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리 강좌
- 신행의 첫걸음 삼귀의
- 대중과 함께 반성하는 '포살(布薩)'
- 스스로 잘못을 참회하는 '자자(自恣)'
- 자신을 닦는 수행법 참선(參禪)
- 업장을 소멸하는 '기도'
-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주력(呪力)'
- 진리의 말씀을 옮겨 적는 '사경(寫經)'
- 참다운 원을 세우는 '발원(發願)'
- 진리의 말씀을 펴는 '전법활동'
-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如來十號)
- 삼명육통
- 부처님의 십대제자
- 화합의 공동체 승가
- 돈 없이 베푸는 일곱가지 보시(無財七施)
- 육사외도
1. 신행의 첫걸음 삼귀의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맑고 깨끗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무명에 싸여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오탁악세를 살아가면서 번뇌의 때가 묻고 탐진치 삼독으로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탐진치 삼독을 멀리하고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까요? 불교에서는 그 첫 번째 단계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은 무명의 사슬을 끊고 지혜의 길로 다가서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율장대품)
이 같은 삼귀의는 부처님께서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전도선언을 하시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지역에 가서 어떤 이를 교화했을 때 그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바로 귀의삼보(歸依三寶)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믿음을 표현하고 불자가 되겠다는 종교적 약속이자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2.참된 귀의
2.참된 귀의
1) 그릇된 귀의
그렇다면 귀의란 무엇일까요? 귀의는 'Namo'에 대한 한역으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돈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권력에 의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한다면 참된 것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거나 가상적인 것에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과오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근심하며
소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한다.
진실로 의지함은 사람의 근심이다.
의지(依)가 없는 자는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부경전-경집)
소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한다.
진실로 의지함은 사람의 근심이다.
의지(依)가 없는 자는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부경전-경집)
여기서 '의지한다(依)'는 것은 'Upadhi'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의 대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하지만 재산이나 자식, 또는 권력과 같은 것에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근심을 초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의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의(依) 가운데서
견실(堅實)을 보지 못하도다." (경집)
견실(堅實)을 보지 못하도다." (경집)
2) 참다운 귀의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인 의지처는 무엇일까요? 붓다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法-Dharma)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인 의지처는 무엇일까요? 붓다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法-Dharma)라고 말씀하십니다.
(1) 자귀의(自歸依)
"진실로 자기는 자기의 주인(主)이며
자기는 자기가 의지할 곳(依所)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잘 다스려라.
마치 상인이 양마를 길들이듯이." (법구경 380)
"진실로 자기는 자기의 주인(主)이며
자기는 자기가 의지할 곳(依所)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잘 다스려라.
마치 상인이 양마를 길들이듯이." (법구경 380)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로다.
다른 곳 어디에 의지할 곳이 있을 것인가.
자기가 잘 조어되었을 때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 것이다." (법구경 23권.)
다른 곳 어디에 의지할 곳이 있을 것인가.
자기가 잘 조어되었을 때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 것이다." (법구경 23권.)
여기서 '의지할 곳(依所)'이란 나아타'Natha'라는 산스크리트의 번역입니다. 나아타의 뜻은 '머물다', '수호자(守護者)'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란 뜻입니다.
(2)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하라(自歸依 法歸依)
올바른 귀의처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 아함부 경전에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눈앞에 두고도 이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하라(自歸依 法歸依)
올바른 귀의처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 아함부 경전에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눈앞에 두고도 이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에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를
의지할 곳(依所)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을 의지할 곳으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하며 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 다른 이를 의지하지
말라." (장부경전17. 대열반경 2, 26)
의지할 곳(依所)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을 의지할 곳으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하며 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 다른 이를 의지하지
말라." (장부경전17. 대열반경 2, 26)
여기에서 주(洲)는 Dipa의 번역어로 강변, 또는 뭍을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이 변해 가는 세상에서도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뭍은 언제나 그곳에 있듯이 변함없이 영원한 삶의 발판이 주(洲)인 것입니다.
한역에서는 이러한 주(洲)를 '등을 밝히다'라는 의미인 등명(燈明)으로 의역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권력이나 돈에 의지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혜의 밝은 빛을 얻게 되면 그와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또는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은 사람, 돈, 권력, 명예 같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 속에서도 흐르지 않는 주(洲)와 같이 자신과 진리에 머물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3.삼귀의
3.삼귀의
그렇다면 의지처가 될 만한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일상적 모습의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방종한 자기에 대한 무조건적 의지는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잘 통제된 자기, 마치 상인이 좋은 말을 조련하듯이 잘 조련된 자기만'이 귀의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의지할 만한 곳으로 조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法-Dharma)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귀의를 구체적으로 체계화된 것이 다음과 같은 삼귀의인 것입니다.
1) 귀의불(歸依佛)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삼귀의의 첫 번째 의지 대상은 바로 법의 구현자인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2) 귀의법(歸依法)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재의 참 모습을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의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러러보며 그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3)귀의승(歸依僧)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서로 화합하고 실천에 힘쓰는 이들입니다.
4.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자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 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대중과 함께 반성하는 '포살(布薩)'
4.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자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 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궁극의 의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문이나 부처님 그 자신마저도 영원한 의지처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나 사문들은 다만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導師)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 의지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2. 대중과 함께 반성하는 '포살(布薩)'
포살이란 범어 Posadha의 음역으로 출가중이 매달 보름마다 행하는 의식이다. 매달 보름과 그믐날에 모든 비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계본(戒本)을 외우고 지은 죄가 있으면 참회해서 악을 그치고 선을 기르는 의식이 포살이다.
이 포살제도는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외도의 교단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집회를 갖고 일반인들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으니 불교 교단에서도 이런 행사를 갖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부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율장대품 포살건도)에 나타나 있는 포살 의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포살제도는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외도의 교단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집회를 갖고 일반인들을 위해 설법을 하고 있으니 불교 교단에서도 이런 행사를 갖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부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율장대품 포살건도)에 나타나 있는 포살 의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중이여, 들으십시오. 오늘은 15일 포살일입니다. 만약 대중들의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포살을 열고 계본을 외우겠습니다. 무엇을 교단의 첫 행사라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하는 것이니 나는 이제 계본을 외우겠습니다. 대중은 이를 잘 듣고 잘 생각하여 만약 스스로 어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서서 그 죄를 드러내고 죄 없는 사람은 잠자코 있을 것이니 잠자코 있으면 여러 대덕이 청정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나니 비구는 대중들로부터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 질문 받고도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의적으로 망어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고의적인 망어는 도(道)에 장애가 된다고 설하셨으니 죄 있는 비구가 청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죄를 드러내십시요.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 을 것입니다."
만약 누가 물을 때에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나니 비구는 대중들로부터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세 번 질문 받고도 지은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의적으로 망어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고의적인 망어는 도(道)에 장애가 된다고 설하셨으니 죄 있는 비구가 청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죄를 드러내십시요.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 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계율 하나 하나의 항목이 세 번씩 외어졌다. 예를 들면
"만일 비구가 촌락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나 주지 않는 것을 가져오면 이것은 비구의 바라이 죄이니 함께 살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촌락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나 주지 않는 것을 가져오면 이것은 비구의 바라이 죄이니 함께 살지 못한다."
하는 식으로 계본을 외웠다. 그리고 이렇게 몇 조목이 끝날 때마다
"나는 이제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니 이 계에 대해 청정합니까?" 하고 세 번씩 물었다.그리하여 모두가 잠자코 있으면
"이제 여러 대덕은 이 계에 대해 청정하기에 침묵하신다고 나는 알겠습니다. "
라고 말하고 다음 계로 넘어간다. 이렇게 모든 계를 외우고 문답함을 끝낸다.
"나는 이제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니 이 계에 대해 청정합니까?" 하고 세 번씩 물었다.그리하여 모두가 잠자코 있으면
"이제 여러 대덕은 이 계에 대해 청정하기에 침묵하신다고 나는 알겠습니다. "
라고 말하고 다음 계로 넘어간다. 이렇게 모든 계를 외우고 문답함을 끝낸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이 포살을 여실 때에는 지금과 같은 250계와 348계는 아니였다. 이들 계의 조목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이런 포살의식은 전 대중이 모여 보름마다 행하였다.
이같은 포살 법회는 불교 교단의 청정한 계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출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불자들도 그 뜻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포살 법회는 일상 생활 속에서 참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의식으로 스스로 나쁜 악습을 버리고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반드시 초하루 보름 법회가 끝난 다음 스님의 지도에 따라 포살 법회를 열고 자신이 그동안 참다운 불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고 선근 공덕을 키워 나가야 한다.
이같은 포살 법회는 불교 교단의 청정한 계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출가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 불자들도 그 뜻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포살 법회는 일상 생활 속에서 참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의식으로 스스로 나쁜 악습을 버리고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반드시 초하루 보름 법회가 끝난 다음 스님의 지도에 따라 포살 법회를 열고 자신이 그동안 참다운 불자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반성하고 선근 공덕을 키워 나가야 한다.
3. 스스로 잘못을 참회하는 '자자(自恣)'
자자란 수의(隨意)라고도 하는데 부처님 당시엔 우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포살일에 행해졌던 의식이다. (율장대품 자자건도)에는 자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안거가 끝나는 마지막 날 해가 넘어가고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오면 비구들은 모두 마당에 둘러앉는다. 그러면 한 장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한다.
"대중이여, 들으십시요.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입니다. 만약 대중들의 이의가 없다면 교단은 자자를 베풀려 합니다."
이렇게 의식이 시작되면 장로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모든 비구가 합장한 손을 높이 쳐들고는 동료 비구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덕들이여, 나는 이제 자자를 행하노니 대덕들이 나에 대해 무언가 보고, 무언가 듣고, 또 무언가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을 해주십시요. 죄를 알면 곧 그것을 제거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세 번씩 청하여 모든 차례가 끝나면 자자의 의식도 끝나는 것이었으니 부처님을 선두로 신입 비구에까지 모두 마친 것이 된다.
자자란 이렇게 자진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청하는 아름다운 의식이다. 참된 공동체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비구들은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허물은 도반의 지적을 받아 고쳐 나갔던 것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했던 것으로 도반끼리 서로 탁마해 가는 아름다운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자란 이렇게 자진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해 달라고 청하는 아름다운 의식이다. 참된 공동체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비구들은 스스로의 죄를 드러내어 반성하고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허물은 도반의 지적을 받아 고쳐 나갔던 것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했던 것으로 도반끼리 서로 탁마해 가는 아름다운 수행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 자신을 닦는 수행법 참선(參禪)
불교 수행법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참선이다. 참선은 전통적으로 훌륭한 선사들이 이 방법을 통해서 도를 얻고 인격을 완성했다. 요즘은 많은 불자들이 참선을 자신의 수행법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 참선에도 크게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지관참선(止觀參禪法)이다.
이것은 마음의 온갖 산란한 번뇌를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슬기로써 모든 존재(萬法)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흔히 관법(觀法) 혹은 비파사나(Vipasyana)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마음의 온갖 산란한 번뇌를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슬기로써 모든 존재(萬法)를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흔히 관법(觀法) 혹은 비파사나(Vipasyana)라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는 묵조선(默照禪)이다.
이것은 참선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온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갖지 않고 참선을 하는 방법을 묵조선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선이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것이라는 데서 나온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화두를 갖지 않고 참선을 하는 방법을 묵조선이라고 한다.
셋째는 간화선(看話禪)이다.
이것은 화두(話頭)를 근거로 하여 참선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달마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방법이다. 간화선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선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일사불란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인간의 실존과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바로 보는 방법으로 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은 화두(話頭)를 근거로 하여 참선하는 방법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달마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화두를 들고 좌선하는 방법이다. 간화선은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참선법이다.
선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서 일사불란한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인간의 실존과 만나는 일이다. 자신의 진실한 생명을 바로 보는 방법으로 참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선의 본래 목적은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있다. 자신의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마음의 본질을 깨닫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 바로 참선이다. 선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이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가능하다.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사람의 기본적인 동작에서부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어느 상태에서도 참선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앉아서 하는 선 수행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해서 흔히 좌선(坐禪)을 많이 행하고 있다.
참석의 방법 중 우리 나라에서는 화두를 들고 행하는 간화선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화두란 쉽게 말해서 하나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은 철저한 문제의식을 마음속에 새겨서 참구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속에 오로지 문제의식만을 남겨 놓고 다른 어떤 것도 떠올려서는 안된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지 오직 자신의 문제 삼고 있는 화두만을 새겨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긴다는 말은 곧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선을 행할 때는 아주 고요하고 맑은 생각으로 몰입해야 한다. 참선은 인생의 근본 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진지하고 철저히 행해야 한다. 전문적으로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삼 개월 혹은 일년 이상씩 철저히 모든 일상사를 다 배제하고 몰입해야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을 집중시키는 훈련을 계속 쌓는다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1) 기도는 업장을 소멸하는 것
기도는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서 매우 신비롭고 미묘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기도'라는 말은 그대로 빈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그 능력에 한계가 있으며 죄업은 무겁고 복덕이 엷은 관계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온갖 재난과 재앙이 그 뒤를 쫓고 있다. 이러한 고난, 장애, 재앙은 다 그가 날 적부터 지니고 태어난 전생의 업보(業報)와 업장(業障) 때문이다.
기도는 중요한 수행법의 하나로서 매우 신비롭고 미묘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기도'라는 말은 그대로 빈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그 능력에 한계가 있으며 죄업은 무겁고 복덕이 엷은 관계로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온갖 재난과 재앙이 그 뒤를 쫓고 있다. 이러한 고난, 장애, 재앙은 다 그가 날 적부터 지니고 태어난 전생의 업보(業報)와 업장(業障) 때문이다.
우리들은 기도를 통해서 불, 보살의 가피를 입게된다. 그리고 그 가피력에 의해 타고난 업보와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해서 모든 고난, 장애, 재앙에서 벗어나 하는 일과 구하는 바를 뜻대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복덕(福德), 지혜(智慧), 자비(慈悲), 만덕(萬德)의 무한한 능력을 갖추신 부처님과 보살님께 진심으로 귀의하여 예배, 공양, 참회, 발원함으로써 불, 보살의 가피력을 입고자 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염불과 주력도 그와 같이 죄업을 소멸하고 지혜 복덕을 성취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보다 직접적으로 불, 보살의 가피력에 의하여 죄업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기도는 마치 텔레비전의 안테나처럼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이 자비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성으로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중생의 마음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어두운 먹구름이 걷치고 마치 태양과 같은 지혜 광명이 빛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는 우주에 충만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기도는 마치 텔레비전의 안테나처럼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이 자비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성으로 염불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중생의 마음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어두운 먹구름이 걷치고 마치 태양과 같은 지혜 광명이 빛나는 것이다.
2) 기도의 방법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식을 갖추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 통례이다.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식을 갖추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 통례이다.
① 불, 보살님께 지성으로 귀의하는 것이 첫 번째 순서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이나 또는 많은 불, 보살님전에 한 마음을 기울여 귀의한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이나 또는 많은 불, 보살님전에 한 마음을 기울여 귀의한다.
② 두 번째는 공양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공양은 좋은 향을 사르고 등불을 밝히면서 청수다(淸水茶)를 올리며 꽃, 과일, 쌀 등을 불, 보살님 전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향과 등과 차만을 공양하거나 또는 향 하나만을 공양해도 무방하다.
물질적인 공양은 좋은 향을 사르고 등불을 밝히면서 청수다(淸水茶)를 올리며 꽃, 과일, 쌀 등을 불, 보살님 전에 공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향과 등과 차만을 공양하거나 또는 향 하나만을 공양해도 무방하다.
③ 세 번째는 예경이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님이나 또는 많은 불, 보살님께 지극 정성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3배, 108배, 1,000배 이렇게 불, 보살님께 예배를 올려야 한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님이나 또는 많은 불, 보살님께 지극 정성으로 예배하는 것이다. 3배, 108배, 1,000배 이렇게 불, 보살님께 예배를 올려야 한다.
④ 넷째는 참회하는 것이다.
이 참회 의식에는 비로자나 참법, 미타참법, 관음참법, 보현참법, 지장참법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기도법회에 참회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참회는 진실로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 참회법은 기도와 독립시켜서 실행하는 것도 좋다.
이 참회 의식에는 비로자나 참법, 미타참법, 관음참법, 보현참법, 지장참법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기도법회에 참회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참회는 진실로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 참회법은 기도와 독립시켜서 실행하는 것도 좋다.
⑤ 다섯째로 염송이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이나 많은 불, 보살님의 명호를 지극정성으로 부르며 정근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불, 보살이나 많은 불, 보살님의 명호를 지극정성으로 부르며 정근하는 것이다.
6.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주력(呪力)'
주력은 불, 보살님의 명호나 진언(眞言)을 일념으로 염송하는 것을 말한다. 한역경전에서 주(呪)로 번역되는 산스크리트어는 만트라(Mantra)·다라니(Dharani)·비드야(Vidya)의 세 종류가 있다. 물론 주(呪)외에도 만트라는 진언(眞言), 다라니는 총지(摠持)·능지(能持), 비드야는 명주(明呪)라고 번역되기고 한다. 이 세 종류의 말이 함께 주(呪)라고 번역되는 것은 이 말에 비밀어(秘密語)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유가사지론) 권 45에는 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엇이 보살의 주다라니인가? 보살이 삼매자재(三昧自在)를 획득해서 이 자재에 의해 중생의 재환을 없애는 주문에 가피를 입히면 그러한 주문이 최고의 신령스러운 영험으로 허무하지 않은 영험을 나타내어 모든 재난을 없앤다. 이것을 보살의 '주 다라니'라 한다." (유가사지론)
이렇게 재난을 없애고 복을 부르며, 어떤 재해로부터 몸을 지킨다는 진언 혹은 다라니를 마치 참선을 할 때 화두를 참구하듯이 항상 외우고, 이것을 수행의 요체로 삼는 것을 우리 나라에서는 주력(呪力)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한국불교에서 통용되는 것일 뿐,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진언을 외우는 수행법을 주력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원래 진언을 외우는 것은 밀교의 수행법이다.
밀교에서는 부처님의 삼업(三業) 즉 몸으로 짓는 행위, 입으로 짓는 행위, 뜻으로 짓는 행위는 중생으로서는 미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것이라 하여 삼밀(三密)이라 한다. 중생의 삼업(三業) 또한 본성에서는 부처님의 삼밀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성불하기 위해서는 중생의 삼업이 부처님의 삼업과 서로 걸림이 없이 융화되어 평등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밀 교에서는 즉신성불(卽身成佛) 즉 현세의 이 몸 그대로 성불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부처님과 중생이 서로 융합하는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생은 손으로 인(印)을 맺고(身密), 입으로 진언인 주문을 외우며(口密), 생각으로는 부처님과 중생이 하나임을 관(意密)해야 한다.
7. 진리의 말씀을 옮겨 적는 '사경(寫經)'
사경(寫經)은 부처님의 경전을 베껴쓰는 것으로 유래가 매우 깊은 수행법이다. 거의 모든 경전을 통해서 써서 지니고 외우는 '서사수지독송(書寫受持讀誦)'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경은 마음을 집중해서 정갈한 종이에 경문을 한 자 한 자 쓰는 일을 말한다. 수행법에서는 일자일배(一字一拜), 또는 일자삼배(一字三拜)라고 해서 한 글자를 쓰고 한번 절하거나 세번 절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기도 한다. 사경은 단순히 경문의 뜻을 전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경이 수행법으로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을 씀으로써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마음 깊이 와 닿게 되며 경을 쓰는 동안 정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으로써 사경은 더할 수 없이 좋은 방법이다.
특히 마음이 산란하고 집중력이 약한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사경이 더할 수 없이 좋은 수행방법이다.
사경은 마음을 집중해서 정갈한 종이에 경문을 한 자 한 자 쓰는 일을 말한다. 수행법에서는 일자일배(一字一拜), 또는 일자삼배(一字三拜)라고 해서 한 글자를 쓰고 한번 절하거나 세번 절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기도 한다. 사경은 단순히 경문의 뜻을 전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행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경이 수행법으로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경을 씀으로써 그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마음 깊이 와 닿게 되며 경을 쓰는 동안 정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법으로써 사경은 더할 수 없이 좋은 방법이다.
특히 마음이 산란하고 집중력이 약한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사경이 더할 수 없이 좋은 수행방법이다.
사경은 특별히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시작할 수 있다. 굳이 법당을 찾아야 한다거나 소리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큰 제약 없이 시작할 수 있다. 기도나 독경의 수행법에 어색한 학생들이나 젊은 층에게 사경은 좋은 수행법이 될 것이다.
사경을 할 때는 부처님의 마음과 가르침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성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사경의 신앙은 경전의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의미도 크지만 자신의 원력과 신앙을 사경 속에 담아 신앙의 힘을 키워 나가는데 그 목적 있다. 사경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게 되면 지혜의 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경을 할 때는 부처님의 마음과 가르침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득 채우는 성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 사경의 신앙은 경전의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의미도 크지만 자신의 원력과 신앙을 사경 속에 담아 신앙의 힘을 키워 나가는데 그 목적 있다. 사경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과 자기의 마음이 하나로 통하게 되면 지혜의 빛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경을 할 때의 순서와 주의점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얼굴과 이를 닦고 몸을 단정히 한 후에 사경을 시작해야 한다.
둘째, 환경을 정돈해야 한다.환경을 정돈하는 것은 곧 마음을 정돈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셋째, 정좌해서 자세를 바르게 갖춘다.이것은 곧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경할 자세를 갖추는 단계이다.
넷째, 합장하고 사경의식 순서에 따라 의식문을 염송한다.
다섯째, 붓이나 붓펜을 잡고 사경을 시작한다.사경에 사용하는 붓이나 붓펜은 사경 이외의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째, 일자일배의 사경 신앙이 전해 오지만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우니 한 줄을 다 쓰고 난 뒤 합장하여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일곱째, 사경이 끝나면 사경한 날자와 사경한 사람의 이름을 쓴다.
여덟째, 사경을 통해 가장 청정해진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축원한다.
아홉째, 사경이 끝나면 손수 쓴 경전을 소리내어 한 번 독송한다.
열째, 사경 회향문을 읽고 삼배를 올린다.
둘째, 환경을 정돈해야 한다.환경을 정돈하는 것은 곧 마음을 정돈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셋째, 정좌해서 자세를 바르게 갖춘다.이것은 곧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경할 자세를 갖추는 단계이다.
넷째, 합장하고 사경의식 순서에 따라 의식문을 염송한다.
다섯째, 붓이나 붓펜을 잡고 사경을 시작한다.사경에 사용하는 붓이나 붓펜은 사경 이외의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섯째, 일자일배의 사경 신앙이 전해 오지만 그대로 따르기는 어려우니 한 줄을 다 쓰고 난 뒤 합장하여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일곱째, 사경이 끝나면 사경한 날자와 사경한 사람의 이름을 쓴다.
여덟째, 사경을 통해 가장 청정해진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축원한다.
아홉째, 사경이 끝나면 손수 쓴 경전을 소리내어 한 번 독송한다.
열째, 사경 회향문을 읽고 삼배를 올린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경을 할 때 마음이 한곳으로 모아져서 순일하게 되므로 뜻과 정신이 맑아져 삼매의 경지에 들게된다. 사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자세이다. 글자를 잘 쓰고 못 씀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경건한 마음 자세만 갖추어지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경의 수행법이다.
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쓰는 일이기 때문에 진리의 보석을 찾아내어 마음에 주워 담는 일이다. 마음의 종이에 진리의 말씀을 새기다 보면 어느새 지혜가 밝아져 무아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8. 참다운 원을 세우는 '발원(發願)'
발원이란 스스로 어떤 원(願)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원(願)이란 '기필코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것과 같이 대승 보살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뜻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원은 단순히 자기자신의 개인적인 복을 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사회가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어떤 일을 하겠다든지,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한량없는 보시를 베풀겠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발원이다. 그래서 발원은 마음속에 원을 일으킨다고 해서 발원심(發願心), 뜻 있는 원을 세운다고 발지원(發志願), 가장 높은 원을 세운다고 해서 발무상원(發無上願), 가장 큰 원을 일으킨다고 해서 발대원(發大願)이라고도 한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삶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리적(自利的) 삶이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이다. 그래서 "나는 중생들을 위해서 이러 이러한 일을 하겠습니다" 하고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발원이다. 다시 말해 발원이란 자신이 어떤 보살행을 행할 것인지를 마음속에 정하고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발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다. 총원이란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이 총원은 불자라면 누구나 다 가져야 하는 원이다. 천수경에 나오는 사홍서원이 대표적인 총원이다. 그래서 모든 법회가 끝날 때는 반드시 사홍서원을 부르는 것이다.
衆生無邊誓願度 - 중생이 가이 없지만 기어코 다 건지오리다.
煩惱無盡誓願斷 - 번뇌가 끝이 없지만 기어코 다 끊으오리다.
法聞無量誓願學 - 법문이 한이 없지만 기어코 다 배우오리다.
佛道無上誓願成 - 불도가 가이 없지만 기어코 다 이루오리다.
煩惱無盡誓願斷 - 번뇌가 끝이 없지만 기어코 다 끊으오리다.
法聞無量誓願學 - 법문이 한이 없지만 기어코 다 배우오리다.
佛道無上誓願成 - 불도가 가이 없지만 기어코 다 이루오리다.
이에 비해 별원(別願)이란 한 부처님이나 한 보살님이 세운 개개의 원을 말한다. 아미타불의 48원이나 약사여래의 12원 같은 것이 대표적인 별원이다. 특히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을 가리켜서 서원(誓願)이라고 한다. 그것은 널리 모든 것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이고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맹세이기 때문에 서원(誓願)이다. 또 다른 말로 그 원이 한없이 넓고 크기 때문에 홍원(弘願), 홍서(弘誓)라고도 하며 중생들을 향한 자비심이 깊고 무겁기 때문에 중원(重願)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발원이란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남을 위한 일인 동시에 곧 자신의 깨달음(菩提)을 위한 것이다. 불교는 신앙적인 의지에 의한 구원보다는 자발적인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불자에게서 발원이란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불자들은 부처님께 복을 비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불자로써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 발원을 하나씩 세워야 한다. 불자는 이 발원을 통해서 삶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며 이 발원을 통해서 새로운 보살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9. 진리의 말씀을 펴는 '전법활동'
1) 전도선언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5비구를 교화하시고 다시 야사와 그의 벗들을 교화하신 뒤 61명의 제자들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러 떠나라는 전도선언을 하신다. 부처님은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을 성취하셨고 그 법열의 기쁨에 만족하실 수 있었지만 모든 중생들의 번뇌와 고통을 치료해 주시고자 전도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5비구를 교화하시고 다시 야사와 그의 벗들을 교화하신 뒤 61명의 제자들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전하러 떠나라는 전도선언을 하신다. 부처님은 무상정등각의 깨달음을 성취하셨고 그 법열의 기쁨에 만족하실 수 있었지만 모든 중생들의 번뇌와 고통을 치료해 주시고자 전도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여러 수행자들이여, 나는 인간을 얽어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그대들도 인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가라. 그러나 같은 길을 두 사람이 함께 가지는 말아라. 한결같이 훌륭한 법문을 중생들에게 들려주고 언제나 깨끗한 수행자의 생활을 하여라. 그대들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 하고 마지막도 훌륭하며, 내용도 있고, 말도 다듬어진 설법을 하여라. 완전하고 원만하며 청정한 수행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때가 덜 묻은 사람들도 많으니 그들이 훌륭한 법문을 듣게되면 곧 깨달아 아라한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전법륜경}
바로 이 전도선언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도 땅을 넘어 전 인류의 위대한 가르침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전도선언을 통해서 무명의 중생계에는 찬란한 진리의 말씀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리의 등불을 전하는 것을 불자의 기본적인 실천이며 나아가서 그것은 가장 높고 수승한 공덕이다. 그래서 모든 경전에서는 전법의 공덕에 대해서 수없이 강조하고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무량아승지 세계에 가득 차는 칠보를 가지고 보시에 썼다 할지라도 만약 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갖거나 사구게 등이라도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해 연설한다면 그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오히려 낳으니라. (금강경 응화비진분)
이처럼 불법에서 가장 큰 보시는 바로 법보시이다. 진리를 몰라 암흑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은 찬란한 빛을 밝혀 주는 것이며 장님에게 눈을 뜨게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불자된 도리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일러주고 불법을 전하는 전법이다. 누구나 배운 만큼 마음속에 지니고 남을 위해 연설한다면 그 공덕이 한량없는 것이라고 경전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전법은 남을 위한 길(利他)이며 동시에 바로 자기를 위한 길(自利)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전하는 것은 바로 나와 남이 함께 성불하는 길이다.
2) 사섭법(四攝法)
불법의 수승함을 알고 그 가르침의 위대함을 알지만 어떻게 불법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남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러주고 불법으로 인도하는 보살의 자세에 대해서 사섭법이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다.
불법의 수승함을 알고 그 가르침의 위대함을 알지만 어떻게 불법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불법에서는 남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러주고 불법으로 인도하는 보살의 자세에 대해서 사섭법이라는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다.
① 보시섭(布施攝)
보시섭이란 저마다 중생이 바라는 바를 베풀어서 불법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 베품에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다. 재시란 재물을 베풀어주는 것을 말하며 법시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일러주는 것이다. 낙담하고 좌절에 빠졌을 때 부처님의 말씀 한 마디를 일러주는 것은 더 없는 위안이 되고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을 일러주는 것은 바로 전법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 무외시란 항상 온화한 미소와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함이다. 다정하고 친절한 표정과 온화한 말 한마디가 다 베푸는 것이다. 보살은 이렇게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베풀어서 불법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보시섭이란 저마다 중생이 바라는 바를 베풀어서 불법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 베품에는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 등이 있다. 재시란 재물을 베풀어주는 것을 말하며 법시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일러주는 것이다. 낙담하고 좌절에 빠졌을 때 부처님의 말씀 한 마디를 일러주는 것은 더 없는 위안이 되고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을 일러주는 것은 바로 전법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또 무외시란 항상 온화한 미소와 인자한 모습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함이다. 다정하고 친절한 표정과 온화한 말 한마디가 다 베푸는 것이다. 보살은 이렇게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베풀어서 불법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② 애어섭(愛語攝)
애어섭이란 부드럽고 따뜻한 말을 말한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 사람에게 더없이 큰 용기가 된다. 그래서 보살은 언제나 상냥하고 인정이 넘치는 말로서 사람을 대하고 그렇게 믿음을 얻어 마침내 불법의 바다로 그를 인도하는 것이다.
애어섭이란 부드럽고 따뜻한 말을 말한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는 그 사람에게 더없이 큰 용기가 된다. 그래서 보살은 언제나 상냥하고 인정이 넘치는 말로서 사람을 대하고 그렇게 믿음을 얻어 마침내 불법의 바다로 그를 인도하는 것이다.
③ 이행섭(利行攝)
이행섭이란 바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신체행 동, 언어행동, 정신행동이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삽업(三業)이 모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이행섭이다. 아무리 따뜻한 말을 하고 상냥한 표정을 짓더라도 마음으로 나쁜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며 상대방도 그것을 근방 알아차릴 것이다. 행동과 말과 뜻이 모두 진심으로 중생을 이롭게 할 때 믿음을 얻을 것이며 그 믿음을 바탕으로 불법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행섭이란 바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신체행 동, 언어행동, 정신행동이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삽업(三業)이 모두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이행섭이다. 아무리 따뜻한 말을 하고 상냥한 표정을 짓더라도 마음으로 나쁜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것이며 상대방도 그것을 근방 알아차릴 것이다. 행동과 말과 뜻이 모두 진심으로 중생을 이롭게 할 때 믿음을 얻을 것이며 그 믿음을 바탕으로 불법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④ 동사섭(同事攝)
동사섭이란 중생과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통받는 중생을 보 면 함께 그 고통을 아파 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함께 그 어려움을 감당해 주는 것이 동사섭이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위한 '한끼 굶기운동'같은 것은 대표적인 불교의 동사섭 운동이다. 동사섭을 행함으로써 상대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고 생각이 같아지며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도솔천에 계시던 부처님이 고해의 중생계에 내려오심은 바로 중생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동사섭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동사섭이란 중생과 함께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고통받는 중생을 보 면 함께 그 고통을 아파 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면 함께 그 어려움을 감당해 주는 것이 동사섭이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위한 '한끼 굶기운동'같은 것은 대표적인 불교의 동사섭 운동이다. 동사섭을 행함으로써 상대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고 생각이 같아지며 그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도솔천에 계시던 부처님이 고해의 중생계에 내려오심은 바로 중생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고 그리고 어떻게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동사섭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보살은 바로 이러한 사섭법의 방법으로 중생을 위로하고 불법으로 인도한다. 불교를 믿는 것은 단순히 절대신 앞에 복을 비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는 바로 스스로의 실천을 통해서 선업을 쌓는 것이며 보살도를 행함으로써 깨달음(菩提)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불법을 포교하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10. 부처님의 열가지 이름 - 여래십호(如來十號)
십호(十號)란 말 그대로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이름은 부처님에게 갖추어진 공덕상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각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여래(如來)
범어로 'tathagata'를 의역한 말로 한역 경전에서는 '多陀阿伽陀'·'多陀阿伽度'로 음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범어 tatha+gata가 합성된 말인데 '모든 부처님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그 와 같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즉 우연이나 기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여실 (如實)한 진리를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보여주시는 분'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2. 응공(應供)
응공은 범어 'arhat'를 의역한 말인데 한역 경전에서는 '阿羅伽'로 음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 의 뜻은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과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 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해석해 보면 참다운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공양을 받 을만 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공양 받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늘 깨달 음을 위해서 정진하시는 것입니다.
3. 정변지(正遍知)
범어 'samyaksambuddha'를 의역한 것으로 한역으로는 '三耶三佛檀'이라고 음역합니다. 그러 나 일반적으로 등정각(等正覺)·정등각(正等覺)·등각(等覺)·정각(正覺)이라고 의역하고 있 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부처님은 일체의 모든 지혜를 두루 갖추셨기 때문에 세계와 우주의 모든 물질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4. 명행족(明行足)
범어 'vidyacarana-sampanna'를 의역한 것인데 한역으로는 '碑多庶羅那三般若'이라고 음역 하고 있습니다. 『열반경』에 의하면, '명(明)'이란 '더 없이 높은(無上)', '바르고 두루 아는 것(正遍知)'을 의미하며, '행족(行足)'은 '각족(脚足)'이란 의미로 계·정·혜 삼학(三學)을 가 리킨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은 계정혜 삼학을 두루 구족하여 무상정변지를 얻었으 므로 명행족이라 합니다. 명행족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天眼通, 宿命通, 漏盡通의 삼명(三明)을 밝게 아는 지혜와 신체, 언어, 행동 등이 다 함께 완전한 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5. 선서(善逝)
범어 'sugata'.의 의역으로 '修伽陀'·'須伽陀'라고 음역합니다. '잘 갔다'라는 의미인 '호거(好去)', '묘왕(妙往)'이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는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서 열 반의 저 언덕에 잘 가셨으므로 다시는 생사의 바다로 돌아오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6. 세간해(世間解)
범어 'lokavid'의 의역인데 한문으로는 '路迦憊'라고 음역합니다. 이 말의 뜻은 부처님께서는 참다운 깨달음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능히 세간의 모든 일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7. 무상사(無上士)
범어 'anuttara'의 번역으로 부처님은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대사라는 뜻입니다.
8. 조어장부(調御丈夫)
범어 'purusa-damya-sarathi'의 의역인데 한역 경전에서는 '富樓沙曇 娑羅提'라고 음역하기 도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부처님은 대자(大慈)·대비(大悲)·대지(大智)로써 중생을 대하시 며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중생들을 잘 통제하여 올바른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9. 천인사(天人師)
범어 'sasta-devamanusyanam'의 의역으로 한역 경전에서는 '舍多提婆摩沙 '라 음역합니다. 부처님은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10 불세존(佛世尊)
범어 'buddha-lokanatha'을 의역한 것으로 '佛陀路伽那陀'라고 음역합니다. 불(佛)는 지자(知者) 또는 깨달은 사람이라 번역하며, 세존(世尊)은 세상에서 가장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 래서 이 둘을 합친 불세존(佛世尊)은 앞에서 나열한 것처럼 부처님은 아홉 가지의 원만한 덕상을 갖추셨기 때문에 세상이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불(佛)과 세존(世尊)을 따로 떼어서 각각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10호가 아니라 11 호가 됩니다. 이 경우에 대해서 『성실론(成實論)』에서는 '무상사(無上士)'와 '조어장부(調御丈夫)'를 합하여 하나의 이름으로 하고 불(佛)과 세존(世尊)을 따로 하나의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11. 삼명(三明)과 육통(六通)
삼명(三明)이란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자에게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세 가지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인데, 즉 천안명, 숙명명, 누진명을 말합니다. 또 육통은 여섯 가지 신통력을 말하는 것으로 삼명에 세 가지를 더 추가한 것을 말합니다. 삼명이 세계를 보는 세계관이나 또는 지혜의 눈이라는 측면이 강한 반면 육통(六通) 어떤 불가사의한 능력, 부처님이나 아라한에게 갖추어진 자유자재한 권능이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 항목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비롯해서 육도(六道)의 온갖 중생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아는 것이 천안명 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아귀에 빠지고 축생에 떨어지는 육도윤회는 모두 인과윤회의 법칙에 따라 이뤄지는 것입니다. 결국 천안명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과의 올바른 법칙을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안명은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중생의 전현실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모두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중생에게는 그런 눈이 없습니다. 세상은 행복하다거나 물질에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언제나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그 전도된 눈으로 인해 육도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윤회하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다룬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던 날 새벽에 천안명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 쌓여 있음을 여실히 보시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은 천안명을 얻어 중생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신 다음 다시 숙명통을 통해 모든 생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밝게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진명을 얻어서 모든 번뇌를 끊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천안통에서 나온 말이나 개념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통신회사 중에 천리안(千里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불교의 이 천안통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안통의 올바른 이해는 앞의 천안명의 설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세간 일체의 좋고 나쁜 말, 멀고 가까운 말, 또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들의 소리까지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자재한 능력을 말합니다. 중생이 어디서 무슨 소리로 하든 불·보살님은 어디서든 들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동통신회사에서 이 개념을 쓴다면 천리안처럼 이미지에 걸맞는 상표가 되겠지요. 옛날에 외화중에 "소머즈"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그 소머즈가 이 천이통 같은 능력이 있었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천이통이란 단지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라기 보다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발원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천이통은 단순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이해한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수 많은 소리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많은 소리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지만 우리들은 마음의 장벽이 가려놓여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단절되고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천이통에서 단순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듣는다는 그 자체 보다 남의 말을 겸허한 자세로 듣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자세야 말로 참된 천이통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다.
타심통은 또 유심히 봐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선종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법을 전하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그 뜻을 알고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粘花微笑) 같은 것도 결국 타심통이라는 연결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타심통 역시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의도로 그같은 행동을 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호의든 악의든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상대방의 행위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채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이렇다면 타심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남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아량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항목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 삼명(三明)
1. 천안명(天眼明)
거리의 멀고 가깝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世間)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가지가지의 유형(有形)과 색(色)에 대해 밝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천안명은 단순히 거리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보는 생리적 능력이라기 보다 차라리 세계관에 가까운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일체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에 쌓여 있음을 여실하게 보는 것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비롯해서 육도(六道)의 온갖 중생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아는 것이 천안명 입니다. 지옥에 떨어지고, 아귀에 빠지고 축생에 떨어지는 육도윤회는 모두 인과윤회의 법칙에 따라 이뤄지는 것입니다. 결국 천안명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과의 올바른 법칙을 이해하고 있음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천안명은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는 중생의 전현실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모두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합니다. 중생에게는 그런 눈이 없습니다. 세상은 행복하다거나 물질에 집착하거나 부질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언제나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그 전도된 눈으로 인해 육도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윤회하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다룬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던 날 새벽에 천안명을 얻어서 모든 중생이 고통 속에 쌓여 있음을 여실히 보시는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 숙명명(宿命明)
지나간 과거생의 모든 일들을 자유자재롭게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생(前生)의 일을 아는 신통력입니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우리의 전생을 숙세(宿世)라고 합니다. 즉 숙명통은 겹겹이 쌓인 우리 과거 전생의 일을 밝게 보아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들을 다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역시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은 사람들의 전생을 보시고 너는 전생에 어떠어떠했던 누구인데 어떠어떠한 일 때문에 지금 그 과보를 받는다라는 형식의 설법을 하시는데 그처럼 전생 일을 환히 아는 것을 숙명명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숙명명은 연기(緣起)의 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여실히 아는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숙세의 업연은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요. 3. 누진명(漏盡明)
누진명은 이 생에서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는 지혜를 말합니다. 앞에 나열했던 천안명을 통해서 육도 중생의 전현실적인 삶을 관조한 다음 숙명명을 통해서 숙세의 모든 인과관계를 꿰뚫어 보게 되면 오늘의 자기 존재를 모두 알게 됩니다. 즉 인간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자신의 삶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그 이유를 알게 되며, 존재를 둘러싼 고(苦)의 원인을 환하게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다 끊을 수 있습니다. 본생경에 보면 부처님은 천안명을 얻어 중생들의 고통을 꿰뚫어 보신 다음 다시 숙명통을 통해 모든 생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밝게 보시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진명을 얻어서 모든 번뇌를 끊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육통(六通)
삼명(三明)에 세 가지를 더 보탠 것이 육통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삼명이 세계관으로써의 지혜를 말한다면 육통은 부처님에게 갖추어진 하나의 권능, 즉 자유자재한 능력이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육통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천안통(天眼通)
보통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체 세간의 멀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모든 고락의 모양과 가지가지의 유형과 색을 밝히 내다볼 수 있는 자유 자재한 신통력을 말합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능히 볼 수 있는 부처님의 능력이지요. 이는 곧 바로 중생을 향한 자비의 힘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무명으로 고통받는 중생이 어느 곳에 있든 부처님은 능히 그 모습을 보시고 해탈의 가르침을 주시는 능력으로 이해하면 되겠지요. 즉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시는데 필요한 권능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천안통에서 나온 말이나 개념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통신회사 중에 천리안(千里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불교의 이 천안통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안통의 올바른 이해는 앞의 천안명의 설명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2. 천이통(天耳通)
보통 인간의 귀로는 듣지 못할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세간 일체의 좋고 나쁜 말, 멀고 가까운 말, 또 사람이나 사람 아닌 것들의 소리까지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자재한 능력을 말합니다. 중생이 어디서 무슨 소리로 하든 불·보살님은 어디서든 들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동통신회사에서 이 개념을 쓴다면 천리안처럼 이미지에 걸맞는 상표가 되겠지요. 옛날에 외화중에 "소머즈"라는 프로가 있었는데 그 소머즈가 이 천이통 같은 능력이 있었죠.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천이통이란 단지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차원의 것이라기 보다는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발원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천이통은 단순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이해한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매일매일 수 많은 소리와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많은 소리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지만 우리들은 마음의 장벽이 가려놓여 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단절되고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천이통에서 단순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듣는다는 그 자체 보다 남의 말을 겸허한 자세로 듣고 받아 들일 수 있는 자세야 말로 참된 천이통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다.
3.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아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독심술(讀心術)같은 신통력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타심통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때는 룸비니 동산에서 5비구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5비구들은 부처님이 가까이 오셔도 일어서서 경배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막상 그들에게 다가서자 그들은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오는 등 성자를 맞이하는 예를 다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대들은 나를 아는채도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죠. 그들의 마음을 다 이미 알고 계셨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타심통은 또 유심히 봐야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선종에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이 법을 전하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그 뜻을 알고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粘花微笑) 같은 것도 결국 타심통이라는 연결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타심통 역시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의도로 그같은 행동을 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호의든 악의든 말입니다. 우리들은 그 상대방의 행위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채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이렇다면 타심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 남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아량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숙명통(宿命通)
모든 생명이 지나온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전생의 일을 볼 수 있는 신통력인데 앞에서 설명한 숙명명의 설명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숙명통은 신통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과거 1세의 일만 알기도 하고 , 2세 또는 3세 더 나아가 천만세를 아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5. 신족통(神足通)
다른 말로 여의통(如意通)이라고 합니다. 이 신통력은 크고 작은 몸을 나타내서 자기 생각대로 자유자재하게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중국 무협소설에 나오는 축지법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즘 어린이 프로그램 지오 레인저에 나오는 공간이동과 같은 개념이겠지요. 6. 누진통(漏盡通)
누진통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밝게 알아서 인간의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인과관계를 모두 알게 되는 신통력을 말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앞의 누진명을 참고하십시오. 12. 부처님의 십대제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이후 사라쌍수 아래서의 입멸에 이르기까지 그 제 자는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열 명의 고명한 제자가 있었으니 이를 석 가십대제자, 석가십성, 혹은 십대제자라고 한다. 이들 십대제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 어 교단을 다스리고 각지를 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등 불교 교단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어느날 목건련 존자가 천안통으로 지옥을 보니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고통받고 있 는 모습을 발견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목건련 존자는 바로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어머니 를 구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서 어머니를 천도했다고 한다. 同 제자품에는 "神足 이 輕擧하여 十方에 飛到함은 대목건련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사리불과 대목건련은 10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上道의 제자였지만 부처님보다 먼저 입 멸하였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의 교단사는 자연 그 다음 서열의 가섭에게 돌아갔다.
마하가섭은 多子神處에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8일 후 바른 지혜를 내어서 자기의 僧迦梨를 벗어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께서 주신 糞掃衣를 받아 입고 곧 아라한과를 증득 했다. 동 제자품에는 "十二頭陀 難得의 行은 대가섭이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의 心印을 전해 받은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오백명의 아라한을 데리 고 칠엽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편찬하는 제 1결집을 했다. 이때 가섭은 모든 대중들을 통솔하는 上首가 되어 결집을 지휘했다.
특히 가섭은 선종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가섭이 세 곳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전해 받았다는 '三處傳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가섭은 禪宗 법맥의 제 1조로 추 앙받고 있다.
우파리 존자는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존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불멸후 제 1회 결집 때에 우파리 존자가 律을 외워 냄으로써 律藏을 결집하게 됐다.
이밖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간청하 여 허락을 얻어냈다. 이것은 여성의 출가를 가능토록 한 일이었다.
1.사리불(Sariputra)
智慧第一. 舍利弗多, 舍利子라고 하며 영 취로자(鷲鷺子), 身子 등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족 출신으로 육사외도의 한 사람인 산자야를 섬기어 7일만에 그의 敎旨를 통달할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사리불은 산자야의 신뢰를 받았으며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 250 인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苦를 끊지 못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성취하 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그의 스승이 죽자 불제자 阿設示를 만나 諸法無我의 이치를 깨닫 고 목건련과 함께 제자들을 데리고 佛門에 들어왔다. {증일아함경} 권3 제자품에는 "지혜 가 무궁하여 모든 의혹을 푸는 데에는 바로 사리불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 처님이 입멸하기 전 목건련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사리불도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자 기 고향인 나알라다 촌으로 가서 바로 입멸하였다고 한다.
2. 마하목건련(Mahamaudgalyayana)
神通第一. 마가다국 왕사성 밖의 콜리타촌 사람으로 바라문족 출신이다. 사리불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죽림원에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가장 뛰어났던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였다. 어느날 목건련 존자가 천안통으로 지옥을 보니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고통받고 있 는 모습을 발견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목건련 존자는 바로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어머니 를 구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서 어머니를 천도했다고 한다. 同 제자품에는 "神足 이 輕擧하여 十方에 飛到함은 대목건련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사리불과 대목건련은 10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上道의 제자였지만 부처님보다 먼저 입 멸하였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의 교단사는 자연 그 다음 서열의 가섭에게 돌아갔다.
3. 마하가섭(Mahakasyapa)
頭陀第一. 대가섭 또는 그냥 가섭, 迦葉波라고도 하며 大飮光, 大龜라고 번역한다. 少欲知足하여 항상 頭陀行을 하였다. 가섭은 부인과 함께 출가하였다고 한다. 마하가섭은 多子神處에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8일 후 바른 지혜를 내어서 자기의 僧迦梨를 벗어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께서 주신 糞掃衣를 받아 입고 곧 아라한과를 증득 했다. 동 제자품에는 "十二頭陀 難得의 行은 대가섭이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의 心印을 전해 받은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오백명의 아라한을 데리 고 칠엽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편찬하는 제 1결집을 했다. 이때 가섭은 모든 대중들을 통솔하는 上首가 되어 결집을 지휘했다.
특히 가섭은 선종에서 크게 존경받고 있는데 그것은 가섭이 세 곳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마음을 전해 받았다는 '三處傳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가섭은 禪宗 법맥의 제 1조로 추 앙받고 있다.
4. 아나율(Aniruddha)
天眼第一. 阿尼樓陀라고 하며 無滅, 如意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의 從弟로써 아난, 난 타와 더불어 출가하였다. 사위국을 지나는 길에 어느 과부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과 부는 그를 보고 淫意를 일으킴에 부처님께서 그의 非法을 훈계하였으니 이것이 婦人同宿戒 가 정해진 동기라고 한다. 후에 부처님 앞에 앉아 졸다가 부처님에게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아나율은 그후 밤낮으로 자지 않고 수도 정진하다가 그만 눈이 멀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참 지혜의 눈인 天眼通을 얻었다고 한다.
5. 수보리(Subhuti)
解空第一. 須淨提, 須扶提라고도 하며 善, 善實 등으로 번역한다. 사위국 바라문족 출신 이다. 수보리 존자는 지혜가 총명하여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에는 성품이 악하여 모든 것에 성을 잘 냈다고 한다. 수보리는 부모친족이 자신을 싫어하 자 집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갔고 여기서 선인을 만나 부처님께 인도되어 불법에 귀의 했 다. 동 제자품에는 " 항상 空定을 즐기고 空의 이치를 분별하는 것은 수보리 비구가 제일 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공사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반야부 경전에는 항상 수보 리가 등장한다.
6. 부루나(Purnamaitrayani)
說法第一.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의 약칭이며 滿願子, 滿慈子 등으로 번역 한다. 바라문족 출신으로 생년월일이 부처님과 같다고 한다. 동 제자품에는 "능히 법을 廣說하여 의리를 분별하는 것은 만원자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는 수로나국 의 사람들이 포악하다는 말을 듣고 부처님의 허락을 얻어 그곳에 가서 오 백명의 우바새 들에게 설법해서 그들을 교화 했다고 한다. 가장 난폭한 수로나국 사람들 마저도 교화할 만큼 부루나 존자의 언변과 설법은 감동적이고 훌륭했다고 한다. 부루나 존자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귀의한 수로나국 사람들은 오 백개의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7. 마하가전연(Mahakatyana)
論議第一. 迦 延子라고도 한다. 서인도 아반티국의 왕족계급 출신으로 국왕의 명을 받 아 부처님을 영접하러 갔다가 불법을 듣고 출가하였다. 그는 불법에 귀의한 뒤 뛰어난 언 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음으로써 논의제일이라고 칭송받았다. 부처님 당시는 수많은 종교 사상이 군웅할거 하던 시대였으므로 포교를 하기 위해서는 논리 정연한 설법을 통해서 상대방의 생각이 틀렸음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경 전 곳곳에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다른 종교인들과 토론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 다. 가전연 존자는 바로 이들 외도와의 교리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었으며 뛰어난 말솜씨 로 널리 불법을 폈다고 전한다.
8. 우파리(Upali)
持戒第一. 優婆離, 優婆梨라고도 하는데 近取 또는 近執이라 번역한다. 수타라족 출신으 로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는 싯달타 태자의 이발사였다. 아난, 난타 등 석가족 출신의 남자들이 출가했을 때 그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으나 천민이라는 이유로 함께 출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의 출가를 허락하시고 세속에 있을 때에는 지위의 고하와 종성의 차별이 있지만 일단 불문에 들어오면 차별 없이 평등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들은 대부분이 바라문족이거나 왕족계급이었는데 우파리 존자만 유 일하게 노예계급 출신이다. 그러나 우파리 존자는 바로 부처님의 교단이 계급과 종성에 평등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노예계급 출신이 종교지도 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교단에서 계급 평등을 실현하셨다. 우파리 존자가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우파리 존자는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존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불멸후 제 1회 결집 때에 우파리 존자가 律을 외워 냄으로써 律藏을 결집하게 됐다.
9. 라후라(Rahula)
密行第一. 라훌라 존자는 부처님의 친아들이다. 그는 15세 때 부처님이 카필라국으로 설법하러 가셨을 때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다. 라후라 존자는 사리불을 화상으로 목건련을 아사리로 삼아 출가함으로써 최초의 사미가 되었다. 동 제자품에는 "禁戒를 깨뜨리지 않 고 誦讀을 나태하게 하지 않음은 라후라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10. 아난다(Ananda)
多聞第一. 阿難이라고도 하며 歡喜, 無染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의 종제이기도 한 아 난 존자는 늘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부처님의 설 법을 가장 많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아난 존자는 제 1회 결집 때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외워 냄으로써 경전을 결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경전에는 "내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뜻으로 "如是我聞"이란 문 구가 붙게 된 것이다. 이밖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출가할 수 있도록 부처님께 간청하 여 허락을 얻어냈다. 이것은 여성의 출가를 가능토록 한 일이었다.
13. 화합의 공동체 승가(僧家, Samgha)
1. 승가의 뜻
僧家는 범어 Samgha의 음역으로 줄여서 僧이라고만 하기도 하는데 그 것은 개개인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여럿이 모인 단체를 의미하는 말이기에 衆이라고 번역한다. 衆은 衆 이되 그저 모인 단체가 아니라 부처님과 法을 섬기며 올바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和合된 단체이므로 和合衆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唐의 道宣이 지은 {사분율책계보궐행사초}에 의하면 三人이하는 單那(gana)라 부르고 四人 이상이라야 僧家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승가를 인원수에 따라 ① 四人이상 ② 五人 이상 ③ 十人이상 ④ 十二人 이상 ⑤ 二十人 이상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이 러한 승가는 화합이 그 전제 조건이므로 理和와 事和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理和란 서로 탁마하여 진리를 함께 증득 한다는 뜻이요 事和란 곧 六和敬行을 말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권3에는 승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唐의 道宣이 지은 {사분율책계보궐행사초}에 의하면 三人이하는 單那(gana)라 부르고 四人 이상이라야 僧家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승가를 인원수에 따라 ① 四人이상 ② 五人 이상 ③ 十人이상 ④ 十二人 이상 ⑤ 二十人 이상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이 러한 승가는 화합이 그 전제 조건이므로 理和와 事和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理和란 서로 탁마하여 진리를 함께 증득 한다는 뜻이요 事和란 곧 六和敬行을 말하는 것이다. {大智度論} 권3에는 승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어떤 것을 승가라 하는가? … 비유하면 큰 나무가 무더기로 모여 선 것을 숲이라 이 름함과 같나니 낱낱이 서 있는 나무는 숲이라고 하지 않으나 낱낱의 나무를 제하면 또한 숲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낱낱의 비구를 제하고는 또한 승이 없나니 모든 비구가 화합하 므로 승이란 이름이 생기느니라." {대지도론}
그런데 현재 우리 나라에선 승이라 하면 비구나 비구니의 한 사람을 두고도 승 또는 승려라 부르고 있지만 원 뜻으로 보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렇게 통용되고 있 으며 우리말로는 스님이라고 한다.
2. 승가의 기원
승가의 기원을 찾는다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5비구를 제도하여 그들이 부처님의 제자로 출가한데서 부터 시작된다. 물론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은 그 전에도 있었다. {사분률}에 의하면 ① 바라문으로서의 최초의 귀의자는 부처님께서 우루벨라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받고 계실 적에 7일간의 定에서 일어나 걸식 을 나가심에 부처님께 밥을 공양하고 귀의한 어느 바라문이요, ② 남자로서의 최초의 귀 의자는 부처님께서 7일간의 定에서 일어나셨을 때 초밀을 공양하고 귀의 한 과(瓜)라는 사람과 우바리라는 두 상인이었고, ③ 여인으로서 최초의 귀의자는 역시 우루벨라에서 부 처님께 밥을 공양한 바라문의 아내인 소사라 대장장이의 딸이었으며 ④ 동남 동녀로서 최초의 귀의자는 우루벨라의 어느 바라문의 아들, 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가 한결 같다.
"우리들은 이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나이다"(사분율 권 31)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들을 승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佛과 法에 귀의 했을지언정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어떤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거나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엇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5비구의 제도 출가와 더불어 "이 다섯 사람은 부처님께 경례하고 부 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했다. 그 때에 부처님은 그들의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 히며 사문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승가의 처음이었다."(인과경 권3)라고 한 것처럼 비로소 처음으로 그 제자들에 대해서 승가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각기 떨어져 있으 면서 공양이나 올린 제자들이 아니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제자로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함께 뭉쳐 있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승가를 제 일 처음 구성한 것은 교진여 등 5비구로서 출가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승가가 탄생하므로 교단에는 곧 佛·法·僧 三寶가 다 갖추어지게 된 것이 니 삼보에의 귀의는 이 직후부터 지금까지 불자가 되는 첫째 필수요건으로 내려오고 있 는 것이다.
{律藏大品}에 의하면 최초로 삼보에 귀의를 표명한 사람은 베나레스 교외에 사는 장자 였다. 그는 부처님께서 5비구를 제자로 삼은 직후 부처님께 찾아와 설법을 듣고 여섯 번 째의 제자로 출가한 야사의 친아버지로 아들의 출가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왔다가 부 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신도 재가의 제자가 되고자 다음과 같이 부처님 앞에서 귀의를 표 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저는 이제 세존과 그 가르침과 그 비구 衆에 귀의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 로 받아 주옵소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후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곧 출가 수계의 중요한 의식으로 채택되었다. {대품수계품} 에는 그 경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야사가 출가한 후 곧 이어 야사의 친구 등 여러 사람이 찾아와 출가하여 제자가 60여 명이 됐을 때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각지로 전도하도록 떠나 보내고 자기도 우루벨라의 장군촌으로 가 전도하신 적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부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각지에선 출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부처님이 안 계신 곳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출가를 하기 위해서 비구와 동행 하여 석존이 계신 곳까지 머나먼 길을 오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비 구도 출가 희망자도 피로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돌아가야 할 머나먼 길이 비구에게는 남아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들의 전도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깊은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이 단안을 내리셨다.
"우리들은 이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나이다"(사분율 권 31)라고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들을 승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佛과 法에 귀의 했을지언정 부처님을 중심으로 한 어떤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거나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엇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5비구의 제도 출가와 더불어 "이 다섯 사람은 부처님께 경례하고 부 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도하기를 청했다. 그 때에 부처님은 그들의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 히며 사문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승가의 처음이었다."(인과경 권3)라고 한 것처럼 비로소 처음으로 그 제자들에 대해서 승가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각기 떨어져 있으 면서 공양이나 올린 제자들이 아니었으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제자로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함께 뭉쳐 있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승가를 제 일 처음 구성한 것은 교진여 등 5비구로서 출가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승가가 탄생하므로 교단에는 곧 佛·法·僧 三寶가 다 갖추어지게 된 것이 니 삼보에의 귀의는 이 직후부터 지금까지 불자가 되는 첫째 필수요건으로 내려오고 있 는 것이다.
{律藏大品}에 의하면 최초로 삼보에 귀의를 표명한 사람은 베나레스 교외에 사는 장자 였다. 그는 부처님께서 5비구를 제자로 삼은 직후 부처님께 찾아와 설법을 듣고 여섯 번 째의 제자로 출가한 야사의 친아버지로 아들의 출가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왔다가 부 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신도 재가의 제자가 되고자 다음과 같이 부처님 앞에서 귀의를 표 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저는 이제 세존과 그 가르침과 그 비구 衆에 귀의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 로 받아 주옵소서. 오늘부터 시작하여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후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곧 출가 수계의 중요한 의식으로 채택되었다. {대품수계품} 에는 그 경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야사가 출가한 후 곧 이어 야사의 친구 등 여러 사람이 찾아와 출가하여 제자가 60여 명이 됐을 때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각지로 전도하도록 떠나 보내고 자기도 우루벨라의 장군촌으로 가 전도하신 적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부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전도하게 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물론 각지에선 출가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문제는 부처님이 안 계신 곳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출가를 하기 위해서 비구와 동행 하여 석존이 계신 곳까지 머나먼 길을 오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비 구도 출가 희망자도 피로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돌아가야 할 머나먼 길이 비구에게는 남아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들의 전도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깊은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이 단안을 내리셨다.
"비구들아, 지금부터 그대들은 각 지방 각 나라에서 사람들의 출가 수계를 행하라. 나 는 이를 허가한다. 그러나 비구들아, 이렇게 출가시키고 수계하라. 먼저 수염과 머리를 깎 고 가사를 입혀라. 울다라(上衣)를 한 어깨에 덮어 입고 모든 비구들의 발에 예배 합장하 고 꿇어앉아 '불타에게 귀의합니다. 달마에게 귀의합니다. 승가에게 귀의합니다' 이렇게 세 번 하도록 하라. 비구들아, 이러한 삼귀의에 의하여 출가 수계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렇게 하여 승가는 성립되고 佛·法과 더불어 삼보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겨지게 됐다. 처음에 비구만으로 성립되었던 승가는 그후 재가인의 제자도 늘어나고 석존의 이모 겸 양모인 마하파자파티를 선두로 야소다라 등 많은 여인이 출가함에 따라 비구니도 생겨 났다. 이렇게 해서 승가의 구성요소는 비구에서 四衆 七衆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3. 승가의 구성
승가의 구성은 현재 四衆과 七衆의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四衆이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그것이며 七衆이란 四衆에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니를 더한 것이다. 여 기서 우바새 우바이는 재가불자를 말하며 나머지 五衆은 출가불자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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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比丘(Bhiksu)
- : 출가 수행하는 20세 이상의 남자 불자를 말한다. 흔히 乞士라고 번 역하는데 출가한 비구는 위로는 부처님께 법을 빌어 지혜를 기르고 아래로는 일반인에게 음식을 빌어 몸을 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걸식생활은 불교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 니고 이미 불교 이전에 있어 왔던 바라문교를 위시한 출가 수행자들의 생활풍습이었다. 이외에도 비구는 魔王 및 그 권속들을 두렵게 한다는 뜻에서 怖魔, 戒·定·慧 三學을 닦 아서 모든 악을 없앤다는 뜻에서 破惡, 그들이 지키는 戒行은 능히 좋은 福田이 되어 인 과의 흉년을 없앤다는 뜻에서 除饉, 또는 계행을 부지런히 닦는다는 의미에서 勤事男이라 고도 한다. 이들 비구들은 모두 250계의 구족계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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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比丘尼(Bhiksuni)
- : 출가 수행하는 20세 이상의 여자 佛子를 말한다. 비구에서와 같 은 뜻으로 乞士女 또는 勤事女라 번역하기도 한다. 이들은 남자보다 업장이 두텁다고 하 여 348계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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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優婆塞(Upasaka)
- : 삼보를 친근히 하고 받들어 섬기는 재가인 남자 불자를 말하며 이런 뜻에서 近事男이라 번역하기도 하고 또는 近善男, 近宿男, 淸信士라 하기도 한다. 이 들은 삼보에 귀의함은 물론 오계와 팔제계를 받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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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優婆夷(Upasika)
- : 삼보를 친근히 하고 받들어 섬기는 재가인 여자 불자를 말하며 이런 뜻에서 近事女라 번역하기도 하고 또는 近善女 淸信女라 하기도 한다. 이들도 우바 새와 마찬가지로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지켜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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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彌(Sramanera)
- : 息慈, 息惡, 行慈, 勤策男 등으로 번역하는데 출가 수행하는 20세 미만의 남자 불자로 비구가 되기 전의 스님을 말한다. 사미계 혹은 勤策律儀라고 하는 십 계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사미엔 나이에 따라 세 가지의 구별을 둔다. 첫째 구조사미(驅鳥沙彌)란 7세에서 13세까지로 절에서 음식을 보고 날아드는 까마귀나 쫓고 파리나 날린 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둘째로 명자사미(名子沙彌)로 구족계를 받지 못하여 사미 이기는 하지만 훌륭한 비구가 될 나이이므로 이렇게 부른다. 셋째는 응법사미(應法沙彌) 로 바르게 사미로서 수행할 수 있는 14세에서 19세까지의 사미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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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沙彌尼(Sramanerika)
- : 勤策女라고 번역하는데 출가 수행하는 18세 미만의 여자 불 자를 말하는 것이다. 비구니가 되기 전 단계로 역시 사미와 같이 십계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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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式叉摩那(Siksamana)
- : 學法女, 學戒女, 正學女 등으로 번역하는데 비구니가 되기 위한 전 단계로 18세 이상 20세 미만의 출가한 여자 불자이다. 이 기간 동안 貪, 瞋, 痴, 慢의 四根本과 六法을 수련시켜 비구니가 될 수 있는가를 시험한다. 이상이 승가의 구성 요소인 七衆이다. 이 가운데 우바새 우바이는 재가인이며 나머지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는 출가인으로서 出家五衆 또는 그냥 五衆이라고 한다.
14. 돈 없이 베푸는 일곱가지 (無財七施)
보시(布施)란 남에게 무엇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보시에는 흔히 세 가지 형태의 보시가 있습니다. 《대지도론》 제 14에 보면 보시의 유형으로 법시(法施)·재시(財施)·무외시(無畏施)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법시란 진리를 모르고 무명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보시의 개념으로 물질적인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외시는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불안이나 공포를 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시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엇을 베푼다고 할 때 거기에는 당연히 어떤 물질적인 것이 상정됩니다. 특히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시하면 당연히 돈이나 물질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지요.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질을 가지지 않고도 7가지의 보시를 베풀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재물을 갖지 않고 베푸는 일곱 가지 보시'라는 뜻의 무재칠시(無財七施)입니다.
1. 안시(眼施)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보시가 됩니다. 요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기고 극복해야할 경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첫눈에 강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날카롭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상대를 대합니다. 이런 눈빛은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심어주며 마음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럴 때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2.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
자비롭고 미소 띤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도 안시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흔히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고 늘 싸우는 표정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성난 표정, 그리고 무심한 표정은 사회를 삭막하게 하고 서로간에 말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얼굴에 화기애애하고 기쁨으로 가득찬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소중한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3. 언사시(言辭施)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속담도 있잖아요. 우리는 늘 험악한 말들을 쉽게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인터넷 게시판이나 대화방 같은 곳에 가보면 정말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이렇게 험악한 말이나 가시돗힌 말은 자칫 상대방과 언쟁을 일으키고 분쟁에 휘말리게 합니다.
언사시는 삼업(三業) 가운데 구업(口業)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열가지 업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첫 구가 바로 우리의 구업을 깨끗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언사시는 삼업(三業) 가운데 구업(口業)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짓는 열가지 업 가운데 입으로 짓는 업이 무려 네개나 된다는 점을 상기해 봐도 우리의 언어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에서도 첫 구가 바로 우리의 구업을 깨끗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친절하며 예의바른 말 한 마디, 그것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를 대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한 보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4. 신시(身施)
예의 바르게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신업(身業)에 해당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공손한 자세로 반갑게 인사하고, 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할 줄 알고, 몸으로 남을 돕는 이런 행위들이 바로 몸으로 베푸는 보시행입니다. 이렇게 공손하고 예의바른 몸가짐은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주는 보시행입니다.
5. 심시(心施)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삼업 가운데 심업(心業)에 해당합니다. 마음 가짐을 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대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 결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사람를 대하는 것도 하나의 소중한 보시행입니다.
6. 상좌시(床座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 같은 때 얼마나 필요한 보시인지 모릅니다. 전철을 타거나 버스를 탓을 때 젊은이들이 노약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자는 척 하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노약자에게 또는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양보하는 것도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행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방사시(房舍施)
사람을 방에 재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요즘같이 부동산을 재산의 중요한 목록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엄격히 말해서 무재시라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집에 사람을 재워 준다고 했을 때 돈 드는 일이 아니므로 무외시로 분류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옛날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밤길을 가다가 남의 집에 하룻밤 묵어가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은 어려운 시절이라면 이것도 크고 아름다운 보시행이겠지요.
이상이 물질을 가지 않고도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행입니다.
어쩌면 요즘 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있어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쩌면 요즘 처럼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이같이 무재칠시가 오히려 더 의미있는 보시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를 아름답고 정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있어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15. 육사외도(六師外道)
부처님께서 탄생하셨던 기원전 5, 6세기의 인도 종교 철학계는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버금갈 만큼 다양한 종교와 철학사상이 풍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말은 뒤집어 해석한다면 그때까지 유일한 종교이며 철학으로써 인도사회를 지배해왔던 전통 브라만교의 권위가 무너지고 새롭고 다양하며 혁신적인 종교와 철학사상이 등장했다는 뜻입니다.
이 시기 이전까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인 전통 브라만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성전인 베다(Veda)는 하늘(梵天)의 계시에 의해 씌어졌다는 베타 천계주의, 또 신(梵天)과 인간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Brahman)계급이 최고라는 브라만 중심주의, 다음으로 신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된다는 제사만능주의가 그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종교 사상과 전통들에 의해 아리안 족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며 인도사회를 지탱해 왔지만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던 기원전 5, 6세기에 접어들면 이런 전통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새롭고 혁신적인 종교 철학사상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신흥 종교사상가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브라만교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철학 사조를 이루었던 이들 사상가의 출신 계급또한 기존의 제사장 계급중심에서 탈피해서 무사계급, 평민, 심지어 노예계급까지 등장해서 자유로운 사상을 펼쳤습니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인간과 세계 만류는 브라만으로부터 나왔다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한 반면 이들 혁신 사문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취합하여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성립됐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창했습니다. 또 기존의 브라만교가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천착한 반면 이들 사문들은 현실생활 속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으려는 형이하학에 더욱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브라만교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서 자유로운 사상들을 펼쳤습니다. 이들의 이같은 활약으로 인해 오랫동안 인도사회를 지배해 왔던 브라만적 전통이 쇠약해지고 그에 따라서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보다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토양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의 이런 종교사상가들을 사문(沙門, Sramana)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정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런 다양한 종교 사상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62見이라고 분류되는 사상가들이며 이들을 더 압축해서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하는 종교가들입니다. 즉 여섯 명의 이교도(異敎徒)라는 뜻인데 이 명칭은 불교에서 이들을 경계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들 육사외도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사문들의 새로운 사상과 활동은 기존의 브라만적 전통을 극복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을 펼 수 있는 자유로운 사상풍토를 만드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도적 부정론 같은 주장을 편다거나 극단적인 유물론 등을 펴서 나쁜 영향을 끼친 것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에 보면 외도(外道)의 잘못된 견해에 따르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열하는 것은 육사외도에 대한 간단한 각론입니다.
이 시기 이전까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인 전통 브라만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성전인 베다(Veda)는 하늘(梵天)의 계시에 의해 씌어졌다는 베타 천계주의, 또 신(梵天)과 인간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Brahman)계급이 최고라는 브라만 중심주의, 다음으로 신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된다는 제사만능주의가 그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종교 사상과 전통들에 의해 아리안 족들이 원주민들을 지배하며 인도사회를 지탱해 왔지만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던 기원전 5, 6세기에 접어들면 이런 전통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과 더불어 새롭고 혁신적인 종교 철학사상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 신흥 종교사상가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브라만교의 권위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철학 사조를 이루었던 이들 사상가의 출신 계급또한 기존의 제사장 계급중심에서 탈피해서 무사계급, 평민, 심지어 노예계급까지 등장해서 자유로운 사상을 펼쳤습니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는 인간과 세계 만류는 브라만으로부터 나왔다는 전변설(轉變說)을 주장한 반면 이들 혁신 사문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물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그러한 요소들이 취합하여 자연과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성립됐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창했습니다. 또 기존의 브라만교가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천착한 반면 이들 사문들은 현실생활 속에서 인생의 의의를 찾으려는 형이하학에 더욱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브라만교의 전통과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서 자유로운 사상들을 펼쳤습니다. 이들의 이같은 활약으로 인해 오랫동안 인도사회를 지배해 왔던 브라만적 전통이 쇠약해지고 그에 따라서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보다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토양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당시의 이런 종교사상가들을 사문(沙門, Sramana)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정진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런 다양한 종교 사상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62見이라고 분류되는 사상가들이며 이들을 더 압축해서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하는 종교가들입니다. 즉 여섯 명의 이교도(異敎徒)라는 뜻인데 이 명칭은 불교에서 이들을 경계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이들 육사외도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들 사문들의 새로운 사상과 활동은 기존의 브라만적 전통을 극복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을 펼 수 있는 자유로운 사상풍토를 만드는데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도적 부정론 같은 주장을 편다거나 극단적인 유물론 등을 펴서 나쁜 영향을 끼친 것도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경전에 보면 외도(外道)의 잘못된 견해에 따르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열하는 것은 육사외도에 대한 간단한 각론입니다.
육사외도(六師外道)
1. 푸라나 카삿파(Purana kassapa)
푸라나 카삿파의 사상은 한마디로 도덕 부정론입니다. 노예출신이기도 한 푸라나 카삿파는 부처님과도 관련이 있는데, 그가 부처님과 신통력을 겨루어서 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은 선악(善惡)의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멋대로 정의한 것이며 실제로 선악(善惡)이란 없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사음 등의 악행(惡行)을 저질러도 그것이 인간들이 임의로 정의한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악행(惡行)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보시와 방생 같은 선행(善行)을 행한다 해도 역시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낳은 것이지 절대적인 선행(善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견해는 자연히 업(業)이란 없는 것이며 업(業)에 대한 응보(應報)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해서 정통적인 종교에서 인정한 업보(業報)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흉화복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푸라나는 그것이 인과(因果)나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선악(善惡)의 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멋대로 정의한 것이며 실제로 선악(善惡)이란 없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사음 등의 악행(惡行)을 저질러도 그것이 인간들이 임의로 정의한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악행(惡行)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대로 보시와 방생 같은 선행(善行)을 행한다 해도 역시 그것은 인간의 관념이 낳은 것이지 절대적인 선행(善行)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같은 그의 견해는 자연히 업(業)이란 없는 것이며 업(業)에 대한 응보(應報)도 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해서 정통적인 종교에서 인정한 업보(業報) 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흉화복은 어떻게 결정될까요? 푸라나는 그것이 인과(因果)나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2.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ayana)
파쿠다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을 일곱 가지의 요소(要素)로 보았습니다.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 고락(苦樂), 생명(生命), 영혼(靈魂)의 7요소로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요소들을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즉 생명(生命)이라는 것도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에 생명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로 인식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이란 문제를 놓고 볼 때 그는 죽이는 자도 없고, 살해되는 자도 없다는 주장을 폅니다. 즉 칼로 인간의 목을 자른다 하더라도 이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곱 가지 요소 사이로 칼이 지나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곱 개의 요소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생명도 영원히 상주하는 하나의 요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
숙명론(宿命論)자인 막칼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명외도(邪命外道)의 개조(開祖)입니다.
아지비카(Ajivika)라는 교단의 교조이기도 한 막칼리는 육사외도 가운데 자이나교와 유사한 교설을 펼쳤는데 교세에 있어서도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 다음가는 유력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설은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 통합되기도 했습니다.
막칼리는 일체의 구성요소로서 12원소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12개의 원소 가운데는 영혼도 포함되는데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원소로 파악했던 극단적인 유물론자입니다.
또 막칼리 고살라는 인간 운명에 대해서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합니다. 생사(生死) 윤회(輪廻)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에는 모두 인과(因果) 업보(業報)에 의한 것으로 보지만 막칼리 고살라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또 어떤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인(無因) 무연(無緣)론을 펼칩니다. 인간의 의지작용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해탈(解脫)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8백 40만 겁을 윤회하는 동안 고(苦)가 저절로 없어져서 스스로 해탈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처럼 막칼리는 인간이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막칼리 고살라는 의지(意志)의 작용을 부정한 최초의 사상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아지비카(Ajivika)라는 교단의 교조이기도 한 막칼리는 육사외도 가운데 자이나교와 유사한 교설을 펼쳤는데 교세에 있어서도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 다음가는 유력한 종교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교설은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 통합되기도 했습니다.
막칼리는 일체의 구성요소로서 12원소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12개의 원소 가운데는 영혼도 포함되는데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원소로 파악했던 극단적인 유물론자입니다.
또 막칼리 고살라는 인간 운명에 대해서 극단적인 결정론을 주장합니다. 생사(生死) 윤회(輪廻)하는 것은 불교의 경우에는 모두 인과(因果) 업보(業報)에 의한 것으로 보지만 막칼리 고살라는 아무런 원인도 없고 또 어떤 결과도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인(無因) 무연(無緣)론을 펼칩니다. 인간의 의지작용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며,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해탈(解脫)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8백 40만 겁을 윤회하는 동안 고(苦)가 저절로 없어져서 스스로 해탈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처럼 막칼리는 인간이 자기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막칼리 고살라는 의지(意志)의 작용을 부정한 최초의 사상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4.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아지타는 단멸(斷滅)론자이자 유물론(唯物論)자입니다. 불교와 같이 물질적 구성의 최소 단위를 지, 수, 화, 풍(地水火風)의 사대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 사대(四大)만이 참된 실재이며 독립 상주(常住)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삶은 지수화풍의 사대원소가 결합한 것이며 죽음이라는 것은 이 사대원소가 각기 자기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므로 무(無)로 돌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즉 사후(死後) 세계나 영혼 같은 것은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윤회(輪廻)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선악(善惡)에 대한 과보(果報)도 없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도덕은 부정되는 것이겠지요. 이 현세의 삶이 최초이자 최후이므로 인간은 그저 즐기고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자이자 철저한 유물론자였습니다. 이러한 철학 사조를 인도철학에서는 순세파(順世派, Carvaka)라고 합니다.
5.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
산자야는 인식의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편 회의론(懷疑論)자입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대표적인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자야는 인도 철학사 가운데 최초의 회의론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후의 존재나 선악(善惡)의 과보(果報)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대답을 회피했는데 그의 이런 논법을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논의'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확정적인 지식을 주지 않으므로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철학사상 처음으로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어떤 일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판단중지(epokhe)의 사상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산자야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산자야의 문하에는 두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부처님의 10 대제자 가운데 사리불과 목건련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산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그만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두 제자는 불교 교단으로 들어와서 10대 제자로 활동하며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의 대표적인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산자야는 인도 철학사 가운데 최초의 회의론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사후의 존재나 선악(善惡)의 과보(果報)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대답을 회피했는데 그의 이런 논법을 '뱀장어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논의'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확정적인 지식을 주지 않으므로 그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철학사상 처음으로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 어떤 일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판단중지(epokhe)의 사상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산자야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산자야의 문하에는 두 명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부처님의 10 대제자 가운데 사리불과 목건련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250명의 제자들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했습니다. 산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그만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두 제자는 불교 교단으로 들어와서 10대 제자로 활동하며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6.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
자이나교의 교주입니다. 자이나교는 당시 불교와 함께 흥성했던 종교입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위대한 영웅'이라는 뜻의 마하비라(Mahavira)로 불려졌으며 자이나교의 교주로서 자이나교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相對主義)적 인식론(認識論)을 수립하고 여기에 입각해서 이원적(二元的) 우주론을 제시했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되어서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영혼인 지바를 끈적끈적한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극심한 고행이 행해졌습니다. 심지어 고행을 하다가 죽게되면 성자로까지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과 같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는 한편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살생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농사마저 짓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작은 곤충들을 죽이기도하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실제로 이들로 인해서 인도의 상업이 발달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다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흰옷을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자이나교는 아직까지 인도에 신봉자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불교와 함께 크게 흥성했던 종교입니다.
이상이 육사외도 각각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불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상가들인데 아마 서로 교리논쟁을 하고 경쟁하면서 더욱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불교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되어서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순결한 영혼인 지바를 끈적끈적한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행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극심한 고행이 행해졌습니다. 심지어 고행을 하다가 죽게되면 성자로까지 추앙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과 같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는 한편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살생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농사마저 짓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작은 곤충들을 죽이기도하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실제로 이들로 인해서 인도의 상업이 발달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다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흰옷을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 자이나교는 아직까지 인도에 신봉자들이 남아 있을 정도로 불교와 함께 크게 흥성했던 종교입니다.
이상이 육사외도 각각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이들은 모두 불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상가들인데 아마 서로 교리논쟁을 하고 경쟁하면서 더욱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불교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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