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이제 서른일곱, 아내의 몸에서 발견된 '종양'

Private/자기개발 · 2009. 11. 30. 10:34
이제 서른일곱, 아내의 몸에서 발견된 '종양'
이것이 암이 전이된 것이라면... 하늘이 노래졌다

최병일 기자 XTALOSC@hitel.net

올핸 추석연휴가 길지 않았다. 달랑 사흘의 추석연휴 마지막 일요일 날, 아내에게 뜬금없이 제안을 했다. 월요일 병원에 가서 이것 저것 검사도 받고 치료도 받아보자고. 이번 참에 아예 정관수술까지 남김 없이 받아보자고. 아내는 순순히 동의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도 귀 밑에 불거져 나와 손에 잡혀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 싶다고 아예 한 다리를 걸치고 나섰다.

효도방학이라고 학교에 가지 않은 큰아이 편에 작은아일 맡기고 병원을 서둘러 찾았다. 9시 반, 첫 손님으로 당당하게 의사 앞에서 아내가 문진을 시작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게 풀린다는 사실을 느꼈다.

"언제부터 이러셨나요?" 의사가 묻고 "6개월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머뭇거리는 아내 대신 내가 대답했다. "그건 더 된 것 같은데…." 아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제서야 그 기간이 짧지 않았음을, 왜 이제야 병원에 왔을까 하는 자책이 뒤통수를 쳤다.

어느날 퇴근한 나에게 아내가 물은 적이 있다. "여기 귀 밑에 뭔가 잡혀지는 거 같아요." "어디 보지... 그런 것 같네, 내일 병원에 가봐."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씩 들었다. "이게 안 없어지네." "그래? 어디?" "거봐 내가 병원에 가라고 그랬잖아?" 내가 말꼬리를 올리면 아내는 힘없이 "알았어요, 내일은 꼭 갈게." 대답했었다. 그러나 아내는 여전히 병원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침샘이 부은 경우가 많아요. 여기서는 진단을 할 수가 없으니 두경부 외과 전문의가 있는 대학병원을 찾아서 검사를 해보세요"라는 통보와 함께 소견서를 끊어 주겠다는 의사의 말꼬리를 잡고 나는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물었고 의사는 노트를 뒤적이다가 용인에서 가까운 수원 아주대 병원으로 예약을 했다. 예약 일자가 10여일 뒤로 잡히자 의사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덧붙였다.

"아래층에 진단 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어요. 혹시 모르니까 거기서라도 진단을 받아보도록 하시지요."

아래층의 진단은 달랐다. 두경부 쪽이라기보다는 임파선인 것 같다라는 진단이었다. 초음파 사진으로 본 아내의 혹은 컸다. 정상이라는 1cm를 3배나 넘게 초과한 거의 4cm에 육박한 크기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큰 혹 주위에 작은 혹들이 여러 개 눈에 띄고 반대편에도 혹이 보였다. 이것이 전이라면... 암이 전이된 것이라면... 하늘이 노래졌다.

국부 마취를 한 후 주사기를 넣어 조직 샘플을 채취한 다음 가슴 사진을 찍었다. 의사는 세 가지 가능성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핵을 앓았던 흔적이거나 종양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진에는 그런 흔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종양은 아시는 바와 같이 양성일 수도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사나흘 후에 검사 결과가 나올 겁니다."

마지막 의사의 말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받으려던 모든 진료를 다 취소했다. 그래도 아내의 표정은 별 차이가 없었다. 아이들을 불러내 늦은 점심을 피자 한 판으로 때웠다. 식당에서 재잘대는 아이들 표정을 바라보며 다시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렸다. 오늘이 작은 녀석의 생일인데... 부디 내년 생일에도 우리 가족이 이렇게 둘러 앉아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작은 녀석을 혼내키며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기를 빌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 것 아닌 것으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줄 아내가 알게 되길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는 학교에서 만났다. 군에서 제대한 후 복학한 학교에 아내가 있었고 남다를 것 없는 연애 기간을 끝내고 약혼하고 결혼했다. 복학한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아내의 말에 나도 그러했노라고 고백한 건 시간이 지나서였다.

결혼에 맞춰 부랴부랴 잡은 직장 때문에 성남의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그것도 붙은 다른 방에는 막 복학해 서울로 학교를 다녀야 하는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신혼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동생이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운신이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아내는 청주 시댁으로 갓난아이였던 첫 애를 데리고 내려갔다.

2년여가 지나고 동생이 결혼할 무렵, 어느 정도 회복된 어머니를 모시기 시작했다. 3년 전 집을 장만하고 아직 빚가림에 한 달 월급이 푹푹 꺼져가고 있다. 이 와중에 남편이란 작자는 직장 때려치고 독립을 단행했다.

왜 이렇게 고생시킨 일들만 떠오르는지. 아내가 눈물 흘리던 때, 내가 아낼 서운하게 했구나 반성하던 모습만 눈 앞을 스쳐가는지. 내가 잘못했소, 용서해주오 엎드려 빌고 싶었다.

또,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믿고 싶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아직 서른일곱의 아내에겐 너무 가혹한 일일 뿐이라고 높은 존재들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아직 아무 결론도 내려지지 않았으나 가능성은 불안으로 잉태되어 분노나 절망으로 사산되었다. 꿈이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검사결과를 받아들고 아내 앞에서 '거봐 아무 것도 아니잖아'라며 짐짓 아내의 엄살을 탓할 수 있게 되길 얼마나 빌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죽음 선고가 내려진다면. 그것이 치명적인 병에 의해서건 아니면 어느 한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에 의한 사형선고이든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어차피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 마련이니까, 삶도 그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일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에게 닥쳐온 그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생각해보자. 어느 순간 자신이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다던 아내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면 그건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차라리 내 스스로 겪는 것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어졌다.

이런 혼돈 속에 사흘이 지났다. 늦지 않게 퇴근하려고 애썼으며, 그러나 표나지 않게 애썼으며 극단적으로 어쩌면 우리에게 남겨진 정상 적인 삶의 시간이 결과가 나오기 전인 지금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연락을 받고 찾아간 의사가 내민 쪽지에 쓰여진 글자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눈에 딱 들어오는 두 음절은 '정상'이었다. 운 나쁘게 양성인 종양에서 음성 조직의 샘플이 채취된 것이 아니라면 정상일 확률이 95퍼센트 이상이라고 했다.

너무 호들갑스럽게 이 과정을 지나온 것이 아닐까 순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 동안 수도 없이 내려진 삶의 여러 가치들과 가족들의 소중함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지나간 사흘이 내겐 훨씬 더 자극적이었다. 내가 나의 삶에 선행하여 지켜야 할 가족들의 삶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깨닫고 눈물겨워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로써 규정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책무를 다하려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자기 인식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집 안에 못 하나를 박으며 얼마나 으시댔던가. '만일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당신이 못질을 할 터인데,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내 생각날 거야, 그치?' 내가 먼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신문에 나오는 30~40대 가장들의 높은 사망률에 대해서 생각했다기 보다는 또, 내 몸이 지나치게 부실한 타수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내 주위의 누구인가가 날 떠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이기심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이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으리라, 나 소중한 줄 알고 나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하기보다는 당신 소중한 줄 알고 '당신 있을 때 잘할게, 내가 먼저 가서 당신 힘들게 하기보다는 당신 먼저 보내고 내가 갈게'하고 뉘우쳤다.

아내와 난 내일 한 번 더 병원엘 간다. 애초에 예약되었던 병원에 아내가 이상 없음을 확인하러 간다. 그리고 난 곧 담배도 끊을 것이다. 내 삶이 내 것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