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 5. 맹자(孟子)의 의義

Fact/역사-고전 · 2009. 12. 4. 00:54
5 맹자(孟子)의 의義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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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맹자의 의義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孟子의 생몰 연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자 사후 약 100년경인 기원전 372년에 태어났다고 하며, 향년 74세에서 84세, 94세, 97세 등 여러 설이 많으나 사전史傳에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대체로 공자 사후 약 100년 뒤에 산동성 남부 추芻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가軻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자가 춘추시대 사람이라면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입니다.

   춘추시대의 군주는 지배 영역도 협소하고 전통의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특히 군주 권력이 귀족 세력들의 제어를 받는 제한 군주制限君主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전국시대의 군주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絶對君主였습니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가 결국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압축되고 드디어 진秦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음모와 하극상이 다반사였으며 배신과 야합이 그치지 않은 난세의 전형이었습니다. 군주는 사방에서 정치 이론에 통달한 학자를 초빙하여 국가 경영에 관한 고견高見을 듣는 것이 상례화되어 조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습니다. 맹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지만 제자백가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한 학자들의 총칭입니다.

   맹자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물론 다른 모든 사상가의 이해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특히 이러한 시대적 특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맹자가 공자를 잇고 있는 사상가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우리의 강의에서는 공자 시대의 유가儒家 사상이 맹자 시대에 와서 그 중심이 어떻게 이동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仁이 맹자에 의해서 의義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예시 문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자』의 제1장에서 맹자가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바로 의義입니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풚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對曰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梁惠王 上」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뵈었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  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과 의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만 의에 무게를 두고 있는 사상가입니다.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 예문을 통하여 이 부분을 재론하도록 하지요.
원문이 장문이어서 생략했습니다만, 맹자는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설파합니다.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시면,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내 영지領地에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고, 사인士人이나 서민庶民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하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이利를 추구하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의 글은 매우 논리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논어』가 선어禪語와 같은 함축적인 글임에 비하여 『맹자』는 주장과 논리가 정연한 논설문입니다. 서당에서는 『맹자』로써 문리文理를 틔운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문의 문학적 모범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첫 장의 내용을 끝까지 읽어보도록 하지요.

   만승萬乘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千乘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백승百乘의 대부 중에서 나올 것입니다. 일만一萬의 십분의 일인 일천一千을 가졌거나, 일천의 십분의 일인 일백一百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적게 가졌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義를 경시하고 이利를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진(仁)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義로운 자로서 그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이利를 말씀하십니까?

   맹자와 이 대화를 나눈 임금은 위魏나라의 혜왕惠王입니다. 당시 수도를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기 때문에 흔히 양왕梁王 또는 양혜왕이라 했다고 전합니다. 주자주朱子註에서는 양혜왕은 위나라 제후 앵종으로서 대량에 도읍하고 왕을 참칭僭稱하여 예를 갖추고 폐백을 후히 하며 여러 어진 사람을 초청했는데 맹자도 응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연고로 양혜왕과 대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맹자의 태도는 의연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잘 아는 동문의 한 사람으로 최고 수준의 『맹자』 역주서譯註書를 출간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맹자에 대하여 최고의 헌사를 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학자와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문장가와 문학가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떠한 고전도 『맹자』만큼 힘차고, 유려하고, 논리 정연하고, 심오한 뜻을 지니고, 현재에도 그 내용이 여전히 타당하며, 사람의 정신을 분발시키는 문장들로 가득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주장입니다.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否定句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숙어들의 출전이 바로 이 『맹자』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농단壟斷, 호연지기浩然之氣, 인자무적仁者無敵, 항산항심恒産恒心 등 이루 다 예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맹자는 조금 전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공자 사후 100년경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맹자 당시에는 유가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쇠미하여 오히려 묵자墨子와 양자楊子 사상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맹자는 당시 세상에 크게 떨치고 있던 다른 사상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갑니다. 따라서 『맹자』에는 농가農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 한 권의 고전을 택하려고 하는 경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단연 『맹자』가 천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 제1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요. 양혜왕은 맹자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고 만 셈이지요. 맹자의 사상과 정책은 결국 당시 패권을 추구하던 군주들에게 채용되지 못했습니다. 맹자 사상이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했다고 하지만 당장의 부국강병을 국가적 목표로 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사회적 정의正義’는 너무나 우원迂遠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활적 경쟁에 내몰리고 있던 군주들에게 정의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양혜왕이 말했던 이利란 오로지 ‘부국강병의 류類’였던 것이지요(王所謂利 蓋富國强兵之類). 오늘날로 말하자면 의義란 국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정책 제안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하는 즐거움


   孟子見梁惠王 王立於沼上 顧鴻鴈麋鹿 曰賢者亦樂此乎
   孟子對曰 賢者而後樂此 不賢者雖有此 不樂也
   詩云 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攻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 王在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鶴鶴 王在靈沼 於牣魚躍
   文王以民力爲臺爲沼 而民歡樂之 謂其臺曰靈臺 謂其沼曰靈沼
   樂其有麋鹿魚鼈 古之人與民偕樂 故能樂也
   湯誓曰 時日害喪 予及女偕亡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梁惠王 上」

   『맹자』는 문장이 길어서 일일이 해석하는 방식보다는 전체의 의미를 중심으로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예시문은 1장에 이어지는 글로서 여민락장與民樂章으로 불립니다. 여민락與民樂은 백성들과 함께 즐긴다는 뜻입니다. 맹자의 민본民本 사상이 표명되어 있는 장입니다. 물론 맹자의 민본 사상은 「진심 하」盡心下에 분명하게 개진되고 있습니다. 잠시 그 내용을 먼저 읽어보지요.

   (한 국가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賢君을 세운다. 그리고 좋은 제물祭物로 정해진 시기에 제사를 올렸는데도 한발旱魃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社稷壇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운다.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 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진심 하」에 표명된 민본 사상이 정치권력의 구조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여민락 사상은 그러한 권력구조에 더하여 문화적 민본주의, 정서적 민본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본 사상의 보다 발전된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맹자 사상의 핵심을 의義라고 할 경우 그 의義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여민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민락장의 예시문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뵈었을 때, 왕은 연못가에 서서 고니와 사슴 등 갖가지 새들과 짐승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현자賢者들도 이런 것들을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현자라야만 이런 것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현자가 아니면 비록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즐길 수 없습니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영대」靈臺)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습니다.

   영대를 지으려고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우니
   백성들이 달려와 열심히 일해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완성되었네.
   왕께서 서두르지 말라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부모의 일처럼 더 열심이었네.
   왕께서 동산을 거니시니, 암사슴들은 살지고 윤이 나고 백조는 털이 희디희어라.
   왕께서 못가에 이르시니 아! 연못에 가득한 물고기들 뛰어오르네.

   문왕文王은 백성들의 노역으로 대를 세우고 못을 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두 그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으며 그 대를 영대靈臺, 그 못을 영소靈沼라 부르면서 그곳에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이 살고 있음을 즐거워했습니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그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했기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입니다.) 『서경』書經 「탕서」湯誓에는 (백성들이 걸왕을 저주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놈의 해 언제나 없어지려나
   내 차라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

   만약 백성들이 그와 함께 죽어 없어지기를 바랄 지경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대와 못, 아름다운 새와 짐승들이 있다고 한들 어찌 혼자서 그것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맹자의 유명한 여민동락與民同樂 사상입니다. 주자가 주를 달아서 강조하고 있듯이 “현자라야 즐길 수 있다”(賢者而後樂此)고 한 대목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즐거움(樂)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의 조건 즉 낙樂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독락獨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일반적 정서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과 닮는 것을 피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에 가치를 두려고 하지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개인적 정서의 만족을 낙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이 얼마나 한 개인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공감이 감동의 절정은 못 된다고 하더라도 동류同類라는 안도감과 동감同感이라는 편안함은 그 정서의 구원久遠함에 있어서 순간의 감동보다는 훨씬 오래가는 것이지요. 마치 잉걸불처럼 서로가 서로를 상승시켜주는 것이지요. 유행流行이 바로 동류와 동감의 현실적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정서입니다. 이를테면 소외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독락의 정서는 오히려 개별 상품이 추구하는 디자인의 차별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오늘날 낙의 보편적 형식은 독락입니다. 여민락과 같이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눌 때의 편안함이나 연대 의식은 결코 즐거운 것이 못 되지요. 그것이 즐거움 즉 낙이 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것이지요. 평상심平常心이나 낮은 목소리가 주목받을 수 없는 것 역시 오늘 우리의 삶이고 우리들의 정서라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서경』 「탕서」편을 인용하여 걸왕을 독락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걸왕은 일찍이 “내가 천하를 얻은 것은 하늘에 해가 있는 것과 같으니 저 해가 없어져야 내가 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그 말을 풍자하여 “저놈의 해와 함께 죽어버렸으면” 하고 노래한 것이지요. ‘탕서’湯誓는 탕왕의 서약이란 뜻으로 포악한 하나라의 걸왕을 치기위하여 출진하기에 앞서 선언한 맹세문입니다. 백성들의 민심을 꿰뚫고 있는 것이지요.

   『맹자』의 문장은 길어서 원문을 많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한문학의 교범이라고 할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맹자』의 내용만이라도 가능하면 많이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민락장에 이어서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의 원전이 되고 있는 다음 장을 읽어보기로 하지요.
양혜왕은 자신의 치적治積을 자랑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일하게 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救恤하는 등 백성들을 보살폈는데도, 그렇지 않은 이웃 나라의 백성들 수가 줄지도 않고 자기 나라의 백성이 늘지도 않는 까닭을 맹자에게 물었지요.
맹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칼날이 부딪치면 갑옷을 벗어던지고 무기를 끌면서 달아나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백 보를 달아나 멈춘 자도 있고, 오십 보를 달아나서 멈춘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보 달아난 자가 백 보 달아난 자를 보고 겁쟁이라 비웃는다면 어떻습니까?”
   왕이 대답했습니다.
   “안 되지요. 백 보는 아니지만 그 역시 달아나기는 마찬가지지요.”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그러한 이치를 아신다면 왕의 백성들이 이웃 나라 백성들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사철을 놓치지 않으면 곡식은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촘촘한 그물로 치어稚魚까지 잡아버리지 않는다면 물고기는 먹고도 남을 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봄여름같이) 초목이 자라는 시기에 벌목을 삼가면 목재는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와 목재가 여유 있으면 백성들은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기에 아무런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시작입니다. 다섯 묘畝 넓이의 집 안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친다면 쉰 살이 넘은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닭, 돼지, 개 등의 가축을 기르게 하여 (새끼나 새끼 밴 어미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여) 그 때를 잃지 않게 한다면 일흔이 넘은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한 집마다 논밭 백 묘씩 나누어주고 (전쟁 등으로)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한 가족 몇 식구가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교육을 엄격히 하고 효도와 공경의 도리로써 백성을 가르치고 이끌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반백이 된 노인들이 물건을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노인들이 따뜻한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일반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서도 천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자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풍년이 들어 곡식이 흔한 해에는 개와 돼지가 사람들의 양식을 먹고 있는데도 나라에서는 이를 거두어 저장할 줄 모르고, 흉년에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뒹굴고 있어도 곡식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할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도 ‘이것은 내 탓이 아니라 흉년 탓이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이는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이 칼이 죽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왕께서 죄를 흉년 탓으로 돌리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은 왕에게로 귀의해올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도록 하지요. 어떻습니까? 우선 맹자의 논리 전개 방식과 그 비유의 적절함이 어떻습니까? 문장의 간결함, 흐름의 유려함, 대비의 명쾌함, 그리고 한문 특유의 농축미濃縮美가 서로 어울려 이루어내는 격조를 나로서는 생생하게 살려낼 방법이 없습니다.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

   다음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나타나 있는 글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는 것이 이른바 맹자의 성선설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선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글에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본성론本性論에 대한 비판적 관점입니다. 본성을 전제하고 그 본성으로부터 사회 이론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논리에 대한 반성입니다. 구조론構造論, 본질론本質論, 원죄론原罪論 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 기계론적機械論的 구조의 단순성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그 본성으로 규정하는 이론, 그리고 그러한 본성에 근거한 인간 이해를 근거로 구축하는 사회학에 대하여 아마 여러분도 매우 회의적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서슴없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그 본성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읽기 전에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문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이 장은 인간 본성보다는 본성의 확충에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문이 좀 길지만 모두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

   맹자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왕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知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네 가지 싹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크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 싹을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장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표명된 구절입니다.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단 하나의 예를 들어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구성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사람이 불인인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선언을 먼저 하고 선왕의 어진 정치가 바로 이러한 성선性善에서 비롯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의 선한 정치가 성선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선왕 중에는 포악한 정치를 한 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다음 그 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본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등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수긍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측은지심을 근거로 하여 사단四端으로 나아갑니다.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을 모두 이끌어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입니다. 우물의 어린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仁을 뺀 나머지 즉 의義, 예禮, 지智라는 세 가지의 단은 우물의 어린아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장의 목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단의 확충’으로 넘어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장에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사단과 이 사단의 확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지요.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나와 있지요.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克己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합니다. 천명→본성→사회적 질서(禮)라는 체계를 만들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됩니다. 송대의 객관적 관념론에 대하여는 『대학』, 『중용』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사회 원리인 예禮가 (그것이 봉건적 사회 원리이든, 고대 노예제 사회의 원리이든)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天理라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仁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하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은 ‘불인인지심’을 확충하는 체계이며 이 불인인지심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사회화가 곧 맹자’라는 논리가 확인되는 셈입니다.

   이 장과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논의의 과제로 남겨두고 싶은 한두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萬民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사실 나는 사회 원리로서는 측은지심惻隱之心보다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측은지심은 인간 이해와 관련된 정서라 할 수 있고 수오지심 즉 부끄러움은 인간관계 즉 사회 문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곡속장쬢푛章에서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孔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焉得智
   夫仁天地尊爵也 人之安宅也 莫之禦而不仁 是不智也
   不仁 不智 無禮 無義 人役也
   人役而恥爲役 由弓人而恥爲弓 矢人而恥爲矢也
   如恥之 莫如爲仁
   仁者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        ―「公孫丑 上」

   이 장에서는 성선설을 다른 각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성선설의 의미를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첫 구절에서 모든 사람은 선하다는 그의 성선설이 표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그가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겠느냐(矢人豈不仁於函人哉)며 화살 만드는 사람과 갑옷 만드는 사람이 그 인仁에 있어서 같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에서는 사람의 소위所爲, 즉 하는 일에 따라서 그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입장에 따라 그 생각과 정서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인간 본성의 사회적 존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선性善이란 어떤 경우에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術)에 따라 달리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공자의 ‘성상근性相近 습상원習相遠’과 같은 의미입니다. 본성은 서로 차이가 없지만 습관에 따라 차츰 멀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의 저술에서 공자를 29회나 인용하여 기본적으로 공자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가 공자의 인仁을 사회화했다고 하는 까닭은, 공자의 인이 인간관계의 개념이고 인간관계가 결과적으로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인은 의에 비해 사회적 성격이 약한 개념이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 장의 내용이 그 점을 분명하게 지적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맹자의 술術(직업, 기술, 생업)은 공자의 습習(습관)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습보다는 술이 사회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습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술은 개인이 처하고 있는 사회적 조건이며 개인이 맺고 있는 사회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문을 읽으면서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巫堂과 장인匠人도 역시 그러하다(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棺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職業)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 아름답다. 스스로 택해서 인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가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맹자의 성선설과 맹자의 사회적 관점을 비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공자의 ‘이인위미’里仁爲美를 인용하여 어진(仁)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진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인里仁이란 인仁에 거居하는 것이라고 직역했습니다만 인仁을 삶 속에서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앞에서 이야기했는데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맹자는 그 사람의 사상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본성도 사회적 입장에 따라서 재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성을 어떤 순수한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닐 수 없지요. 선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회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장은 본성으로서의 성선性善의 문제도 처지와 입장이라는 사회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입장을 여기서는 기술이나 직업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회적 실천의 문제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위의 내용을 강조하는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인仁이란 하늘이 내려준 벼슬이며, 사람의 편안한 거처이다.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인을 행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며, 무례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은 남의 부림을 받는다. 남의 부림을 받으면서 남의 부림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마치 활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열심히 인을 행하는 것만 못하다.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

   인仁의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대체로 위에서 주장한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구절에서 특히 활 쏘는 예를 들어 자기 반성을 이야기하는 맹자 특유의 비유가 매우 공감이 갑니다. 아마 어릴 때 활터에서 활 쏘는 광경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활터가 우리들의 놀이터와 가깝기도 하였고 활 쏘는 사람 중에 친구의 부친도 있었으며 또 우리 집에서 인사를 드린 분도 있어서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하였지요. 곱게 차려입은 여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만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없었을 때는 우리들이 고전기告傳旗를 흔들어서 과녁에 살이 꽂히는 위치와 화살이 날아간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화살을 주워서 갖다주기도 했습니다.
   궁술弓術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활 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두 발을 딛는 자세와 어깨와 팔의 각도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흉허복실胸虛腹實이라 하여 가슴은 비우고 배는 든든히 힘을 채워야 하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활을 쏘는 동작 전체에 일관된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작과 동작 사이에는 순서와 절차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동작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 휴지休止 없이 정靜과 동動으로 유연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종횡십자縱橫十字를 이루면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도弓道에서 이러한 것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궁도란 것이 살을 과녁에 적중시키는 단순한 궁술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과정과 자세의 정진正眞 여부가 중中, 부중不中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중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삶의 자세와 철학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 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IMF 사태는 어떻습니까? 국제 금융자본의 작전과 담합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작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허약한 경제적 구조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이지요. 식량, 에너지, 기술, 원료, 시장 등 자립적 기반이 없는 취약한 구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3공의 군사정권과 산업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해방 전후의 권력구조와 경제구조의 창출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일제의 식민지 경제구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반구제기反求諸己의 자세란 IMF 사태에서 우리의 종속적이고 비자립적인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지요. 물론 친인소연親因疎緣을 다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인因을 미루어놓고 먼 연緣을 먼저 보는 것은 사태를 그릇되게 보는 것이지요. 사활적 공세를 전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패권주의와 그러한 세계 경제체제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는 우리의 경제적 위상을 아울러 보아야 하겠지만,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를 양으로 바꾸는 까닭

   다음 구절은 곡속장觳觫章의 일절입니다. 원문을 다 싣기에는 너무 길어서 앞뒤를 자르고 가운데만 살려서 실었습니다. 앞뒤로 잘린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지요.

   제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춘추전국시대의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선왕의 이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매우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무력으로 패자가 되었던 제환공과 진문공에 대하여 공자의 제자들 중 누구도 이야기한 사람이 없으며, 맹자 자신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패도覇道가 아닌 왕도王道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왕도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며 이러한 왕도로 통일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설파합니다.
   그러자 선왕이 자기와 같은 사람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맹자는 자신 있게 “가”可라고 대답합니다. 선왕이 그 까닭을 묻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예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 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癈釁鍾與 曰 何可癈也 以羊易之
   不識有諸        ―「梁惠王 上」
   신은 호흘胡齕이라는 신하가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釁鍾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를 실천할 자질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한 질문입니다. 먼저 제선왕의 신하인 호흘한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제선왕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질문에 대한 선왕의 답변과 맹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왕: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 그런 마음씨라면 충분히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인색해서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신은 왕께서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선왕: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백성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齊나라가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소 한 마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죄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맹자: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하더라도 언짢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라고(以小易大) 하셨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어찌 왕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는데) 어째서 소와 양을 차별할 수 있습니까(牛羊何擇焉)?

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재물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닌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나를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겠군요.

맹자: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仁의 실천입니다. 소는 보았으나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가 금수禽獸를 대함에 있어서 그 살아 있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 죽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군자가 푸줏간을 멀리하는 까닭이 이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징역살이를 10여 년쯤 하게 되면 얼굴만 봐도 죄명과 형기刑期를 정확하게 맞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걸음걸이만 보아도 성격이나 학력, 직업까지 맞힐 수 있게 됩니다. 감옥의 인간관계는 바깥 사회의 인간관계와는 판이합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몇 년 동안 같은 감방에서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역사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사람에 대한 판단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소하고 난 이후에 사회에서 내가 그런 사람 보는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입니다. 저는 꼭 앉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앉을 수 있습니다. 누가 어디서 내릴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승객이 너무 많지 않아서 앉아 있는 사람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도 연습하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이대역에서 내릴 사람과 서울역에서 내릴 사람은 구별이 어렵지 않지요? 그런 쉬운 문제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경험을 쌓아가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창밖을 자주 내다본다고 해서 곧 내릴 사람이라 기대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눈 감고 있다고 해서 종점까지 가는 사람이라고 포기해서도 안 되지요. 매우 종합적인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사람의 인상, 옷차림, 소지품, 그리고 각 전철역의 사회 문화적 특성은 물론이고 현재 시간에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언제든지 앉을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앉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1호선 인천 가는 전철이었어요. 영등포역에서 승차했는데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두 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어서 전철 속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도림역에서 내릴 사람을 골라 그 앞에 섰습니다. 정확하게 신도림역에서 그 사람이 일어나더군요. 그래서 막 앉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재빨리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자리에는 자기 앞에 서 있던 친구를 앉히는 거였어요.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거지요. 나는 엇비슷이 두 사람 걸치기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의 정면에 서서 그 좌석에 대한 확실한 연고권을 주변에 선언해두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내 주변에는 나와 경쟁 상대가 될 만한 나이 든 사람도 없었거든요. 태무심으로 있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지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 앞에 선 채로 나는 매우 착잡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 떠오른 것이 이 곡속장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여자와 내가 만난 적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를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群集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四端의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치恥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20분을 초과하지 않는 일시적 군집에서는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다시 볼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피차 배려하지 않습니다. 소매치기나 폭행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잠시만 지나고 나면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무관심과 냉담함을 도시 문화의 속성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밀집해 있는 도시라는 과밀 공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과밀 공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 문화 역시 자본주의가 만든 것입니다. 도시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식인 셈이지요.

   인류 5천 년 역사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도시 형태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비인간화되는 정도에 있어서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합니다. 물론 노예제도란 그 자체가 억압적 제도임이 사실이지만, 관계 그 자체가 소멸된 구조는 아니지요. 더구나 그리스―로마의 경우, 일부 광산 노예나 갤리선 노예 등이 담당했던 노동은 오히려 특수한 경우이며, 오늘날의 경찰·행정·교육 등을 노예 계급이 담당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가내노비家內奴婢는 물론이고 외거노비外居奴婢도 매우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는 외견상으로 볼 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매우 광범하게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지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전체적인 사회 구성에 있어서 전 자본주의前資本主義 부문도 온존하고 있으며 비자본주의非資本主義 부문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부문에 주목하고 이 부문을 진지陣地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적 과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 자본주의, 비자본주의 부문이 공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지하철에서 있었던 작은 사건은 사소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이야기를 하나 더 하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신도림역의 지하철 좌석 이야기는 동시대의 횡적인 인간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남에게 모질게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곡속장을 통하여 반성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맹자는 제선왕이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한 사실을 통해 제선왕에게서 보민保民의 덕德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맹자』는 7편 261장 3만 4,685자에 달하는 대저大著입니다. 그 내용도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정된 우리의 고전 강독 강의로는 더 이상 다룰 수가 없습니다. 아쉽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몇 가지 구절을 소개하고 『맹자』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음 장에는 맹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맹자』의 대부분은 치세治世에 관한 도도한 논설임에 비하여 이 장은 매우 성찰적이면서 엄정함을 느끼게 합니다. 먼저 본문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盡心 上」

   전체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공자께서 동산에 오르시어 노魯나라가 작다고 하시고 태산太山에 오르시어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물(水)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언言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바라보아야 한다(깊은 물은 높은 물결을, 얕은 물은 낮은 물결을 일으키는 법이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둔 이상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이 장의 전체 기조는 아까 말한 것처럼 성찰적이면서도 엄정합니다. 동산東山과 태산太山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석이 없습니다. 상징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산과 태산의 예를 들어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학문을 닦고 품성을 기르는 일의 가없음(無涯)에 관한 것입니다.
   ‘난위수’難爲水와 ‘난위언’難爲言의 해석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물이기 어렵다, 물이라 여기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문법적으로 무리가 없고 그 뜻도 좋습니다. 대해大海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따라서 물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바다를 본 사람의 이미지가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집니다.

   이 글에서의 ‘바다’는 큰 깨달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더구나 작은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깨달은 사람이 취할 태도가 못 되지요. ‘난위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언言은 단순한 말의 의미가 아니라 학문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은 모든 언에 대하여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이나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웬만한 물이나 이론에 대하여 그것을 물이나 이론으로 쳐주기 어렵다고 하는 해석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맹자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노자老子의 ‘지자불박知者不博 박자부지博者不知’와 통하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難爲水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로, 서예전에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일입니다만 도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내가 달아놓은 설명문(caption)을 교정했습니다.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면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말하기 어렵다”로 바꾸어놓았어요. 깜짝 놀라서 다시 바로 잡았습니다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이지요. 세태의 일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일월이 모든 틈새를 다 비춘다는 것은 한 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科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그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正道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불성장부달’不成章不達 역시 ‘불영과불행’과 같은 의미입니다. 장章은 수많은 무늬(文)들로 이루어진 한 폭의 비단과 같은 것입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경지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치인治人의 장場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치인은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야 남이 모욕하는 법

   맹자는 공자를 잇고 있다는 일반적 통설과 달리 맹자는 공자에 대한 최대의 이단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공자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제자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맹자는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사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가 아니지요. 자사는 증자曾子의 문인으로 되어 있지만, 막상 증자는 공자 최만년最晩年에 입학한 제자로 공자보다 46세 연하여서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음이 지적됩니다. 더구나 증자의 아버지인 증석曾晳은 『논어』에 매우 부당하게 삽입되어 있는데 필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맹자가 무리하게 공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강의에서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는 나도 여러분도 양쪽 모두가 적합하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러한 맹자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공자와 맹자의 시대적 차이에서 상당 부분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맹자 당시에 진秦에서는 법가인 상앙商?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고, 초楚와 위魏에서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전쟁으로 적국의 땅을 빼앗았으며, 제齊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은 병가兵家인 손자孫子와 전기田忌를 등용하는 등, 당시는 합종연횡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면서 오로지 전쟁을 능사로 여기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비록 맹자가 공자와 마찬가지로 요순堯舜과 하夏·은殷·주周 3대 성왕들의 덕치德治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점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차별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엄격한 수기修己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지요. 「등문공」편騰文公篇에서 맹자는 왕량王良의 비타협적인 자부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진晉의 대부인 조간자趙簡子가 천하제일의 마부인 왕량으로 하여금 임금의 총신寵臣인 해亥의 사냥을 위하여 마차를 몰게 했습니다.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맞히지 못하고 돌아온 해가 왕량을 일컬어 천하의 형편없는 마부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량이 다시 한 번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마차를 몰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해가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쏘아 맞히었습니다. 그러자 해는 왕량을 일컬어 천하제일의 마부라고 칭찬했습니다. 조간자가 총신 해를 위하여 앞으로도 마차를 몰겠느냐고 왕량에게 묻자 왕량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사냥의 법도대로 마차를 몰았더니 하루 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법도를 어기고 궤우詭遇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고서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그가 권세가라 하더라도 마차를 몰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궤우란 것은 아마 짐승을 옆에서 쏘게 해주는(橫而射之) 것으로, 부정한 방법으로 사냥하는 것(不正而與禽遇)을 의미하는가 봅니다. 맹자는 왕량의 그 법도를 잃지 않으려는(不失其馳) 자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원칙과 정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맹자에 관하여 여러분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일 것입니다. 출처는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 「모의」편母儀篇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고사입니다. 그 고사의 진짜 주인공이 맹모孟母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훈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맹모로 만들었지 않았나 짐작됩니다. 당사자가 맹모였다면 대단한 현모賢母는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맹모는 아들이 주변에서 본 대로 흉내를 내자 아들의 교육을 위하여 이사를 갑니다. 처음에 아마 시장이었던가요? 그리고 묘지 부근으로, 마지막으로 서당 옆으로 이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세 번씩이나 이사한 다음에야 깨닫다니 현명한 어머니라 하기 어렵지요.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韓石峰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지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가난한 떡장수였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불을 끈 캄캄한 방에서 아들과 서로 겨루게 됩니다.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지요. 그리고 다시 불을 켜고 확인합니다.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하지만 석봉의 글씨는 비뚤어지고 크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석봉은 어머님의 솜씨에 비교해볼 때 자기의 글씨가 아직 멀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닫는 것이지요.

   물론 이 게임은 공정한 게임은 아닙니다. 나도 붓글씨를 쓰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떡은 손으로 만져보면서 썰 수가 있지만 글씨는 만져보고 쓸 수가 없지요. 그렇긴 하지만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지 않고 시키기만 하는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환경만을 만들어주는 맹모에 비해서도 훨씬 뛰어난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극히 일부분만을 여러분과 함께 읽었습니다만 맹자의 사회주의社會主義와 민본주의民本主義는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맹자는 그 사상이 우원迂遠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패자들에게 수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맹자의 민본 사상은 패권을 추구하는 당시의 군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아마 제선왕이었지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맹자는 참으로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답변하여 군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인仁을 짓밟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짓밟는 자를 잔殘이라 합니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개 사내(一夫)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일개 사내일 뿐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으나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단호하고 준열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맹자는 자기를 돌이켜보고 그 품성을 곧게 간추리기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끝으로 『맹자』 「이루 상」離婁上의 일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장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太甲篇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