 반복. 완전한 문장으로 가르치는 그의 강의는 인기가 높았다. 가르칠 책도 없는 형편.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번역해 냈다. 귀국 일주일만에 뚝딱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학생은 물론 외교관을 가르치고 정부에 프랑스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해야 했다. 그렇게 40여년. 성균관대 이화여대 한양대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렀다. 번역 또는 지은 책이 100권을 넘는다.

프랑스어의 직설법-접속법 구분은 그의 삶에 배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지기, 생각(바람)과 현실을 분리해서 사고하기가 그것. 접속법은 “(서점에 있는) 그 책을 사다줄 게”라 말할 때 쓰는 화법. 팔렸으면 못 사다주지만 자신의 말을 어긴 게 아니다. 테제베 도입 협상 당시, 약탈해간 강화도 서고의 ‘의궤’를 돌려 주겠다고 했을 때 프랑스 대통령이 사용한 어법이다. 프랑스는 목적한 고속철을 팔아치웠고 의궤를 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핑계는 실무담당자의 반대.


‘불교 교수법’ 개척…쓴 책 100권


잠시 휴식. 나머지 네 곳의 책방 탐험에 나섰다. 같은 층 건넌방.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구조. 주로 일어 문고본. 시리즈별로 나뉘어 겹으로 뉘었다. 책꽂이 맨 위에 그의 저서와 역서가 먼지를 썼다. 의자를 놓고 하나하나 내려 쌓으니 키를 넘어 쌓을 수가 없다. 바닥에 두 겹으로 늘어놓고 카메라를 통해 보니 책등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표정이 착잡했다. 쪽방에는 불교책 500~600권이 쌓였다. 지하실은 본래 보일러실. 바닥을 깔고 책을 부려놓았다. 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 불문·영문의 전공책, 백과사전만은 종이상자 또는 책꽂이에 두었다. 전공책은 그의 존재증명과 같아서 손이 타지 않는 곳에 두고 필요할 때만 꺼내본다고 설명했다. 보고나서는 제자리에 반납한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은 모두 있고 백과사전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프랑스 백과사전은 너무 상세해 자주는 안 본다. 일층은 일반책이라 건너뛰었다.

다시 서재. 과연 이 많은 책 가운데 원하는 책을 바로 찾아낼 수 있을까? 방마다 분야별로 나누고 책꽂이를 세분해 대부분 잘 안다는 답변이다. 하지만 서재의 책은 손을 많이 타는 통에 둔 곳을 잊는 경우가 잦다고 털어놨다. 같은 책을 다섯 권이나 반복해 산 것도 있다. 이중으로 쌓아둔 책 뒤로 넘어간 책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 귀한 책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까치발로 (M. E. Burnouf 역. 프국립인쇄소, 1973)를 뽑아왔다. 법화경의 불역본. 19세기 초 초판이 나왔고 3단계로 걸쳐 완간되었다. 내용이 상세해 한문, 또는 국역본으로는 불분명하던 개념이 쏙쏙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희귀본이나 절판본은 관심없소. 관심이 있는 것이 귀할 뿐이오.” 그의 관심사는 불문학과 간다라문화. 불문학에 관심이 쏠렸을 때는 그쪽 분야의 책이, 간다라에 쏠렸을 때는 그쪽의 책이 무한 가치를 갖는다. 지나고 나면 껍데기다. 딩동댕 정답. 눈호사를 하려다 호된 꾸지람을 받은 꼴이다. 저·역서 책 무더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그래서 착잡했던 걸까.

퇴임하면서 연구실에 있던 책은 “집으로 나르기 귀찮아”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었다. 요즘도 빌려달라는 이한테 선뜻 빌려주고 반납을 채근하지 않는다. 책은 다른 것과 달리 대체 불가한 것. 자신의 욕심에 견주어 다른 사람들의 책욕심을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책 알맹이는 다 뽑아져 그의 머리로 옮겨지고, ‘괜찮은 책’은 빌리는 형식으로 다른 주인에게 옮겨졌으니 책꽂이의 책들은 빈 껍데기처럼 보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탐내지 않는 책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터.

“우리 집은 도둑이 든 적이 없어요. 책밖에 없으니까요.” 살 때는 제값이지만 팔때는 값없는 책, 책들. 하긴 살때만 사용가치와 싯가가 일치하지 않겠는가. 외출 때도 대문만 잠근다. 그가 쓰는 방은 온통 책과 책상, 그리고 침대 하나뿐. 나머지 옷장이나 장식장 따위는 모두 마루에 나와있다. 책 이외에 하다못해 골동품 하나, 그림 한점 없다.


책밖에 없으니 도둑도 안 드네요


요즘도 그는 하루에 책 3권을 읽는다. 식전에 한권, 일과 중 돌아다니는 중에 한권 그리고 저녁때 잠자리에 들기전 한권. “하루 다섯권을 읽는 사람도 있는데요 뭘.” 요령은 삼매경. 집중하면 안될 것도 없다. 전철 같은데서 오히려 집중이 잘 된다. 책의 핵심은 20%, 나머지는 불필요하거나 보조적인 내용이라며 핵심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빨라 걱정이다. 책을 사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가까운 삼선서림은 산보삼아 들른다.

정원 한쪽 맑은 물웅덩이. 비단잉어와 금붕어가 노닐었다. 청계천 상류다! 도시가 아스팔트로 뒤발하고 있어도 맑은 지하수는 흐르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선거판 구호의 시끄러움과 아랑곳없이 책에 침잠한 은사가 있는 것처럼.

-------------------------------------------------------------------------------------

한국의 책쟁이들/②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


“서운하시겠어요?”

“무슨 말씀을…. 좋은 집으로 시집 보내는 기분이라 즐겁고 기뻐요.”(<갑사로 가는 길> 117쪽)

92년 그는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연구실과 집에 있던 책 여섯 대 분량(1.5t 트럭)을 강남대 도서관으로 실어보냈다. 정말 즐겁고 기뻤을까.

5월 말 찾아간 이상보 국민대 명예교수의 서대문구 홍은동 집은 깨끗했다. 거실 책꽂이에 자신 및 가까운 지인의 최근 저서, 작은 방 두 벽에 전공인 국어국문학 관련 책, 침대 방에는 최근 헌책방에서 사들인 잡학 책이 쌓였다. 그뿐.

단행본(H) 2만4809권, 연속간행물(HP) 1059권, 참고도서(HR) 851권, 논문(T) 523권. 그가 서너 차례에 걸쳐 강남대에 기증한 책들은 도서관 4층 종합정보자료실 한쪽 별도의 공간에 비치돼 있다. 7단복식 2연서가 40개 분량. 그의 호를 딴 한실문고다. 문고 이름 첫자를 따 분류기호 앞에 H 기호를 부여했다. 관외대출은 안 되고 열람 또는 복사만 할 수 있다. 영구보존 조건에 기증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92년 장서 인수 당시 강남대도서관 장서는 20만권. 한꺼번에 1/10이 늘어난 셈이다. 인수작업에 간여한 강남대의 한 직원은 “이 박사의 장서는 우선 양이 많았고 국문학 쪽으로 특화돼 소장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한번만 봐서인지 거의 새책 수준이었고 출판사에서 증정한 책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기증도서 목록을 보면 분류기호 800대 도서가 70% 가량 차지하고 그 가운데 시집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한문책은 도서관 2층 고서자료실에 잠금장치를 두고 전시하고 있다. 도서관에서는 그가 연락해올 때마다 고인 책들을 인수하기로 약조했다.

그가 장서를 기증한 것은 물리적으로 그가 더이상 책을 보관하여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 아파트가 비좁을 뿐더러 나이듦에 따라 책의 활용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50년 이상 국문학 분야로 특화해 모은 책은 그의 분신과도 같았다. 종이뭉치로 전락해 먼지를 덮어쓴 모습이 마치 자신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책은 인간과 다른 운명을 가진 것. 표지를 닦고 먼지를 떨어내면 그 속의 콘텐츠는 다시 무시간성을 회복할 터. 젊은이들이 그 책들을 들춰 그 안의 진미를 맛보면 자신의 국어국문학 열정 역시 전해지지 않겠는가.

도서관에 둥지를 튼 그의 장서는 행복하다. 한살이를 끝낸 책들이 또 다른 한살이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장서가들의 책은 도서관에서 거절당하거나 홀대받기 일쑤. 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집된 책은 패총처럼 분야와 층위가 잡다하기 마련이다. 질이 담보되지 않을 뿐더러 도서관의 자료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따른다. 하여, 나름대로 모아진 자료를 귀중하게 여기는 소장자와 일정기준에 따라 필요한 것만 받겠다는 도서관의 입장이 달라 ‘일괄 인수-보존’은 이뤄지지 않는다. 서가정리 겸 기증생색을 내려 귀중자료는 빼고 나머지만 인수해 가라는 사람조차 있다고 사서들은 전했다.

장서를 의탁한 강남대는 이 교수의 모교. 그는 동국대 국문과를 다니면서 강남대의 전신인 중앙신학교 2년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한국전쟁 뒤 혼란기에서 믿을 이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국군이 적을 퇴치하고 있으니 서울시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선무방송은 대전에서 녹음된 것이었음을 나중에 알고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터다. 환도하자마자 세운상가 자리에 있던 신학교에 등록해 함석헌 등에게 초교파적 신학을 배웠다.

“내 나이가 얼마나 돼 보이오?” “예순 다섯?” 약간의 아부섞인 대답. “올해 여든이오.” 실제로 그의 얼굴은 10년을 낮잡아볼 정도로 젊어보였다. 무슨 비결이라도?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했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치지망생이었다. 학생이자 교사 시절 그는 원효로 건국청년훈련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났다. 악수를 할 때 쇳덩이를 쥔듯 했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 수시로 경교장을 드나들면서 먹물 시중을 들거나 잔디밭에서 공을 찼다.

“을지로에 살았는데, 피난하면서 ‘이상보 동지에게’라고 백범이 서명한 <백범일지>를 항아리에 묻어두었소. 돌아와 보니 쑥밭이 되어 찾을 수 없었소. <백범일지>가 눈에 띄면 사 모으는 습관이 생긴 것은 그때부터요.”


고전시가 찾으려고 발로 글을 썼지


백범 사회장 때 그의 영구차 끈을 잡고 장례행렬에 참가한 뒤 다니던 단국대 정치학과를 때려치고 동국대 국문과로 편입했다. 그 이후는 국어국문학 인생. 한때 시집을 낼 만큼 시를 좋아했던 터, 고전시가를 전공하기로 하고 조선시대 3대 가객 중 ‘노계 박인로 연구’로 석사학위를 땄다. 정송강(김사엽), 윤고산(이재수)은 선점되었기에 박노계로 물꼬를 잡았다. 박사학위는 ‘가사문학의 연구’.

“옛 시가를 연구하니 시골 노인들이 옛날 책을 가지고 찾아오곤 했소. 한글 시가가 한두 편 섞인 문집은 아주 소중한 자료였소.” 목판본 문집은 5만원, 필사본은 10만원 하는 식으로 구입했다. 그가 산 고서는 골동품으로서가 아니라 연구자료로서. 이탁본 농가월령가 등 조선시대 기사를 발굴하면 하는대로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대부분이 일차적인 사항을 망라한 ‘발굴보고서’다. “요즘의 신문기자와 흡사하오. 전국 안 다닌 절이 없을 정도로 발로 글을 썼소. 요즘은 자료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소.” 웬만한 자료는 모두 햇빛을 보았다고 본다. 그는 ‘디지털 시대의 국어국문학 연구’가 마뜩찮다는 표정이다. 문예학이다, 사회학적 관점이다 해서 남이 써놓은 논문을 종합해 냅다 자기 얘기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19, 20세기 가사 자료가 많은데 미답지경이오. 지은이를 밝히려면 족보도 찾아보고 해야 하는데 힘이 달려요. 누군가 젊은이가 한다면 전부 넘겨줄 의사가 있소.”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한 듯, 얘기해도 듣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의 책에 대한 관심은 여전해서 들며나며 집에서 가까운 헌책방을 들른다. 그 좋은 책들이 주인을 못 만나는 게 안타깝다. 자신이 거두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한두 권씩 집어온 책이 다시 쌓인다. 장서의 빈자리처럼 허허한 가슴을 채우거나, 매만지고 냄새맡는 완상 수준에 머무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줌에 드는 작은책, 이름하여 좁쌀책. 기증도서에 포함하지 않고 지금껏 애완하는 책이다. ‘부지기수’라지만 2천권쯤 되지 않을까 추정한다.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오.” 그는 여행가방 먼지를 떨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또다른 상자. 그것을 열자 비로소 좁쌀책이 우수수 쏟아졌다. 베트남판 춘향전, 일본·중국 시집과 유교경전, <고험요람> 등 옛책, 프라하에서 구입한 성구집, 바라밀경, 코란경, 호주 교포가 준 열쇠고리형 성경 등등. “이것좀 보시오” 하는 근엄했던 그의 표정은 아이처럼 바뀌었다. 1992년 러시아 철도여행 중 샀다는 <레닌 약력첩>. 1.7×1.8cm. 컬러사진과 활자가 빼곡하다. “보여줄까 말까?” 인주함 크기의 상자를 열자 인주 대신 동그란 구멍 속에 ‘작은 물질’이 들었다. 3.5×3.5×2.5mm. 핀셋으로나 집히는 게 책이다. 돋보기로 봐도 글자를 알아볼 수 없지만 분명히 활판인쇄다. 그렇다니 그런 줄 안다. 독일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구한 것이라며 회심의 미소다. “좁쌀책은 그 나라의 인쇄기술을 그대로 보여주지요.”

그를 비롯한 몇몇 좁쌀책 애호가들이 글을 모아 <나의 애장서> <나의 좌우명>이란 책을 만들어 나눠가졌다. 일련번호를 붙여 400부 한정본으로 만들었다. 1999년에는 그 혼자서 <인도차이나 역사기행>(민속원)이란 책을 만들었다. 일반판매를 하려 했지만 서점에서 분실 우려가 있다며 맡지 않더란다. 그는 실컷 자랑을 하고 한 권도 흘리지 않고 도로 여행가방에 넣었다.


지적 자산 보존 수집가가 애국자요


좁쌀책과 더불어 그의 계속되는 관심은 문학비 건립.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의 이름으로 문학비 23개를 세웠다. 이달 하순에는 정태진 문학비(파주도서관 앞) 건립을 앞두고 있다. 이 동호회는 나손 김동욱 박사의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의 후신. 31개의 시비를 세운 바 있는 나손의 동호회는 90년 그의 타계와 함께 이 교수가 대를 이었다.

“책 수집가, 그 사람들 애국자요. 자칫 인멸될 지적 자산을 보존하여 세대를 중개하는 몫을 하니까요.” 폼 안나고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의미깊은 역할을 하는 그들이 정당하게 대접 받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자신의 약력을 참고하라면서 140쪽 수필집 <갑사로 가는 길>(범우문고 219)과 95년에 나온 <고서연구>(한국고서연구회 회지 11호)를 건넸다.

그는 요즘 ‘아름다운 가게’ 다니기를 즐긴다. 책값 싸서 좋고 이익금은 불우이웃돕기에 들어간다면서….

-------------------------------------------------------------------------------------

한국의 책쟁이들/③ 이석범 장서가협회장


책꽂이 앞에 서서 사진기자를 향해 수줍게 웃는 40대 초반의 부부. “서가가 먼지 한점없이 가지런하다”고 설명돼 있다. 82년 10월 <주간여성>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모범장서가상을 받은 이석범(당시 42세, 동구여상 국어교사)씨 집 탐방기사가 실렸다. ‘독서의 계절, 가을… 책모으기 15년에 장서 2천5백권’라는 제목. 기사를 보면, 그는 주머니에 몇백원만 생기면 책방으로 달려갔다. 새책방에서 목록을 확인하고 책은 주로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아내 보기 미안해 사들인 책들은 직장에 두기도 하고 다른 방에 살짝 감추기도 하고 맡겨두었다가 낱권으로 나르기도 했다. 어려운 살림에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가 결혼 19년만인 전년 여름 동해로 해수욕을 다녀왔다. 책 욕심에 아내에게 치마 한감, 털 스웨터 한벌 선물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06년 6월. 2천5백여권의 책은 1만2천여권으로 불어나 단독주택 옛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새 아파트로 옮겨졌다. 책의 주인 이석범씨는 예순여섯, 지난해 동구여상에서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그가 서있는 배경은 여전히 먼지 한점 없는 서가였다. 4년 전만해도 그는 냉천동에서, 그 이태 전까지는 천연동 구옥에서 27년을 살았다. 남들은 집을 넓힌다, 아파트를 장만한다고 하는데, 그는 그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짐 때문에 이사할 엄두를 못냈다. 원인은 그·놈·의· 책이다. “월급을 봉투째 집에 가져오는 경우는 없었어요. 따로 나오던 수당이나 과외비는 당연히 책값으로 들어갔죠. 생존 이외의 것은 서화를 사는데 들어갔다고 하면 맞아요.” 불어나는 책과 함께 아내의 불만도 조금씩 불어났을 터.

“물어보지 마세요. 안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중에 소장품을 팔아 호강시켜 줄라나 모르지만…. 남편 마음이 딴데 가 있는데 무슨 호강을 해요?” 마침 외출했다가 점심을 차려주러 잠간 들른 부인 이종순(65)씨의 말에는 뼈가 들었다. “그대신 술을 안 하니까 술값이라고 생각하고 잘 살았어요.” 눅잦히는 덧말에 굳어졌던 남편의 표정이 비로소 풀렸다. 그놈의 책은 부부간 감정의 골에 완고하게 존재하는 셈. 안방에 시집 3천여권, 작은 방에 국문학 책 3천여권, 거실에 각종 미술 책이 수백권. 쉬엄쉬엄 옮겨온 게 그것이고 나머지는 옛집 옥탑과 지하실에 보관돼 있다.


술값이라 치고 살았다는 아내


“고교때 친구가 읽던 딱지본 삼국지가 부러웠어요. 얼마나 읽었는지 내용을 달달 외더군요. 빌려달랬더니 아버지 핑계를 대며 선뜻 빌려주지 않더라고요.” 여러 번 졸라 허겁지겁 읽었지만 그 허기는 훗날 월탄 삼국지를 읽고서야 끌 수 있었다. 서울맹학교 보통사범과 재학 때, 일정액을 헌책방에 맡기고 빌려읽은 책 정가의 10~20%를 빼나가는 식으로 책을 섭렵했다. 한 여학생한테서 민중서관 한국문학전집 38권을 한권씩 차례로 빌려 모두 독파한 기억이 있다. 운산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66년 맹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그는 점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책들을 5년동안 학생들에게 읽어주며 동시에 자신의 독서량도 채웠다.

그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동구여상 교사 시절 국제대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전공은 물론 자신이 맡은 국어수업과 관련된 책이 시작이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집, 소설집 등 실물을 구해 수업 교재로 활용해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 모으는 재미와 속도가 붙으면서 그는 헌책방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 홍제동 대양서점 주인 정종성씨는 “교사 재직 때는 토, 일요일이면 꼭 들르곤 했다”면서 “책 외에 그림과 글씨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옆집 세탁소 불로 타거나 그을고, 장맛비로 옥탑이 새면서 젖어서 할 수 없이 버린 100여권 외에 그의 집으로 옮겨온 책들은 애지중지 호강이었다. 떨어진 것은 붙여지고, 이빠진 것은 짝이 맞춰졌다.

현재 그는 최성장, 김관호, 박기연, 진병노, 신영길씨에 이은 장서가협회 6대 회장이다. 이 협회는 출판문화협회가 주는 모범장서가 표창을 받은 사람을 회원으로 1972년에 조직되었다. “상서기풍을 진작하여 서적수집과 독서연구의 상호협동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단체다. 모범장서가는 64년부터 74년을 제외하고 매년 수상자를 내고 75년부터는 <상서>라는 이름의 회지를 내어왔다.

“순수하게 읽기 위해 스스로 발품을 팔아 한권두권 책을 모은 사람을 대상으로 했어요. 나라 안에서 발행한 단행본 2000권이 넘으면 자격이 주어졌지만 대학교수, 목사, 신부 등 책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 운좋게 조상한테 물려받은 사람,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들인 사람은 제외됐죠.”

책읽는 풍토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제도는 차츰 권위가 붙어 해마다 수상자들은 매스컴의 조명을 받았고 공직자는 가점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판문화협회가 지원을 중단하면서 94년부터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회원은 87명에서 뚝 멈추었고 그나마 타계, 주소불명 등으로 연락이 닿은 사람은 55명뿐이다. 회비와 후원금으로 발행하던 회지도 97년 14집을 끝으로 더이상 잇지 못하고 있다.

“출협을 찾아가 포상제도를 부활해줄 것을 몇차례 얘기했는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는 “요즘 사람들이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한해 책 5권도 채 읽지 않는다”면서 “그런 만큼 책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고흥식 출협 사무국장은 “대상자가 엇비슷하고 표창 효과가 기대에 못 미쳐 중단되었다”면서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으면 재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신영길 전임회장의 장서를 거론하며 책이 홀대받는 현실을 개탄했다.

신씨가 평생 모은 책은 5만여권. 전경련, 여수대학, 이화여대 등에서 모두 거절당한채 이리저리 떠돌았다. 박영식 총장의 후의로 광운대 도서관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그 책들은 한달 보관료 60만원을 물며 컨테이너 박스 신세를 져야 했다. 이씨는 문화일보 건물 지하에서 한때 펼쳐진 신씨의 장서를 구경한 적이 있다면서 한마디로 장관이었다고 술회했다. “젊은 사서들은 오래된 책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열람회수가 적거나 세로로 쓰인 책은 낮춰보는 것 같고요. 귀한 책이 폐기 처분돼 흘러나오는 걸 보면 가슴 아파요.” 장서가가 작고한 뒤 2~3일 안에 헌책방으로 책이 흘러나와 깜짝 놀란 적도 있다고 전했다.


젊은 사서 세로쓰기 책 낮춰 봐


문무속객실유장서(門無俗客室有藏書). 거실에는 친구인 윤양희 교수(계명대 미대 서예과)가 써준 휘호가 걸렸다. 청정지대에 들어온 속객이 물었다. “어찌하여 같은 책이 여러 권 있습니까?” 언뜻 조지훈 시집 <역사 앞에서>가 세권이나 눈에 들어왔다. “귀중한 것은 거둘 수밖에 없어요. 겹치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을 염두에 두고 가져온 것입니다.” 한때 그는 결혼식 등에 책을 즐겨 선물했다. 하지만 받는 사람이 시덥잖아하는 눈치가 보이면서 책의 운명이 걱정돼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그런 흔적이 복본으로 남았다.

감신대 뒤쪽 다세대 주택 옥탑방. 책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들인 열평 안팎의 공간이다. 아파트로 옮겨가고 남은 책들과 신문스크랩 상자가 가득하다. 책 꽂임새나 놓임새가 아침조회에 모인 학생들 닮았다. 논맹 한적이 한켠에 고요하고, <조선사화>(문일평, 청구사) <창에 기대어>(조지훈, 범조사), <백팔번뇌>(최남선, 한성도서) 등 근현대 서책이 누웠다. 민중서관의 한국문학전집 서른 여덟 완질이 추억처럼 쌓였다.

오랫동안 써온 일기와 독서노트, 탁상일기, 교무일지 등이 고스란하다. <나의 일기>로 제본된 것, 종이를 잘라 맨 것, 스프링노트, 실로 꿰맨 것 등 자체가 하나의 노트 변천사다. 군대에서 짧은 휴식중 메모한 것은 낱장으로 끼워져 있다. 사연이 깃들지 않은 책, 손길이 머물지 않은 노트는 한권도 없다.

“이곳에 오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잊어버립니다.” 시간이 뒤섞인 책무더기에 자신의 기억이 버무려져 있으니 어련하겠는가. 그는 김동인의 소설 ‘무지개’의 마지막 구절이 뇌리에 맴돈다고 했다. ‘무지개 쫓기를 단념한 순간 폭삭 늙어버렸다.’

그는 요즘도 기억창고를 채우고 있다. 책은 책방에 가서 직접 골라야 한다는 게 지론. 인터넷으로 책을 사본 적이 없다. 늦은 점심을 먹고 그는 서대문에서 5호선 지하철을 탔다. 아무래도 동묘 부근의 헌책방으로 가지 싶다.

-------------------------------------------------------------------------------------

한국의 책쟁이들/④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책을 기증한다고 하니 집사람이 먼저 책짐을 싸더군요.”

은평구 구산동 예일여고 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집. 그의 집은 예상과는 달리 넓어 보였다. 길쭘한 거실. 두 벽이 책꽂이지만 책들은 책꽂이에서 한발짝도 내밀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소파와 깔개가 널찍하게 자리잡았다. 첫째 아이의 방. 책상을 등진 벽에는 이중 책꽂이에 어른 책이 버티고 있다. 어쩌면 박 실장 자신의 서재로 쓰다가 크는 아이한테 쫓겨 책을 둔채 나왔는지도 모를 일. 안방에는 부부 공용 외에 둘째 아이의 책상과 아이의 책뿐, 그의 책은 전혀 없다. 말끔한 정도로 보아 안방에까지 쌓였던 그의 책들이 어느 순간 마나님의 반란으로 추방되지 않았을까.

“가족이 함께 사는 공간인데 내 책이 독점하다시피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던거죠.” 며칠 걸려 정리한 것이 지금의 모양새다. 추방된 책 가운데 수백 권은 베란다에서 수형생활이다. 다행히 북향이라서 햇볕이 들지는 않지만 책이 바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대부분 오래된 사회과학 서적이나 복사본이어서 가슴앓이가 덜하지 않을까.

책과의 싸움은 식구들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 책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고, 선택한 방법이 기증하기. 그는 기증을 누군가와 책을 나누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을지는 모르지만, 더이상 책을 수용할 공간이 없는 터에 불가피하게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 아니겠는가.

“민주화기념사업회에 일곱 상자를 보냈어요. 연구자로서 미련이 남지만 욕심을 버렸어요. 책뿐 아니라 각종 팜플렛도 포함돼 있어요.” 고려대 한국사 연구실에도 1천여 권을 떨궜다. 자주 기증을 하다보니 자료의 공유라는 대의명분을 띠기 시작했고 그것은 연변까지 확장됐다.

중국출장을 가서 조선족학교인 연변대의 실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구내 만화대여점에는 허접한 한국만화가 꽂혀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신입생 환영회. 퀴즈대회에서 고구려를 세운 왕이 누구냐는 물음에 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귀국한 뒤 그가 한 일은 기증용 책모으기. 우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질을 문화당에서 싸게 구입하고 헌책방 ‘책나라’에서 쓸만한 단행본을 한권에 500원씩 샀다. 공감하는 동네사람들한테서는 만화나 잡지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15상자 분량. 중국으로 가는 컨테이너 틈에 끼워넣어 보냈다.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는데 그 책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책 수백 권 베란다 ‘수형살이’


그의 책은 그가 연구실장으로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도 가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연구서 2천여권을 보냈다. 자료실이 안정되면 더 보낼 생각이다. 연구소가 궁극적으로 자료센터가 돼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으면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시간과 돈을 절약해 주지 않을까. “책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자료가 만인들에게 이용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박원순 변호사가 장서 전량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증하면서 “마누라 빼고 다 가져가라”고 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자료실의 근간이 된 임종국 선생의 책에 비하면 나의 책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연구소 자료들은 자체적으로 구입하거나 기증을 받고 있다. “연구소 근처 70~80평 지하실을 빌렸어요. 제습기만 설치하고 분류정리하는 수준입니다.” 언젠가 전모를 펼쳐 공개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동안 한해 한차례 정도 주제를 특정해 전시회를 열었다. 올해는 조정래의 <아리랑>을 주제로 펼쳐보일 생각이다.

“그동안 우리는 자랑스런 유산만을 내세워왔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죠. 항일이 빛이라면 친일은 어둠에 해당합니다. 빛은 어둠과 대비시킬 때 더욱 돋보입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8월13일부터 한국일보 갤러리를 빌려놨다. 원래는 서울시립박물관을 임대하려 했으나 강렬한 주제를 부담스러워하는 박물관쪽 윗분에 의해 거절됐다는 후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89년 친일문제연구가 임종국 선생의 빈소에서 싹이 텄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임 선생이 추진했던 친일파 총정리 사업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다. 91년 초 정식으로 연구소가 설립됐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표로 지금껏 활동해왔다. 진성회원 5000명, 상근자 35명.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몇 안되는 엔지오 가운데 하나로 연구와 사회운동적 성격을 겸한다. 그동안 김창룡 묘 이전, 서춘에 대한 서훈 취소, 문래동 박정희 흉상 철거 등 ‘평지풍파’를 일으켜왔다.

“잘못된 것을 상식적으로 바로잡는 겁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인 척하고, 독립기념사업에 참여해 훈장을 받아 왔어요.” 그는 친일 미술가가 이순신, 백범, 안중근, 동상을 도맡아 제작하고 노년에 3·1문화상 받아 그의 친일문제가 감춰졌다고 말했다. “냄비식 반일과는 달라요. 일본을 비판하려면 우리의 잔재부터 청산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마사오 다가키’ 박정희를 기념한다면서 어떻게 일본한테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기증한다니 아내가 언른 책짐 싸


근현대 한국사를 전공한 박 실장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향은 거의 겹친다. 설립 초기에 연구소에 합류한 그가 개인의 일을 접어두고 연구소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 탓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연구소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일 터다. 그의 몫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료의 수집. 평소 개인적인 수집벽을 연구소로 연장하면 바로 공적인 일이다. 개인 자료와 연구소 자료가 뒤섞여도 표가 나지 않고 그것을 어쩌지 못한다.

연구소에서는 <일제 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편람>(국내편), <일제하 해외 친일단체 편람>, <일제하 지방 친일단체 편람>을 공식·비공식으로 간행하고 <재일조선인단체편람>을 정리중이다. 2007년에는 최종목표인 <친일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다.

바탕이 되는 것은 일제 때 그들이 펴낸 자료들. 매일신보, 대한매일, 조선일보, 동아일보, 만선일보 등 신문은 물론 친일잡지들, 인사록, 신사대동보, 공로자명감, 연감류, 서훈록, 국방헌금납부자명단, 만주국한국인관리 명단, 전국지방의원 명감, 병합기념장 수여자 명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자료를 구하기 위해 국사편찬위, 기록원, 각종 도서관을 뒤지고 일본과 중국에도 여러 차례 출장을 갔다. 중국의 문서관에는 만주친일파, 간도특설대에 관한 자료가 보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부분 비공개라서 애로가 많다.

문서자료 외에 간접자료도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한일합방 기념 오사카 <매일신문> 부록인 아동용 블루마블게임. 신공왕후. 귀무덤, 신라인 조공 등 조선역사 왜곡를 왜곡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한 내용이다. 당시 국어교과서에 실린 ‘간도에서 온 편지’. 비적이 평정돼 살기 좋다며 개척이민을 장려하는 내용. 수신교과서에 실린 충효사상. 이는 유교문화의 유산이 아니라 천황에의 충성을 말한다. 박정희 정권 때의 충효사상 강조와 흡사하다.

수집은 전단, 포스터, 우표, 군복, 지도, 앨범등 생활자료로까지 확대됐다. 역사는 텍스트로 알기보다 오감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천인침(처녀 1000명이 수를 놓아 총알을 막아준다는 배띠), 무운장구의 기원을 적은 일장기, 한일합방 축하 가두행진 사진, 이완용의 친일시화, 최린 임전대책협의회 회장의 엽서, ‘돌격’ 담배,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세로 표어, 창씨개명 관련 자료, 일본군 앨범과 군표, 조선지원병 첫사망자인 이인석 상병 선전책자, 일본군가, 친일영화 전단 포스터, 황국신민서사 전단, 러일전쟁·중일전쟁 주사위 게임 등등. 이런 자료는 중간수집상,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구입한다.


친일청산 뜻있는 분 기증 바랍니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모은 것이 처음입니다.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장삿속으로 모으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값이 많이 올랐거든요. 돈 없어 못 산 것 많아요.” 그는 뜻있는 사람들의 기증을 바랐다. 흩어져 값으로 존재하기보다 합쳐져 의미로 남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믿음에서다.

한해 앞으로 다가온 2007년. 대망의 친일인명사전이 마무리되면 10년 너머 미뤄온 박사학위 논문을 매듭지을 참이다. 주제는 박정희가 통치이데올로기로 내세워 성공을 거둔 민족, 국가 담론 분석과 국민교육헌장, 반상회, 학도호국단 등 언술을 관철시켰던 시스템 연구.

“해 저문 저녁 갈길은 먼데, 비가 오죠, 소는 뛰고요, 풀짐은 무거워오고요.”

-------------------------------------------------------------------------------------

한국의 책쟁이들/⑤ 책 중간상 김창기씨


책은 물건이다. 그 물건은 펼쳐져 읽힐 때 책이 된다. 마지막 장이 덮이면 책은 다시 물건이 된다. 책이 책됨은 무척 짧다. 책은, 책으로서보다 책이 되려는 기다림으로 존재한다. 책은 곧 그러함일 터이다.

기다림은 책방 혹은 책꽂이에 존재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가 밭을수록 책은 제값을 한다. 읽힘과 읽힘 사이에서, 즉, 책-책, 책방-책방, 독자-독자 사이에서 책을 책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간상. 시쳇말로 ‘나카마’라 한다.

그들은 변두리에서 도심으로 책을 나른다. 수집가들한테 직접 전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책의 값을 높인다. 중간상은 이곳과 저곳 사이에 존재한다. 두곳의 책값 사이가 그들의 삶터다.

고급 중간상은 이에 더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책을 공부하기도 하며 뜸을 들여 책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 한 때에서 또 다른 때로 책을 옮기면서 생산되는 부가가치는 두 곳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훨씬 크다.

지난 7월 12일. 월계동 자택에서 만난 중간상 김창기(68)씨는 느긋했다. 하늘이 터진듯 비가 쏟아져 어차피 일하기는 틀렸기 때문. 40여년 이 일로써 어엿한 집을 마련하고 1남4녀를 쑬쑬하게 키워 대학을 졸업시킨 관록이 보여주는 자신감이 깔리지 않았을까. “예순여덟 나이에 현역으로 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하시오.”

1968년 스물아홉 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신설동 대광학교 근방을 지나다가 화재가 난 집에서 끄집어낸 쓰레기 더미에 우연한 눈길이 멎었다. 불타고 물에 젖어 뭉그러진 종이를 펴보니 누군가의 유묵. 3000원을 달라는 인부한테 주머니에 있던 1500원을 탈탈 털어주고 넘겨받았다. 건너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보자고 해서 보여주었더니 자기한테 팔라고 했다. ‘쓸 만한 물건인 모양이군.’ 집으로 가져와 알아보니 추사였다. 그 사건이 김씨를 중간상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그것을 우연이라 했지만 평생 직업이 되었으니 운명일 터다.

“80년대 말까지는 괜찮았지요. 헌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 헌책방이 많았거든요. 중고교 참고서나 대학 교재를 주로 취급했는데 한 뭉치면 하루 일당이 나왔어요.” 교재에서 생기는 기본벌이 외에 옛 시집, 소설, 잡지, 광고물에서 생기는 수입은 덤이었다. <해파리의 노래> <님의 침묵> <진달래 꽃> <화사집> 초판본 등 웬만한 책은 다 만져보았다.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구경 못하지만….


중간상이 책 욕심 내면 안되죠


그는 스크랩북을 가져왔다.

1933년 천안 우체국 집배원의 1년치 일기 세 권. 10년 전 청계천 노점에서 구입해 간직하고 있다.

‘9월 25일. 공산당 대공판 개정. 피고 264명이라는 미증유의 큰 공판. 신의주에서는 조봉암 등 공판에 기만권의 서적을 최 변호사 일인이 뒤적거린다고. 밤에는 태양극장 구경갔다. 인기 중심은 최승희양. 그 신기한 기능. 참으로 귀엽고 칭찬을 아낄 수 없다.’

필적과 내용으로 보아 고학력자인 듯하다. 당시 집배원의 생활상 외에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의 울분이 행간에 배었다. “값지게 활용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할 생각도 있어요.”

이밖에 ‘민형소송규칙’(융희 2년, 의진사 발행) ‘재건국민운동본부 화보’(1963년, 운동본부 발행) 등 소책자, ‘대한민국 건국강령 공포서’(1947년), ‘박애원 취지서’(1947년) 등 유인물은 그가 폐지와 헌책 더미에서 구해낸 것들이다.

“중간상이 책 욕심을 내서는 안 되죠.” 그한테 책은 흐르거나 잠시 머무는 존재. 그런 탓일까. 그의 집에는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온 이것들은 책이라고 하기는 뭣하고 그나마 때와 때 사이에 좀 길게 머무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리 욕심이 없기로서니 이것뿐일까, 라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왕 보여줄 것 다 보여주마, 면서 자리를 옮겼다. 오랫만에 누리는 안복. 40년에 걸쳐 자신의 욕심을 줄이고 책들을 졸여 남긴 것이니 어련할까. 그의 절제와 인내는 범인이 이를 수 없는 ‘저만치’에 있었다.

그가 중간상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자산은 오토바이와 부지런함, 그리고 책을 보는 안목. 오토바이를 빼고는 단순한 만큼 어려운 것들이다.

현재 그가 타고 다니며 헌책방 사이를 오가는 오토바이는 여섯 대째. 98년에 구입해 7년 만에 주행거리가 13만킬로미터다. 눈, 비가 와 쉬는 날을 제하면 하루 60~70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다. 81년에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업그레이드해 88시시를 거쳐 125시시급이다. “오토바이로 바꾸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서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인들과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좋은 책을 더 구할 수 있었어요.”

그의 일과는 식전에 고물상과 헌책방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슷한 처지라면 먼저 보는 사람이 아무래도 유리하기 때문. 아침식사를 하고는 본격적인 순회. 60~70년대 강북에는 헌책방이 무척 많아, 미아리 바닥(삼양동, 종암동, 장위동, 길음동, 정릉동)만 해도 40~50군데. 그곳만 돌자 해도 하루가 꼬박 걸렸다. 주인과의 친분, 책이 나오는 정도에 따라 매일 또는 며칠만에 들르는 집이 구분됐다. 미아리 이오서점, 정릉 동학서점, 길음시장 노씨책방, 문화책방, 홍제동 대양서점은 매일 들르던 곳이다. 서점의 위치에 따라 넘치고 부족한 책이 각각 달라 그것을 맞춰주는 것이 그의 몫. 소화하기 힘들거나 제값을 받기 힘든 책을 빼주는 것도 일이다. 대학교재는 청계천 헌책방가로, 한적이나 왜정때 나온 책은 인사동의 계림서점, 통문관, 문고당, 고문당 등으로 옮겼다.

“대학 나온 분을 능가하는 노력을 했어요. 짧은 여름동안 대하소설 세 질을 읽을 정도로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어요.” 부인 김양자(67)씨는 남편이 책만 아는 학자타입이라고 말했다. 늘 보이는 책은 당일 처분하고 희귀해 보이는 책은 집으로 가져와 ‘검토’를 했다. 내용은 물론 지은이와 발행연도, 희귀성 등을 알아보면서 그는 안목을 키워갔고 서지에 관한 한 ‘박사’가 되어갔다. 말하자면 헌책방은 그의 삶터였고 학교였다.

그가 40년 넘게 그 동네에 머문 것은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상거래 덕이 크다. 턱없이 비싸게 부르는 것은 그냥 지나치고, 알아서 쳐달라면 쳐줄 만큼 쳐주었다. 터무니없이 싸게 부르는 것은 남긴 돈에서 일부를 돌려주기도 했다. 뭐니뭐니 해도 재미보다 더한 재미는 없다. “발이 넓어 좋아하는 책, 이문이 많은 책 구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서점보다 자유롭고 벌이도 괜찮았지요. 오래하다 보니 아는 것도 많아지고요.” 미아리서 6년, 정릉서 6년(고미당). 책방은 외도였을 뿐이다.


여섯번째 오토바이 13만km 주행


동학서점, 이오서점, 세전항서점…. 늙은 주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책방들은 시나브로 없어졌다. 더불어 어울릴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혜화동 혜성서점, 수유리 신일서점, 청계천 경안서점, 성동서점, 중앙서점, 상연서점 주인들 역시 김씨와 함께 늙어간다. 공진석씨, 미아리 김씨, 아현동 윤씨, 청량리 조씨(생존) 등, 서점을 누비던 내로라는 중간상들 역시 세상을 떠나거나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은 사람은 김씨뿐. 성북동, 정릉, 한남동, 수유리, 연신내 등 재개발이 되면서 쏠쏠한 책이 고여있다가 흘러나오는 물좋은 곳도 없어졌다. 게다가 대학생들이 헌책방을 멀리하면서 헌책방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전성기에 비해 1/10로 줄어 10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헌책방 대부분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어 희귀한 책을 올리는 마당. 밝은 눈과 부지런함으로 서점과 서점 사이에 존재하던 중간상의 시대는 저물고 김창기씨 역시 그 시대의 끝에 서 있다. 골목골목 들어선 헌책방들이 선하고 고물상인의 가위질 소리가 들리는 듯 그의 표정은 아련해졌다. 그는 자신의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그렇지만 문화사업의 한축이 시들어가니 서글프다고 했다.

“직접은 아니지만, 필요한 사람한테 책이 돌아가 생명력을 얻게 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해요. 책들이 내 손에 머무는 동안 즐거웠고요.” 회고의 말로 마무리하기는 뭔가 어색했을까.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 아닌가요. 두 다리가 성한 한 계속 돌아다닐 겁니다.” 그는 현역이었다.

-------------------------------------------------------------------------------------

한국의 책쟁이들/⑥ 논술강사 정윤식씨


서재는 내밀하다. 그곳에는 책들이 특별한 규칙 아래 도열해 필요할 때 뽑힐 수 있게 되어 있다. 손때 묻은 권권의 사연들은 적절한 어둠과 침잠을 요구한다. 주인 외의 수선한 눈길이 머물면 그 사연들은 가뭇없이 사라져 부끄러움은 초라하게 내면화한다. 그래서일 거다. 책쟁이들이 서재 공개를 꺼리는 까닭은….

젊은 책쟁이 정윤식(31)씨 역시 자신의 책무지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랐다. 처음 선뵌 곳은 종로구 동숭동 오피스텔. 그곳에는 그의 현재와 미래가 일렁거렸고 정씨는 당당했다. 일주일 뒤 두번째 찾아간 서초구 양재동 본가. 책방으로 꾸민 옥탑방에는 서른 살 과거가 고여있었고 그는 몹시 수줍어했다. 무의미하다며 세기를 그만두었다는 그의 말을 무찌르고 권수를 헤아리자 함께 거들기는 했지만 막상 7500여권으로 판명되자 어리둥절해했다. 얼결에 벌거벗기운 것처럼. 그 나이에 적잖은 숫자다.

책탐은 대학 1학년 때 시작됐다. 겨울방학 때 25일동안의 인도 선교여행 중 고수를 만났다. 책은 도서관이나 책상에서나 읽는 줄 알았는데 고수는 이동하는 짬에 일곱 권의 책을 읽어냈다. 그때 자신도 어불려 다섯 권을 읽었다. 어려서 추리소설이나 퀴즈풀이를 읽었고, 사춘기 때는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위한 책읽기에 지나지 않던 그한테 귀중한 첫경험이었다.

그 뒤 권장도서 또는 각주를 따라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다니던 그한테 한 사람이 스승처럼 다가왔다. 천리안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나귀’라는 필명의 박 아무개씨. 내공이 무척 높은 것을 알고 장문의 편지를 썼다. ‘싸부’로 모시고 싶다고…. 그가 읽은 책을 따라읽다가 그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교인 가운데는 책읽는 사람이 적은데다 취향이 편중돼 있는 터에 자기처럼 많은 책을 읽고 교리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된 것. 두번째로 놀란 것은 그의 나이가 또래임을 알고나서. ‘이럴 수도 있구나.’ 기독교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기독교 관련 책을 ‘무지하게’ 읽게 되었다. 엠티를 가서도 프린트해온 서평을 ‘줄쳐가며’ 읽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정씨가 좋아한 것은 그가 권한 책이 아니라 그의 고민이었다.


이담에 허영만 작가론 쓸 생각


동호회에서 만난 또 다른 스승. 책을 두고 채팅을 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니 무불통지, 책에 관한 계보를 줄줄이 꿰어 40대 이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역시 또래였다. 막힘이 없을 뿐더러 누구든 필요한 사람한테 책을 나눠주었다. 형편이 넉넉치 않을 터인데 ‘너 그 책 읽어봤어?’ 하면서 아무데서나 사서 스스럼없이 건네주었던 것. 그한테 책이란 물성은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 (얼마 전 4년만에 통화를 했다. 자신이 어설프고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인간 또는 생활을 중요시하는 이를 보면 찔립니다. 저는 읽은 것은 꼭 실천해야 한다, 자료적 가치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스트레스죠. 어쩌면 책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는 대학에서보다 헌책방과 헌책동호회에서 더 많은 것을 읽고 배웠다. 만화, 기독교, 에스에프, 베스트셀러 등 관심사를 따라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학생 신분에 호주머니가 얇은 터, 서울시내 헌책방은 가리지 않고 다녔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배낭을 메고 순례했다. ‘숨책’ 동호인들과 함께 무박2일은 예사였다. 그가 공익으로 근무했던 한 지하철 역사가 아지트였다. 또래의 동호인들은 인문학, 소설·영화, 태극권·요가 등 저마다 깊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어서 서로 길잡이가 돼 주었다. 그의 특장은 만화. 한 만화가게에서는 여기에서 저기까지 400권을 쓸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3년. 기본으로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더텄고 웬만한 관심사의 것은 다 구했다.

“어떤 책이 좋다 나쁘다 하는데, 쉽게 말할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것을 읽으면 그만이라고 봅니다.”

그가 가진 책 가운데 만화가 2200권으로 가장 많고 단행본은 과학소설(에스에프), 기독교가 각각 500여권으로 단일항목으로는 가장 많다. 책을 대하는 태도, 책의 모둠이 신세대 책쟁이답다.

만화는 자료적인 성격인데다 먼지가 많이 나 종이상자에 넣어 쌓아두었다. 그가 가장 고이는 것은 허영만. 이담에 본격적인 작가론을 쓸 생각이다. 분단, 대학교육, 경제성장 등 시대의 고민을 함께하고 끝없는 상상력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오! 한강>은 짜릿짜릿하다. <식객>과 <사랑해>는 많이 사두고 사람들한테 선물한다. (작가나 출판사가 자신의 공덕을 알 턱이 없지만….) 다른 책은 몰라도 만화를 선물해서 실패한 적이 없다. 대개는 나중에 만나면 내용과 느낌을 공유하기 때문. 돈을 많이 벌면 권가야의 <해와 달>, 박흥용의 <그의 나라>, 윤승기의 <맘보 파라다이스> 등 끊기거나 서둘러 끝낸 만화를 다시 그리게 하고 싶다. 절판된 박흥용의 <검>은 제본해서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있다.

그는 에스에프가 빨리 절판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소재가 가상세계일 뿐 플롯이나 메시지에서 다른 소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상상력이나 논리에서 더 뛰어나다고 말한다. 30~40대가 좋아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 <시계태엽 오렌지> <솔라리스> 등은 두고두고 읽을 수 있는 명작입니다. <화성연대기>는 아름다운 시처럼 읽히죠.” 무협지 가운데 김용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영웅문> 3부작은 역사적 배경과 캐릭터의 설정이 뛰어나 세 번을 읽어도 새로웠다.

정씨는 현재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대비학원 대표강사. 우연히 얻은 직업이어도 책읽기와 밥벌이가 일치해 그는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이다. 그동안 읽은 책을 싸고 있다고 표현했다. “신체의 건강은 똥 색깔로 판명되듯이 책읽기의 건강은 책싸기로 알 수 있어요. 싸기는 곧 생각하기, 쓰기, 말하기로 구현되죠.”


SF 명작 많은데 너무 빨리 절판


그는 두 가지 꿈이 있다. ‘어떻게 물을 것인가’와 ‘세계의 대입 출제경향’ 정리하기. 학생들한테 싸기를 가르치기만 할 게 아니라 자신도 싸야 한다고 믿는다.

탈무드에 나오는 ‘굴뚝 소제를 마치고 나온 청소부 가운데 검뎅 묻은 사람과 묻지 않은 사람 가운데 누가 세수를 하겠는가’라는 질문. 랍비가 원하는 궁극적인 답을 끌어내 깨달음을 유도할 수 있는 씨앗이 담겨있는 형태이다. 또 예수가 부활 뒤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같은 질문을 던진 것 역시 고도로 계산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정리하면 면접평가, 인성계발에 유용하리라 본다.


한달 도서구입비 50만~60만원


매스컴에서 수능의 문제점 등을 얘기하면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의 예를 드는데, 정작 그들의 시험문제와 답안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독일의 아비투어, 미국 사립고교 졸업시험, 일본의 주요대학 논문시험 등 자료를 구해 번역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문제점과 개선할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 건강을 해쳐 강의를 잠시 쉬고 있는 정씨는 고민이 있다. 전에는 기독교, 헌책방, 논술 등 그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 어느 것도 시덥잖다. 누군가 그한테 미친듯이 매달릴 무엇을 제시해주거나 나아갈 방향을 넌지시라도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신이든, 여성이든, 또다른 무엇이든.

시간이 아쉽다는 그는 장 보고 밥 짓는 게 번거로워 집에서는 주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중국음식을 배달해 먹는다. 대신 밖에서 식사를 할 때는 번듯하게 먹는다. 근자는 구간보다 신간을 주로 구입하는데 시간도 줄일 겸 일목요연하게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서점을 이용한다. 한달 도서 구입비 50만~60만원. 책이 넘치면 버리기보다는 공간을 넓힐 생각이다. 결혼해서는 무엇보다 넉넉하게 두개 이상의 방을 서재로 만들 생각이다. 책은 그에 어울리는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무엇보다도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환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영만의 <사랑해>를 선물하마고 했다. 신혼부부한테 권한다는….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겠는가. 혜화동 오피스텔과 대학로 큰길 중간에 있는 지하서점에 들렀다. 주인과는 구면인 듯 건강은 어떠냐며 인사를 나눴다. 아니나 다를까 나오면서 책 한권을 집어들었다. 필요해서였을까? 인사치레였을까? 아니면 버릇일까?

-------------------------------------------------------------------------------------

한국의 책쟁이들/⑦ 미술 저술가 이주헌씨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출판사에 “천만원 먼저 달라”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콘셉트·문체·구성, 책마다 달라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

한국의 책쟁이들/⑦ ‘삼성비서실’ 저자 박세록씨


경기도 고양시 가장동 그의 집은 완벽하다. 2만권 장서. 거실, 안방, 주방옆방, 서고, 서재 등 다섯 곳에 펼쳐진 책들은 분야, 시리즈, 책 크기대로 정리정돈돼 있다. 바닥에 놓인 책이 없다. 단 한 곳 예외, 주방옆방 구석에 몇 권. 더도말고 덜도말고 책꽂이와 책의 양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셈.

박세록(70)씨.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작고)의 비서를 지냈다. 그 인연으로 <삼성비서실>(미네르바기획, 1997)을 쓰고 펴냈다. 그룹 안에서 삼성전자, 제일기획 등 주로 창업선발대로 활약했다. 이쯤이면 아하! ‘삼성맨’이다. 그 가운데서도 고갱이. 옷차림 역시 흐트러짐 없다. 8월 초순 무더위에도 연노랑 세미 정장이다. 그래서다. 거실 책꽂이 위에 앉은 고운 먼지가 슬픈 것은…. 일주일쯤 된 느낌.

“요즘 <일리아드 오디세이> <겐지 모노가타리>를 읽었어요. 일리아드는 50년만입니다. 감각을 벼리기 위해서죠.”

“토마스 만이 일흔한 살에 <선택된 인간>을 썼고 윈스턴 처칠 역시 일흔 넘어 많은 저술을 남겼다”는 말은 그 사람들이 그의 거울이라는 의미다.

<부기 도입사>, <이병철 평전>, <연애 문화사>, <미인의 역사>, <이름 문화사>. 이 책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박씨가 쓰려는, 앞으로 나올 예정인 까닭이다. “죽기 전에 정리해야죠. 가을부터 착수할 겁니다.”

거실 책꽂이에는 메모로 가득한 바인더 노트가 16권. 노트의 등에는 사무관리, 비서론, 산(경기, 강원충청, 영호남), 명승지, 성, 바다, 일기, 연구경영, 연구등산, 회계, 연애, 미인, 실크로드, 집시, 탱고 등 제목이 달려있고 권마다 다닥다닥 견출지에는 세부사항이 구별돼 있다. 그 가운데 ‘연애’를 들춰보니 “남성은 권총자살 여성은 투신자살(보봐르, <제2의 성> 31쪽). 윤심덕의 자살방법은 여성적인 방법이다”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는 개화기. “1890년대 서구문화의 유입은 4~5세기 불교의 도래보다 더 큰 변화입니다.” 한국사를 근본부터 뒤흔든, 역사상의 일대 장관이라는 거다. 쓰려고 하는 부기, 연애 분야에서 그 파노라마를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70년대 초부터 심혈로 모아온 자료는 그쪽이 가장 많다.

부기는 자본주의의 바탕에서 그 시스템을 움직여 왔으면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문. 아무래도 다루기 어렵고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70년대초부터 심혈로 자료 모아


서양 부기가 처음 들어오기는 19세기 말 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을 통해서라고 추정된다. 부기 단행본이 첫선을 보인 것은 1908년(융희2년). <신편 은행부기법>(임경재, 휘문관), <실용 가계부기>(민천식, 휘문관), <실용 상업부기>(임경재, 휘문관)가 그것. 일본 것을 그대로 들여와 편역했다. 이어서 나온 것이 1908년 <사개송도치부법>(현병주, 덕흥서림). 송도 상인들의 용어를 빌어와 복식부기를 설명하고 있다.

부기를 국내에 정착시킨 사람으로 윤정하를 꼽는다. 한국의 첫 회계사(당시 명칭 계리사)다. 1938년에 낸 <조선세무요람>이 그의 저서. 학문적으로 정착시킨 이는 김순식(메이지대 상업부 졸업, 고려대 교수 역임). <상업부기요람>(엄송당서점, 1937)을 냈고 해방 뒤 <부기요강>(동지사, 1948)을 썼다.

“개성(송도)부기는 복식부기가 아닙니다.”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개성부기가 복식부기라는 오류를 빚어낸 장본인으로 현병주와 윤근호를 꼽았다. 1908년 현병주가 서양 복식부기를 부연하면서 송도치부법의 용어를 차용한 것이 빌미가 되었고 1984년 윤근호가 <한국회계사 연구>(한국연구원)에서 ‘용어의 차용’을 ‘사실의 부합’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장책>을 제시했다. 80년대 청계천 경안서림에서 구입한 이 장부는 어느 개성상인이 작성한 1887~89년 3년치 외상장부. 여기에는 복식부기의 기본이 되는 단위의 통일이 구현돼 있지 않다. 물량은 물량대로, 화폐는 화폐대로, 따로 기술돼 있어 아퀴를 맞출 수 없다. “단위가 일관되지 않으면 장부의 객관성이 없거든요. 1원 단위까지 정확히 맞출 수 있어야 하는데 송도치부법은 그렇지 않아요.”

이러한 학문적 오류는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되지 않는 탓이다. 80년대 이전까지는 장책 자료가 많이 유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무렵 민족주의 사관이 득세하면서 국수주의로 흐른 영향도 없지 않다고 본다.

‘연애’ 역시 개화기를 엿보는 만화경이다. <매천야록>에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키스’가 언급돼 있다. 이광수의 글을 보면 그가 하라다 미노루의 연애 관련 글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하라다는 1920년 엔런 케이의 <연애와 결혼>을 번역 출간했다. 박씨는 ‘연애’를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해탄에서 김우진과 정사한 윤심덕, <김연실전>의 이연실,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등이 대상일 터. “한국의 여성운동이 5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선진국 수준에 이른 것은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안방의 한쪽 벽을 차지하는 철학 서적 역시 문화 이입사의 전모를 보여줄 수 있는 컬렉션이다. 1950년 이전에 나온 것들은 대부분 모았다. 능력과 필요를 갖춘 사람이면 넘길 생각도 있다. 거의 완벽하게 모았던 임진왜란 관련 책은 더 절실한 친구의 아들한테 양도한 바 있다.


감식안 무뎌져 이젠 필요 책만 사


돋보기를 쓰는 그는 책을 볼 때 별도의 커다란 돋보기를 집어든다. 6년쯤 전부터다.

2001년 그는 넉달동안 사실상 장님으로 지낸 적이 있다. 왼쪽 눈이 포도막염으로 실명한 터에 오른쪽 눈의 시신경에 마비가 온 것. 충격이었다. 책 수집광에다 영화광인 그한테 눈은 생명줄. 심각한 고민을 했다. 고민이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아서 무얼 하겠는가. 밤낮이 뒤바뀌고 열흘동안 몸무게가 5㎏이나 빠졌다.

실명해서도 업적을 낸 사람들을 떠올렸다. <임꺽정>의 홍명희, ‘아랑페스 협주곡’의 호아킨 로드리고,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오스트롭스키 등등. 삶의 방식을 비디오 체제에서 오디오 체제로 전환했다. 휴대용 녹음기를 사고 성경테이프 등 각종 오디오북을 샀다. 다행히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밑져야 본전, 세브란스병원에서 회복확율 20%라는 왼쪽 눈을 수술해 0.2의 시력을 얻었다. 세상을 다시 얻은 기분.

그는 요즘 영화관은 물론 헌책방에 안 간다. 책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뿐더러 좋은 책을 찾아내던 동물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 최소화한 필요를 새책방에서 채운다. 대신 그동안 사들인 책을 진하게 본다. 업데이트된 책은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책>(들녘), <유서필지>(돌베개) 등 ‘책에 관한 책’. 책꽂이 틈에 가로뉘어 끼여 있다. 이쯤에서 ‘책꽂이-책의 완벽한 일치’ 수수께끼가 풀린다.

가혹한 줄 알면서 던진 질문. “계획한 책을 과연 쓸 수 있겠는가?” 토마스 만, 윈스턴 처칠은 그래서 언급됐고 감각을 벼리고 있다는 말도 그래서다.

그는 이야기하던 중, 김두한을 괴롭힌 일본인 형사가 미와 경부라는 설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김두한(1918~1972)이 깡패생활을 하던 40년대에 미와는 함경도 경찰국장을 끝으로 경찰을 그만두고 총독부 고문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미와는 1884년생으로 나이차가 서른 넷, 김두한이 20대일대 미와는 환갑노인이었다. 박씨가 이를 일일이 확인해준 책은 <조선공로자명감>(민중시론사, 1935). 20여년 전 인사동에서 10만원에 샀다는 베게만한 책이다. 그리고 부기도입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8년에 나온 책들을 20초도 안돼 뽑아왔다. 또 책꽂이를 둘러보던 중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책 <국어 및 조선어를 위해>가 제자리에 없음도 금방 알아냈다.


여자 대신 책과 결혼한듯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의지, 사실의 정확성, 각종 전거의 위치 등을 꿰고 있는 만치 소기의 저술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마침 찾아온 고서연구회 후배 노영식(53)씨는 “보통 사람들은 재미없어 하지만 누군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의 자료를 오랫동안 모아 가치있는 컬렉션으로 만든 분”이라며 “그 자료가 저술로 꼭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 고전을 읽어야 해요. 영화 2000편을 봤지만 <돈키호테> 한편만 못하더군요. 할리우드가 패권을 잡은 이면에는 독서대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 이사오기 전 그는 세검정에서 책과 함께 20년을 살았다. 책들이 엄청난 무게로 그를 잡고 늘어졌던 것. 그는 미혼이다. 책의 유혹이 여성의 그것보다 강렬했을까. 지긋한 그는 이미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책과.

-------------------------------------------------------------------------------------

한국의 책쟁이들/⑧ SF마니아 박상준씨


인터넷으로 ‘박상준’을 검색하면 여러 명의 인물이 떠오른다. 책쟁이로 칠 수 있는 박상준 역시 세 사람이나 된다. 출판사 사장, 출판 기획자, 에스에프 매니아. 이번 주인공은 에스에프 마니아 박상준이다. 정작 그는 한겨레신문사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데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마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세작처럼.

최근 그는 ‘에스에프아카이브’를 만들어 그 대표가 되었다. 물론 원래의 출판기획·번역가라는 타이틀 역시 가지고 있다. 사정이 있다. 과학문화재단 등 각종 과학관련 단체에서 무슨 일을 추진하고자 할 때 카운터파트가 없어 고민스러워했다는 것. 번듯함을 요구하는 그들의 관료성 외에 최소한의 수준과 체계를 갖춘 ‘무엇’이 없었다는 얘기다.

에스에프아카이브의 취합 대상은 한국어로 된 모든 에스에프 및 관련 자료다. 지금까지 책, 만화, 비디오테이프, 포스터, 팸플릿 등 1만여점, 간접자료를 합치면 2만점이 넘는다. 15년 이상 국내는 물론 해외의 헌책방을 뒤져 국내 최대의 독보적인 자료를 갖췄다. 지금도 수시로 인터넷을 통해 양과 질을 높이고 있다. 개인을 넘어 공공재산으로 활용하고자 목록작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창문 차단 외계인 침입 막으려?


슈퍼건물 4층인 그의 사무실 겸 아카이브는 17평쯤. 정리 중인 자료가 쌓인 거실 양쪽으로 2개의 방에 자료가 꽉 차 있고 그 중 넓은 방 한쪽에 빈 자리를 비비고 박씨가 틀어앉았다. 공습에 대비한 것일까, 불빛이 새지 않도록 창문을 꼼꼼 여몄다. 화성인이 침공한다면 지구인 가운데 우주와 미래의 비밀을 가장 부지런히 염탐하는 그가 첫번째 제거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나이가 지긋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박씨는 무척 젊었다. 67년생,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이 역시 알고보면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에스에프 하면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 또는 과학을 제대로 알아야 읽을 수 있는 어려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어요. 기성 문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학자들 역시 연구나 비평작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저한테까지 행운의 차례가 온 거죠.”

그가 초점을 두는 것은 70년대 이전에 번역 또는 창작된 에스에프. 존재를 모르는, 또는 건사하지 않으면 잊혀져 없어질 자료들이다. <금성탐험대>(한낙원, 삼지사, 1957 초판, 1969 10쇄), <우주항로>(한낙원, 계몽사, 1981), <해저왕국>(한낙원, 삼성당, 1988 재판), <2064년, 우주소년 삼총사>(안동민, 동민문화사, 1972). 샘플로 들고나온 어린이용 책들은 옛 활판인쇄, 싸구려 장정에 먼지가 묻어났다. <2064, 우주소년 삼총사>의 삽화는 고우영이 그렸다.

아나운서를 하다 52년부터 어린이용 과학소설을 쓴 한낙원(1924~ )의 책들은 과거형. 더 이상 새로 쓰이지도, 서점에서 판매되지도 않는다. 안동민은 문단의 변방에 머물렀고 그의 아들은 <임페리얼코리아>라는 과학소설을 썼다. 박씨의 귀띔이다.

대학생 때부터 출입한 헌책방은 그의 공부방이자 놀이터. 에스에프를 읽으면서 자란 그의 눈에 우연히 영어 원서가 눈에 띄었다. 어려서 본 것은 얇고 짧은데 원서는 상당히 길었다. 띄는 대로 집어다 짧은 것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나 조지 오웰의 <1984>가 에스에프로도 분류됨을 알게 되었다. ‘에스에프가 과학공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을 담을 수 있는 미디어구나.’ 그 무렵 깨친 생각이다. 91년부터는 기획번역을 했다. <멋진 신세계>, <라마와의 랑데부>, <세계 에스에프 걸작선> 등. 그걸로 밥벌어 먹겠냐는 부모의 염려로 몰래 내야 했다. 그 중 <세계 에스에프 걸작선>는 꽤 팔렸다. 당시 동유럽 붕괴 이후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사회과학 출판사를 설득해 에스에프를 잇따라 냈다.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 외엔 별 재미를 못 본 것으로 안다. 자신한테는 진실을 전하는 미디어였지만 대부분 출판사한테는 돈벌이 대상이었을 뿐. 장정, 번역 모두 유치해 오래 가지 못했다. “얼떨결에 전문가 소리를 듣습니다. 절대평가 하자면 김상훈, 홍인기, 두 사람이 훨씬 윗단계죠.” 에스에프를 위한 사무실은 97년부터 냈고, 에스에프 도입사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SF걸작선’ 출판사 설득 펴내


“우리나라의 에스에프는 당연히 번역으로 시작됐어요.”

1907년 재일유학생 잡지인 <태극학보>에 연재된 <해저여행기담>이 최초. 원작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인도 왕녀의 5억 프랑’를 번안한 <철세계>(이해조, 1908), ‘기구를 타고 5주간’이 원작인 <비행선>(김교제, 1912), ‘달나라 탐험’ 원작의 <월세계 여행>(신일용, 1924) 등 쥘 베른이 잇따랐다.

카렐 차펙의 를 번역한 <인조노동자>(박영희, 1925),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원작인 <일신양인기>(게일·이원모, 1926)는 특기할 만하다.

최초의 창작 에스에프는 김동인의 ‘K박사의 연구’(1929년 <신소설> 12월호)를 친다. 똥을 원료로 개발한 대체식량을 둘러싼 이야기다. ‘천공의 용소년’(허일문, 1930), ‘라듸움’(김자혜, 1933), ‘여신’(방인근, 1939) 등이 뒤를 이었다. 해방 뒤는 먹고살기 힘들어 에스에프는 전무하다시피하다. <완전사회>(문윤성, 1965)가 섬처럼 도들하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 <역사 속의 나그네>(1991), <파란 달 아래>(1992), 듀나의 <태평양 횡단특급>(2002)이 근작들. 문윤성과 복거일 사이 22년 동안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없다. 다만 1968년 ‘한국SF작가클럽’이 결성돼 그 회원들의 작품을 1970년대 중반 10권으로 묶은 적이 있으나 모두 청소년용이고, 일부는 번안이다. 반면 북한은 과학소설 평론서인 <과학환상문학창작>(황정상, 1993)이 나올 정도로 남쪽보다 작품활동이 활발했다는 평가다. 특기할 것은 2004년부터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이 생겨 신인들의 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다. 올해로 세번째. 역시 훌륭한 작품이 대거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하지만 등단 이후 인터넷 외에 뾰족한 발표지면이 없어 안타깝다. 박씨는 “이제는 월간 또는 계간 잡지가 나올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구하지 못한 자료들이 숱하다. 예컨대 아데네사에서 낸 ‘소년소녀세계과학모험전집’. 그 가운데 그가 보유한 것은 1959년에 나온 <공중열차 지구호>(압플톤 지음, 최지수 옮김) 낱권. 책 뒤에 전집 8권이 소개되어 있고 출간예정인 19편의 제목이 들었다. 이런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자신이 갖고 있는 다른 희귀자료를 내놓을 생각이다. 그는 1953년에 나온 <타임> 잡지뭉치를 들고 나왔다. 거기에는 한국전 대차대조표가 실린 6월29일치도 포함돼 있다.

“에스에프 모른다고 자학하지 마세요.” 그는 한 도서평론가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행복한책읽기)를 읽고 비로소 눈을 떴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척 설득적이다. 20세기는 특별한 시대라는 거다.

20세기 100년동안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 1900년 비행기 없던 때 태어난 이는 이른 살 무렵 달나라에 착륙한 인간을 보았다! 과학기술 변화가 일상적인 시대다. 토플러는 “고대 로마시대나 중세 장원경제를 가르치면서 미래사회학이나, 변화양상은 왜 가르치지 않는가” 역설했다. 21세기에는 에스에프 정체성이 흔들릴 것이다. 사회상을 반영하는 본격소설이 곧 에스에프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일본만 해도 교과서에 에스에프가 들어있다는데….


‘두개골의 서’ ‘일본 침몰’ 강추


“과학발전에 관해서는 물론 그로 인한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에스에프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그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 외에 <두개골의 서>(북스피어), <일본침몰>(범우사)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에스에프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뀔 것이라면서. “그런데 말예요. <일본침몰>이 1970년대에 이미 3종 이상 번역되었어요.” 영화덕에 다시 떴다면서 <일본열도 침몰하다>(안동민 옮김, 휘문출판사, 1973)를 보여주었다.

박씨는 에스에프 도입사가 완성되면 과학문화사 기술에 도전할 생각이다. <과학조선> <학생과학> 등 지나간 잡지는 물론 요즘 나오는 <과학동아>를 부지런히 모으고 있다. 할 일은 많은데 문제는 시간과 돈이다. 그런데 지구 방위대 유지비는 어디서 나올까?

-------------------------------------------------------------------------------------

한국의 책쟁이들/⑨ 천주교 집안 4대손 송명근씨


책쟁이 치고 공간 고민 않는 이가 없다.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다. 그 바탕에는 책의 늘어날 수 있음과 공간의 늘일 수 없음이란 물성이 대립한다. 하여, 책과 공간이 일치하는 행복한 순간 외에는 책의 놓임새는 곧 책과 공간의 투쟁사다. 책과 공간 사이에 시간이 끼이면서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주름살처럼 불가항력 앞에서의 부질없음이 적실하게 드러난다.

송명근(55)씨 집은 가장인 그의 몫으로 할당된 공간이 가장 크다. 송씨 부부와 자녀 1남2녀, 그리고 어머니 등 6명이 거주하는 80평 가운데 25평이 송씨 전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안내한 곳은 좁은 계단을 톺아올라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좁은 방이었다. 책쟁이의 웅장한 서재가 짠~ 하고 나타나려니 기대한 방문자라면 적잖이 실망한다. 견본으로 미리 준비해 둔 천주교 관련 고서 외에 <고서연구> 잡지 20여권이 책상 위에 놓여있을 뿐.

책들은 꼬깃꼬깃 숨어있었다. 쪽문으로 연결된 마루, 그 맞은 편 다락방, 층계참의 창고, 지하방 가구의 뒤쪽…. 지붕의 물매가 그대로 드러난 이층은 구석구석 여축없이 맞춤 책꽂이고 거기서 넘친 책은 이중 삼중으로 쌓였다. 원래 도르래를 달아 이중으로 운용했던 책꽂이는 그 앞에 책이 쌓이면서 도르래는 기능을 잃었고 그 뒤의 책들 역시 거풍한 지 오래다. 층계참 창고 안쪽은 빵빵한 책 마대가 겹으로 쌓여 천장에 닿았다. 문쪽 책꽂이의 책이 ‘마대 속 책은 이러려니’ 하는 표지다. 무정한 책은 아들방이라고 예외없어 가구로써 반을 갈라 그 뒤쪽을 차지했다. 책은 공용공간인 단련실과 주방 옆까지 몰려나왔다. 이처럼 분산된 책들이 흐트러져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숱한 공간전쟁을 치른 ‘역전의 용사’의 손길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애초 할당한 공간에서 어떻게든 완결하려는 투지가 그것. 물론 넘치기 전 완벽할 정도로 공간을 요리한 솜씨 때문에 그 느낌을 두배다.

“만권 정도 됩니다. 천주교 2천권, 기독교 4천권, 시집 1천권, 기타 문학, 실용서 등등 해서 3천권?” 1980년대 대학 다닐 때부터 시작한 책사냥 치곤 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낌새를 챘는지 송씨는 사모은 책이 주로 50년대 이전에 나온 것들이라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썩음썩음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탓이다. 들인 시간과 금액이 책 속의 세월만큼이나 녹록치 않을 것이다.


다락방·가구 뒤쪽…책 숨바꼭질


월급은 100%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보너스와 부수입은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골프, 등산, 운동 외에 잡기가 없는 터, 남들이 술, 노름, 여색에 들일 돈을 책에다 쏟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탐탁찮아하다가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쌓이면서 책탐을 묵인하게 되었다. 2004년 현대그룹 금융사에서 임원으로 퇴사하기까지 한해 800% 이상의 보너스를 20여년 동안 책과 맞바꾸었으니 대충 알 만하다. 송씨는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더라면 돈좀 벌었을 거라며 웃었다.

그의 책탐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것은 깔끔한 정리 외에 수집분야를 특화하였기 때문. 주변에는 책을 좋아해 무절제하게 책을 사들이다 패가한 사람, 좋은 물건을 만나려는 욕심에 아예 장사꾼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있다. 그는 시세가 떨어졌다거나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거나 해서 책을 사는 일을 자제했다. 대신 관심분야의 책은 값의 고하를 크게 따지지 않고 샀다. 놓쳐서 아쉬운 책은 기억이 없다. 그는 이를 두고 ‘중심잡기’라고 일렀다.

“내가 수집한 책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오.” <서유견문>(유길준, ), (John w. Hodge, 서울 프레스, 1902) <법한자전>(샤를르 알레베크, 서울프레스, 1901), (Camille Imbault-huart, 파리 Imprimerie Nationale, 1888), (Griffis, 1885), (Adrien Launay, 파리외방선교회, 1895), <한국천주교회사>(달레) 1~3권, (Norbert Weber, 1915), (Maurice Courant, 1896) 1~3권, <성경직해>(Diaz, 최창현 옮김, 1892~1895) 1~9권, <성교감략>(Delaplace, 1883) 등 개화기에 나온 한국 또는 천주교 관련 자료들. 주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가 가장 공들인 분야는 천주교 서적. 그 이면에는 집안 내력이 자리한다. 비교적 개방적인 강경에서 터잡은 송씨 집안은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고조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증조부 안드레아, 조부 아우구스티노, 아버지 베드로. 증조모 허수산나, 조모 이베로니카, 어머니 김글라라 등. 증조부 안드레아는 익산의 나바위 성소 신도회장을 지냈다. 할머니는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103인 가운데 한 분인 이명서(베드로, 1821~1866)를 낸 집안이다. 병인박해(1886) 때 전주 부근 성지동에서 다른 신도들과 함께 체포된 이베드로는 전주 감영에서 배교를 거부한 채 고문과 혹형을 당하고 교우 5명과 함께 참수돼 마흔 다섯 생을 마쳤다. 할머니의 오빠와 조카가 신부였고 송씨의 동생과 고종사촌 동생 역시 서품을 받았으며 외사촌 동생은 가톨릭대학 학생이다. 송씨의 세례명은 바오로.


천주교 2천권·기독교 4천권 등 만권


어려서 초기 천주교 책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송씨는 어느 때부턴가 책이 슬금슬금 없어졌다고 말했다. 귀한 책이 있음을 알고 천주교신자라면서 접근해 한권 두권 집어간 것. 그가 책의 가치를 알고 끝물에 챙긴 것은 <성경직해> 1~9권, <성교감략>(1883, 납활자), <요리강령>(1910, 한기근 옮김, 뮈텔 감준), <천주성교공과>(1862~1864, 목판본), <성찰기략>(1864, 필사본, 다블뤼 지음) <성상경>(1900, 납활자) 등 10여종. 그것은 씨앗이 되어 2천여종의 천주교 선교 초기서적과 자료로 불어났다. 그런 점에서 송씨의 책탐은 옛 기억의 회복 또는 소명의식과 동의어다. 1992년에는 100여권을 엄선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임대한 150여점의 사진·형구와 함께 청담성당에서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보유한 가장 오랜 천주교 관련 자료는 척사윤음. 사교에 미혹되지 말라는 임금님의 말씀이 담긴 이 책자는 1801, 1839, 1866, 1881년 네 차례 반포됐다. 그가 보여주는 기해년(1839) 및 신사년(1881) 윤음은 당시의 급박성과는 달리 정려한 금속활자체가 아름다웠다. 특히 뒷부분의 한글체는 슬플 정도로 미려해 탄성을 자아냈다.


1800년대 한글체 슬플 정도로 미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면서 두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12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한국성서백년사>(리진호, 대한기독교서회, 1996년) 등 공구서를 뒤져 각종 자료의 서지를 확인해 주었다. 무척 행복해 보였다. 공소를 순회하던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지메모, 1881년 신사윤음을 기초한 영의정 조인영의 필적을 펴보이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천주교 관련 초기의 책은 거의 다 모았다는 그는 박물관이 꿈이다.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지자체의 제의도 있었고, 스스로 땅을 찾아도 보았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소중한 자료가 단지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마뜩찮을 뿐더러 책이 홀대받는 요즘 세태로 보아 과연 보러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좋은 자료를 왜 독점하고 있냐”며 기증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소중하게 관리해 줄 지 미덥잖다. 절두산 박물관에 첫 세례자인 이승훈이 과거 급제자 명단으로 오른 <사마방목>을 임대해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때 알바를 시켜 자료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해 스스로 연구를 하는 쪽을 고민하고 있다. 더 나이 들어 눈 어둡기 전에 어떻게든 자료화 해야겠는데…. 송씨는 초조해 보였다.

-------------------------------------------------------------------------------------

한국의 책쟁이들/⑩ 목재상 김태석씨


관악구 봉천6동, 봉천중앙시장 건너편 ‘봉천목재’. 전면의 유리를 흰필름으로 바른 사무실 안은 정통으로 받은 오후 햇볕이 물 속에서처럼 적막한 밝음으로 치환돼 있다. 그 탓일까. 자신은 목재상일 뿐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장 김태식(42)씨의 표정과 말투가 착 가라앉았다.

“86년 ‘그 사건’을 당한 뒤로 열 받아서 공부했어요.” 고교 졸업 뒤 성남시에 있던 제과회사 고려당의 빵공장을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위장취업, 노조결성 등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터, 그와 관련한 연행으로 추정하지만 그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 취조경관이 당시 노동운동가인 김문수를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 “신문수요? 만화 그리고 있지 않아요?”라고 되물을 정도였으니…. 경관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무식한 공돌이새끼라고 면박을 주었다. 풀려나서는 자괴감에 정관수술을 하려 했으나 병원에서 “젊은이가 왜 그러느냐”며 말렸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와 친절하게 금서목록을 실은 신문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전태일 평전>을 독파하고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한국민중사> <세계철학사>를 거쳐 <자본론>으로 옮아갔다. ‘낮 장사, 밤 공부’ 몇 해가 지나자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잡히고 삶의 자세도 바뀌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책들은 어디있지? 왼쪽 구석의 바퀴달린 빈 책꽂이를 밀어옮기자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한발짝을 들여놓자 4천여권의 책이 잘 차려진 헌책방처럼 책꽂이에 빼곡했다. 정확히 4평인 사무실의 반. ‘낮장사 밤공부’ 겹살이 인생이 추리소설의 배경처럼 고스란히 구현돼 있다. 책들은 사회과학, 철학, 한국근대사, 시, 소설 등을 고루 망라돼 있어 콕 집어낼 만한 특징이 없다. 교양인이 되기 위한 고른 독서의 결과랄까.


저잣거리가 책이더라고요


그가 책쟁이인 동시에 목재상인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가 동의하든 않든. 나무는 펄프의 원료이고, 책은 종이에 활자가 박힌 것뿐이니, 두 가지 모두 죽은나무인 점에서 일치한다. 그는 나무를 팔아 몸의 양식을 마련하고 책을 사들여 마음의 양식을 준비하니 팔고사는 게 모두 이익이다. 이보다 더 남은 장사가 어디 있는가. “전생에 나무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의 독백이다.

하지만 그가 목재상이 된 계기를 보면 우연과 필연이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988년 스물다섯 살, 빵공장을 그만두고 실업자였을 때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가 사람을 구하는 동안 좀 도와달라고 하였다. 사람은 쉬이 구해지지 않았고 일년만 하겠다는 시한은 지금까지 18년 연장됐다. 아버지가 1990년 암으로 세상을 뜨지 않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엉겁결에 사업을 맡았지만 정식으로 인수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돈받을 게 있다는 사람들은 악착같았고 돈을 줄 게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한테 받아가라고 하라”고 했다. 자리잡기까지는 부도 등 몇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정확히 말해 건축업체, 인테리어업체에 목재를 공급하는 중간상인. 목재(원목, MDF, 몰딩) 외에, 합판, 건축자재(텍스, 석고보드)를 취급한다. 자재 주문량으로써 경기 동향을 알 수 있고 몇 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생겼다. 그가 백일 때부터 나무장사를 해온 아버지의 장부와 아들이 이어서 기록한 장부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경기의 성쇠가 드러난다. 수출품이었던 합판은 중국에서의 수입품이 되었고 그 많던 수입원목도 집성목이 상당부분 차지한다. 국산 원목은 문화재 복원 등 특별한 경우 외에는 쓰이지 않는다. 채산이 안 맞기 때문. 그는 부동산 경기의 시한을 10년 정도로 보았다. 중국 동향 역시 주목 대상이다. 거품이 꺼질 때의 여파는 한국에 걷잡을 수 없는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 나무를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나무 역시 그한테는 책이 아니겠는가.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군요. 저자거리가 책이고 사람들이 책이었어요.” 책에서보다 저자의 사람들한테 배운 게 더 많다고 했다. 사람들한테 받은 상처를 치유하거나 잊으려 책을 보았고, 그 상처는 곧 지혜로 전환되었다. 뾰족하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육체노동이 아닌 입으로 먹고사는 복덕방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싫어하던 것과의 화해는 결혼하면서부터.

하이텔 독서동아리인 ‘분서갱유’에서 지금은 아내가 된 선진(34)씨를 만났다. 1999년에 채팅을 시작으로 신촌에서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 2000년 11월 결혼했다. 주로 호남사람들한테 돈을 떼어 그들을 싫어했는데 전주사람인 선씨를 만나면서 ‘그들’과 화해했다. 부부의 공통점은 책을 좋아한다는 것. 아이를 낳기 전에는 생활비 대부분을 책을 사는데 쓸 정도로 공통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거기까지.


독서동아리서 사랑 키워


남편은 사회과학, 철학, 역사에 관심이 많고 아내는 소설, 그 가운데 에스에프, 추리와 고전에 쏠려있다. 남편은 에스에프를 비현실적이고 소모적이라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반면 근현대사 인물은 옆집 아저씨처럼 잘 안다. 목동 그의 집 거실 책꽂이는 헌책이 주류인 사무실과는 달리 새책들이 가득하다. 아래쪽은 페이버백의 소설, 위쪽은 사회과학, 역사, 철학 분야로 하드커버가 주다. 김씨는 박상륭 칸을 따로 둘 정도로 그의 팬이다. 소설을 싫어하지만 박상륭은 예외다. 부부의 접점은 박상륭 하나다. “서로 영역을 인정하는 거죠, 뭐.” 이들 부부는 ‘일치하는 부부’의 맞은편 ‘보완관계의 부부’다. 연애할 때 아내의 레포트 자료 조사와 구입은 남자 몫, 정리는 여자 몫이었다.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의 각주 자료를 찾아 읽을 정도라면서 남편자랑이다. 남편 역시 비슷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미인이 많다면서 자신은 책으로써 땡을 잡았다고 말했다. 책을 좋아하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쁜 점은 단 한가지. 책을 잡으면 밤 늦도록 보는 바람에 아침을 잘 안 해준단다.

싫어하지만 화해하려는 나머지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피’ 돈이다. 화해하려 한다고 해서 화해가 되는 게 아닌 만큼 그의 노력은 여느 사람처럼 짝사랑일 터. ‘네가 장사꾼이냐 학생이냐’는 친구들의 지청구로 책 공간을 막아두었지만 <현금의 지배>(니알 퍼거슨) 외에 몇 권의 책이 사무공간에 나와있다. 마흔 넘어 경영책을 읽기 시작했다. 피터 드러커의 저서, ‘세이 노’ ‘브라운 스톤’ 등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 서른 여섯 늦장가가 완전히 사람을 바꿔놓았다. “이래도 되나 싶어요.” 그는 일요일마다 도서관에 간다. 아내한테는 비밀이지만 평일에도 시간 나면 그리로 간다. 경제·경영 분야를 파고 있다. 책한테 고민거리를 묻는다. 큰 업체가 가격으로 밀고 들어와 대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현실. 투자를 해야 하나, 더 두고 봐야 하나? 근교에 땅도 알아보지만 아직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학력사회에서 그는 대학 진학하지 않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목재를 팔고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더러 스스로 졸업장 못지 않는 자격을 갖췄다고 믿는다. 그러나 두 차례 씁쓸한 기억이 있다. 책을 보려고 국회도서관에 갔을 때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지 당했다. 그곳과는 인연은 그것이 다다. 또 한차례 지금의 아내가 자신보다 학력이 높다며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물론 인연은 이어졌고 고부 사이도 더할 나위 없다. 책이 많아서 좋았던 점? 한참만에 떠올린 기억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옆 병상에 누우신 분이 낯익다 싶더니 책에서 사진으로 본 이숭녕 선생이더라는 것. 대국어학자시라고 간호사들한테 귀띔하자 그분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고 ‘눈밝은’ 그도 덩달아 덕을 보았다.


아들과 대화하려 수학 정석 공부


그동안 세번 이사를 하고 보니 책짐이 여간 골치가 아니다. 앞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며 오동나무 원목으로 책꽂이를 짤 생각이다. 거기다 500~1000권 정도만 꽂고 싶다. 만권서 삼대면 정승이 나온다고 아들한테 책을 물려줄까도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좋은 책은 절판돼도 다시 나온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잘 보관해 주는데 굳이 개인이 짐을 싸안고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것. 그래서 그는 서초동 중앙도서관을 자주 간다. 그리고 <수학의 정석>을 읽는다. 아이가 크면 그게 대화의 창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

한국의 책쟁이들/⑪ ‘토라 연구가’ 이기대씨


책은 왜 읽는가? 답을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물음 자체가 괘씸한 질문이다. ‘왜 사느냐’처럼…. 책이 있으니 그냥 읽을 뿐 무슨 이유가 있는가, 라고 일축하기에는 뒤끝이 찜찜하다. 한번이라는 삶의 무게가 너무 큰 까닭. 목적이 왜 없겠는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마른 들풀도 의미없는 존재가 아닐 터인데….

겉 모양만큼이나 속 생각이 다르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왜’라고 자문할 수 있어 비인간과 다르다. 빈도와 깊이가 차이있겠지만. 이번 책쟁이는 그 ‘왜’를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한다.

이기대(49)씨. 서울 서대문구청 7급 공무원으로 관내 거주 외국인의 등록관리, 증명발급 등이 그의 업무다. 취업, 유학, 초청비자 등으로 90일 이상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은 주소지 변경 등 중대한 변동사항이 있을 경우 14일 이내에 관할구청 또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 터.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70%가 연희동에 집단 거주하는 화교이고 나머지는 일본인, 미국인, 중국동포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하니 그한테 맞춤할 법하다. 그의 특이점은 제3 외국어 히브리어도 능통하다는 사실. ‘제3외국어 히브리어’에 그만의 ‘왜’가 숨어있다. 그는 자신을 토라연구가라고 소개했다.

“당신의 정의는 영원한 정의, 당신의 법은 언제나 진실됩니다.(시편 119편 142절) 여기서 ‘법’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토라’입니다. 토라는 좁게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넓게는 구약성서 전체를 말하죠. 그러니까 성경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히브리어-한국어 대역성경을 펼쳐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진리는 생명으로 가는 길잡이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성경에는 진리가 감춰져 있지요.” 그는 모든 종교 가운데 ‘민 하샤마임’, 즉 하늘로부터 온 것은 토라뿐이라고 믿는다. 그한테 토라를 읽고 행하는 삶이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에무나(믿음)와 에메트(진리)의 어근은 ‘아만’(믿는다 라는 동사)입니다. 믿음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 거죠.”

그는 성서를 100번 이상 읽었다. 원래의 히브리어로도 줄줄 왼다. 어디에 무슨 구절이 있고, 그 구절이 무슨 뜻인가 원어로 꿰고 있다. 관련 자료도 구할 수 있는 한 다 보았다고 말했다. 기독교(신약), 이슬람교(코란)의 원전이나 관련 자료도 두루 섭렵했다.


‘토라’가 진리라고 믿는 공무원


“유월절에 해야 할 일을 규정한 출애굽기 12장 가운데 흠없는 수컷 양을 해질 무렵에 잡으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질 무렵’이라는 번역은 분명히 오역입니다. 원어에는 ‘베인 하알바임’ 즉 ‘두 저녁 가운데(between the evenings)’라고 되어 있어요. <탈무드>를 보면 첫 저녁이 오후 3시, 둘째 저녁이 오후 6시입니다. 그러니까 베인 하알바임은 오후 3~6시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지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사건이 오후 3시에 일어났으므로 토라에서 말하는 유월절 희생양과 일치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만일 번역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기독교에서 예수를 희생양으로 믿는 근거가 사라진다!

“모세가 던진 지팡이가 변해서 뱀이 되었다고 하지요? 히브리어로 ‘탄닌’인데, 그 말은 경우에 따라 뱀, 악어, 개구리 등 다르게 번역돼 있어요. 유대교 회당의 랍비도 어느 것이 정확한지 모르더군요. 탄닌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런 것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그가 토라의 세계로 들어가기는 1986년. 구청 직원으로 공무원에 첫발을 디딘 이듬해다. 여러 가지 책을 보다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눈이 머물고 결국 유불선과 기독교 등 종교를 거친 끝에 유대교로 귀착되었다. 당시 일본으로 철수한 이스라엘대사관 소개를 받아 미8군 영내 미군과 군속을 위한 유대교 회당과 끈이 닿았다. 당시 랍비 필립 실버스타인(현재 유대인목회자연합회장)의 호의로 매주 그곳을 출입하면서 유대교에 깊이 빠졌다.

100번 이상 읽었다는 성서는 너덜너덜해져 책등이 완전히 꺾였고 쪽쪽이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장1절) 성서 첫 구절이 일곱 마디죠. 신이 천지와 안식일을 창조한 날수와 일치해요. ‘행운의 7’은 여기서 유래했어요. 그리고 ‘베레쉬트’를 거꾸로 문자치환해서 읽으면 ‘티슈리베알렙’ 즉 ‘티슈리월 1일’이 되지요. 유대 민간력 1월1일입니다.” 그의 달변은 계속됐다.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행위의 옹호에 이르기까지.

그는 책과의 인연을 기적이라고 했다. “마음으로 원하는 책은 모두 얻어 보았어요.”

행자부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의 중국 주재관으로 베이징에 32개월 동안 머물 때는 초면의 남경대 유대학연구소 쉬신 교수한테서 중국어본 유대백과사전을 받았다. 남경 중화기독교협회를 통해서는 보기 힘든 두 상자 분량의 기독교 자료를 구입했다. 신과 인간, 우주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유란시아>라는 책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사업가한테서 소개받았다. 한참 도교에 빠졌던 20대에는 국립도서관 고문서실에서 본 필사본 <황정경> 말미 “정성을 다해 황정경 100독을 하면 <대동선경>을 만나리라”라는 메모를 통해 <대동선경>을 만났다. 그 책은 희귀한 도교경전으로 한국 첫 도교사찰인 ‘도관’을 연 박병극씨가 큰절을 하고 그한테서 복사본을 얻어갔다. 그가 이렇게 책을 말하는 것도 기적을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언뜻 무협지 같은 얘기다.


한문 실력 뛰어나 무협지 200종 번역


1978~79년 그는 실제로 무협지 200여종을 번역했다. 신당동 쪽에 있던 대룡각이라는 출판사. 입사시험을 치러 서울대 출신자와 함께 합격했다. 고교 때 별종 취급 받을 정도로 한문을 잘했고 졸업 무렵엔 백화문을 줄줄 읽을 정도의 실력이 바탕이었다. 당시 대룡각은 쌍벽을 이루던 무협지 출판사 중 하나로 편집부 상근자가 10여명. 그는 한달 두 종꼴로 2년동안 번역했다. 주로 와룡생의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공무원 봉급이 10만원 안쪽일 때 그의 한달벌이는 40만원이었다. 책이 잘 나가면 전체 직원이 삼겹살 불고기로 회식을 하고 5만~10만원의 금일봉이 주어졌다. 번역자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근사한 도사이름을 썼다. 무협지는 유불선, 연애, 원수갚기가 세 축. 초식은 도가, 격식은 유가, 원수갚기의 출가는 불교와 관련돼 있다. 그는 세 가지 축과 뿌리를 알면 무협지 번역은 아주 부드럽다고 말했다.

“독서는 정보를 얻고 연구를 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죠. 그 다음은 명상과 기도로 이어집니다.” 만일 성경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하면 3천년의 지혜를 얻는 것이고 3천년을 산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생활패턴만 바뀔 뿐 삶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 요즘 연구논문들은 95%가 인용이고 자기얘기는 5%에 불과하다고도 말했다.

얼마나 책을 읽으면 이런 주장을 자신있게 펼치는가. 그가 가진 책은 두 평 베란다에 꼬깃꼬깃 300권이 전부다. 나머지, 아니 몸통은? 2000년 12월 중국주재관으로 떠나면서 4톤 짐차에 가득실어 충북 진천의 이삿짐 보관센터 창고로 보내고 6년째 보관료를 물고 있다. 형편이 나아지면 짐을 찾아와 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희망으로 그칠지도 모를 일. 한때 책들은 모이고 쌓여 베란다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쳐들어왔다. 빨래를 널 수도 없고, 나중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어두침침했다.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이혼하자고 몇번을 을렀다. 결국 이삿짐센터로 간 책들은 무기한 유배에 처해졌고 그 이후의 책은 베란다에 유폐되었다. 이씨의 책은 이씨의 방문을 넘을 수 없도록 돼 있다. 만일 그곳을 벗어나면 책임 못진다는 무서운 아내의 엄포 탓이다. 그래서….


집에는 300권만…창고 보관 6년째


그는 일단 구득한 책은 다 읽는다. 읽지 않을 책은 사지 않는다. 읽는 속도가 빠르니 어느 책이어도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잡식성. 그한테 책은 종이와 활자로 보관하는 물건이 아니다. 읽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책 이야기는 결국 종교, 인생으로 이어지고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뒤섞었다. 못다한 얘기는 배웅길에도 이어졌고 쿵후의 발차기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오십 나이에 이런 자세가 나오는 사람이 있느냐면서. 그한테 책은 몸의 책이다. 어쩌면 무림의 비급처럼, 배우고 익히는….

-------------------------------------------------------------------------------------

한국의 책쟁이들/⑫ 화청 상서 36살 우체국장 조희봉씨


그는 올해 옥수수 400접을 팔았다.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딱 한달 동안. 새벽 밭에서 따온 옥수수가 앞마당에 부려지면 직원들이 달려들어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25개 들이 상자에 담아 당일 도시로 보낸다. 올해로 3년째. 옥수수 수확기에 그의 손은 푸른 물이 들었다.

조희봉씨는 우체국장이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우리나라 최북단 상서우체국. 춘천에서 50㎞ 북방 자동차로 45분 거리다. 옥수수, 벼, 감자 등을 재배하고 버섯, 산채 등 채취를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강원도 산간 마을에 자리한 이 우체국은 마을주민과 바깥을 이어주는 창구다. 각종 편지와 소포가 매개, 예금과 보험이 통로다. 인근에 산재한 군부대 사병들에게는 떠나온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다.

조 국장은 졸업철이면 관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상장을 준다. 상위권 아이에게 주어지는 우체국장상은 시골 마을에서는 여전히 권위 있다. 시상 때마다 정장 차림이지만 아직도 쑥스럽다. 반백의 기관장 사회에서 서른여섯의 그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가 별정우체국인 상서우체국장이 된 것은 2004년 1월, 정년퇴직한 아버지 뒤를 이어서다. 전국에 730여개인 별정우체국은 1960년대 ‘1면 1우체국’ 시책에 따라 국고가 미치지 못하는 오지에 만들어진 일종의 사설우체국이다.

젊은 그가 국장이 되면서 돈이 되지 않던 옥수수가 이제는 농가의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고 재배면적도 늘어났다. 그가 직접 밭을 돌며 옥수수를 꺾고 나르니 느른한 산촌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옥수수로 시작한 농산물 판매는 쌀, 한과, 산머루술로 품목이 늘어났다. 청정농산물, 수확당일 배송의 이점을 살린 홍보와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도회인의 정서가 맞아 떨어졌다. 올해 시작한 쌀은 화천농협과 협조해 20㎏들이 1천여 포를 팔았다. 내년부터는 나물도 팔 생각이다.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 관내 학교, 군부대를 돌며 홍보도 하고 큰 덩치 보험 상품은 직접 나섰다. 특히 장병들의 효도 소포는 군사우체국과 경쟁을 벌여 상당량을 유치했다.


네가 왜? 아버지는 무척 놀랐다


3년 전 조씨가 내려와서 우체국을 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아버지는 무척 놀랐다.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을 뿐더러 저 잘난 맛에 살고 서울의 좋은 직장에 자리 잡은 상황에서 하향해 뒤를 잇겠다는 말이 황당했던 것은 당연.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딴 짓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냐, 30년 넘게 청춘을 바쳐 이룩한 자신의 분신을 말아먹진 않겠느냐, 라는 미덥잖은 시선이 따랐다. 사실 조씨도 쉬피 보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때로 외로울때는/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생각한다.”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처럼 서울에 있는 지인들도 그가 그렇게 사는 줄 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만만한가. 서울에서보다 오히려 생존경쟁이 더 치열하다. 단 하나의 선택지. 이것 아니면 없다. 핑핑 돌아가는 서울로의 퇴로는 더는 없다. 워낙 흐름이 다르기 때문. 읽지 못할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만은 서울 직장생활 때와 흡사하다. ‘내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안전지대를 떠나보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전혀 다른 두번 째 삶을 사는 자신은 무척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선머슴아 같은 신참국장 3년차, 이제는 제법 자리가 잡히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실적이 좋은 우체국에게 주는 상을 받아 제주도 포상관광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그가 과장 승진을 앞두고 6년 정도 다니다 때려치운 직장은 동부정보기술. 시스템 개발 판매, 컴퓨터 서버 등 전산기기 판매를 하는 전산 관련 아이티(IT) 업체다. 한해 평균 400억 어치의 물품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가방 속의 읽히지 않은 책처럼 그의 젊음도 먼지만 쌓여갔다. 잠재한 책에 대한 열병이 도진 것은 ‘숨은책’이라는 헌책 동아리를 알게 되면서부터. 대부분의 회원이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인 이 모임은 ‘벙개’를 통해 보고 싶은 책을 헌책방에서 싼값에 사고, 주말 밤을 새며 책 이야기를 나누는 마니아들의 동아리다. 처음 넥타이 차림으로 참석해 ‘뻘쭘하던’ 그가 두번 째 시삽을 맡게 된 것은 숨은 열병이 발현되면서 나이를 잊을 만큼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갈등을 빚던 실재와 정서가 일치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표현했다. 2년여 ‘낮 회사원, 밤 책벌레’의 이중생활은 <전작주의자의 꿈>이라는 단행본 출간으로 맺어졌다. ‘전작주의자’는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로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찾아서 완독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한놈만 패”라는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의 대사처럼.


이윤기 책 모두 따라읽고 주례 ‘협박’


조씨가 따라읽은 사람은 소설가 이윤기씨. <하늘의 문> <나비 넥타이> 등 창작소설로 시작한 그의 따라읽기는 번역본으로 확대돼 200여권을 모두 독파했다. 그렇게 하면서 작가 이윤기의 전모뿐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 세상 이치까지 두루 읽게 됐다. 그 무렵 사내 커플의 사랑은 무르익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800자 원고지 10장에 빼곡히 사연을 적고 그동안 독파한 200여권의 이윤기 책 사진을 동봉해 반 협박편지를 띄웠다. 당신 아니면 주례설 사람이 없다며. 결혼식 며칠 전까지 답이 없어 포기하고 있던 차 이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12월9일 화천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활자가 목소리로 되고 책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는 듯한 환각. “책과의 인연에서 더 이를 수 없는 극점이었다”는 게 조씨의 말이다. 소설가 이윤기는 주례 이윤기가 되었고 스승 이윤기가 되었다.

신접살림은 화천과 서울의 중간인 춘천에 차렸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사농동. 여느 집과 다르지 않은 한 아파트. 서재가 있고 두 벽면이 책꽂이인 점, 그리고 베란다가 책으로 그득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책을 싫어하진 않지만 넘치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 최호경씨는 책이 서재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몰래 산 책은 화천의 우체국 관사에 쌓아두고 하루 한 봉지씩 슬며시 들여온다. ‘몰래’나 ‘슬며시’는 조씨한테만 해당할 따름이다. “다 알지만 어떡해요. 워낙 책을 좋아하는 걸요.” 최씨의 말이다. 책꽂이에는 헌책방을 무수히 쏘다닌 자의 흔적이 없다. “새 책을 제값 주고 사서 읽는 사람처럼 바보는 없습니다. 두세 달만 기다리면 반드시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거든요.” 그는 출판의 흐름에 맞춰 신간들을 꾸준히 섭렵한다. 단 두세 달이 늦을 뿐이다.

그의 따라읽기는 김병익, 김원우, 고종석 등으로 이어지고 외국작가로는 스티븐 킹, 딘 쿤츠를 거쳐 요즘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 있다. “우리나라 소설은 개인 체험이나 내적인 갈등 위주의 정서에 머물고 있지만 일본 미스터리는 인간 내면의 추악한 밑바탕까지 파고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한 대사회적 발언의 수위도 굉장히 높아요.” 그는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기리노 나츠오의 <아웃>을 높이 평가한다. <이유>는 일가족 살해사건의 비밀을 캐가는 이야기인데 더불어 부동산, 교육문제 등을 짚어 일본에서 ‘현대의 발자크’라는 평을 받는다. 또 <아웃>은 도시락 공장에 다니는 네 여자 중 한 명이 남편을 살해하면서 빚어지는 이야기로 페미니즘 문제를 담고 있다. 잔혹한 장면의 세밀한 묘사는 도저히 여성작가가 썼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적실하다. “읽고 난 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어요.”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 등 스쳐 지나쳤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70, 80년대에 번역된 책은 당시 우리나라 독자들의 시선을 벗어나 있었다. 2, 3년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일본 미스터리는 헌책 마니아들 사이에 잠복했던 ‘어두운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미스터리문학즐기기’, ‘하우미스터리닷컴’ 등 동호회 붐이 일고 <화차> <아웃> 등 판이 끊긴 책들이 다시 나올 예정이다. “영국 미국에서 태동해 일본에서 엄청난 흐름을 보였던 추리, 미스터리 소설이 우리만 비껴갔던 거죠. 존 그리샴, 로빈 쿡, 영화 시에스아이(CSI) 시리즈 등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그는 본격소설과 장르소설이 이분화된 한국이 특이한 상황이라면서 조만간 그 경계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일본 추리물 ‘어두운 열정’ 불러


책 읽는 우체국장, 아니 책을 계속 읽고자 하는 시골 우체국장. “사라지는 것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절대 매체였던 책이 나이 든 사람의 구식 매체로 밀리고, 유일한 소식통이던 우체국은 전자우편에 밀려 디엠이나 고지서를 배달하는 곳으로 전락한 즈음, 조씨는 그 두 가지를 겸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서울의 원심력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우체국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소중한 통로이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책과 비슷해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지만 누군가 지켜야하지 않겠어요?” 불임 종자가 횡행하는 가운데 강원도 집집이 튼실한 옥수수 종자를 품듯 책 읽는 조씨의 우체국도 우리네 삶의 건강한 원초를 품고 있다.

-------------------------------------------------------------------------------------

한국의 책쟁이들/⑬ 춘천에서 ‘북카페’하는 김종헌씨


“멋있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사는 모습, 살아온 경험을 듣고 책을 구경하다보면 음식은 덤이란 생각이 들어요.”

홍천에서의 기억을 따라 다시 찾아왔다는 전병길(33·춘천시 우두동)씨 부부는 “이런 공간이 가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며 “이곳은 콘텐츠와 스토리가 있다”고 말했다. ‘6가지 스프레드와 소스를 곁들인 모듬빵+허브차’를 가운데 둔 정씨 부부의 식탁 모서리에 북마스터 김종헌(60)씨가 앉았다. 메뉴와 허브에 대한 설명은 매장을 홍천에서 춘천으로 옮긴 사연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부부는 서예작품으로 안내되었고 두런두런 얘기가 꼬리를 물었다.

춘천시 석사동 석사천변 길에 자리잡은 ‘피스오브마인드 베이커리&북카페’. ‘이형숙 전통제과제빵연구소’란 간판이 함께 붙었다. 입구 옆에는 송천 정하건의 득만권서 행만리로(得萬券書 行萬里路)’ 예서체 휘호가 걸려 있다.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면 화~악 펼쳐진 100여평. 고풍스런 공간이다. 저만치 맞은편 제빵시설이 차지한 공간을 빼고는 사방이 만권서와 음반 5천점, 서화 300여점으로 뒤덮여 있다. 손님용 식탁에도 스며들어 유리판 안에 고서와 옛 물건이 소품처럼 고여 있다.

“20여년 동안 꿈으로만 간직했던 북카페입니다.” 강원도 홍천 공작산 아래 있던 카페를 올해 9월 이곳으로 옮겨왔다. 30여대의 트럭이 동원된 이사 행렬은 자체가 볼거리였다. 지인들이 각종 옛책과 옛물건을 맡겨 ‘홍천시대’ 3년만에 짐이 두 배 분량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춘천시대’를 편 이곳, 코 앞 석사천은 버들치에 왜가리가 노닐고 고개를 들면 안마산이 봉긋하다. ‘V자 계곡의 A자 공작산’, 절경인 홍천 옛터의 풍광과 겹친다.

김종헌씨가 28년동안 몸담았던 섬유회사 남영나일론에서 사표를 던진 것은 2003년, 당시 대표이사에 연봉은 1억이 넘었다. 사직 이유는 ‘일신 상의 이유’가 아니라 ‘북카페를 차리기 위해서’라고 적었다. 서울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자리를 물색하다 홍천 옛 자리를 찍은 것은 고즈넉하면서 경관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허브농장 안이라 손님이 연계될 것이라는 판단도 한몫 했다. 예상과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독일식 호밀빵과 허브차를 기본 메뉴로 운 뗀 카페는 입소문이 나면서 서울, 경기는 물론 멀리 제주서도 손님이 찾아들었다. 동업자인 베이커리 마스터 이형숙(55)씨는 허브농장의 각종 허브를 십분 이용해 빵과 과자, 피자, 그리고 다양한 음료를 개발해 메뉴를 넓혀나갔다.

북 마스터 김씨와 베이커리 마스터 이씨는 30년째의 부부. 신혼방에 붉은 글씨로 써 붙였던 ‘결혼했다 방심 말고 오는 연적 막아내자’는 구호는 아직 유효하다. 다행인 것은 상호 시선이 결혼 30년 여느 부부와 달리 여전히 존경어려 있다는 사실.

이씨의 눈이 빵에 머문 것은 8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 지사장이 된 남편 김씨를 따라 그곳에 이주하면서다. 층층시하 대가족에서 4명의 핵가족이 되면서 다가온 자기계발의 기회. 근처 빵집을 소개받아 3년 동안 어깨 너머로 빵동네 물정을 두루 익혔다. 그 빵집은 통밀과 자연원료를 이용한 ‘바이오빵’를 팔았는데 주인은 4대째 대물림한 정통 독일 제빵장이었다. 남편 김씨는 4년여 유럽생활 틈틈이 박물관, 미술관, 서점을 찾고 중세 옛 성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을 눈여겨봐뒀다.


결혼했다 방심 말고 오는 연적 막자


귀국 뒤 이씨는 한국제과고등기술학교에 등록해 공부를 하다 미국제빵협회(American Institute of Baking)의 6개월 연수유학을 다녀왔다. 애초 남편 김씨는 낙방할 것을 예상해 그러마 했는데 아내가 시험에 덜컥 붙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아내에 대한 투자가 인생에서 가장 멋진 투자였다”고 할 만큼 김씨의 자랑거리가 되고 부부의 이모작 새 인생에 큰 밑천이 될 줄은 몰랐다. 이씨는 그 뒤 8년 동안 기술학교에서 제과제빵을 가르쳤고 1997년에는 아예 아들과 함께 수능 공부를 한 끝에 대학에서 전통조리를 전공했다. 배울 욕심은 쉰 나이에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적을 둔 현재까지 이어졌다.

“단순히 음료를 곁들인 북카페는 자생력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따라야 합니다.” 새 책과 음료로써 겨우 현상유지를 하는 다른 북카페나 책만 가득 들여놓아 반짝행사 때만 손님이 들뿐 썰렁한 책박물관과 달리 손님이 부절한 것은 큰 회사에서 쌓은 김씨의 경영노하우와 부인 이씨의 농익은 제빵 기술이 합쳐진 결과다. 처음 우연히 선택한 ‘허브농장 안’은 거의 모든 메뉴에 허브가 들어가게 된 절묘한 끈이 되었다. 원료로 쓰는 허브는 서양종은 물론 각종 토종약초들이다. 솔잎, 마늘 등 통상 허브라고 생각지 않는 것들이 이곳에선 훌륭한 허브다. 허브차를 곁들인 허브빵, 허브 밑판으로 만든 피자, 해산물 스파게티 등 기본 메뉴 외에 십전대보탕으로 반죽한 ‘십전대보빵’, 솔잎가루와 잣 호두를 섞은 ‘솔향기빵’, 소나무 숯가루와 대추 호두가 들어간 ‘솔숯검은빵’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서울 특급호텔의 식사를 춘천 값으로 제공한다”는 게 김씨의 말이다.

사방에 펼쳐진 책은 고풍으로서의 악세사리가 아니다. 한권 한권 사 모은 그것들은 자체 가치는 물론 하나같이 구입 당시의 의도와 사연이 깃들어 있다. 그 탓일까. 그곳에 머문 다섯 시간 동안 구석구석에서 뽑아온 온갖 책과 자료와 얽힌 이야기가 쉼없이 곁들여졌다.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을 지낸 이기형씨를 외할아버지로 둔 김씨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라 옛 문향에 익숙한 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서예에 흠뻑 빠져 들었다. 중학 시절 대학천 고서점가를 지나며 고서에 친근해져 첫 인연이 삼국지 목판본이었다. 그 나이에 믿기지 않게도 원효의 <대승기신론기회본> 6권2책을 구입했다. 첫 연애, 둘째 연애, 군 복무, 취업 등으로 휴면기에 들었던 책 사랑이 다시 불끈해진 것은 1987년 전주 골동품점에서 누군가에게 선물했던 자신의 서예작품을 부르는대로 값치르고 되찾아오면서부터다. 하루 두 갑씩 피던 담배도 끊고 골프도 끊고 주말이면 등산과 탐서에 몰입했다. 골동품점에서 외조부의 저서도 발견했고 김홍도의 삽화가 실린 내사본 <오륜행실도>도 인연이 닿았다. 뉴욕 고서점에서 발견한 린위탕의 <생활의 발견> 1937년 초판본은 그가 아끼는 책 가운데 하나다.


88올림픽 총감독 유품 고이 보관


한해 400~500권씩 늘어가는 책은 30평대 집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10년 전 60평으로 넓혀야 했다. 새 집으로 이사하는 날은 부인 이씨가 인도 성지순례를 떠나는 날과 겹쳤다. “아무 걱정 말고 여행이나 잘 다녀오시오.” 돌아와 보니 남편이 인심 쓴 이유를 알았다. 60평 새집이 더 좁아보였다. 방마다 책을 두고도 모자라 거실과 안방, 화장실에까지 책이 널렸다. 빤한 벽은 서예작품과 그림 도배였다. 지하 서고를 따로 두고 쌓아두었던 책을 이사하면서 책장에 꽂아버린 것. 안방 화장대도, 옷장 위에도 책, 책. “어디서 화장을 하란 말예요?” “나는 화장안한 당신이 제일 예뻐요.”

북카페 한켠 작은 공간. 이경렬 철학문고, 유경환 컬렉션, 두 개의 팻말이 달렸다. 양장본 고서 400여권으로 된 이경렬 문고는 1996년 여름 수원의 한 파지수집상에서 폐기처리 직전 건졌다. ‘바위고개’ 작곡자인 이흥렬 선생의 맏형인 이경렬은 박종홍, 안호상보다 앞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0세대 철학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34년 동안 배재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문고에서는 초기 서양철학자의 궤적을 더듬을 수 있다. 유경환은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총감독을 맡았던 이로 한국 연출계의 원로. 유족들의 몇 차례 면접을 거쳐 가장 적합한 유품 관리자로 김씨가 낙점됐다. 올 3월 인수한 14상자의 유품에는 1950~90년대 무대예술의 프로그램 팸플릿, 등사판 희곡 대본 및 최근의 뮤지컬 악보와 대본, 유 감독이 설계한 무대조명과 장치 설계도 등이 포함돼 있다.

“널찍한 공간과 책에 대한 애정, 그리고 아내의 아량 때문에 가능한 얘기죠.” 김씨는 자신의 장서를 두고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버리지를 않고 모아뒀기에 가능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성적표, 납부금 영수증, 각종 상장, 안경, 타자기도 살아남았다. 단순한 컬렉션과는 달리 그의 장서는 생산에 잇닿아 있다. 결혼 30돌을 기념해 <빵굽는 아내와 CEO남편의 전원카페>, <남자 나이 마흔에는 결심을 해야 한다>를 펴냈고 <추사 김정희를 넘어서서>(가제)는 연내 출간을 앞두고 있다. 또 동양 선승들의 선시집, 60~70년대 생활사 이야기 등 두 종의 책은 얼개가 거의 잡혔다. 매주 두 차례 부부는 강사가 되어 이웃과 지식과 지혜를 나눈다. 토요일 오전 9시30~11시30분 ‘실무 영어+일본어 동시에 배우기’, 월요일 9시~12시는 ‘전통떡과 음식 만들기’가 주제다.

낮에는 청바지에 헐렁한 면티 차림으로 허드렛일을 하는 김씨는 밤이면 북카페가 서재로 바뀌면서 저술가로 변신한다. 낮은 제2인생, 밤에는 제3인생을 일구는 ‘삼겹행복’.

-------------------------------------------------------------------------------------

한국의 책쟁이들/⑭ ‘시집 모으는 시인PD’ 이도윤씨


(…) 우리는 지지 않았다/북소리 높여라 장미 같은 피들아/너는 이미 낡은 역사 위를 딛고 선/나의 젊은 발/새 이파리로 하늘을 걷는/나의 푸른 발/우리 언제 이처럼 하나로/뜨겁게 서로를 부른 적 있었더냐/ (…) 머리 떨구지 마라/네 뜨거운 피가/나를 젊게 하느니/우리 모두 젊어졌느니/너는 결코 지지 않았다/우리 붉은 함성으로/더 뜨거운 세상을 울리자/흔들어놓자/우리의 푸른 아들아.

2002년 월드컵축구 4강전. 한국이 독일에 패한 뒤 중계를 마친 엠비시 텔레비전에는 ‘우리들은 지지 않았다’는 제목의 시가 자막으로 흘렀다. 화면은 똑같지만 엠비시가 월드컵경기 중계방송 시청률에서 다른 두 방송사를 압도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터. 그 가운데 경기 전후 화면에 시편을 덧붙인 것이 승리의 감격과 패배의 아쉬움에 품격을 더한 것도 한몫했다. 당시 제작팀 차장이었던 이도윤씨의 아이디어로 삽입한 시들은 중계와 중계 사이에 이씨 자신이 밤을 도와 쓴 것이었다.

이런 상상력의 힘은 2006년 월드컵에도 이어져 차범근 감독에다가 아들 차두리까지 해설자 자리에 앉혔다. 2대에 걸친 경험과 입심은 시청자를 엠비시 채널에 붙들어 두었다. 특히 차두리의 솔직한 실수담, 뒷얘기 등 신세대다운 말투는 젊은 층을 쓸다시피 끌어들였다.

엠비시 스포츠제작단의 스포츠제작팀장 이도윤(49)씨의 명함에는 ‘시 전문지 <시인> 편집인’이 병기돼 있다. 직업은 방송 피디지만 신분은 자칭 ‘삼류시인’이다. 1985년 <시인>을 통해 등단한 이씨는 1993년 첫 시집 <너는 꽃이다>(창비)를 내고 2005년 12년 만에 두번째 시집 <산을 옮기다>(시인)를 냈다. 치렁치렁 은색머리에 개량한복 차림의 그는 사무실 안에서 단연 튄다. “보도국 근무 2~3년을 빼면 17년동안 줄곧 스포츠 제작단에서 근무했어요. 스포츠 중계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이 끝난 다음에는 나만의 생활을 가질 수가 있지요.” 낮이 피디의 시간이라면 아침과 저녁, 그리고 그 사이의 밤은 시인의 몫이었다.


“한 권 낼 때마다 1천만원 깨져요”


첫 시집은 민중시풍. 등단작인 ‘오월의 꽃’에 닿아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노여움/깊이 심장을 열고 떨리는/이파리 모두어 컴컴한 밤의/가늠자 위에 개화한 함성/끝내 굳은 입술에 패인/이빨자욱 피의 목소리 죽어/머리 풀고 끌려간 형제들/향기 뒤섞인 꽃이파리/손목에 질끈 이마에 질끈/아아 죽음에 질끈 동여맨/피묻은 죽음의 그리움 다시/피어날 오월의 꽃. 86년 입사와 더불어 방송파업에 연루되고 91년에는 4~5개월동안 잠수를 탔다. 광주의 연합문학서클인 ‘용설난’ 출신인 그는 광주항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민중시풍으로 고스란히 첫 시집에 박혔다. “민중시는 특이한 현상이었죠. 시는 근본적으로 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박에서의 자유 특히 틀에 갇힌 현대인의 고뇌 등을 형상화하는 게 시인의 몫이죠.” 일제 때에는 해방이 최고 목표라면 분단시대인 지금은 통일이 지향점이 돼야 한다고 본다.

지난해는 북에서 열린 6·15민족문학인대회를 다녀왔다. 문인들과 함께 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을 둘러본 그는 돌아와서 60분 다큐 ‘백두산에 바치는 시’를 만들었다. 1990년에는 사하라를 다녀왔다. 그 곳에서 그는 하늘, 땅, 물 외에 사막을 하나 더 보았다. 쏟아질 듯한 왕별, 뒹구는 나무화석, 금새 생겼다 없어지는 모래언덕 등.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평양도 사막도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지 못했다. 첫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를 120년이라고 표현하는 이면에는 시적방황이 잠재돼 있다.

어쩌면 그의 시한(詩恨)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됐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2003년 9월7일자로 시 전문지 <시인>을 재복간했다. 85년 <시인>의 편집인이었던 조태일 시인이 이씨를 시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조 시인은 그의 ‘문학적 부친’이었다. 조 시인이 20대인 1969년에 창간한 월간 <시인>은 1년 뒤 강제 폐간되고 83년 무크지로 복간되었다가 87년 또다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1999년 타계 때까지 조 시인은 재복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씨가 재복간 날짜를 조 시인의 타계일인 9월 7일에 맞춘 것은 <시인>의 재복간이 조 시인에 대한 헌사임을 보여준다. “애초 추모집으로 내려다 아예 잡지를 복간하자고 뜻이 모아졌어요.” 조태일, 신동엽, 김남주, 김현승, 박봉우 등 권마다 시인특집을 싣고 생명, 평화, 남북작가회의 등의 주제를 조명했다. 특히 신작시들은 모두 육필 원고를 영인해 실었다. “컴퓨터화 시대에 인터넷이 판을 칠수록 정신적인 작업인 시는 손맛이 느껴지는 육필이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다섯 권을 내고 여섯 권째를 준비 중인 그는 줄곧 하드커버에 호화장정을 고집해왔다. 매호 제호는 시단 원로의 휘호를 받아 펴냈다. ‘개성있게 가자’, ‘망하더라도 화려하게 망하자’의 생각에서다. “한 권 낼 때마다 일천만원씩 깨져요.” 처음에는 5천부를 찍다가 셋째 권부터는 2천부로 줄였다.


1년에 한번 ‘108일 금주’하는 술꾼


돈벌이나 문단권력과 무관한 반년간 잡지를 생떼같은 돈을 들여 펴내는 것은 그의 대책없음과도 무관치 않다. 82년 결혼해 지난 1999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구입하기까지 청파동, 포일리(평촌), 여의도를 17~8년 전세로 떠돌았다. 그동안 책값, 술값으로 나간 돈이면 집 두어 채는 샀을 거라는 게 부인 강문자(48)씨의 말이다. 술을 마시면 스스로 전생에 황제였다고 뻐길 만큼 남들과 비교해 결코 빠질 게 없다는 그한테 단 한 가지 빠진 게 적금통장일 정도이니…. 좋은 책을 만나면 값의 고하를 안 따지고 호주머니를 턴다. 인사동 고서경매장을 멋 모르고 따라갔던 아내는 ‘쥐똥 묻은 책’이 1만원으로 시작해 백여만원에 이르도록 남편이 계속 손들어 응찰하는 걸 보고 속이 뒤집히기도 했단다. 이사할 때 책짐을 싸던 한 인부는 짐옮길 걱정에 끊었던 담배를 빼물더란다. 인터넷을 애용하는 지금과는 달리 이씨는 얼마 전까지 헌책방을 순례했다. 헌책방에서 박봉우의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를 싼 값에 사고는 책자랑에 술값이 더 들기도 했다. 아내는 두세 시간 괴로운 벌을 선 뒤로는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엠비시 구내서점에서는 그가 가장 큰 손님이다. 장기출장 때면 초판을 놓칠세라 특별히 부탁해둔다.

그렇게 모아진 시집들은 2003년 <시인> 복간과 더불어 개관한 조태일기념관 부설 시집박물관에 내려보냈다. 그 가운데는 최남선, 이용악, 정지용, 설정식 등 희귀본이 많이 포함돼 있다. 13억이 든 기념관은 전남 곡성군 태안사 경내 4680㎡ 터에 지상 2층 419.49㎡ 규모로 세워졌다. 그 절은 조 시인의 부친이 주지로 있던 곳으로 조 시인은 거기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씨가 시집, 특히 초판 시집에 빠져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그에게 시집을 아낌없이 넘겨준다. 보람있게 쓰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년께 또 한번 박물관으로 책짐을 실어내릴 예정이다.

고쳐 쓴 시가 완성되었다고/술 취한 시인이 전화를 해온 흐린 저녁/낯 모르는 여인이 내 휴대폰에 문자를 보내왔다/‘네가 시인이냐?’/‘너 같은 녀석이 시인이냐?’/단호한 그 글씨를 바라보며/나도 나에게 묻는다/‘너는 세상을 울고 있는가?’(‘나의 스승’ 부분) 쓰여지지 않는 시로 불면의 밤을 보낸 날은 인사동 술집에서 빈 술병을 늘어놓는다. 그즈음 주머니 속 글씨들은 거리로 도망쳐 시가 되고 그는 시에 대고 방뇨를 한다. 언젠가 대낮에 광화문 이순신 동상에 오줌을 눠 경범죄로 붙들려 가기도 했다. 고광헌 시인은 이씨를 책쟁이라기보다 술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일년에 한차례 ‘108일 금주’를 한다. 스승 조태일을 따라.


고서경매장서 100여만원 응찰도


초겨울 밤 은행나무가 잎을 마구 떨구는 여의도 이씨의 집. 서재는 꺼멓게 세월이 더께앉은 시집들이 책꽂이에 꽂히고 바닥에 쌓여 아우성이다. 그 흔한 사인볼 하나 없는 거실 책장에는 시집 귀중본이 곱게 모셔져 있다. 일고여덟 권 남았다는 서정주의 <화사집> 초판을 비롯해 이용악의 <낡은 집>, 임화의 <현해탄>, 임학수의 <후조> 등을 조심스럽게 펴보였다. 일일이 비닐 포장을 했다. ‘한잔 하세 노래가 사람이더군’. 고은 시인의 휘호가 문인끼리의 교유를 짐작케 한다.

“책을 모으다 보면 굉장히 책을 아끼게 됩니다. 나는 보관자일 뿐입니다. 그중에서 잘 보관하는 사람이죠. 나에게 온 책들은 주인을 잘 만난 셈이구요.” 표지가 떨어져나간 신동엽의 <아사녀>. 하드커버 제본하고 김지하의 글씨와 그림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문우서림 김영복씨가 선본인 자기 것과 바꾸자는 것을 거절했단다.

“우리 같은 사람이 있으니, 책이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거죠.”

아시안 게임 중계차 도하로 떠나는 그는 틈틈이 읽을 거라고 최근에 나온 문태준, 김사인, 황동규의 시집을 챙겼다. 그는 아무래도 서울을 비우는 스무날 동안 어떤 시집 초판이 나올까 궁금해 할 것이다. 어쩌겠는가. 깊이 든 병인 것을.

-------------------------------------------------------------------------------------

한국의 책쟁이들/ ⑮출판인이 된 ‘6·10항쟁 밥풀데기’최용철씨


맨 정신으로는 힘들다, 저녁시간 끼어 술 한잔 하자고 했다. 그 단어 하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밥풀데기.

직원 12명인 출판사 두리미디어 최용철(52) 사장은 자칭 ‘번잡스런 사람’이라고 했다. 운전하고 가다가 길에 장애물 있으면 내려서 치워놓고 간다. 미아리 살 때는 2㎞ 구간 도로를 자주 뜯기에 관심을 갖고 헤아려보니 스물세 번이었다. 계획성 있게 하라며 구청에 쓴소리를 했다. 사회가 이만큼 변한 것도 참여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주인의식 없이 구호로만 외치는 진보나 개혁은 헛거라고.

두리출판사의 주종은 ‘청소년을 위한 교양시리즈’ 지금까지 14권을 냈다. 한국근현대사, 한국음악사, 서양철학사, 서양수학사, 동양미술사 등등. 책을 많이 읽어야 할 청소년들이 입시에 시간을 뺏겨 이렇게라도 요약 정리해 줘야겠다며 통사식으로 정리한 것들이다. 모두 합쳐 한달 7000부 정도 나간다. 이 가운데 <한국사>가 가장 많이 나가 99년 5월 이래 20쇄 20만부가 팔렸다. 사실 이 책은 경영난에 시달리던 그가 이것만 내고 출판사를 접으려던 참에 우연히 걸린 것이다. 출판사에 들어온 지 3년이나 지난 원고인데 때마침 눈에 띄어 읽게 되고 가능성 있다고 판단했다. 영영 묻힐 뻔했던, 마지막이 될 뻔했던 책은 효자가 되어 내년 2/4분기면 26권으로 완결되는 큰 시리즈의 첫권이 되었다. 자신이 출간하기로 결정했으니 자신이 발굴한 원고라고 말했다.

그는 시리즈 한 권을 낼 때마다 좋은 대학 하나 세운다는 생각을 한다. 청소년 도서는 최근 들어 논술이 강화되면서 종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텅빈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입시광풍에 휩쓸려 책 읽기는 꿈도 못 꾸고 출판인들 역시 그들을 위한 책을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부모 말도 안 믿을 정도로 기성세대를 믿지 못한다. 대학 가면 된다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 아무리 공부해도 일등 못한다는 것 등등. 그런 아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양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의 학교도서관에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를 기증한다. 얼마 전에는 거창고등학교에 200권을 보냈다. 교도소, 군부대, 지역사회도서관에도 수시로 책을 보낸다.

이처럼 그가 ‘청소년을 위한’ 책 출판에 이른 데는 긴 이력이 숨어져 있다.


유행가 부르는 학생은 쫓아냈어


제약회사 영업직 6년차 때 최씨는 공금횡령 누명을 썼다. 새삼 판공비를 영수증 처리하라는 것을 전결사항인데 갑자기 왜 그러냐며 거부한 것이 빌미였다. 검찰 조사에서 사장과 대질하면서 혐의가 풀려 무혐의 처리됐지만 생각없이 살던 그에게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인인 그 회사는 예배에 참석 않는다는 이유로 직원을 해고했던 터. 사정이 딱해 해고자와 회사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한 것이 밉보이지 않았을까. 회사를 그만둔 그는 정경모의 <찢겨진 산하>, 윤정모의 <고삐> 등을 읽었다. 배워보자!

1986년 안암동 5가 로터리 근처에 ‘장산곶’ 간판으로 막걸리집을 차렸다. 대학가에 가면 뭣이 문제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90평 술청은 무척 붐볐다. 정원 130명이 꽉차면 대문앞 추녀까지 신문지를 깔 만큼 장사가 됐다. 술집마당에서 서노협, 전노협 태동회의가 열리고, 구석에서 미 대사관저 침투조가 마지막 결의도 했다. 엔엘주점이라고들 했다. 술외상 대신 학생증 받은 것 세 차례뿐 학생들과의 관계는 끈끈했다. 고연전에서 고대가 이기면 기분이다 외상값을 까줬다. 4·18 마라톤 코스 중간중간에 막걸리통 놓아 두었고 질주 대열에 끼어 함께 달렸다. 그의 차는 집회 현장으로 유인물을 실어나르는 도구로 쓰였다. 한번은 계훈제 선생이 뒤트렁크에 숨어 집회장으로 갔다. 수배되어 도망다니는 학생들에게 여비로 10만~20만원씩을 쥐어주었다. 박노해의 <노동해방문학>을 복간할 때는 700만원을 댔다. 그는 스스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장산곶매가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치기였지만 과외하는 학생들한테는 술을 팔지 않았다. 생각이 있다면 야학활동을 해서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면서. 유행가를 부르는 학생은 쫓아냈다. 젊은이라면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면서.

그렇게 학생들과 18년이란 나이차를 잊고 어울리면서 엄청나게 다른 대동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현대사의 민족, 계급 모순을 알게 되었다. 막걸리장사 5년 동안 그는 마냥 행복했다. 지금까지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고대앞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6·10항쟁의 추억도 막걸리집과 겹친다. 밤에는 술집, 낮에는 명동성당. 눈뜨면 아내한테서 5천원을 얻어 현장으로 출근했다. 하루종일 우유 사먹고 거기 나와 앉았는 게 일이었다. 사과탄에 맞아 발목인대가 끊어졌을 때도 목발을 짚고 아내 부축을 받아 그곳에 나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전경들한테 끌려가는 것을 보고 아내의 목소리가 터지는 것만 기분 좋았다. 누가 누군지 모르면서도 어깨를 걸었다. 시위 대열이 남대문 상가로 피신하면 상인들은 셔터를 내려 보호해주고, 물주고, 떡주고…. 휴가 나온 사우디근로자는 이것이 더 보람있다며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집에 가면 최루탄 가루를 털고 들어가야 했다. 연세대 집회에서는 프락치로 오인돼 학생들한테 잡혀 연금되기도 했다. 아는 학생을 만나 한시간 만에 풀려났지만.


도산…재도전…‘청소년 시리즈’ 성공


수류탄을 생각했다. 집회 지도부는 뇌관, 자기와 같은 사람은 장전된 폭약. 뇌관이 터지고 그 불꽃이 꽉찬 화약에 옮겨붙어 폭발하면서 강고한 외피를 찢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사람이 백걸음보다 백사람이 한걸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같은 사람’이 몸으로 터져야 모순이 깨지지 않겠는가. 경찰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말로 그는 밥풀데기였다. 그가 본 것은 해방공간이었고…. (그때 모은 유인물이 라면상자 3개로 가득이다.)

88년 가을 술집영업이 끝난 어느 날 밤. 늘 보아온 비틀거리는 학생, 음식 토사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을 술 취하게 해놓고 자신이 살아간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자기 인생이 황당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다른 것은 없을까. 그리고 막걸리 장사를 하면서 깨닭은 세상이치와 6·10항쟁에서 목격한 해방공간의 기쁨을 세상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1989년 도서출판 가교를 차렸다. 오피스텔에서 직원 6명, 매킨토시 3대, 600디피아이 레이저프린터로 시작했다. 하지만 ‘낭만적인 활동’ 3년만에 4~5억을 까먹고 도산했다. 아는 사람은 운동권 사람들. 현장에서 필요한 책, 팜플렛 예컨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기관지인 <연대와 전진> 같은 것 20여종을 만들었다. 밤새워 일해 납품하고 돈을 못 받는 일이 반복되면서 빚더미에 올랐기 때문. 결국 집은 사채업자에게 넘어가고 미아리 단칸 지하셋방으로 옮겼다. 네 식구는 ㄴ자로 구부려 자야했고 공중화장실을 썼다. 들어낸 가재도구는 노원구청 옆 민간주차장에 쌓아놓았다. 술힘을 빌어 가보면 하루는 냉장고가, 하루는 세탁기가 없어졌다. 두리미디어는 절치부심 1997년 다시 시작한 출판사다.

300여종의 책을 낸 출판 10여년을 돌아보면 그는 스스로 비주류였다고 생각한다. 섬처럼 정보의 세상에서 소외된…. 청소년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내면서 자신감을 회복했다. 시리즈들은 각종 상을 받고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 <추사진묵-추사작품의 진위와 예술혼>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1910년대> 등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책이라고 자부한다.


“난 죽어서도 출판을 할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이나 운에 맡기는 것은 안 통한다고 본다. 최근 기획이사와 주간을 새로 채용했다. 변이철 기획이사는 대학 1학년때부터 장산곶 출석률이 좋았고, 백운광 주간은 1학년 때부터 <한겨레>를 사명감으로 돌렸던 사람이다.

“나는 죽어서도 출판을 할 것입니다.”

돈을 벌면 좋지만 성공이든 실패든 출판에 종사하는 것에 만족한다. 그가 속하는 출판동네는 남을 속이지 않고 큰소리 나오는 법이 없다. 역시 행복하다고 했다.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추악한 것은 먼 곳의 일일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 영세한 것이 오히려 그런 것에서 자유롭게 한다. 넘치면 엉뚱한 일을 하게 마련이다.

이제, 누가, 그를, 밥풀데기라고 하는가.

-------------------------------------------------------------------------------------

한국의 책쟁이들/(16) 자궁에 햇볕정책 펴는 한의사 이유명호씨


자기의 이름을 건 한의원 원장 이유명호(53)씨는 넉자 이름이다. 대놓고 나 페미니스트요, 또는 남녀평등주의자요 나팔부는 격이다. 얼마 전까지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 전화를 걸면 이유명호 한의원으로 연결되었다.

“여자는 신한테서 생명 창조를 위임받은 존재예요. 자신의 반쪽 씨에 남자의 반쪽 씨를 보태어 열달간 자신의 피로써 완전한 생명으로 길러내지요. 그렇게 자궁은 소중하기 때문에 보물처럼 깊숙히 들어 있어요. ‘똥 마려워’는 되는데 ‘자궁 아파’는 왜 안되냐구요. 자궁에는 햇볕정책이 필요해요.”

마포의 한 오피스텔 2층. 복사골에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직격으로 받는 곳. 환자들은 ‘약초밭’ ‘풀밭’ 치료실에 누워 치료를 받는다. 손님들은 주로 여성과 어린이들이다. 전공이라고는 없는 한의계에서 88년 문을 연 이래 여성질환, 그 가운데서도 자궁질환을 전문으로 해온 것을 오래된 관심과 연구의 결과다. 새우젖 동네 마포 토박이인 그는 열살 때 엄마를 따라 전차를 타고 시내의 일본집 같은 의원을 따라간 적이 있다. 돌아와서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엄마를 귀찮게 하지 말라던 외할머니가 선하다. 그 자신 연애·결혼생활 10년동안 자연유산 한번, 인공유산 두번, 출산을 두번 했다.

그는 한가지 경험담을 털어놨다. “환자들의 질염이 자꾸 재발돼서 남자인 친구 의사한테 묘수가 없는지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뒷물이나 잘 하라고 그래, 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뒷물 안하는 여자가 어딨는가. 너무 깨끗하게 씻으려고 해서 탈이지. 오줌과 정액이 한 통로로 쓰는 음경과 달리 질은 요도와 엄연히 분리되어 있고 자연살균 처리돼 균형이 깨지지 않으면 감염될 우려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모욕적인 처방(?)을 내리는 것은 그 의사가 한번도 월경이나 임신을 해보지 않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아니, 의학 자체가 남성들이 권력을 틀어쥔 남성과학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약품의 표준모델은 남성이다. 개발할 때부터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하고 임상실험 대상도 남성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은 아예 고려대상에 들어있지 않다.


호주제 폐지, 자궁질환 치료와 같아


“월경은 불결하다. 질은 더럽다 등 여성의 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물론 겨드랑이·다리털을 깎아라, 살 빼라, 무릎을 오므려라 등 여성한테 이상한 요구를 하는 것은 이 사회가 남성권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가슴이 크면 머리가 비었다거나 미련해 보인다고 하고 유방이 작으면 낑깡이니 달걀프라이니 하고 놀리죠. 남자 물건이 번데기건 줄줄이 소세지건 그것을 두고 놀림거리로 삼지는 않잖아요.”

그는 1997년 부모성 함께쓰기운동에 동참해 넉자이름을 쓰게 됐다. 이후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서 주방장을 맡아 서명 다닐 때 김밥과 차를 조달했다. 국회 앞 일인시위도 하고 남들이 일인시위할 때는 “커피배달을 했다.” 안티호주제, 안티미스코리아, 안티포르노, 안티성폭력 등 행사의 연극공연에 거의 최고령자로 자꾸 나가 “그만 나오라는 뜻의” 대상을 받았다. 2003 대한민국 여성축제 기획에 참여해서 매년 개천절 즈음에 양성평등한 후천개벽을 꿈꾼다. 감투 사양하고 한국여성장애인 연합, 이주여성인권쎈터,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을 뒤에서 돕고 있으며 해외의료봉사단, 성폭력상담소, 막달레나의 집, 월드비전 등에 조금씩 후원하고 있다. 지금까지 몸을 살리는 다이어트 자습서 <살에게 말을 걸어봐>(2000), 여성이 행복해지는 건강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2003)을 썼고 내년에는 <우리 아이들 뇌힘을 키우는 돈안드는 총명한 건강법>을 낼 계획이다.

그가 이처럼 호주제 폐지 운동에 팔걷어부치고 나섰던 것과 자궁질환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소중한 후세를 재창조하지만 ‘아이 낳는 기계’로, 위대한 밥상을 차려내지만 ‘부엌데기’로 대우 받아온 오천년 여성수탈사가 자궁에 집적된 까닭이다. 자궁에는 각종 사회적 편견과 냉담한 시선으로 외면 받아온 질병이 쌓인 일종의 오래된 폴더다. 햇볕정책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이렇듯 깊은 사연이 들어있다.

“자궁질환을 진단받으면 자신부터 용서하세요. 주위 사람들이 다 밉고 수술하라는 의사한테도 왜 못 고치냐고 화를 냅니다. 화풀이 대상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남탓만 하지 마세요. 내탓도 심히는 하지 마세요.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어떠했는가부터 시작하세요. 자신부터 용서해주세요. 그래야 돌보기와 보살펴주기라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환자들에게 나눠주는 안내문의 한 구절이다.

여성환자들은 이곳에서 꽁꽁 여몄던 아픔과 부끄러움의 주머니를 연다. 그렇게 공감대를 이루고 나면 모두들 너남없이 친정식구처럼 변한다. 약해 뵈는 의사를 걱정하고 식혜나 김치를 담가 서로 나눠먹는다. 이 한의원은 여성해방구인지도 모를 일이다.

“생리를 일컫는 월경(月經)은 성경, 불경, 역경처럼 최고의 가치를 지닌 생명의 경전이란 뜻입니다. 할머니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딸로, 피로 영원히 어어지는 몸으로 쓰는 경전이지요.” 우리 할머니들은 월경통이 적었다. 다리를 벌리고 아궁이 불을 때며 자궁을 데웠고 엄마 세대들은 뜨끈한 온돌에서 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아래 옷은 구중궁궐처럼 단속곳, 속곳, 속치마 겹겹이 아래를 덮어서 따뜻한 공기층에 둘러싸여 냉병에 걸릴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지금처럼 짧은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바람이 숭숭 통하게 된 지는 불과 40년밖에 안 되었다. 저고리는 짧고 젖가슴은 보여도 괜찮은 상체개방형에서 손바닥만한 팬티에 짧은 치마의 하체개방형 패션으로 뒤집힌 것이다.


종이책 반 사람책 반…왕성한 독서


허걱, 월경이 책이라니. 거기에 다이제스트판 현대사가 들어있다니!

“옛날 농경시대에는 아기를 여럿 낳아 키우니 자궁과 난소가 호르몬의 영향을 덜 받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유제품과 지방식 등으로 여성호르몬이 과잉분비되고 호르몬 함유식품의 섭취가 늘었고요, 아기는 조금 낳는 추세죠. 그탓에 난소와 자궁는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하니 무리가 오고 병이 생기는 거죠.”

35년 동안 월경을 하는 사이에 나이 든 몸은 매달 빠져나간 혈액손실을 보충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진다. 완경(생명창조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의미. 폐경을 대체한 용어)은 더 이상 피 흘리지 말고 고생한 몸을 돌보며 쉬라는 조물주의 섭리다. 진화학자들은 완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이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배란과 월경을 함으로써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낳아 버려두기보다 자손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종족보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데 진화한 것이라고.

이 원장의 왕성한 책읽기는 호가 났다. 재밌는 책을 위주로 근처 책방에서 주문해 읽는다. “결혼 때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읽었고, 독립한 뒤에는 연애질이 안 돼서” 책을 읽는다. 누워서 읽을 수 있도록 천장에 불고기집 연통처럼 책 잡아주는 게 달렸으면 원이 없겠다는 그한테 한 안과의사는 그러다간 눈알 빠진다고 말했다.

여느 책쟁이와 다른 점은 그가 읽는 책이 종이책 반, 사람책 반이라는 점이다.

사람책은 곧 여성환자. 환부는 물론 몸의 전반적인 상태와 그 동안의 병력 등을 읽어내 첫 방문에 진료카드 2/3가 채워진다. 양방병원에 가면 적어도 다섯 군데를 돌아다녀야 할 만큼 악순환의 고리에 꿰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 고리를 끊으려면 단순히 환부를 치료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때로는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고 아이와 함께면 더 좋은 때도 있다. 심지어 모녀관계에서조차 못 풀어 어혈로 맺힌 사연이 들어있다. 사회적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사람책을 넘기다 보면 여성수난사가 짚이고 현대사가 읽히고 진화사가 눈에 들어온다. 여성엔지오 관련자들은 그를 주치의로 여길 정도다.


애무로 세포 공명하면 스스로 고쳐


그래서일 터다. “어루만져주면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애무전도사로 나선 까닭은.

“애무는 우리 몸에 내장된 치료 프로그램입니다. 사랑을 주고받아 태어났으니 당연하지요. 애무는 손으로 먹여주는 밥이고 손으로 입혀주는 옷입니다. 아픈 곳에 손을 대주고 싹싹 비벼주기만 해도 고통은 사그라져요. 자기를 애무하고 서로를 애무하십시오. 그러면 머리끝에서 말끝까지 온몸이 세포 하나하나에 속속들이 공명의 파동이 퍼져나가 몸은 스스로 치유를 시작합니다.”

-------------------------------------------------------------------------------------

한국의 책쟁이들 / (17) ‘독서경영’ 이장우 이메이션코리아 대표


지난 수요일(17일) 직원의 반 12명이 4박6일 예정으로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떠났다. 발리(2000년), 앙코르와트와 베트남(2002년), 뉴질랜드(2003년), 인도와 스리랑카(2004년)에 이어 다섯번째 여행이다. 회사가 정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주어지는 인센티브 트립. 비용은 전부 회사부담이다. 창립 11년째니 한해 걸러 혜택이다.

이메이션코리아. 시디, 디브이디, 유에스비, 디스켓, 광마우스, 데이터카트리지 등 컴퓨터 관련 제품을 개발판매하는, 매출 208억원(순이익 12억원), 임직원 25명의 아담 사이즈다. 1996년 3M에서 분리독립한 이 회사는 1998년 외환위기 때 급속한 영업악화와 함께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Y2K 등 기회요소를 고려한 100억 투입 결정으로 1999년 147억원, 2000년 160억, 2001년 200억원, 2002년 212억원, 2003년 231억원, 2004년 261억, 2005년 203억 등 성장세를 타며, 전세계 이메이션 법인 중 성장률 1위의 길을 달렸다. 유에스비, 광마우스, 키보드는 이메이션코리아에서 처음으로 런칭시킨 제품이다. 이 가운데 유에스비는 글로벌 전략상품으로 결정돼 2010년 1조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작고 단단한 기업의 선두에는 역시 작고 단단한 대표이사 이장우(51)씨가 우뚝 서있다. 경영학, 공연예술학 박사학위 둘, <미래경영, 미래 시이오> 등 지은책 4권, 이화여대 겸임교수, 한국복지재단 후원대사 등 하루를 36시간으로 쪼개어 사는 인물이다. 올해부터는 이메이션 아시아태평양 소비자부문 부회장을 겸임해 180일 이상을 해외출장으로 보내야 한다. 실제 체험에 바탕을 둔 그의 마케팅 강의는 시이오 사이에 명강의로 소문나 최고 300만원을 주어야 한다.

사무실 천장 한 가운데 ‘GROW, DEFEND, LAUNCH’라는 올해의 슬로건이 걸렸고 남쪽 끝 대표이사실은 유리칸막이로 투명하다. 책상에는 경영전략 관련 영어권 도서 10여권. 올해의 전략을 짜기 위한 참고서다.


CEO·유명 강사·책 저자·겸임교수…


“일에 치여 살면 창의력은 절대 안 나옵니다. 영화도 보고, 뮤지컬도 보고, 책방거리를 걸어도 보고, 게으른 휴가도 다녀오고…. 아이디어는 밖에서 나오는 겁니다.”

피디에이로 관리하는 그의 일정에서 우선순위는 ‘놀기’다. 중요한 것과 급한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을 먼저 하라는 원칙에 따른 재충전과 감각 벼리기다. 와이셔츠 주머니에는 포스트잇을 항상 넣고 다닌다. 떠오르는 생각을 언제든 메모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름지기 일은 즐겁게 해야 한다는 지론. 휴가나 여행, 영화관람 등을 상상하면 일이 즐거워지지 않는가. 대학졸업 직후 서너 달 동안의 백수시절. 연탄불을 못넣은 냉골에서 새우잠을 자고 앞집 연탄불 갈아주며 라면을 끓여먹었지만 몇년 뒤 미래상을 그리며 어려움을 견디던 마음가짐이 지금의 바탕이 되었다.

그는 직원들 경조사를 챙길 만큼 부지런하지 않고, 부하직원 출퇴근·휴가, 차량 운행기록부를 따질 만큼 꼼꼼하지도 않다. 그런 것은 머리없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다. 이제는 포지션파워가 지배하던 세상은 가고 소프트파워의 시대가 왔다. 그의 경영방침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일을 하라’. 커다란 전략과 방향을 설정하고 모든 직원을 그것에 줄 세우는 일이 그의 몫이다. 그러려면 스스로 실력을 길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그가 한해 읽어내는 책은 줄잡아 100여권. 숙독한 것이 그 정도이고 뽑아읽는 것을 합치면 수백권이다. 책장에서 꺼내 보여준 ‘읽은 책’은 밑줄과 괄호로 중요한 부분이 표시돼 있고 중간중간 메모가 돼 있다. 읽고 난 뒤의 생각을 속표지에 가득히 써놓은 것도 있었다. 그는 아침에 잡은 책은 저녁에 끝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여행이나 휴가를 이용해 책을 몰아읽는 편이다. 예술, 문화, 여행 등 즐기는 분야는 씹어가며 읽고 개중에는 읽기가 아까워 책장에 꽂아둔 채 ‘기다리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기도 한다.

“책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필요한 분야, 최고의 책을, 적절한 시간에 읽을 수 있지요.” 관심분야가 생기면 아시로 10여권을 선정해 읽는다. 더 필요하다 싶으면 50권을 읽고 속도가 붙으면 100권 독파는 금방이다. 그렇게 해서 질문이 가능해지면 그 분야 최고수를 찾아다니며 배운다. 새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미 상당히 연구돼 있거나 자신이 별 것 아님을 알게 된다. 전문가가 되려면 그 분야의 책 1000권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책에서 책으로 연결되는 하이퍼텍스트식 기법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면 시멘틱 웹 방식이 된다. 예컨대 해체주의 강의를 듣고 무선인터넷을 통해 해당작가의 작품을 확인하는 식으로 독서행위가 입체공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도, 평생 학벌로 울궈먹는 사람도 딱 보면 알아요.”

가장 경계하는 것은 ‘성공의 덫’. 그는 미샤 화장품을 예로 들었다. 처음에는 저가전략으로 거품 낀 화장품 업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노베이션에 실패하면서 자연주의를 덧도입한 페이스샵에 밀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에 밀린 일본의 소니나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주체사상의 북한도 마찬가지다. 그는 삼성도 언제든 그 덫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재대로라면 10년 뒤에 망할 것이다’라며 모든 것을 혁신하는 싱가포르한테서 배워야 합니다.”


조선시대가 지식사회 모델


그는 지식사회의 모델로 선비가 대우받은 조선시대를 꼽았다. 지식이 풍부한 선비는 돈이 없어도 대우 받았고 배움이 없는 상놈은 돈이 많아도 천하게 여겼다. 귀천은 돈이 아니라 지식이었던 것. 왕도 동궁시절에는 과외선생이 붙었고 왕이 되어서도 경연 등을 통해 공부를 계속했다. 이를 게을리하면 신하한테서 업신여김을 받았고 심지어 탄핵까지 받았다. 화두는 공부하지 않은 386세대와 그들에게 둘러싸여 세상을 읽지 못하는 노무현 정권으로 옮아갔다. “지도자는 열심히 배우고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안보이는 것을 보아야 하지요. ‘뉴턴의 사과’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꿰뚫어보는 능력과 축적된 지식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지난 12월28일 종무식을 겸해 오전 9시 회의실에 책 30권이 쌓였다. 전날 행사담당자인 곽진욱 차장이 준비한 것으로 이 부회장이 내놓은 것들도 자기계발, 경영사례, 디자인 관련 책들이다. 선착순으로 좋아하는 책을 한권씩 골라갔다. 김태현(28)씨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얌 고객에 미쳐라> 한 권을 골랐다. 자신이 맡은 소비자 판매에 관한 책으로, 자신이 맡고 있는 신제품 마케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 까닭이다. 이러한 북랠리 행사는 1998년부터 시작돼 해를 거르지 않고 한해 두 차례 이상 실시됐다.

이메이션에서는 책값을 회사에서 대준다. 사고의 폭, 창의력을 키우는데 독서만한 게 없다는 판단에서다. 직원들이 소설이나 어학 등을 제외한 책을 산 뒤 결제를 올리면 한달 단위로 전액 지급된다. 주제나 금액에 제한이 없고 보고서나 독후감 등 부담도 없다. 한해 2500만원 정도가 책값으로 나가니 직원 한사람이 평균 100만원어치의 책을 사서 읽는 셈이다. 마케팅담당 함동철(37)씨는 “작년에 책값으로 70만여원을 지원받았다”면서 “회사 안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전했다.

3년 전부터는 젊은 직원들 사이에 ‘책사모’라는 동아리가 만들어져 아침저녁으로 책을 읽고 난 뒤 의견을 주고받는다. 이 부회장은 ‘그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처음 쭈뼛쭈뼛하던 책값 결제신청이 시행 10년이 지난 지금 자율로 이뤄지듯이 책동아리 역시 특별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나를 알면 나머지도 추측이 가능한 터. 업무라도 다르겠는가. 8시 출근에 5시 퇴근. 5시30분 이후 회사에 남아있는 인원은 거의 없다. 모든 직원이 시간 내 업무를 소화해내는 집중업무를 해내 야근은 거의 없다. 또 외근 직원들은 업무종료 시 현지퇴근을 하고 불필요한 형식적 보고절차를 하지 않는다. 주력제품들이 팬시스러워 디자인과 포장이 중시되는 데 이는 독서를 권장하는 분위기는 딱 맞아떨어져 의욕적인 런칭과 매출증대로 이어진 것이다.


사내 북랠리 행사…선착순 책 선물


작년 8월에 입사한 김태현씨는 ‘상사가 나간 뒤에 퇴근하라’는 주변의 말, ‘한달에 네번쯤 집에 들어간다’는 다른회사 또래의 말을 듣는 터에 5시 퇴근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울릴 사람이나 할 일이 없어 남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모자란다. 입사이래 넉달동안 50여권(책값지원 30, 북랠리 20권)의 책을 읽었다. 매일매일 읽지 않으면 책이 쌓이고 트렌드를 좇지 않으면 뒤쳐진다. “여기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게 유도해서 좋습니다. 다른회사 동기들이 무척 부러워하지요.”

이메이션코리아는 스스로 작고 단단하지만 경쟁사한테는 부럽고 무서운 회사다. 내년의 인센티브 여행, 일명 학습여행의 목표는 하와이다.

-------------------------------------------------------------------------------------

한국의 책쟁이들/(18)여승구 화봉책박물관 관장


“나는 고서를 사다가 망한 사람이오.”

화봉문고 대표 겸 화봉책박물관 관장인 여승구(71)씨는 책을 빼고는 사실상 빈손이다.

1963년 사업을 시작해 1979~1988년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로 서점을 겸한 것을 빼고는 외국 학술잡지와 일반도서 수입판매를 해온 그는 2003년부터는 고서 판매로 전업해 자신의 호를 따서 화봉문고를 만들었다. 1982년부터 수집해온 10만여점의 고서와 각종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 2005년 10월에는 화봉책박물관을 열었다. 하지만 인터넷 판매와 경매대행을 하는 화봉문고는 개점휴업 상태이고 화봉책박물관 역시 1년 남짓 존재하다가 창고와 사이버공간으로 사라졌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그래도 동, 서, 남쪽 삼면에 창이 있어, 동에서 서쪽으로 해 가는 방향을 따라 빛을 받아가며 책을 읽었다. 행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대하게 되면 번번이 기뻐서 웃고는 했기에, 집안 사람들 누구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기이한 책을 얻은 줄 알았다. …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라고 불렀지만 그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옛문헌에 전하는 책바보 이덕무(1741~1793)의 모습이다.

종로구 신문로 2가 ‘화봉책박물관’ 이름이 붙은 300평 건물. 여승구씨는 볕이 잘 들지 않는 뒤쪽방 한칸을 1만여권의 ‘책에 관한 책’ 창고를 겸해 사무실과 인터넷 쇼핑몰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다. 재개발로 헐린 서린동 서점 건물을 팔아 대토한 자리. 한 대기업이 건물을 지어 구내식당으로 이용케 하다가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공간을 다시 임대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앉았다. 박스에 싸여 사직동 100여평의 창고로 옮겨간 고서들은 아직도 ‘분류중’이다.


반짝 책박물관 기억은 씁쓸하다.


“방문자는 주로 단체관람 어린이들이었지요. 부모 손잡고 온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들…. 조건은 관장이 나와서 안내하라는 것이었지요. 아이들한테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민족과 영토’ 전시회를 할 때였어요. 아이들을 이끌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를 처음 연 할아버지가 누구죠? 단군 할아버지요. 나라 땅을 가장 많이 넓힌 임금님은? 광개토대왕이요.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요? 세종대왕이요. 그리고 고지도 앞에 가서는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같이 부르는 식이었지요. 전문가들은 거의 오지 않았어요. 어쩌다 대학교 문헌정보학과 학생들이 레포트 쓰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공짜 도록만 바라는 시민들에 실망


박물관을 연 동안 ‘민족과 영토’ ‘세상에서 가장 큰책 작은 책’ 등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주로 어린 손님만 들었을 뿐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전시회 도록을 비싼 돈을 들여 만들었지만 다들 공짜로 얻어갈 생각만 할 뿐이었다.

“희생을 무릅 쓸 이유는 충분하지만 파리만 날리니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박물관을 창고와 사이버로 옮겨간 이유다. 앞으로 전시회는 계속 열 생각이다. 다만 수익자 부담의 원칙. 책은 얼마든지 빌려주겠다. 하지만 공간임대와 관리 반환 등은 주최쪽에서 감당하라는 거다. “문화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에 짙은 회한이 묻어났다.

책 수집가의 도착점은 ‘행복한 박물관’이라는데 책바보 여씨의 26년 도착점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새책을 팔아 헌책과 고서를 사들였으니 쟁여놨으니 망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건물 판 돈 40억이 고스란히 책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주변에서는 가치있는 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기좋은 말일 뿐 실제 짐은 오로지 여씨 몫이었다. 박물관에 이르려다 실패한채 책만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다.

나라에서 떠맡아주면 좋으련만. 한번은 문화부 장관을 만나 국립 책박물관을 만든다면 자신이 수집한 책을 조건없이 바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생을 건 일이니 그렇게 해도 승리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라는 말을 듣고는 두말없이 돌아섰다. 도서관은 콘텐츠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이지 유물로서 가치가 있는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 대부분은 고서구입 예산이 없고, 있다고 해도 규모가 적어 싸구려 문집을 구입하는 정도라고 한다. 또 그가 서점을 운영할 때 언뜻 보았던 사서들의 다른 얼굴이 생생하다. 좋은 책을 갖추기보다 책 구입에 따른 떡고물에 관심을 더 쏟던.

국립박물관도 마뜩찮다. 문화재로 지정하는 책들은 불경에 치우쳐 나머지 가치있는 책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텬로역뎡>을 꺼내왔다. 푸른색 겉포갑을 열자 녹색 비단 안포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열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한적 두 권이 나왔다. 1983년께 일본 오사카역 앞 지하상가의 한 고서점에서 96만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1895년 서울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존 번연 원작을 선교사인 게일 부부가 번역 출판한 목판인쇄본이다. 삽화는 기산 김준근이 그렸다. 단원 삽화의 정리자본 <오륜행실도>, 역시 단원 그림이 든 목판본 <불셜대보부모은듕경>(1795, 화산 용주사 간행)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미서에 속한다. 김포세관에서 밀수품으로 분류돼 반송되었다가 두달 뒤 직접 가지고 들여와 품에 안은 것이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서 보전가치가 있는데도 연대가 오래된 것 위주로 지정하는 문화재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여씨가 보여주는 <화사집> 역시 그렇다. 현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지만, 미당이 직접 제본한 것 가운데 세번째이고 표지의 제목에는 시인 정지용의 묵적이 어렸다.


나라에 기증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가 수집한 책들은 고활자본, 문학(고전문학, 신문학), 개화기 교과서, 고지도, 고판화 등 다섯가지 테마.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물건으로서 값을 동시에 가지는 것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까닭에 도서관에서도 박물관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아 개인 소장으로 관리되고 있다. 별도의 수입이 없는 여씨는 다섯 테마 외의 고서를 판 돈과 건물 임대료를 고서 보관료로 충당하고 있다.

그가 가진 두번째 꿈. 문화에 뜻이 있는 대기업에서 일괄 인수해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값을 쳐주면 넘길 생각이다. 그래도 절반의 성공일 테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그런 의사를 대놓고 공표하지 않고 있다.

그가 고서 덫에 걸린 것은 26년전 술자리에서다. 1982년 윤석창씨 소유의 책으로 두달간의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마치나서의 뒤풀이. 한 일간지의 문화부장이 꺼낸 말이 씨가 됐다. 그 책들을 경매에 붙여 팔지 말고 여사장이 사들여 문학박물관을 만드는 게 어떻겠는가? 여씨는 자신을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에 비유했다. 그로부터 2, 3년간 강아지가 주인 따르듯 서지학자인 안춘근씨의 뒤를 따라 헌책방을 다니며 책 보는 눈을 키웠다. 그렇게, 초판본 전시회에서 만난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은 320여종의 다른 판본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에서 만난 <텬로역뎡>은 100여종의 다른 판본까지 인연이 넓어졌다.

“책 모으는 재미가 엄청 났지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책은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인연이 아니면 그곳에 내가 그자리에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블랙홀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지경이었어요.”

1986년인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판판매업자모임인 ‘디스트리프레스’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프라도박물관 옆 고서점에서 그레고리안성가집을 발견했다. 수집가들이면 누구나 탐내는 물건. 7천달러라는 값도 문제려니와 문화재 반출이 금지된 탓에 만지작거리다 나왔다. 돌아오는 길 택시에 지갑을 두고내리는 통에 나머지 기간동안 쫄쫄 굶고 걸어다녔던 기억이 있다.


책 소식지·전시회에도 숱한 ‘바보짓’


바보짓은 책에서 책에 관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에는 잡지 <월간독서>를 창간해 1980년 강제 폐간되기까지 ‘이달의 좋은 책’ ‘독서대상’ 등을 선정해 시상했다. 1982~88년에는 <책방소식>을 49호까지 냈고 <고서통신>은 1987~2000년 모두 17호를 냈다. 1982년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회의 책관련 전시회를 주최 또는 후원했다. 모두 돈쏟아붓기였다.

“한류는 잠시지만 문화유산은 유구합니다. 구텐베르그보다 100여년 앞선 우리의 금속활자보다 더 좋은 한류아이템이 어디 있습니까.” 여씨는 아직 인생역전을 꿈꾼다.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실물크기로 전시하고 그 가운데 우리의 금속활자본 책을 전시하는 꿈.

-------------------------------------------------------------------------------------

한국의 책쟁이들(19)/배상현 동국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아침 9시 반 세검정 근처. 언덕 위 저 집이거니 찍어두고 전화를 넣었다. 가라앉은 목소리 “내가 모자를 쓰고 나가리다.” 2~3분 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이가 돌아앉은 대문을 휘돌아 내려왔다. 제목을 알 수 없는 복사본 책을 펼쳐들고서. 물어 볼 필요도 없이 그이. 머뭇머뭇 수인사. 집 안으로 들어갈 차례다. 하지만 그는 정원의 아래일 법한 곳을 헐고 들인 차고의 셔터를 드르륵 들어 올렸다.

먼저 들어간 그는 전기히터를 틀었다. 배낭끈을 부여잡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승용차 한 대를 넣을 공간. 가운데 괴목탁자를 중심으로 의자 6개가 있고 사방은 책과 돌과 옛 물건이다. 차고가 아니다.

종이컵에 커피를 권했다. 인스턴트 커피와 종이컵, 커피포트, 여러 개의 티스푼은 이곳이 일종의 응접공간임을, 움푹 꺼진 의자 받침은 방문자들이 진득하니 머물렀음을 말해 주었다. 커다란 수석 두개와 자잘한 물건들이 미리 자리잡은 탁자 위 빈 틈에 종이컵을 두고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필수조건, 서재를 공개할 것. 하지만 그는 얘기는 얼마든지 해주겠지만 집안 공개는 할수 없다고 말했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 집안도 이곳과 다름 없다, 친지 외에는 들이지 않는다, 찾아온 제자들도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것이 이유. 대략 난감. 눈썹까지 눌러쓴 모자는 얼굴의 반을 가려 표정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동양철학, 유불선 셋의 통합을 지향한다. 유학에 가장 관심이 많고 수집한 책들도 그렇다고 말했다. “유학의 궁극은 천인합일이오. 아시겠어요? 천지지간 모든 것은 타고난 질서가 있어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회도 마찬가지요. 아시겠어요? 유학은 그러한 천부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요. 아시겠어요?”


“집안 공개는 못한다” 창고서 승강이


말끝마다 붙이는 ‘아시겠어요?’는 앉은 자리만큼이나 거북살스럽다.

“핏줄 가족과 이익사회는 근본이 다르다”며 말을 끊자 그의 표정은 일순 흐트러졌다. “글쎄,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수석을 들어 옮기며 비좁고 불편함을 내비쳤다. 그는 입구쪽의 또다른 책상과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 역시 빈틈이 없기는 마찬가지. 다시 그의 이야기.

“수행의 목적은 알인욕존천리, 즉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오. 그러면 상하 합일공동체가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한마디로 하면 성(誠)인데,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이 경(敬)이오. 경은 주일무적(主一無適) 즉 오롯해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성성성성(性誠成聖), 인간이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오. 아시겠어요?” 알 수 없지요! 재미없어하는 속내가 드러났을 터이다.

“먼 데 있지 않아요. 비바람이 분 다음날 산에 올랐을 때 나뭇가지들이 등산로에 떨어져 흩어진 것을 보고 처음에는 사람이 그런 줄 알았어요. 나무들이 용도가 지난 가지를 떨구는 것이더군요. 그처럼 체험적으로 알고, 돌이켜 책임을 나한테 묻는 것이죠.”

“그런 말씀을 받아 적어야 하거든요.” 아무래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엔 탁자가 너무 낮았다. 의자의 방석을 빼보아도 마찬가지. “글쎄, 얘기를 더 들어보세요.” 그는 적든 말든 자신의 얘기를 펼쳤다.

“나는 혼자였어요. 용인에서 없이 올라와 공장 다니면서 동생들 뒷바라지 다하고, 교생 실습 때 남들 싫어하는 연구수업을 자원해 바로 그 학교 교사가 되었어요. 1961년에요. 능력껏 일관되게 하면 모든 일이 물 흐르듯 이뤄져요. 누구한테도 머리 숙일 필요가 없지요. 한문도 독학 했어요. 국사 교사로 있으면서 방과 후 한서를 보았어요. 시험 감독 때는 명심보감, 적벽부를 외었지요. 20여년 교사생활을 했는데 그 와중에 대학원을 졸업하니 강의가 주어지더군요. 1981년 시험을 쳐 한문과 교수가 되었고 1999년에 정년을 맞았어요.”

얘기는 마구 진행되어 대강의 마무리가 되었다.

이쯤에서 책쟁이의 이름을 밝히자. 배상현(75). 전 동국대 한문학과 교수다. <조선조 기호학파의 예학사상에 관한 연구>란 박사학위 논문이 그의 유일한 저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총서 63번으로 출간됐다. 논문도 30여편뿐이다. 쉽게 쓰여지는 세상의 논문들 사이에 허투로 쓰인 글 하나 더 얹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다. 잡문은 일체 없다. ‘開天’을 ‘하늘이 열렸다’라고 풀자 “어? 이놈이 문리가 났네” 하고 훈장이 깜짝 놀랐다는 어린 시절부터 한문이 친숙했다. 스님이 오면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불교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전생이 있다면 아마도 불목하니였을 거라고 했다. 이룬 것이 적으니 성현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니라 훈습을 거쳤을 뿐이라는 겸사다. 이이화, 은정희, 조규용 등과 함께 민족문화추진회의(민추) 연수 1기였다. 시간이 아까워 중도에 그만두었다. 공부에 나이가 있나, 라는 어느 선생의 격려로 아들이 대학 갈 나이에 석사과정에 들고 연하 교수를 지도교수로 박사과정을 밟았다.


아들이 대학갈 나이에 석사


30년이 된 이 집. 1978년께 근처 동료교수한테 놀러왔다가 이 집이 마음에 쏙 들었던 터, 집을 내놨다는 소식을 듣고 주인한테 큰 절을 하고 구입했다. 처음 집들이때 벽 두개 분량이던 책은 서른해가 지난 현재 불고 불어 집 전체에 꽈악 들어찼다. 아래 위층 방 셋과, 거실, 계단. 그리고 차고로 연결된 기사방과 보일러실.

1959년인가, 홍제동 살 때 300환을 털어 서화집을 사고는 걸어서 귀가한 기억이 있다. 1975년 졸업 20년만에 동창모임에 가다가 청계천 헌책방에서 회비 2000원을 털고는 그냥 돌아온 적도 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책을 사들였고 세도가 집안의 수택본을 만나기도 했다. 요즘도 틈나면 헌책방을 돌아 주인 못 만난 책을 건져온다. 요즘 사람은 읽을 수 없는 한적이나 중국책이 많다. 평소 책은 손에서 떼지 않아 북한산 승가사를 다녀오는 길에서도 책을 읽는다. 활자가 큰 한서라서 지장없이 읽힌다. 근처 사람들은 신기해들 한다.

“수입의 60%를 저축하고 나머지로 책을 사서 읽었어요. 나는 한번도 내자에게 돈관리를 맡긴 적이 없어요. 지금껏 책을 수집해 벗삼아 살아왔고 지금도 무척 행복해요. 선생과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학교의 명예교수 연구실에 가 있을 거요.”

얘기는 일단 마무리됐고 받아적은 것은 하나도 없다. 더구나 집안 구경을 못한 상태. 내몫 커피는 이미 마셨고 거의 입을 안댄 그의 것은 싸늘하게 식었다. 투항. 노트북을 꺼내고 전원을 연결했다. 공궈서 높이를 돋워야겠다고 하자 그는 이곳의 무엇이라도 활용하라고 말했다. ‘자기 책이 헌책방에 나와 있으면 기분이 묘하다’며 의자 옆 <주자대전>을 두고 써도 좋으냐고 물었다. 득허락. 소중한 책을 그런 용도로 써도 괜찮냐는 재확인을 거쳐 두 권씩 세 켜를 쌓으니 얼추 높이가 맞았다. 부팅.

그는 이미 말을 많이 했고 이제는 내 차례, 물고늘어지기다. 신문의 도리와 선비의 도리.

신문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좋은 것을 널리 알리는 나팔수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은 널리 베풀어야 한다. 기자는 나팔수다. 한 삶을 20매로 압축해 전달하고자 하면 최소 네 시간의 면담이 필요하다. 지금껏 이야기는 워밍업이다, 라는 취지. 또 찾아온 사람을 집안이 아니라 차고로 들이는 것은 이치가 아니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안 되면 기사를 펑크내고 말지, 뭐.


책을 수집해 벗삼아 살아와


“좋습니다.” 10시 반이었다. 호된 통과의례. 꾸진 노트북이 겨우 부팅되었을 때다.

차고를 정리하고 나와 휘돌아 대문을 들어서자 그는 비로소 모자를 벗었다. 몇 개의 돌확과 자잘한 잡석들이 더미를 이루고 그 가운데 몇개의 눈에 띄는 수석이 널린 뜰처럼 그의 얼굴에서 완강함이 걷히고 세월이 더께앉은 주름과 백발이 드러났다.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할아버지. “발에 채이는 잡석들이 나로 인해 의미가 되지요. 밤낮 책이나 보니 남들은 멍텅구리라 할지 모르지만 뭐래도 나는 상관 안 해요.” 그가 들고 있던 복사본은 우암 송시열의 <예경문답>이었다. 그리고 빨래줄 끝 풍경의 놋쇠 물고기가 꽁꽁 묶여있었다.

-------------------------------------------------------------------------------------

한국의 책쟁이들/(20) 만화 마니아 박지수씨


촉촉한 눈망울, 발그레한 입술, 오똑한 콧날. 캔디를 사로잡은 테리우스(캔디 캔디)? 파리의 남장무사 오스카(베르사유의 장미)?. 순정만화 네모 칸에서 걸어나온 듯한 그는 부품이 기~일다. 머리~발끝이 그렇고, 손가락이 그렇고, 머리카락이 그렇다.

사회성 짙은 만화를 펴내는 ‘길찾기’의 신입사원 박지수(28)씨. 처음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작품은 <나는 미치고 있다>. 그의 순정만화 외양과 달리 인혁당, 광주항쟁 등 음울한 내용이다. 그는 수요일(21일) 오후 <십자군 이야기> 세쨋권의 말풍선 글자를 쳐넣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 어울리지 않던 그가 작은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서자 홀연 만화 속 자리를 찾았다.


집안에 만화책 5500여권
군복무때, 대학 휴학때 모은 보물들
어린애나 보는 거?
만화의 새 문화, 새 시장을 꿈꾼다
“공공도서관에 만화가 있어야 하는데”


“품명:박지수(혹은 iamX). 종류:인간(일지도 모름. 인간은 모두 외계인의 비상식량일 뿐임). 용도:논쟁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논제를 제안하면 시키지 않아도 졸라 열심히 땀 뻘뻘 흘려대며 소리 높임. 주의사항:ㅈ일보를 좋아하고, 정치인을 존경하며, 돈을 숭상하고, 한국도 핵을 가져야 한다며 전·노통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거나,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든가, ‘야한 영화는 싫어요’ ‘엽기 영화도 싫어요’라고 이쁜 척 하는 이는 접근하지 말 것. 제조일:1979년 7월 10일. 유효기한:뒈질 때까지.”

자신의 블로그(http://iamx.net/blog)에 올린 자기소개. 만화스런 구성과 도발적인 내용이 충돌해 사뭇 괴기스럽다. 아파트 경비실에서 찾아 든 소포. 만화 <루크루크> 전질. 인터넷 중고책 사이트에서 주문한 것. 지옥이 만원이라 저승사자들이 이승에 와 ‘좋은 사람 되기 운동’을 한다나 어쩐다나.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기 모습에 한차례 반한 다음, 여느 때처럼 문간방 자신의 공간으로 스며들어 고치 속 애벌레로 자폐한다. 손에 들고온 책을 풀어 이미 겹으로 두른 만화책 차단벽을 덧기우면 정적은 더욱 깊어진다.

자기 방, 현관 벽 그리고 동생 방에까지. 5500여권의 책이 그렇게 번호를 맞춰 빼곡하게 꽂혀있다. 일반 단행본 책과 달리 깡똥한 만화책들은 더불어 알록달록 무지개 사탕빛이다. 간간이 눈에 띄는, 비닐포장 그대로인 책들. 역시 사들이는 속도가 읽기를 앞지르는 모양이다. 행여 허술하게 제본된 책등이 꺾일까 파운데이션 콤팩트처럼 조심스레 반만 펼쳐 읽는다. 행여 이가 빠질까 친구들을 불러들여 읽힐지 언정 옥외대출은 절대 없다.


밤이면 사이버 논객X로 변신


밤 깊으면 그는 이름을 엑스(X)로 바꾸고 또 다른 턱을 넘어 사이버 공간으로 이동한다. 민노당 지역구 모임에서도 구석자리를 지키는 그가 거기에서는 가면을 쓴 동료들에 둘러싸인 주인공이다. 우수에 젖은 테리우스가 되고 시공을 넘나드는 마법사가 된다. 잇새로 침을 찍찍. 툭하면 절라, 쓰벌. 로마 검투사가 되어 우경화 했다며 <한겨레>를 난도질하기도 한다. 사들인 만화와 만화동네 이야기에서 시작해 뻗은 가지는 무방향성이다. 또 거기에는 무림지존 ‘그분’이 있어 한마디 은혜에 감읍하고 추천한 비기를 봉창한다. 가상공간에만 존재하는, 또래들의 무협지스런 풍경이다.

그가 만화를 미친 듯 사들인 때는 군 복무 때와 대학 휴학 때. 계룡대 시절(2004~2006) 스물네 차례 외박·휴가 때마다 사들인 게 500여권. 아버지가 취직하면 천천히 갚으라면서 빌려준 돈이다. “만화는 때 놓치면 구하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부대 안에서의 만화 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씨는 그때를 암흑기라고 했다. 1억원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복간하고 싶었던 박흥용 작가의 초기 단편집. (낯익은 생각이다.) 한 출판사에서 대행해 줘 엄청난 헐값에 목표를 이룬 것도 그 무렵이다.

2000년 한햇동안 휴학하면서 역시 만화를 무던히 사날랐다. 말이 1천여권이지, 인터넷 회사 두루넷에서 번 알바비와 영화잡지 <키노> 모니터 기자로 받은 고료를 쓸어넣었다. 때마침 종각 부근의 만화가게 ‘라퓨타’에서 쏟아내는 덤핑만화를 고스란히 자신의 방으로 옮겼다. 이때 알게 된 작가가 강경옥, 김진, 김혜린 등. 독특한 추리만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이 기억에 남는다.

그에게 만화는 창이었다. 그것을 통해 세상과 소통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격절되었다.

다섯 살 무렵 만화잡지 <보물섬>을 보면서 한글을 깨쳤다. 세상 암호와의 소통. 몸이 약해 한해 180일 이상 병원을 다녔는데 주사를 잘 맞으면 1천원짜리 ‘현대 코믹스’ 한권을 사주는 식으로 만화를 가까이했다. 몸과 만화의 일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드래곤 볼>이 연재되는 <아이큐 점프>를 사모으고 <슬램덩크> 단행본이 나올 때마다 단골책방에 들렀다.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로봇콩콩 미니백과>. 이 책에서 철인28호, 마크로스, 건담 등 애니메이션 꿈을 키웠다. 중학교 때는 만화영화 <요술소녀>를 즐겨보았고 만화잡지 <터치>(후에 <이슈>로 바뀜)와 <월간 챔프> <인어공주를 위하여> <아기와 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도 이때 사봤다. <출동! 먹통 X> <개미맨>도 이때 처음 접했다.


다섯살 때부터 만화는 친구


고교 때 만화는 친구들와 그를 이어주었고 또한 격리시켰다. 비교적 풍부한 용돈으로 책을 사들이고 친구들은 그한테서 빌려갔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전> <카페 알파> <맛의 달인> <엔젤비트> <보이즈 비> <굿바이 미스터 블랙> <우리는 길잃은 작은새를 보았다> <하늘속 파람 그리고 별> 등이 친구 사이의 끈이었고, <윙크> <이슈> <챔프> <점프> <영챔프> <나인> <아디> 등 만화잡지가 친구 사이의 벽이었다. 만화영화 <에반게리온> <마법기사 레이어스> <사이버 포뮬러> <슬레이어즈>가 기억에 남는다. <에반게리온>은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 사고 주말 밤을 새워 함께 보았다. 고3 겨울. <겨울 이야기>는 재수를 고민하는 그의 처지와 아주 흡사했다. <나인>은 그를 한국만화에 눈뜨게 한 길라잡이였다. 이때 만난 작가가 이진경, 김경호, 한혜연, 이정애, 이강주, 이향우 등.

대학에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 과 공부 대신 만화동아리에서 놀았다. 학사경고를 맞아 휴학하는 동안 마음껏 만화에 빠졌다. 졸업 뒤 군 입대하기까지 일년동안 ‘길찾기’에서 알바를 하면서 <테르미도르>, <로보트킹>을 편집했다. 그것이 나중에 정식취업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 무렵의 요상한 경험. 어릴 적 기억 속의 <출동! 먹통 X>를 찾아 헌책방을 헤매다 실패하고 엄청난 음모(?)를 꾸몄다. 400명을 모아오면 책을 내준다는 기획사의 말에 사이트를 만들고 사발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모아들였다. 정말 400여명을 채웠다. 그래서! 1만원짜리 만화를 한권 손에 넣었다! 말풍선 입력비 40만원은 덤.

글 깨칠 무렵 새끼오리의 각인효과처럼 틈입한 만화. 학교공부의 틈새에서 삶의 고명 구실을 하다가 출판사 입사와 더불어 삶의 중심이자 방편이 되었다. 이제 만화는 사회를 향한 그의 나팔이 되려는 순간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비로소 어른의 길에 접어든 셈이다. 박씨는 어려운 때를 만나 고독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만화가들과 함께 새 문화, 새 시장을 일구고 싶다.


만화출판사 알바하다 사원으로


만화동네 월급은 빠듯해 학자금 상환, 교통비, 식비, 병원비를 제하고 거기에서 만화책 15만원을 포함해 책값 25만원을 떼어내면 빈털터리이다. 동선을 최소화하고 동전 샐 구멍까지 막을 수밖에. 돈많이 드는 연애는 아예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지한테 빌린 돈 역시 언제 갚을지 난망이다. 다른 것은 다 버려도 이것만은 남기고 싶은 책은? “아무 것도 버리고 싶지 않다.” 사뭇 어긋나는 질문과 답변은 만화세대와 비만화세대의 거리다.

“도서관에는 왜 만화책이 없을까요. 제가 사는 광명시 중앙 도서관에는 ‘2004 우리만화’에 선정된 말리 작가의 <도깨비 신부>나, ‘2005 우리만화’에 선정된 변기현 작가의 <로또블루스> 같은 책이 없어요. 독자들이 도서관에 책 신청을 안 해서 그런 걸까요? 사서들이 만화 쪽에 소양을 갖춰서, 추천 들어오면 그 작품이 뭔지는 알 정도는 되어야죠.” 비껴가는 문답에서 가장 돋보이는 말이다.

-------------------------------------------------------------------------------------

한국의 책쟁이들/(21) 독문학자 최두환-레기네 부부


한강에서 상도터널을 지난 뒤에는 그냥 다 잊자. 그렇잖으면 내내 시대착오 증세로 멀미를 할 터이니까. 버스에서 내려 뒤로 돌아. 행길과 나란한 옆 언덕길을 톱아오르고 샛계단을 오르면 느닷없이 나타나는 구조물. 도저히 대문이랄 수 없는 크기의 암청색 철문. 커다란 쇠고리를 부여잡고 탕탕! 이리 오너라, 라고 해야 할 법하다.

최두환(72)-레기네최(71)의 성채.

“독일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좋은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다.’ 한국에서는 남녀의 결혼을 ‘하늘과 땅’의 결합으로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남편은 항상 위에 있고 아내는 항상 아래에 있어야 합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남편에게 아내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아내에게도 남편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하늘의 보물, 즉 천보입니다. 국보보다 훨씬 더 귀중한 천보입니다.” (레기네, ‘주례사’, 1999)

이들은 은퇴한 독문과 교수. 남편은 중앙대에서, 아내는 서강대에서 17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5년 독일 괴팅겐에서 서른,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신접살림을 차려 올해로 마흔두 해를 함께 살았다.


독일서 5년 펜팔끝 결혼해 한국서 교수직
김지하 시 독역하고 파우스트 오역 바로잡아
집안 층계참엔 토마스 만, 큰방엔 온통 괴테
“오랫동안 동무처럼 지낼 책만 사죠”
출판사 차려 한국엔 괴테, 독일엔 퇴계 전파


1960년 ‘첫 만남’을 떠올리는 이들의 얼굴은 상기됐다. 독일어를 익혀야 하는 총각과 아시안에 눈 동그란 처녀는 말동무였다. 쾰른 로센몬탁 사육제. 라인 강변을 거닐며 헤르만 헷세의 <싯타르타>를 화제 삼았다. “달이 항상 차 있지 않듯이 사랑도 기운다.” “단지 달라져 보일 뿐, 구름 위에도 달은 빛난다.” 하이쿠식 대화는 본-괴팅겐 편지교환으로 이어졌다. “우정은 평행선처럼 지속된다”는 비유에 “보이지 않는 평행선의 끝은 교차돼 있다”는 화답. 펜팔남녀는 5년 뒤 더 이상 편지교환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서로에게 선물인 이들의 첫 작품은 김지하 시 독역. 구명운동이 전개되던 과정에서 주어캄프 출판사가 그의 시 번역을 맡겨왔다. 2년이 걸려 김지하 시선집 <황토 및 그 밖의 시들>(1983)이 최두환과 샤르 슈미트의 공역으로 출간됐다. 하지만 ‘오적’만 제외하고 모두 최씨 부부의 번역이다. 한국어를 아는 남편이 초역을 하고 독일인 아내가 독일어 시 답게 마감했다. 독어본 김지하의 시를 읽어본 한 독문학 전공자는 시편이 운률에 맞고 무척 우렁차다면서 번역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평했다. 레기네는 독역에서 자기 몫은 1/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고, 남편은 레기네가 언어감각이 있으며 외우는 시가 50여편이라고 말했다.


독역땐 남편이 초역 아내가 감수


82년, 84년 각각 입국한 이들은 대학강단에 섰다. 아침에 부부로 헤어진 이들은 저녁이면 다시 연인으로 만났다. 그 사이의 시간은 각자의 제자 만들기. 최씨는 독일시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르쳤다. 1부를 강독하면 한학기가 끝났다. 레기네는 독일원전 강독, 독어회화, 독일문화 등을 가르쳤다. 살가운 성격 그대로 독일어성서 강독, 독일인교회 성가대 등 과외활동도 활발했다. 그들의 교수시절은 독문학과 전성기와 겹친다. 전국 독문과가 72개에 이르렀을 정도. 의욕적으로 가르친 만큼 보람도 컸다. 제자들은 대기업에 쉽게 입사했다.

정원 너머 멀리 아파트군이 보이는 일층 침실. 최씨의 최근 관심사를 반영하는 책들이 서가에 꽂혔다. 풍류도에 관한 책들. “최치원이 쓴 ‘난랑비 서문’에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라 하는데 이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 맥은 퇴계 이황에게까지 이어졌어요. 명산대찰을 돌며 쓴 시를 보면 알아요. 퇴계를 근엄한 성리학자라고만 알고 있지만 자기를 벗어나 대자연과 합일하고자 하는 풍류도가의 면모가 숨어 있어요.”

토마스 만 서가가 우두커니 선 층계참을 지나 이층에 오르면 남면한 가장 큰 방이 괴테한테 주어져 있다. 나머지 작은 방은 브레히트, 독일시, 철학 등 기타. ‘괴테의 방’은 창을 뺀 사방이 온통 괴테, 괴테다. 다섯 종의 괴테전집, 자연과학 저작집, 대화집, 샤롯테 폰 슈타인 서간집 등 일차 자료와 동시대를 산 실러의 저작들과 학술논문 등 이차 자료들이다. 1881년 이래 독일의 괴테학회에서 낸 두 가지의 연간 학술지와 1994년 이래 한국의 괴테학회에서 낸 학술지가 나란히 꽂혔다. 전자는 독일 괴팅겐 고서점에서 운좋게 만난 것이고, 후자는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1994~98) 간여해 펴낸 것이다. 독어판 괴테전집 중 완결본은 바이마르판. “3대에 걸친 작업인데다 중간에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편집방침이 바뀌고 했지만 유일한 완본입니다. 나머지는 선집이라고 보면 돼요. 일본에서는 학생용 함부르크판을 토대로 번역한 ‘전집’이 있어요. 우리는 물론 전집이 없어요. 60년대 말 ㅎ출판사에서 6권으로 선집이 나왔는데 악명이 높았어요. 역자 이름을 도용하고 번역도 엉망이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오역의 예로 <파우스트>를 들었다. 잘못 꿴 첫 단추는 파우스트가 50~60대의 노 교수라는 것. ‘밤’ 장면에 나오는 독백을 노교수의 인생 한탄으로 이해해 ‘아!’ 또는 ‘아아!’로 시작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파우스트의 나이는 30살. 따라서 그 감탄사는 학문과 일상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의 번역은 ‘악!’이다(27쪽, <파우스트>, 시와진실, 2000).


쪽지에 “최두환 선생, 문 다드세요”


다시 일층으로 내려오다 현관 벽에서 맞닥뜨린 커다란 쪽지. “최두환 선생, 문 다드세요.” 삐뚤빼뚤 필체에 낯선 표기법이다. 아무래도 최씨가 꼬리가 길고 레기네는 추위를 타는 모양이다.

“괴테의 ‘은행나무잎’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 것일까/ 하나가 둘로 나뉘어진 것인가/ 그대는 느끼지 않는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인 것을.’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행잎을 보고 좋은 부부가 어떠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아래 쪽은 하나로 되어있고 위 쪽은 둘로 나뉜 은행잎처럼 하나의 가정을 이루되 남편과 아내는 각기 개성을 존중해야 합니다.”(윗글)

각자의 제자 만들기가 끝난 지금 그들은 이제 다시 하나가 되어 공동작업을 한다. 박희진 시인과 이퇴계의 시를 독일어로 옮기는 일. 박 시인의 것 100편은 올해 안 슈트트가르트에서 나올 예정이고 퇴계는 샘플 번역단계다. “퇴계와 괴테의 자연관은 아주 비슷해요. 시인이 자연이고 자연이 시인이죠.” 최 교수는 괴테를 ‘독일의 풍류도인’이라고 말했다. 괴테와 퇴계는 우연하게도 소리값이 거울상이다.

틈새시간. 비스마르크시대, 바이마르공화국시대, 빌헬름시대의 시가지와 생활사를 기술한 <베를린> 3부작, <고딕시대 생활사>. “분단시절 동독에서 나온 책 가운데 민중생활사 연구가 출중해요. 사회주의권이어서 그렇지 싶어요.” <고요아침 나라로 떠난 여름여행>(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테크, 1895). 그 무렵 유행처럼 번졌던 귀족들의 동방여행기 가운데 하니다. “남편은 책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요. 지금 필요치 않더라도 자료가치가 있거나 앞으로 읽고 싶은 책을 사는 편이에요. 나는 꼭 필요하고 오랫동안 동무처럼 지낼 책만을 사고요. 하루살이 베스트셀러를 사지 않는 것은 똑같아요.”

노부부가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눈치없이 오래 머문 것. 시간착오 멀미가 겨우 가라앉자 파우스트의 밤이 창가에 넘실댔다.

유러피언이라고 자칭하던 독일여인이 낯선 땅에서 24년째. 가끔 고향이 그립지 않을까. “내 고향은 나의 남편과, 나의 종교가 있는, 그리고 남편과 일상어로 모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서울입니다.” 그리고 창문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집은 20여년전 그대론데 사람과 나무만 늙어갈 뿐이네.”


“재고·반품 쌓였어도 상관없어요”


괴테 컬렉션 출간과 괴테도서관 설립 꿈을 가진 그들은 2000년 괴테자서전에서 따와 ‘시와진실’이라는 출판사 간판을 걸었다. 지금까지 20여권을 냈지만 <파우스트> <서동시집>만 나간다. 대문간 차고를 개조한 창고 가득 재고와 반품책이다. “대부분 박희진 시집이오. 12권으로 내기로 한 전집이 4권까지 나왔어요. 거의 반품으로 되돌아 오고 있지만 개의치 않아요. 괴테의 대작 <서동시집>도 사후 70여년이 지난 1900년까지도 초판이 출판사에 재고로 남아 있었으니까요.”

“어느 날, 하느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들이 내 희귀한 선물을 잘 유지하였느냐? 너희의 얼굴을 내보이라! 기쁨과 희망이 잘 보존돼 있느냐?”(윗글) 낭만파 노부부의 표정에 그 대답이 담겼다.

-------------------------------------------------------------------------------------

한국의 책쟁이들 / (22)‘사전 모으는 이상한 교수님’ 박형익 교수


중고생이 있는 집이면 영한사전 한권은 있다. 영어가 외국어인 까닭에 그것 없이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 공부깨나 한다면 손때가 까맣게 묻었을 터다. 하지만 한국어사전 없는 집은 꽤 될 것이다. 한국어는 모국어인 탓에 그것 없이 공부할 수 있거나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박형익(55) 교수다.

“사전이 수준 미달인데다 사전이 필요없는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 한국어사전은 국가 경쟁력에 비해 창피스러울 정도로 수준이 낮다. 뜻을 모르거나 아리송한 어휘를 찾아보면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다른 사전을 찾아보아도 별 수 없다. 그 사전이 그 사전이어서 약속이나 한 듯 뜻풀이가 비슷하다.

실제로 많이 쓰이는 한국어사전에서 ‘사전’을 찾아보면 비슷한 골격의 뜻풀이를 깔작깔작 바꾸어 싣고 있을 뿐이다. 또 동의어로 실은 사림, 사서, 어전, 석사서는 쓰이지 않을 뿐더러 출처도 불분명한 것들이다. (표 참조) ‘사전박사’ 박 교수의 집. 출간 순으로 정리된 사전 서가를 보면 한국어사전은 몸집 불리기 쪽으로 진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니 우리말이 아닌 것들, 예컨대 일본말들을 삽입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1920년 식민통치를 위해 <조선어사전>을 발간했다. 1911년 책임자 小田幹治郞을 포함해 16명(일본인 6, 한국인 10명)이 작업을 시작해 5만8000항의 어휘를 조사했다. 애초 일본인과 한국인을 위해 2개 국어로 원고를 만들었으나 “조선인을 위해서 특히 조선어사전을 작성할 필요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한-일 대역사전으로 바뀌었다. 초판은 1천부를 찍어 관련기관에 배포되고 보급판은 8년 뒤인 1928년에 찍었다. 그런데 해방 뒤에 발간된 한국어사전을 만들 때 이 사전은 기초자료 역할을 톡톡히했다. 사전 전문 출판사인 ㅁ사에서 흘러나온 <조선어사전>은 그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휘 머리맡 대부분이 빨간 색연필로 체크되어 그것들이 그 출판사에서 낸 사전에 표제어로 고스란히 옮겨졌음을 웅변하고 있다.


국력에 비해 창피할 정도


“한국어사전은 서로 변별력이 없어요. 영어는 옥스퍼드 사전과 웹스터 사전이 아주 달라요. 뜻풀이뿐 아니라 용례도 각별하죠. 별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고교학습용 영한사전에는 단어마다 대부분 예문이 딸려있는데 한국어사전은 최근에야 <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두산동아)과 <연세 한국어 사전>(두산동아)에서 일부 채용했을 뿐이다.

“형용사, 부사, 동사는 의미 변별을 위해 반드시 용례가 따라야 합니다.” 말을 바꾸면 용례없는 풀이는 사실상 소용없다. 이는 대학입시에서 논술평가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 것과도 통한다. 어휘가 적확하게 쓰여졌는가, 문장이 적절한 어휘의 조합으로 구성됐는가, 그 문장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돼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조를 갖는가 등을 평가하려면 이를 평가할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라도 동의해 기준삼을 만한 한국어사전이 없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논술문을 두고 심사자마다 평가 편차가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사기준과 평가결과를 쉽게 공개하지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사전이 언중의 의식수준과 사회의 필요성에 비해 수준이 낮은 것은 아무래도 학계의 연구와 지원이 따르지 못하는 탓이죠.”

박 교수의 전공은 사전학이 아니라 본래 어휘문법론이었다. 파리7대학에서 ‘한국어 여격동사의 구문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은 ‘주다’ 동사에 세 용법이 있음을 밝혔다. 목적어에 구체물(사전, 가방)이 올 때는 여격동사, 추상명사(감명, 창피)가 올 때는 사동기능 동사, 구박·연락·자극 등 동명사가 올 때는 형식동사가 된다는 것. 이 분석을 위해 동사 정리 작업을 하면서 한-프 동사사전을 만들었다. 사전의 늪에 빠지게 된 첫 단추다.

“사전을 보면 만든 이, 시대, 학문의 정도가 보입니다. 국어학 연구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지요.”

한국어사전을 본격 수집한 지 10년이 넘었다. 1970년대 이전에 나온 것을 집중적으로 모아 현재까지 1300여권을 모았다. 70년대 이후 것을 합치면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에는 다른 데 정리돼 있다면서 즉답을 하지 못했다. 한자자전과 백과사전, 어휘자료는 1945년 이전에 나온 것을 수집대상으로 하는데 그것 또한 만만치 않아 1000권에 이른다. 아마 자신의 사전 및 어휘 관련 자료가 국내에서 가장 많을 거라고 했다.

“한국어사전 편찬사가 통사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고, 사전 간의 상호관계 역시 규명되지 않고 있어요. 게다가 19세기 말부터 일제 강점기의 한국어 실태는 공백지대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아요. 품이 엄청나게 들고 골치 아프니까요.” 그의 수집은 그러한 공백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그는 강의시간 외에는 거의 컴퓨터 앞에서 자료를 입력하거나 정리한다. 사람 만나는 시간도 아깝다는 그는 하루종일 활자와 씨름하느라 눈을 혹사한 탓에 시력이 무척 좋지 않다. 그래서 책상 앞에서 작업할 때 여분의 안경을 이마에 걸친다. 자료를 찾아 서가를 뒤질 때 쉽게 바꿔쓰기 위해서다. 입력은 단순한 반복작업. 제자들한테 일부 맡길 수 있지 않느냐는 말에 한자가 많고, 진력나는 일이라 싫어하는 것 같다면서 마춤한 제자가 하나 있는데 요즘 통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전했다.

유일한 유식시간은 헌책방 가는 길. 그는 헌책방계에서 ‘사전을 모으는 이상한 교수님’이다.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심의린, 이문당, 1925)을 지방의 한 헌책방에서 찾아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단행본 사전임을 밝혀냈다. 그는 요즘도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방을 찾는데 사전 비슷하게 생긴 고서를 보면 가슴이 찌르르하다고 말했다.

책방길에 유에스비(USB) 메모리는 필수 휴대품. 낯선 물건을 만나면 그것을 컴퓨터에 꽂아서 자신이 구입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 그 안에는 에이포 300쪽 분량의 사전목록과 140쪽 분량의 어휘자료가 입력돼 있다. 10년이상 정교하게 다듬어와 이제는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사전편찬사를 얽을 단계에 이르렀다. 서지학 관련자나 어휘사 연구자들이 탐을 낸다는 말에 ‘한벌 카피해서 줄 수 있느냐’고 운을 떼자 택도 없는 소리 말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의 빼곤 하루종일 활자와 씨름


서지메모리는 계속 한줌이지만 현물자료는 한옥 전체를 뒤덮었다. 메모리 주인은 파리지옥의 파리처럼 자료에 갇혀 ‘자기 줌 속에 갇힌’ 모양새. 일층 연구실은 메모리 속의 자료가 발간시간 순으로 정리돼 있고 이층은 방방이 2차 자료로 가득하다. 틈마다 책이 빼곡이 들어서 거의 포화상태다.

자료 가운데 특이한 것은 척독류. 1910년 이래 출간된 ‘편지투 백과’들은 당대 어휘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란다. 본문 상단, 또는 권말에 붙인 ‘낯선 어휘’ 뜻풀이가 일종의 간이사전이었다. 현재 200여권을 모았는데 어휘와 더불어 당대인의 문장습관 분석에도 유용하리라 본다. 그리고 한자자전. 한자의 어석 외에 해당 한자를 포함한 단어와 뜻풀이를 포함하고 있다. 가나다 순이 아니라 한자 부수 순으로 찾아야 하지만 엄연한 한국어사전이다. “여기에는 신기하게도 오랜 운서의 전통이 살아있어요. 거기에 현대식 사전편찬 방식을 흡수한 것이니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랄까요.” 이들 어휘는 자생적으로 형성된, 토종 뜻풀이로 당연히 한국어사전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게 박교수의 생각이다.

“한국어사전에서 일본어, 죽은말을 털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뜻풀이와 용례를 추가해야 합니다.” 어휘의 사용빈도를 조사해 빈도가 높은 어휘의 조합으로써 뜻풀이를 하고,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예를 찾아내 용례를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하면 마구잡이로 흐르는 언어행위를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현대 한국어 동사 구문사전>(홍재성 외, 두산동아), <한국어 학습용 어미-조사 사전>(이희자 이종희, 한국문화사)을 좋은 본보기로 들었다.

그는 <독립신문> 제1호에 난 <한영자전>과 <한영문법>(언더우드) 광고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당시 사람들한테 이것은 빛이었을 겁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쓰는 한글을 ‘이렇게 쓰세요’ 하고 정리해준 것이니까요.” 그의 작업은 일종의 독립운동일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지 늦은 점심 반주로 소주를 시켰다.

-------------------------------------------------------------------------------------

한국의 책쟁이들 / (23) 일기쓰기 책읽기 가르치는 윤태규 교감


출근할 때 들고 다니는 내 가방은 제법 크다. 그래서 가끔씩 “가방 크다고 공부 잘 하나?” 하는 핀잔을 듣는다. 가방을 들고 복도에 들어서니 먼저 온 진아, 근구, 민화가 쪼르르 마중을 나왔다. 늘 내가 먼저 오는데 오늘은 내가 조금 늦었다. 진아가 내 가방을 얼른 받아 들었다. 근구와 진아가 서로 가방을 들겠다고 다투었다. 가방이 무거워서 진아가 뒤뚱뒤뚱거렸다.

“선생님, 집 나왔어요?” 뒤에 따라오던 민화가 그렇게 물었다.
“왜?”
“선생님 가방이 크잖아요.”
“가방이 크면 집 나온 거니?”
“예, 가방 크면 집 나온 거 맞아요.”
“그래 집 나왔다. 오늘부터 민화네 집에 가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해야겠다.”
“헤헤헤.”
“아니야, 이야기 보따리가 있어서 그래.” 아무 말 없이 걷던 근구가 이렇게 말했다. (1996년 5월 30일 ‘선생님 집 나왔어요?’)

윤태규(57) 교사가 금포초등학교(대구직할시 달성군) 1-2반을 담임할 때의 ‘교단일기’ 중 일절이다. 1972년 교사로 임용되고 6년째부터 꼬박 써온 일기는 그의 보물 제1호다. 갖가지 모양의 노트 서른 권에 ‘교사 전문직’ 30여년이 그대로 담겼다.

2004년 교감이 되어 다시 돌아온 금포초등학교 교무실.

“아이들이 똥누고 밥먹는 것처럼 글쓰기를 자연스럽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어내듯이 자기의 일상을 글로 풀어내면서 차곡차곡 참삶을 가꾸어 가는 거죠. 책상에서 손끝으로 쓰는 글, 글짓기 선수가 상을 타기 위해 꾸며 쓰는 글은 삶을 황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보통 논설문, 독후감, 감상문, 생활문 따위로 글의 갈래를 가르는데 아이들의 글은 모두 생활문이어야 해요. 일기가 바로 생활문 쓰기의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이는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것과 직결됩니다.”


‘재밌는 주제’ 주고 일기 쓰게 해


새로운 일기쓰기와 책읽기운동을 해온 윤 교감의 말에는 30년 교단경험이 녹아 있는 만큼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아이들이 다투어 가져온 일기장 중에서 임의로 들춰본 것 중, 2학년2반 조성욱 군의 3월19일치 일기 한 대목.

“햇볕이 쨍쨍해서 따뜻했다. 우리 엄마는 어릴 때 봄이 되면 뒷산에 냉이를 캐러갔다가 이상한 나물을 캐고 와서 외할머니께 반찬을 해돌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먹을 수 있는 나물을 골라내었는데 이상한 나물들만 가득했다고 한다. 엄마는 1학년 때 가방을 6학년 때까지 썼다고 한다. 1학년 때 학교 미끄럼틀에서 가방에 끈고리를 잊어버려서 6학년 때까지 들고 다녔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새로 샀겠지만 그때는 물건들이 귀했다고 하셨다. 아빠는 금포천에서 미꾸라지를 잘 잡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추어탕을 많이 끓여주셨다고 한다. 요즘엔 컴퓨터게임에 학원에 가고 엄마 아빠처럼 놀 시간이 너무 없는 것 같다.”

금포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저학년, 고학년용 일기장을 나눠준다. 칸 크기가 다를 뿐 같은 모양의 일기장은 시중에서 파는 것과 달리 하루단위로 구획된 틀이 없다. 전날치 일기에 바로 이어 날짜와 제목을 쓰고 본문은 그날의 주제와 느낌에 따라 마음껏 줄이거나 늘여 쓸 수 있다. 그리고 표지 안쪽에 ‘일기쓰기 길잡이’가 인쇄돼 있다.

아침부터 보고 겪은 일을 떠올린다.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잘못, 실수, 부끄러운 일 등 숨기고 싶은 이야기 △답답하고 화나고 억울한 일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 볼 일 같은 것이 좋은 일깃감이다. 쓰고자 하는 일이 벌어졌던 시간대로 돌아가 다시 한번 그 일을 겪어본다. 그리고 차례대로 자세히 써나간다. 맞춤법에 신경쓰지 않고 씩씩하게 쓴다. 때와 장소를 자세히 밝혀쓴다. 집에 가자마자 쓸 것이며 적어도 30분은 들여야 한다.

“일기가 아무리 좋다지만 짐이 돼서는 안 됩니다. 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쓰는 것 자체가 즐거워야 해요. 그래서 주말마다 들판에 나가 봄을 찾아보기, 아카시아꽃 꿀 빨아먹기처럼 ‘재밌는 숙제’를 내줍니다. 조성욱 군의 일기는 ‘부모님 어린시절 얘기 듣고오기’ 숙제일 겁니다.” 그렇게 재미를 들임으로써 습관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고 윤 교감은 말했다.


독서퀴즈 내 정답자에게 책 선물

  
“3시에 첫 전교 어린이회의가 있어요. 아이들과 약속을 했기 때문에 빼먹을 수 없어요.” 그는 자료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30분 먼저 교무실 자신의 자리로 달아났다. 오전에는 11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화단에 심을 봄꽃을 선정하러 왔다면서 근처 농업기술센터에서 손전화를 받았다. “학교의 뒷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살아 있는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라 하루종일 뛰어다녀야 해요.”

저학년 담임을 맡은 한 교사는 ‘학교는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는 게 윤 교감의 모토라고 전했다. “선생님은 등교시간에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아요. 하나하나 안아주면서 울면 우는 이유, 지각하면 지각하는 이유를 물어보세요. 교사 중 아이들 사정을 가장 잘 아실거예요. 아이들이나 교사들이나 선생님을 어려워하지 않아요. 표정도 어린아이 같잖아요.”

아침 8시반에 등교가 끝나면 45분에서 아홉시까지 ‘10분 독서회’가 열린다. 그 시간에는 교실마나 “지금은 10분독서중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라는 팻말이 걸린다. 학교는 아이들이나 교사나 이동이 없어 적막강산이다. 학부모가 와도 그 시간만큼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학년별 권장도서를 두 권씩 지정해 가정통신문으로 알리고 학교도서관에도 5~10권씩을 비치한다. 지난해 12월에는 <지각대장 존>(존 버닝햄, 비룡소) <내가 처음 쓴 일기>(금포초1, 보리)(1학년), <개구리의 세상구경> 1, 2(임정진, 웅진닷컴)(2학년), <개구쟁이 산복이>(이문구, 창비) <감자를 먹으며>(이오덕, 낮은산)(3학년),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권정생, 창비) <지구라는 보자기>(조월례, 오늘어린이)(4학년), <쌀뱅이를 아시나요>(김향이, 파랑새어린이) <안녕 할아버지>(엘 피 도넬리, 창비)(5학년), <싸우는 아이>(손창섭, 우리교육) <해를 삼킨 아이들>(김기정, 창비)(6학년) 등이 선정됐다. 교사와 학부모 용으로는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줘잉, 위즈덤하우스)를 정했다. 이들 책은 주로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중에서 정한다.

“학부모 회의 때마다 ‘가족책거리 행사’를 권합니다. 아이가 책 한권을 읽고나면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온가족이 모여 읽은 느낌을 발표하게 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거죠. 아이들이 발표력도 생기고 가족간의 우애도 생깁니다. 책은 그렇게 읽는 것입니다.”


“많이 읽는 것보다 골라서 읽어야”


학교 홈페이지에는 다달이 학년별로 한편씩 동화 전문을 올려 아이들에게 읽힌다. 내용 가운데 퀴즈를 내어 도서관 응모함에 답쪽지를 넣도록 하고 정답자를 가려 동화책을 주는 등 시상을 한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도서관(이름이 반딧불도서관이다)을 밤 9시까지 개방한다. 대부분의 학교도서관이 등교하면 열리고 퇴근과 동시에 닫혀 활용도가 떨어지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 도서관은 제 구실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일주일에 두차례 화, 금요일에는 영화를 상영한다. 학부모 대상 요가교실을 같은 요일에 열어 아이들과 함께 귀가하도록 배려했다. 방학 중에서도 열어 한명이라도 오면 에어컨을 튼다.

이날 방과후 도서관에는 10여명의 아이들이 남아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고 있었다. 주수형(5-1) 어린이는 게임에 빠진 어린이 문제를 다룬 책 <엄마 이제 조금만 할게요>를 읽었다. 김세나(5-1), 박진희(5-2) 어린이는 “집에 가면 시간 내기 힘들다”면서 “책도 보고 숙제를 할 수 있어서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관내열람은 별도로 하고 하루 대출도서는 30여권 안팎이라고 사서교사는 귀띔했다. 교사들도 책읽기는 마찬가지. 요즘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안병수, 국일미디어)을 읽고 있다. 방학중에는 반드시 한권씩 읽도록 하는데, 읽고 싶은 책을 적어내면 학교에서 구입해 나눠 준다. 독서운동은 교육청 차원에서도 이뤄져 아침 10분독서는 달성군 13개 학교에서 행해지고 교사용 책 40권을 구입해 학교마다 한달씩 돌려가며 읽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이 책만 들고 있으면 부모들은 마음을 푹 놓는데, 안 읽는 것만 못한 책이 많아요. 많이 읽을 필요 없어요. 하지만 골라서 따져 읽어야 해요. 줄거리에 공감하면서 웃게 하는 것이 좋은 책입니다.” 윤 교감의 독서론은 놀이로 귀결됐다. “앉아서 책읽기보다는 골목에서 뛰어노는 게 낫습니다. 삶은 상상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 때문이죠.” 맞다. ‘종이와 활자’는 결국 삶이 말라 비틀어진 게 아니겠는가.

-------------------------------------------------------------------------------------

한국의 책쟁이들/(24)동두천 시인부부 김경식-이주원씨


“이곳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져 생각을 달리해보게 돼요. 우리 동네에 이런 찻집이 있다니 고마운 일이죠.”

‘귀한 손님’과 함께 온 유중권(36)씨는 조금 전 문을 빼꼼히 열고 “영업해요?”라고 물었던 그 사람이었다. 10년만이라고 했고 주인은 10년 전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전통찻집 ‘한다원’은 표정이 없다. 초라한 초록색 간판의 고딕체, 꼭닫힌 여닫이 문, 안이 들여다뵈지 않는 유리막이. 초행은 영업을 하는지 의심할 정도다. 휑뎅한 주변이 그런 느낌은 더한다. 작년말 개통한 전철역, 새로 포장된 2차선 도로, 뒤통수가 시원한 미군병사 서넛이 신호등을 기다리는 건널목….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화들짝 표정이 살아난다. 삼면 벽 가운데 반은 다기, 반은 시집이다. 한벽 가득한 탕관(찻물 끓이는 주전자), 다관(차를 우려내는 주전자)과 찻잔들은 여주인 거고, 나머지 벽을 채운 시집은 남주인 거다. 다기와 시집에는 납작 세월이, 주인 부부의 얼굴에는 볼록 세월이 고였다. 남편은 나한상, 아내는 보살상.

삼척 영은사에서 온 무명스님이 스스럼없이 바랑과 송낙을 벗었다. 주인 내외와 이것저것 안부를 묻고 대답했다. 역시 구면. 먼저 온 유씨가 대화에 끼어들어 말선이 이리저리 꼬였지만 어색함은 잠시였다. 찻집은 나그네들이 다리쉼 하는 사랑방. 누구는 10년만에, 누구는 1년만에, 누구는 생전 처음 들른…. 그곳에서는 모두 나그네였다. 길 위에 나선 시간이 다를 뿐.

김경식(51)-이주원(41)씨. 김씨는 시를 쓰고 이씨는 동시를 쓴다. 1993년 노총각 시인과 스물여섯 처녀시인이 신접살림을 차려 한해 뒤 찻집을 냈으니 내리 15년째 찻집주인이고 시인부부다.

경기도 동두천시. 북행길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주저앉고, 이들을 싣고온 경원선 열차가 되돌아나가는 곳. 한국전쟁때 들어온 미군 2사단 주력이 이라크로 빠져나가자 쑈리와 들병이 후예들 역시 평택으로 대구로 옮겨갔다. 흥청이던 클럽은 서부극 세트처럼 낡아가고 미군상대의 상가자리에는 보산역 새 역사가 들어섰다. ‘철의 실크로드’라는 새 상표를 달고.

“아버지가 집에 가려면 경원선 타야하고/어머니가 집에 가려면 경의선 타야한다/광복이 오니 아버지는 고향에 가지 못하고/동란이 끝나고 나니/어머니는 친정에 가지 못하네/짓밟힌 철길에/미라처럼 버려진 철마/할아버지집 외가집 길목/솟대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데/열차표도 끊을 수 없다는 현실에/식물인간이 부러워진다.”(<경원선> 연작 중 ‘분+단’ 전문)


외국 떠돌다 우리글 소중함 깨달아


김씨 역시 실향민 자식이고 그 자신 떠돌이였다.

결혼해 정착하기 전 열두 해 동안 국외를 전전했다. 수돗물 정수시설 업체 직원으로 아프리카, 동남아, 중동에서 5년, 그 뒤에는 식당 종업원, 무도관 보조 등 프리랜서로 네덜란드, 덴마크에 7년을 머물렀다. 읽을 수도 말할 줄도 모르는 외국어 속에서 상사 주재원들이 놓고간 책과 신문 쪼가리를 몇번씩 보았다. 우리말글 소중함을 몸으로 알았다. 틈틈이 끄적인 그리움은 취미가 되고 주위의 추임새에 ‘외인’이란 동인지도 만들었다. 그예 시잡지인 월간 <순수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지금까지 낸 시집은 모두 6권.

실향은 양양이 고향인 아내 이씨한테도 전염되어 동시 ‘경원선’를 낳았다. 절망이 아닌 희망이 따스하다.

“쿵쿵쿵/땅을 뚫는/기중기 소리//뚝딱뚝딱/망치소리 울리는/보산정거장/공사현장//경원선 철길이/나란히 나란히/이어지려고/숨쉬는 소리//아롱아롱/보이는/원산바다/가는 길.”

이주원씨 역시 <낙서 위에 핀 꽃>(2002), <물거미의 꿈>(2004) 동시집 두 권을 잇따라 냈다. 공공기관의 지원금을 받았으니 작품성이 검증되지 않았겠는가. 이씨의 말이다.

이들이 낸 시집은 아는 사람들이 사주고, 동인끼리 사서 돌리고, 인근 학교와 관공서 등에 기증하고, 서점에서 팔리는 것은 고작 50~100권. 아내의 동시집은 형편이 좀 나아 모두 2쇄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 자체가 돈과 무관한 장르이고 시인 역시 돈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 거기에다 동두천 지역시인임에랴.


지역문인 모임 이끌며 글쓰기도


이들은 지역문인 모임인 ‘이담문학회’ 회원. 남편이 회장이고 아내를 비롯한 39명이 회원이다. 이 지역에 살거나 연고가 있는 18살 이상 성인들로 글쓰기를 좋아하면 자격이 주어진다. 두 달에 한 번씩 본부인 이곳 한다원에 모여 글을 발표하고 교정을 봐주고 격려해준다. 한 해 두 차례 회지를 내는데, 94년 창립이래 모두 18권을 냈다. ‘이담’은 동두천시가 면 소재지였을 때의 이름. ‘이 다음’에는 널리 인정받은 시를 쓰고 싶다는 희망이기도 한다.

9년전 1998년 여름. 6년 내리 든 큰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김씨는 새로 도배해 자국을 가린 가슴높이의 벽을 가리켰다. 찻집은 뻘밭이었다.    

뒷수습을 위해 동동 걷은 부부. 쏟아낸 피혁공장 폐수에 장딴지는 독이 올라 시커멓게 변하고 무릎 아래 탈색된 바지는 더이상 입을 수 없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자랑하던 귀중본 200여권. 책꽂이가 엎어지면서 흙물에 휩쓸려가고 시집박물관을 연다며 가득 꽂아둔 시집들 역시 흉물스레 불어 더이상 책이 아니었다. 빠루로 못을 빼듯이 책을 빼내 볕에 내놓자 씻으려고 내놓은 집기들과 함께 고물장수가 실어가 버렸다. 그때 버린 책이 1만여권, 2.5톤 트럭 다섯 대 분량으로 그가 모아둔 책의 3분의 1이었다. 그 전해에는 연천에 물이 들어 농가주택에 보관하던 시집 5천권을 버렸다. 이때 자신의 시집도 없어져 반년동안 물어물어 다시 갖췄다. 어떤 것은 청계천 헌책방에서 사고, 어떤 것은 지인한테 줬던 것을 되돌려받고, 어떤 것은 동사무소에서 찾아냈다. “유명시인의 것은 헌책방에서 쉽게 구하는데, 제 시집은 그렇지 않더군요. 많이 찍지도 않았고, 찾는 이가 적으니 갈무리하지도 않더라구요.” 그 후 부부의 책 기증은 더 잦아졌다. 나눠주는 것이 남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

“큰물을 당하면서 한공부 했어요. 집착이 없어지더군요. 특히 태풍이 오는 8월이 다가오면 책을 더 나눠주게 되더라구요.”


덜 벌고 덜 쓰며 존재하는 두 사람


94년부터 2006년말까지 쳐보니 105차례 1만3320권의 책을 군부대, 도서관, 경찰서, 동사무소, 교도소, 해양실습선 등 책 궁한 단체에 기증했다. 2005년에는 해외동포한테 책보내기 운동을 펴 쿠바, 멕시코, 브라질에 600권을 보냈다. 한맥문학회 사무국장을 맡은 그한테 들어온 기증본과 눈밝은 그가 헌책방에서 골라 사비로 산 책들이다.

15년전 가격 그대로인 메뉴들. 녹차(우전 세작 중작), 영지탕, 은행탕, 한다탕, 생강탕, 유자탕, 송화탕, 갈근탕, 동규자탕, 모과탕, 당귀탕, 솔잎탕.

“우리집 차는 맛이 없어요. 슈퍼에서 파는 달달한 것이 아니라 진짜거든요. 맛없다는 손님한테는 돈 안 받아요.” 돈 안 되기는 차나 시나 마찬가지. 그래서 차 재료는 모두 김씨가 인근 고대산에서 채취해서 쓰고, 이씨는 월화·목금 두 차례 아이들 10여명한테 다례와 글쓰기를 가르친다. 이날은 박영미씨만 유치원 다니는 아들 정호(7)와 함께 들렀다. “잔을 두 손으로 이렇게 잡고, 후르륵 소리를 내면 안돼요.” 동시 작가의 글쓰기 교육도 똑 이럴 터이다.

“새록새록 숨쉬는/낱말들이/줄맞추어 잠을 자다가/내가 책장을 넘기면/부스스 일어나/마중하지요//무슨 뜻인지/토실토실/숨은 낱말들/싱글벙글 기다리는/도깨비 방망이 같은/보물단지//선생님 없는 집에서/아빠 엄마 안 계셔도/우리말 사전을 훑어보면/한글나라/주인이 되어요.”(‘우리말 사전’ 전문)

부부가 함께 드는 점심. 찬으로는 김치, 고수무침, 취나물·산초나무잎 장아찌. 미나리과 나물인 고수는 정력을 감퇴시킨다는 속설에다 향이 짙어 스님들 외에는 먹지 않았단다.

전통차가 좀 된다는 소문에 일곱 군데나 생겼다가 빠진 자리에 한다원이 외롭고, 함께 감상할 이도 읽어줄 이도 드문 시세계에서 부부시인이 외롭다. 고수처럼 향으로 떠도는 것이 시이고, 찻집처럼 겨우 버티는 게 시인이 아니겠는가. 실향의 그리움이 머무는 동두천에서 시인부부는 덜 벌고 덜 쓰며, 우리끼리 겨우 존재하는 연습을 한다.

-------------------------------------------------------------------------------------

한국의 책쟁이들 / (25) 홈페이지에 독서일기 쓰는 성수선씨


책쟁이라구요? 그렇게 어리고 튀는 여자가? 문화편집장이 놀란다.

기실 이번 주인공은, 좀, 튄다. 젊기도 하고. 삼성정밀화학 해외영업 담당 성수선(34) 과장. 튄다거나 어리다면 본인은 펄쩍 뛸 테지만, 노상 보아온 늙수그레한 책쟁이와는 분명 다르다. 늙은이들만 책쟁이란 법 있는가. 책 쌓아놓은 사람만 책쟁이인가.

성씨의 서재는 인터넷에 있다. ‘수선의 서재’(http://www.kleinsusun.com)라는 개인홈피. 그곳에 가면 대문에 고흐와 클림트의 그림이 걸려있고, 프로필, 독서일기, 소설vs영화, 책방나들이, 영화연극, 여행, 에세이 그리고 방명록이란 방이 있다.

‘프로필’을 보면 책 사기, 책 읽기, 책 구경하기, 책 선물하기를 좋아하고 자주 가는 데가 서점과 도서관이며, 자기만의 멋진 서재를 갖는 게 꿈이다. 이상형 역시 김영하, 김화영, 고종석, 한비야 등 책에 앞선 글쟁이들이다. ‘독서일기’에는 책 169권에 대한 단상이 꽉 차 있다. 2003년부터 지금껏 무슨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또 ‘에세이’는 책과 관련된 이바구 외에 일상에서의 감상이 토로돼 있다. 향내 나는 처자의 방을 훔쳐본 느낌. 2천여권의 책이 있는 실제 그의 방을 구경한 것과는 다르지만.

글을 올리면 평균 조회수가 200회 안팎. 고정팬이 그 정도 된다는 얘기다. 서재 겸 응접실이랄까. 방명록을 보면 그의 홈피가 유유상종 허브임을 알 수 있다. 그들 중 다섯 명은 오프라인 친구가 되었다. 책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만나면 수다를 떠는 여느 친구와 다르지 않다. 2003년에 만들어 꾸준히 공들이는 그곳은 아주 사적인 집이나 아주 공적인 회사와는 또 다른 제3의 공간. 그곳 성수선은 실제 인물과 일치할까. 책과 에세이라는 거울에 한차례 반사된 탓에 낭만적으로 비치지 않을까. 적어도 읽는 이한테는.

그가 하는 일은 포믹애시드(개미산)와 테트라메틸암모늄클로라이드 등 5개 화학제품을 해외에 파는 일. 제품을 소비하는 회사나 중간공급자(디스트리뷰터)가 대상이다. 엘시디나 반도체현상액 만들 때 쓰이는, 일종의 원자재에 해당하기 때문에 물량이 많고 매출액도 크다. 작년 그의 손을 거쳐 나간 게 200억원어치쯤. 계약갱신 또는 새로운 계약을 위해 한해 대여섯 차례 해외에 간다. 동남아는 2~3일, 유럽은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린다.

2000년 타이 출장 때의 일. 비행기가 착륙을 앞두었을 때 스튜어디스가 출입국 카드를 한묶음 건넸다. 단체관광객이 많이 탄 가운데 도드라진 여자가 혼자 있으니 관광가이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노랗게 염색한 머리.


하고픈 건 하고 읽고픈 건 꼭 읽어


그의 도드라짐은 튀는 업무와 용모로도 주체 못해 탈출을 꿈꾼다. “Am I being the person I want to be?” 그의 메일 말미에 붙은 경구, 필시 자문일 터다.

작년 9월에는 10일간의 유럽 출장을 틈타 레게머리를 했다. 처음에는 ‘디따 뻘쭘했지만’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는 가르마처럼 익숙해졌다. 무관심한 이방인 가운데서 자유를 만끽했다. 귀를 뚫고 나서 인생이 달라졌다는 누군가처럼. 귀국 바로 다음 날, 머리를 풀어 ‘12시를 넘긴 신데렐라’처럼 평범하고 모범적인(?) 회사원으로 돌아왔지만.

2005년 대만 타이페이 출장때는 치파오를 입었다. <화양연화>의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모습이 고혹적이어서 언젠가 꼭 입어봐야지 하고 별렀던 것. 장만옥처럼 아름답게 늙어갔으면 하는 바람, 내 인생의 ‘화영연화’가 항상 ‘지금 여기’이기를 하는 바람에서. 그때 찍은 사진은 2005년말 연하카드로 만들어 뿌렸다.

두 주 전에는 유럽으로 열흘간 출장을 다녀왔다. 덴마크, 독일, 스위스, 벨기에, 이탈리아. 함부르크의 토요일. 미카엘교회 앞 헌책방을 둘러보다 문득 게오르크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떠올랐다. 김윤식 선생이 꿈꾸듯이 말했던 책. 가게에는 없어 유럽의 헌책방을 연결한 검색사이트에서 1971년판 하드커버를 찾아내 주문했다. 아쉬움은 헤르만 헷세의 책 세 권과 루카치의 <신독일문학사개설>로 달래고.

그에게 책읽기는 레게머리나 치파오 같은 것. 읽고싶은 것을 꼭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천 개의 공감>(김형경)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강준만, 오두진)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주경철), <5가지 사랑의 언어>(게리 채프먼) <禁止를 금지하라>(지승호) <사람은 왜 인정받고 싶어하나>(이정은) <몸으로 하는 공부>(강유원) <공부의 즐거움-우리시대 공부달인 30인> <인간 사색>(강준만)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레이몬드 카버) <공부>(장정일) <파크 라이프>(요시다 슈이치) <7월 24일 거리>(요시다 슈이치) <나의 피투성이 연인>(정미경)이 최근에 읽은 것들. 꼭 돈 주고 산다. 그래야 한다는 믿음.


국외출장 땐 책짐이 가장 고민


“정미경의 작품은 정말 좋아요. 삶은 계란 몇 개씩 먹고 청량음료 마신 기분이죠. 등장인물들이 다양하고 배경을 잘 살려요. 방송국, 출판사 상사와의 연애 등 천편일률적인 내용에, 주인공이 작가 또래이고 일인칭이어서 자기얘기를 적은 사소설처럼 느껴지는 다른 소설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이번 출장에는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컬처쇼크 벨기에> <유럽의 음식문화> <슬픔이 내게 말을 거네> <여자의 심리학> 등 다섯 권을 들고가 <유럽의 음식문화>를 빼곤 다 읽었다. 이동 중 읽은 책들은 장소의 추억과 결부돼 각별하게 기억된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 고민은 책짐이다. 새로 산 책들로 짐은 무거워지고 가져간 책은 다 읽었고…. 다 읽은 책을 버려 말아, 하는 망설임. 결국은 싸들고 들어온다!

이렇게 읽어낸 책들과 매출실적은 연결돼 보인다. 본인은 그런 결론이 영 어색하다는 표정이다.

그는 거래하는 고객과 친구처럼 지낸다. 그는 ‘미스 성’이 아니라 ‘수선’의 영어식 발음 ‘수잔’이다. 상담이란 것이 사는 사람은 싸게, 파는 사람은 비싸게 하려는 게 본질. 그러니 자기얘기만 한다고 거래가 성사되는 게 아니다. 상대방 말을 잘 듣고 상황에 맞춰야 하고 나의 상황도 이해시켜야 된다. 말하자면 모두에게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

재작년 독일 출장때의 일이다. 마침 총선 며칠 전이어서 거리 곳곳에 후보들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뚱뚱한 요쉬카 피셔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피셔가 다시 둥뚱해졌네요.” 거래선은 그의 말에 깜짝 놀라 “그걸 어떻게 알아요?”라고 물었다. 그의 책 <나는 달린다>를 읽고 현재의 삶을 계속해 파멸하든지 새로운 방식을 찾든지의 갈림길에서 달리기를 선택해 살빼기는 물론 자기개조에 성공한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 그의 책이 한국에 번역돼 마라톤 붐에 한몫을 했다는 얘기. 여러 권을 사서 운동않는 주위 사람들한테 나눠준 얘기를 했다. 대화는 무척 유쾌하게 이어졌고 거래선은 무척 좋아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음식은? 김치’ 식의 단답식 대화는 주고받기는 하지만 접점이 적어 흥미롭게 뻗어갈 수 없다. 사귐이 접점을 넓히는 것이라면 폭넓은 지식과 교양은 필수인 셈이다. 역사철학을 전공한 피오리나가 ‘감성영업’을 성공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하루 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것. 성씨가 감성영업을 위해 독서를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양자가 닿아있다.

그가 책 사는데 들이는 돈은 한달 20만원꼴. 주로 인터넷서점에서 산다. 단골사이트에서 그는 마일리지를 더주는 최우수고객이다. 좋아하는 책은 몇권씩 사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고객, 상사, 친구, 선후배한테 돌린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자궁>(이유명호), <나는 달린다>(요쉬카 피셔), <삼미 슈퍼스타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장미도둑>(아사다 지로), <오빠가 돌아왔다>(김영하)는 10권 이상 선물했다.


한달 20만원꼴 사들여 2천권 소장


그의 취미는 웹서핑.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블로그를 ‘즐겨찾기’ 해두고 자주 들른다. 그곳의 신간 리뷰에서 정보를 얻는다. 소개된 책이나 소개방식이나 그게 그거인 신문 북섹션과 달리 그곳의 리뷰는 호오 평가가 분명하고 솔직해 많이 참고한다. 고수가 꽤 많다. 그렇게 간택되어 읽은 뒤에 홈피에 올린 독후감은 다른 사람들한테 믿음직한 길잡이가 된다.

“일반인에게 기자들의 글은 중립적이에요. 문학평론가 글은 너무 어렵고요. 처세나 자기계발서만 읽던 회사원들이 오랜만에 소설을 잡아보려 해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어요. 회사원 눈높이의 서평이 꼭 필요해요.”

-------------------------------------------------------------------------------------

'Fact >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사상 강좌  (0) 2009.12.04
부처님의 근본교설  (0) 2009.12.04
불교의 기초교리 강좌  (0) 2009.12.04
불교의 체계적 이해  (0) 2009.12.04
영어는 쉽다  (0) 2009.12.04
한국의 글쟁이들  (0) 2009.12.03
여행중 필요한 일본어 회화  (0) 2009.12.03
한국의 미스테리 9가지  (0) 2009.12.03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영어  (0) 2009.12.03
파워포인트 제작의 10대 원칙  (0) 2009.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