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Fact/역사-고전 · 2009. 12. 4. 00:53
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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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래된 시詩와 언言



상품미학의 허위의식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으로

  
   이제까지는 동양 사상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한 셈이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특징’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자칫하면 차이가 특징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이란 개념 자체가 서양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은 동서양의 비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고전의 독법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500여 년 전의 동양고전을 읽는 이유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양 사상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서양 사상과 비교하고 차이점을 지적한 것도 사실입니다. 근대사가 바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 역사이기 때문에 동양 사상의 관계론을 설명하면서 자연히 서구와의 비교 논의로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시경』詩經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선 300여 편이 넘는 시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시의 내용이나 형식이 같지 않고 또 작시作詩의 목적과 과정도 판이합니다. 수많은 주註가 달려 있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대단히 큰 편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전 독법에 비추어 『시경』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가 사실은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시경』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의 사실성에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지만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국풍國風에 주목합니다. 『시경』의 국풍 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백성들이 부르던 노래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정약용丁若鏞, 심대윤沈大允 같은 조선의 지식인은 주희朱熹의 국풍 민요설을 부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식인들이 임금을 바로잡으려는(一正君) 저작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던 조선 사대부들의 입장이 과도하게 투사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국풍의 노래가 백성들 사이에 광범하게 불려지고 또 오래도록 전승된 노래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민요民謠로 보아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 노래가 계속 불려지고 전승될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詩의 정수精髓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眞情性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성과 진정성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소위 상품미학商品美學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CF가 보여주고 약속하는 이미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광고 카피는 허구입니다.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이버 세계 역시 허상虛像입니다. 가상공간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감수성을 사로잡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는 본질에 있어서 허구입니다.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픔과 기쁨이 절절히 배어 있는 『시경』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시경』의 시 한 편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지요.

遵彼汝墳 伐其條枚 未見君子 惄如調飢
遵彼汝墳 伐其條肄 旣見君子 不我遐棄
魴魚赬尾 王室如燬 雖則如燬 父母孔邇        ―周南, 「汝墳」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구나.
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
비록 불타는 듯 가혹하더라도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구려.
―「강둑에서」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은말殷末 주왕紂王의 사역이 이 시의 배경이라고 하지만 서주西周 말末로 보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제목은 「강둑에서」로 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 시가 보여주는 그림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첫 연의 그림은 이렇습니다. 말없이 흐르는 여강, 그 강물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강둑, 그리고 그 강둑에서 나뭇가지 꺾으며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전쟁터로 나갔거나, 만리장성 축조 같은 사역에 동원되어 벌써 몇 년째 소식이 없는 낭군을 기다리는 가난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땔감으로 나뭇가지를 꺾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병역이나 사역에 동원될 리도 없지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두번째 연은 기다리던 낭군이 돌아오는 그림입니다. 자기를 잊지 않고 돌아오는 낭군을 맞는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은 돌아온 낭군을 붙잡고 다짐하는 그림입니다. 그 내용이 지금의 아내나 지금의 부모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시국에 대한 인식입니다. 방어의 꼬리가 붉다는 것은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방어는 피로하면 꼬리가 붉어진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왜 피로한지 알 수 없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방어는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왕실여훼’王室如燬란 정치가 매우 어지럽다는 뜻이지요. 전쟁과 정변이 잦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더라도 그러한 전쟁이나 정쟁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근심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내의 논리지요. 소박한 민중의 삶이며 소망입니다.

   나는 이 「여분」汝墳이란 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 시절의 어느 마을, 어느 곤궁한 삶의 주인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이기 때문입니다. 강둑의 연상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이 시를 읽으면 함께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역시 별리別離를 노래한 시인 정지상의 「송인」送人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 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강둑에 풀빛 더욱 새로운데
   남포에는 이별의 슬픈 노래 그칠 날 없구나.
   대동강물 언제나 마르랴
   해마다 이별의 눈물 물결 위에 뿌리는데.

   이별의 아픔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읊기가 어렵습니다. 이 시가 우리나라 한시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 사신이 올 때면 부벽루에 걸려 있는 한시 현판을 모두 내리지만 이 시 현판만은 그대로 걸어두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시의 자존심인 셈이지요. 시인도 매우 훌륭한 사람임은 물론입니다.

   이 「여분」이란 노랫말이 어떤 곡에 실렸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辭)+노래(調)+춤(容)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은 것입니다.











거짓 없는 생각이 시의 정신입니다

   『시경』에는 모두 30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절반이 넘는 양이 국풍입니다. 국풍은 각국의 채시관採詩官이 거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의 노래를 수집하는 주周나라의 전통은 한漢나라 이후에도 이어져 악부樂府라는 관청에서 백성들의 시가를 수집하게 됩니다.
   『시경』의 시는 약 3천여 년 전의 세계 최고最古의 시입니다. 은말殷末 주초周初인 기원전 12세기 말부터 춘추春秋 중엽인 기원전 6세기까지 약 600년간의 시詩와 가歌를 모아 기원전 6세기경에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어지러워지고 민중적인 정신이 피폐해지면 고문 운동古文運動, 신악부 운동新樂府運動 등 문예 혁신 운동을 벌여 민중 정서에 다가서기를 호소합니다. 근세 이후에는 고문 운동이 오히려 보수화의 논리와 결합되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경』의 이러한 사회시社會詩로서의 성격은 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고대사회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로 『시경』의 가치가 인정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 한 편을 더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投我以木瓜 報之以瓊쩆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爲好也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爲好也        ―衛風, 「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뜻 깊은 만남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변함없는 우정을 위해서라오.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기에 나는 아름다운 패옥으로 갚았지.
   보답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라오.        ―「모과」

   해석은 내가 공역한 『중국역대시가선집』의 번역문을 그대로 옮겼습니다만 경거瓊쩆, 경요瓊瑤, 경구瓊玖는 2절 3절에서 단조로운 반복을 피하려고 변화를 준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아름다운 패옥으로 풀이해도 됩니다. 그리고 ‘영이위호야’永以爲好也는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정도가 적당합니다. 역시 단조로운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남이나 우정으로 번역하여 변화를 주려고 한 것이지요.

   이 시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기린 시라 하였으나 완벽한 연애시라 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남녀간의 애정 표시로 과일을 던지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이 시는 남녀가 편을 나누어서 화답하는 노래, 또는 메기고 받는 노래로 추측됩니다. 이 시는 남녀간 애정 표현의 자유로움뿐만이 아니라 놀이와 풍습을 연상케 합니다. 이 시 역시 위衛나라에서 수집한 국풍입니다.

   『시경』에는 국풍 이외에 궁중에서 연주된 105편의 의식곡儀式曲도 있으며 종묘宗廟의 제사 때 연주된 40편의 무용곡舞踊曲도 실려 있습니다만, 국풍만 읽기로 하겠습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詩三百篇 一言以蔽之思無邪).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다음 시는 정鄭나라에서 수집한 시입니다. 정풍鄭風입니다. 음탕하다고 할 정도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子惠思我 褰裳涉溱 子不我思 豈無他人 狂童之狂也且
   子惠思我 褰裳涉洧 子不我思 豈無他士 狂童之狂也且        
                                                      ―鄭風, 「褰裳」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진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자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치마 걷고 유수라도 건너가리라.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가 그대뿐이랴.
   바보 같은 사나이 멍청이 같은 사나이.           ―「치마를 걷고」

   이 정도의 번역은 상당히 점잖게 새긴 셈입니다. 『시경』의 세계가 충성의 세계가 아니라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거짓 없는 정한情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란 진실의 조각 그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만 더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 역시 국풍입니다. 『시경』을 사실성의 관점에서 읽다보니까 국풍만을 읽게 됩니다.

    陟彼岵兮 瞻望父兮 父曰 嗟予子 行役夙夜無已 上愼旃哉 猶來無止
    陟彼ゥ兮 瞻望母兮 母曰 嗟予季 行役夙夜無寐 上愼旃哉 猶來無棄
    陟彼岡兮 瞻望兄兮 兄曰 嗟予弟 行役夙夜必偕 上愼旃哉 猶來無死
                                                                       ―魏風, 「陟岵」

   이 시가 수집된 위魏나라는 순舜, 우禹가 도읍했던 땅으로 유명하지만 강국인 진秦, 진晉과 접하여 잦은 전쟁과 토목공사로 이산離散의 아픔을 많이 겪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는 징병되었거나 만리장성 축조에 강제 징용된 어느 젊은이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마 당대에 가장 보편적인 이산의 아픔이었다고 짐작됩니다. 감옥 속에서 내가 이 시를 읽었을 때의 감회가 생각납니다만,생각하면 이산의 아픔은 산업사회와 도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난 삶이란 뿌리가 뽑힌 삶이지요. 나는 사람도 한 그루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의 정서는 3천 년을 사이에 둔 아득한 옛날의 정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에 올라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아버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아들아. 밤낮으로 쉴 새도 없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머물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어머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어머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우리 막내야. 밤낮으로 잠도 못 자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형님 계신 곳을 바라보니 형님 말씀이 들리는 듯.
    오! 내 동생아. 밤이나 낮이나 집단행동 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여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너라.        ―「산에 올라」

   전체의 내용으로 미루어 이 시의 당사자는 미혼의 청년입니다. 낭군을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요. 부, 모, 형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역대시가선집』에서는 ‘유래무기’猶來無棄를 “이 어미 저버리지 말고 돌아오너라”로 해석했습니다. 공역자인 기세춘 선생이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절절한 마음을 담으려면 버림받지 말고 돌아오라는 의미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필해’必偕를 “집단행동”이라 번역했습니다만, 뜻은 작업조에 편입되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형님이 먼저 겪었던가 보지요.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책에도 이 시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관광지로 유명한 팔달령八達嶺으로 가지 않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마대司馬臺로 갔습니다. 팔달령은 관광 목적으로 개축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회가 덜할 것 같았지요. 반면에 사마대는 마침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정경이었습니다. 눈까지 내려 더욱 쓸쓸했습니다. 멀리 뻗어 있는 장성을 따라 시선을 던지며 그 엄청난 역사役事에 감탄하기도 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에 몸서리치기도 했습니다.

   만리장성은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가욕관에 이르는 장성입니다만,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산해관의 망루에서 1km 정도 떨어진 발해만의 노룡두인데 이곳에 맹강사당孟姜祠堂이 있습니다. 맹강녀孟姜女의 한 많은 죽음을 기리는 사당입니다. 맹강녀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진시황 때 맹강녀의 남편 범희양이 축성築城 노역에 징용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편지 한 장 없는(杳無音信)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입히려고 이곳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이미 죽어 시골屍骨마저 찾을 길 없었지요. 당시 축성 노역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이 죽으면 시골은 성채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맹강녀가 성벽 앞에 옷을 바치고 며칠을 엎드려 대성통곡하자 드디어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맹강녀는 시골을 거두어 묻고 나서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이지요. 맹강녀 전설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성채가 무너지고 시골이 나오다니 전설은 전설입니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풀은 바람 속에서도 일어섭니다

  물론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수집하는 까닭은 이러한 진실의 창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민심을 읽고 민심을 다스려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써 채시관들이 조직적으로 백성들의 노래를 수집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자도 그 나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고 하였지요. ‘악여정통’樂與政通이라는 것이지요. 음악과 정치는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오늘의 서울에 와서 음악을 듣고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모시毛詩에서는 “위정자爲政者는 이로써 백성을 풍화風化하고 백성은 위정자를 풍자諷刺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초상지풍 초필언’草上之風草必偃,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것이지요. 민요의 수집과 『시경』의 편찬은 백성들을 바르게 인도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 편에서는 노래로써 위정자들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눕지 않을 수 없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선다는 의지를 보이지요. ‘초상지풍 초필언’ 구절 다음에 ‘수지풍중 초부립’誰知風中草復立을 대구로 넣어 “누가 알랴,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는 것을”이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시경』에는 이와 같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큰 쥐」(碩鼠)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매우 직설적이고 저항적입니다. 그러나 「박달나무 베며」(伐檀)는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절만 소개하지요.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중국역대시가선집』의 서문에서 밝혔습니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중국 시가의 전통이 잘못 소개되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의 지배 계층인 양반의 시각과 계급적 입장에 의하여 시가 선별적으로 소개되어왔다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시경』에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저항시와 노동요가 대단히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풍영월이 시의 본령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편향된 여과 장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통과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매우 귀중한 정신세계가 왜곡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세계와 시적 정서, 나아가 시적 관점은 최고의 정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시경』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삶과 정서의 공감을 기초로 하는 진정성에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시와 『시경』에 대한 재조명은 당연히 이러한 사실성과 진정성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적 관점은 우선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동서남북의 각각 다른 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춘하추동의 각각 다른 시간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결코 즉물적卽物的이지 않습니다.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적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시인이 연탄이란 하나의 대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연탄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안도현의 시는 이러한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길러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시를 많이 읽기 바랍니다.
물론 오늘의 현대시는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니지요. 시인이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기초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감수성이 주로 도시 정서에 국한되어 있는 협소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이지요.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 정국에서 대단한 문명을 떨친 임화林和라는 시인이 있었지요. 「네거리 순이」, 「적기가」 등 많은 시가 애송되었습니다만, 임화는 항상 두보 시집을 가지고 다녔다고 전해지지요. 임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인들 대부분은 문학적으로 호흡하는 세계가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모시서毛詩序의 구절을 소개했습니다만 이 구절이 김수영의 시에 계승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김수영의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의 이미지가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白樂天의 「국화」菊花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 잎새 꺾이고 연꽃은 시들어 기울었다. 오직 동쪽 울타리의 국화만이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一夜新霜著瓦輕 芭蕉新折敗荷傾 耐寒唯有東籬菊 金粟花開曉更淸)는 내용입니다. 「국화 옆에서」는 시상의 핵심을 여기서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방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개인적 세계를 열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기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지요. 『시경』의 세계는 그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짓 없는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매몰되고 있는 허구성입니다. 미적 정서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은 황하 유역의 북방 문학입니다. 북방 문학의 특징은 4언체四言體에 있고 4언체는 보행 리듬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서 춤의 리듬이 6언체인 것과 대조를 보입니다. 『시경』의 정신은 이처럼 땅을 밟고 걸어가듯 확실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땅을 밟고 있는 확실함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삶의 진정성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발이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보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지향해야 할 확실한 방향을 잃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에 담겨 있는 사무사思無邪의 정서가 절실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은 무서운 규제 장치입니다

   『시경』에 이어서 『서경』書經의 한 편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경』은 2제(요堯·순舜) 3왕(우왕禹王·탕왕湯王과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주고받은 언言, 즉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유가의 경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서』書 또는 『상서』尙書라고 했습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左右 2사二史가 있었는데 좌사左史는 왕의 언言을 기록하고 우사右史는 왕의 행行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春秋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言行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死後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竹帛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임금의 언행을 남기는 것은 물론 후왕後王이 그것을 거울로 삼아 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서경』을 평하여 정政에 장長하다고 하였지요. 『서경』에는 수많은 정치적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정통하게 되면 정치력을 높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서경』, 『춘추』와 같은 기록 문화는 후대의 임금들이 참고할 수 있는 사례집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떠한 제도보다도 강력한 규제 장치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상상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처럼 기록으로 남기는 문화 전통은 농경민족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농경민족은 유한 공간有限空間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 문화를 만들어냅니다. 땅이라는 유한한 공간에서 무궁한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과거의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구조를 터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록은 매우 중요한 문화적 내용이 됩니다. 기록은 물론 자연에 대한 기록에서 시작합니다만 이러한 문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기록으로 발전합니다. 2제 3왕의 주고받은 어록인 『서경』이 탄생되는 까닭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홍위병들이 붉은 표지의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을 흔들며 행진하는 광경을 보고 매우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연히 『마오어록』毛澤東語錄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유일 지배 체제의 상징 같은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오어록』은 중국의 전통에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중국의 전통에 이러한 기록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기록이 보전되고 부단히 읽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난 후에 서적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매장하는 문화적 탄압,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게 되지만 그는 무엇보다 천하 통일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의 문자를 통일합니다. 이 문자의 통일은 엄청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고대 문자와 고대 기록의 해독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위치우위余秋雨는 그의 『세계문명기행』에서 시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도서관과 『이집트사』를 포함한 장서 70만 권을 소각한 사실, 그리고 그로부터 400여 년 후 로마 황제가 이교異敎를 금지하면서 유일하게 고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이집트 제사장祭司長들을 추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고대 문자 해독 능력이 인멸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에 있어서 기록의 의미는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천 년 전의 기록이 마치 며칠 전에 띄운 편지처럼 읽혀지고 있는 유일한 문명이라는 것이지요.

  『서경』은 본래 하夏, 은殷, 주周의 사관史官이 작성한 것으로 3천 편이 있었는데 공자가 100여 편으로 정리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습니다. 현재 전하는 『서경』은 58편인데, 25편은 고문古文 33편은 금문今文입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진秦의 분서焚書 이후 구전되다가 한대漢代의 언어로 정착된 것입니다. 『고문상서』古文尙書는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노공왕魯共王의 궁실을 넓히다가 공자의 구택舊宅 벽에서 얻은 벽경壁經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의 『고문상서』는 동진東晉의 매색梅펽이란 자의 위작僞作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금문상서』 역시 주공周公 전후의 여러 편이 먼저 성립되어 가장 오랜 부분이고 그 다음에 은殷 부분이 추가되고 그리고 하夏, 다시 요堯, 순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른바 ‘가상 학설’加上學說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최초에는 주周 왕조의 창건자인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중심으로 기록했으나, 유학자들이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설적 제왕들에 관한 단편적 기록들까지 추가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합니다

『서경』에서는 단 한 편만 골라서 읽기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가장 신뢰성이 있는 주공 편에서 골랐습니다.

周公曰 嗚呼 君子 所其無逸
先知稼穡之艱難 乃逸 則知小人之依
相小人 厥父母 勤勞稼穡
厥子 乃不知稼穡之艱難 乃逸 乃諺 旣誕
否則 侮厥父母曰 昔之人 無聞知        ―周書, 「無逸」

이 글은 주공이 조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 창건 초기의 어려움을 도맡아 다스리던 주공의 이야기입니다. 군주의 도리로서 무일無逸하라는 것이지요. 안일에 빠지지 말 것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군자는 무일無逸(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稼穡)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小人之依)를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聞知)이 없다고 한다.

   이 「무일」편에서 개진되고 있는 무일 사상無逸思想은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평가됩니다. 생산 노동과 일하는 사람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어려움을 깨닫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무일 사상은 주나라 시대라는 고대사회의 정서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와 중국 사상의 저변에 두터운 지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1957년과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던 하방 운동下放運動의 사상적 근거가 바로 이 무일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방 운동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당 간부, 정부 관료들을 농촌이나 공장에 내려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군 간부들을 병사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함으로써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운동이었지요. 간부들의 주관주의主觀主義와 관료주의官僚主義를 배격하는 지식인 개조 운동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 1천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하방 운동에 동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일」편은 주공의 사상이나 주나라 시대의 정서를 읽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편을 통해 가색稼穡의 어려움, 즉 농사일이라는 노동 체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산 노동과 유리된 신세대 문화의 비생산적 정서와 소비주의를 재조명하는 예시문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나한테 건설 회사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아는 후배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무일’이란 이름을 추천했지요. 건설 현장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싶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싫다고 하더군요. 건설 회사가 ‘일이 없으면’(무일)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무일無逸이 물론 그런 뜻은 아니지만 어감이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일이란 의미에 대하여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여러분과 같은 신세대 정서로는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한마디로 무일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중국 최고의 정치가 주공

   여기서 주공周公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 사람이지요.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이름이 희단姬旦이지요. 주공은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어느 왕조이건 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에 해당하는 것이지요. 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주나라는 이를테면 신하의 나라가 쿠데타(逆取)에 의하여 세운 국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의 부당함을 간諫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는 고사가 바로 이때의 일입니다.

   개국 초기의 권력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무왕이 동생 주공을 노魯나라에 봉했지만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않을 때여서 주공은 아들인 백금伯禽을 대신 임지로 보내고 자기는 남아서 계속 무왕을 보좌해야 했습니다. 당시 72제후국 중 희姬씨가 55국으로 압도적으로 장악했지만 여呂씨가 17국으로 만만치 않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어요. 원래 주나라는 서쪽에 있던 산간山間의 제후국이었는데 남하南下하여 위수渭水 평야로 이동하고 문왕文王 때에 태공망 여상呂尙을 얻어 강대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곧 강족姜族과 주족周族의 연합이었음은 물론입니다. 17개 제후국을 장악한 여씨가 바로 여상의 강족입니다. 여상은 문왕과 연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무왕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무너뜨린 것이지요. 이 여상이 바로 강태공姜太公입니다. 문왕을 만나기까지 곧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두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이지요. 병법과 지략에 뛰어난 전략가로서 육도삼략六韜三略의 저자이며 무왕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력을 변방인 산동성으로 거세시킨 것도 모두 주공의 정치적 수완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후 마지막 임금 주紂의 아들 무경녹부武庚祿父를 후侯에 책봉하여 은나라 유민遺民을 그에게 복속시켰습니다. 은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왕은 그의 두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무경에게 사부로 붙였는데 무왕이 죽자 무경과 두 동생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동생인 관숙선을 죽이고 채숙도를 추방합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을 모아 주紂의 형인 미자微子를 따르게 하고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 부근인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미자는 송의 시조가 됩니다. 송은 은나라를 계승한 주나라의 제후국이 된 것이지요. 이 송나라와 인접한 나라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이며 이 노가 바로 주공이 봉해진 제후국입니다.

   주공은 조선 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君權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一飯三吐, 일목삼착一沐三捉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여기서 잠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하여 몇 가지 언급해두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중국 고대의 제왕 계보는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우禹(하夏)―탕湯(은殷, 상商)―문文―무武―주공周公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듣던 말이 바로 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이었거든요. 그러나 황제 이하 요, 순까지는 가공의 인물로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반면에 하우夏禹는 실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서경』 「우공」편禹貢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하夏의 건설지로 알려진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와 그 주변 지역에 있는 궁궐 터, 분묘 등의 유물과 유적은 당시에 이미 권력과 계급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염지鹽地 유적은 그곳이 경제적 중심지였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리고 갑골문자甲骨文字(가장 오래된 것이 19대 반경盤庚 이후) 또는 복사卜辭(귀갑龜甲, 수골獸骨에 새겨진 문자)의 존재라든가 우禹의 아들 계啓가 왕위를 세습함으로써 비로소 세습 왕조가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일반적으로는 하夏부터 실재한 왕조로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통설입니다.

   기원전 1760년경에 이 하夏를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가 은殷입니다. 원래는 상商이었는데 주周가 상商을 정벌한 후에 수도의 이름을 따서 은나라로 낮춰 불렀지요. 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28대 주왕紂王(제신帝辛)을 무왕이 멸하고 주를 세웠습니다. 이때가 기원전 1100년경이었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역사 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나는 이 「무일」편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역사를 읽으면서 무엇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무일」이 바로 그러한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나는 이 「무일」편이 무엇보다 먼저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의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을 통해 불편함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씹어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인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을 반성하는 교훈으로 읽히기 바랍니다. ‘석지인 무문지’昔之人無聞知에서 노인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세태였음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IMF 사태 이후 구조 조정 과정에서 퇴직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가 빠를수록 과거의 지식이 빨리 폐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노인들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사회가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조로화早老化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낭비이면서 역사 경험의 낭비입니다. 물론 ‘도시 유목민’이 정보화 사회의 미래상이라는 전망이 없지 않습니다. 농본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노인들의 경험 문화는 주변화되고 청년들의 전위 문화前衛文化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류의 정신사는 어느 시대에나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미래를 모색해가게 마련입니다.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노인들의 지혜와 희생이 역사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 그렇습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초사』의 낭만과 자유

   이어서 『초사』楚辭의 시 한 편을 읽도록 하지요. 『초사』는 『시경』과 함께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시대적으로는 『서경』 다음에 읽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초사』는 한漢나라 유향劉向(BC. 77∼6)이 굴원屈原,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모아 펴낸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초楚나라의 시체詩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사』는 망실되고, 현재 전하는 것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 총17편입니다.

   『시경』이 북방 중원의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4언체 운문韻文인 데 비하여 『초사』는 이러한 북방 4언체를 혁신한 양자강 유역의 남방 문학입니다. 남방 국가인 초나라의 시체로서 음악에 가까운 운문입니다. 특히 방언方言, 무풍巫風, 풍습風習, 음운音韻 등 초나라의 뛰어난 문물과 풍부한 민요, 특히 무풍의 토양 위에 난숙하게 발전한 낭만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경』이 사실적이고 노동과 삶과 보행의 정서로 이루어진 시詩 세계임에 비하여 『초사』의 세계는 자유분방, 정열, 상상력, 신비, 환상 등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초사』는 시는 물론 산문, 소설, 희곡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학 전반에 광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시경』이 집단 창작과 전승을 통하여 만들어졌음에 비하여 『초사』에서는 시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굴원이 중국 시인의 대표인 것도 처음으로 그 이름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굴원의 「이소」離騷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神曲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전쟁 영웅을 기리는 서사시이거나 인간 이성의 구법 여행을 표현한 작품이 아닙니다. 실연한 여인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이소」가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374행이나 되는 장편이어서 여기서는 짧은 「어부」漁父 한 편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
   漁父見而問之曰 子非三閭大夫歟 何故至於斯
   屈原曰 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是以見放
   漁父曰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世人皆濁 何不淈其泥 而揚其波
   衆人皆醉 何不餔其糟 而醊其釃
   何故深思高擧 自見放
   屈原曰
   吾聞之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安能以身之察察 受 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漁父莞爾而笑 鼓枻而去
   乃歌曰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어부」는 굴원이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한 고뇌와 울분을 토로한 애국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는 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시입니다. 고등학교 한문 교재에 있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그 뜻을 새겨보기로 하지요. 전체의 구성은 어부와 유배된 굴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의 구성을 그렇게 가지고 간 것이고, 굴원의 자문자답으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어부는 가상의 상대로 봐야 옳습니다.

   유배되어 초췌한 몰골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 굴원에게 어부가 유배당한 이유를 묻습니다. 굴원이 밝힌 유배의 이유는 다소 엉뚱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부패했는데 자기 혼자만 깨끗했기 때문에 추방당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술에 취해 있는데 자기 혼자만 맑은 정신이어서 추방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원이 자신의 결백함과 정치적 정당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굴원의 이름은 평平으로, 전국시대 말 초나라 왕족의 후예입니다. 그는 뛰어난 학식으로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6세에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좌도左徒에 오릅니다. 당시 합종연횡合從連橫의 대세 속에서 강국인 진秦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는 반진反秦주의자로서 줄곧 제초齊楚 동맹을 주장했습니다. 친진파親秦派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모함을 받게 되고 유배流配와 해배解配를 거듭하다가 결국 강남으로 추방됩니다. 어쨌든 추방당한 이유가 부패한 친진파의 참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는 주장은 일단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이유에 대하여 어부는 굴원의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를 비판합니다.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사世事의 변화와 추이推移에 능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함을 들어 굴원의 심사고거深思高擧(깊은 생각과 고결한 행동)를 나무랍니다. 여기에 대한 굴원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은 명구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됩니다.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깨끗한 몸을 더럽힐까 보냐고 자신의 고고함을 선언합니다. 비타협적 기개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러한 굴원의 비타협적 선언에 어부는 노를 두드리며 혼잣말처럼 노래하며 떠나갑니다. 이 노래가 이 시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어부가 읊조리는 노래로 되어 있습니다만 굴원이 스스로의 생각을 최종적으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명구로 암송되는 구절이지요.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사실 『초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방금 이야기한 바와 같이 현실과 이상의 갈등이 영원한 삶의 고뇌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초사』가 대표하고 있는 남방 문학의 낭만주의적 정신세계가 갖는 의미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美學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 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강고한 억압 구조 속에서는 그 숨겨진 물리적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들이 문화적으로 길들여짐으로써 맹목이 되어버린 보이지 않는 포섭 기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주목할 수 있는 초기 방식의 하나로서 낭만주의적 관점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대 중국의 혁명과 건설이, 특히 인류사 최대의 드라마라고 하는 대장정大長征이 이러한 낭만주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심증(?)을 지울 수 없기도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중국의 전쟁사는 언제나 남의 패배와 북의 승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의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한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북北에게 졌다(敗)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현재의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물론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 권력을 논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남방의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지요.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정 때에도 손에서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직의 류사오치劉少奇 이론의 마오쩌둥”이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만,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굴원은 동정호 남쪽에서 방황하다 기원전 295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안고 투신하여 59세로 일생을 마칩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詩人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