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지식인은 없어도 엘리트는 즐비하다.

Private/자기개발 · 2009. 11. 30. 10:32
지식인인 없어도 엘리트는 즐비하다
by 주상호 in Schizo Vol.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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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가 등장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인류는 그들의 새로운 자산을 목격해야 했다. 그 이전의 시대에서 철학자가 지식인을 대표했다면 산업혁명 이후 지식인이란 철학자 뿐만 아니라 좀더 양적으로 확장된 개념인 저자를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이 저자들은 대량 생산될 수 있게된 저작 환경 속에 놓인 주체였고 또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 지식인들이 대체로 계몽주의자들을 일컫는 말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철학자가 정치와 과학 사이를 산책하는 자라면 (계몽주의적) 지식인이란 대중(현실의 삶)과 지식사이를 격렬히 연결짓는 자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탁월한 능력으로 사회의 권위적 자리들을 (변절하고) 수직상승하여 사회의 재생산에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한 소위 엘리트도 있겠지만 가난한 인문주의자들에 머무는 경우도 다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풍문으로 저자가 죽었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리고 이곳 인터넷이야 말로 그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는 것을 가장 잘 목격할 수 있는 곳이지 않는가. 누구나 html이라는 형식의 저작을 손쉽게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됨으로써 저자와 독자라는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또한 최소한 지식의 문제는 정보의 문제로 인해 혼잡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진실된 지식을 다루는
지식인'이라는 고전적 범주 역시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모던한 상황속에서도 이 지식인의 범주와 연동된 하나의 범주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바로 엘리트라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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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를 비판하거나 진정한 엘리트 운운하는 것은 무익한 일처럼 보인다. 이들은 애초에 지배계급의 기술자이거나 지식생산자일 것이기 때문이고 진정한 엘리트란 이러한 기능을 훌륭히 해냄으로서 사회의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에게 지식인적인 진실에 대한 순결한 투신이나 자기성찰성을 요구하는 것은 애초에 그른 일이다. 이들이 추구해야할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고, 자기성찰과 사회적 변화라기 보다는 사회적 조건의 원활한 재생산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있는 곳은 기능주의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비난은 왜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 좀 잘 해봐라에 매달리게 된다. 그들 공간의 밖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을 바라보며 너무한다 싶을지라도, 왜 '진정한' 엘리트가 되지 못하느냐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초점이 다소 빗나간 것이 된다. 물론 그냥 현상유지만 되어도 좋다는 의미에서라면 말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좀더 많은 바램을 갖고 진정한 엘리트 운운하는 것은 자조적 웅얼거림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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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이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사회적 재생산을 저해하고 지체시키며, 사회적 모순을 증폭시킬 때 이들은 반엘리트 혹은 부정적 엘리트가 된다. 그러나 이 정도로 기뻐해야 할 일이 못된다. 그들은 바로 관료제도 속에 있고, 이들의 반사회적 활동은 결코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최소한 정치 엘리트(관료)들이 기능하는 관료제도라는 기능적 공간이 그만큼 탄탄하고 끔찍하다는 말이다. 카프카가 일찍이 예견했고 불우한 알뛰세르가 몸으로 보여주었듯이 공산당이건, 자본주의 국가기구건 그 정치적 외관과는 상관없이 이데올로기 조직 안에서 자기비판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밖에서 간간히 개박내는 방법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 게다가 유교적 전통과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짬뽕되고, 시민사회가 일천한 이 나라는 이러한 정치적 엘리트와 관료제도가 지식인(인문, 사회, 자연과학 영역 등의 지적 엘리트)과 지식인 사회(기업이건 시민사회 단체이건 학교이건 간에)의 보편적인 모습이지 않던가. 그래서 이 나라에서 지식인은 찾아보기 힘들어도 엘리트는 무수하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이라며 그나마 있던 지식인이 산개한 반면, 엘리트들은 여전히 왕성하게 일을 저지르고 있다. 귀신은 이렇게 후진, 심지어 역겨움마저 주는 원시인들을 안잡아가고 뭐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