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어디일까요?

Fact/역사-고전 · 2009. 12. 3. 23:43
▲ 경복궁 향원정에 있는 다리
ⓒ 이정근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어디일까요? 라고 물으면 난감할 것입니다. 혹자는 한강대교이지 않느냐고 되물으면서도 자신 없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는 한강대교가 아닙니다.

근대적인 다리로서 가장 오래된 다리는 1900년 7월에 완공된 한강철교입니다. 그 이후 한강에는 1917년 한강인도교가 건설되었고 뒤이어 광진교가 개통되었습니다. 일제시대의 일입니다. 해방 이후 개발독재시대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비롯하여 방화대교에 이르기까지 27개의 다리가 한강에 건설되었습니다.

▲ 한강대교
ⓒ 이정근
다리는 우리에게 참 편리한 구조물입니다. 다리가 있어야 할 곳에 다리가 없으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발목을 적시거나 다리가 있는 곳까지 돌아가야 합니다. 큰 강물일 경우 배를 타고 건널 수 있지만 다리는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주는 문명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다리를 건너며 생활하고 있지만 다리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리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주는 유형의 산물이면서 무형의 다리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데 다리를 놓아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연결해준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 참 좋은 다리입니다. 하지만 튼튼하게 잘 놓아야 유익한 다리 구실을 할 수 있듯이 부실한 다리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듯이 인간관계마저 망치게 됩니다.

다리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려줍니다. 광한루 오작교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성춘향과 이도령을 생각하게 합니다. 워털루 다리도 떠오릅니다. 영화 <애수>(哀愁, Waterloo Bridge)에서 거리의 여자가 된 비비안 리가 안개 낀 다리에서 서성이다 전사한줄 알았던 연인 로이 크랜(로버트 테일러)를 발견하지만, 로이의 품에 안기기 못하고 강물에 뛰어들던 애수어린 비비안 리의 눈동자가 떠오릅니다.

▲ 경복궁 영제교
ⓒ 이정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하여 맨 처음에 서두른 것이 조선왕국의 법궁 경복궁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경복궁을 건설하는데 근정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을 짓는 일도 중요했지만 궁궐 안에 다리를 놓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에서 근정전에 이르는 중간에 흥례문이라는 중문이 있습니다. 이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에 북악에서 발원한 명당수가 흐르도록 하고 그 위에 영제교를 건설했습니다. 대궐에 들어오는 신하들은 백성을 위해 마음을 깨끗이 씻고 들어오라는 의미가 있으며, 임금 역시 이 다리를 밟고 궁 밖으로 나갈 때는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마음을 씻어야(洗心)한다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경복궁의 영제교는 조일전쟁 때 파괴되어 원형이 보존되지 못했습니다. 1990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과 함께 영제교도 복원했지만 원형을 살리지 못하여 품격이 떨어져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다리가 가장 오래된 다리일까요? 창덕궁 금천교(錦川橋)입니다. 태종 11년(1411년)에 건설되었으니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 창덕궁 금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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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금천교는 궁궐 북쪽에서 발원한 옥천수가 대궐을 휘감아 흐르도록 하여 금천교를 놓았습니다. 다리는 무지개 모양 반구형 2개를 기본으로 돌판(板石)을 깔아 만들었습니다. 남쪽에는 해태상, 북쪽에는 거북상을 배치하여 다리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두 개의 상위에는 나티(작은 용의 얼굴)를 조각하여 잡귀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후 청계천에 광통교를 비롯한 수표교 오간수교 등이 건설되었지만, 원형을 보존하지 못하였거나 제 자리에 있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서울시에서 최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광통교를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 청계천에 복원된 광통교
ⓒ 이정근
광통교는 1410년 만들어졌습니다. 창덕궁 금천교보다 1년 앞섭니다. 원형이 보존되어 있었다면 금천교를 제치고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가 되었을 텐데 일본제국주의의 경성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도로가 개설되고 전차길이 깔리면서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후 청계천을 복개할 때 지하에 묻히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정동에 있던 자신의 계모이자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의 묘를 파헤치고 석물을 뜯어다 다리를 놓아 만인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조선 개국 초기, 개국공신들의 애증이 서려있는 역사적인 다리입니다. 이로부터 광통교는 장안에서 제일 넓은 다리였기에 광통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 장충단공원에서 셋방살이 하고 있는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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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는 청계천에 흐르는 수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1420년(세종2년)에 건설되었고 1760년 (영조 36년)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수표교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장희빈입니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에서 우연히 장옥정을 만나고, 임금 숙종이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궁으로 불러들여 궁녀가 된 여인. 왕의 총애를 받아 세자 균(훗날 경종)을 낳아 희빈으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루었으나 지아비 숙종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여인. 이러한 역사적인 숨결이 숨어있는 수표교가 장충단공원에서 셋방살이 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 창경궁 옥천교
ⓒ 이정근
그렇다면 조선시대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는 무슨 다리일까? 궁금하시죠? 창경궁에 있는 옥천교입니다. 창경궁 정문 홍화문을 지나면 맨 먼저 만나는 다리입니다. 여타의 궁궐처럼 북쪽에서 발원한 옥류천이 대궐을 휘감아 흐르도록 하고 돌로 만들어진 다리입니다.

옥천교는 1483년(성종14년)에 건립된 다리로서 두 개의 홍예와 그 사이에 귀면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리 네 난간에는 돌짐승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원형 보존과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궁궐에 있는 다리로서 유일하게 보물(제38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정사를 살피는 법궁과 정문 사이에 다리가 있는 것은 신하와 임금이 마음을 깨끗이 하자는 상징성 외에 백성의 땅과 임금의 땅을 구획 짓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살곶이다리
ⓒ 이정근
현재 서울에 있는 다리 중에서 제일 긴 다리의 영예는 2559m 방화대교가 차지하고 있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제일 긴 다리는 살곶이다리(箭串橋)입니다. 한양대학교가 있는 행당동과 뚝섬을 잇는 다리로서, 1420년 세종 조에 착공하였으나 78m의 길이를 감당할 수 있는 기술부족으로 완성을 못 보다가 63년 후, 그러니까 1483년(성종14년)에 완공한 다리입니다.

이 다리는 동대문과 광희문을 통하여 도성을 빠져나온 백성들이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고 송파 나루터로 건너가 삼남지방으로 통하던 중요한 다리입니다.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온 과객이 한양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건넜던 다리이며, 조일전쟁 때는 충주를 함락한 일본군이 도성을 치기 위하여 건넜던 다리입니다.

이 다리를 완성시킨 성종은 태종이 잠들어 있는 헌릉 참배 길에 이 다리를 이용했으며 성종 자신도 죽어 상여(대어)에 몸을 싣고 이 다리를 건너 선릉에 묻혔습니다. 그 당시 축조기술의 상징 살곶이다리도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훼손되어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

▲ 강원도 평창에 있는 섶다리
ⓒ 이정근
서울의 다리 중에서 가장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는 다리는 영도교입니다. 영도교는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로서 동대문 밖 숭인방에서 왕십리 쪽에 연결된 다리입니다. 숙부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난 단종이 영월로 가는 유폐 길에 그의 아내 영순왕후와 마지막 작별했던 다리입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함께 강봉된 단종은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궁궐에 남아 있었으나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된 영순왕후는 대궐에서 쫓겨나 숭인방 정업원에 있었습니다. 정업원은 출가하여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대궐의 여자들과 퇴락한 궁녀가 만년을 보내는 사찰 비슷한 곳입니다.

단종이 영월로 유폐 길에 오른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영순왕후는 버선발로 뛰어가 단종을 만났으나 눈으로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단종이 영도교를 건넜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5살이었고 영순왕후 16살이었습니다. 단종은 영월에서 살해되었고 영순왕후는 정업원에서 단종을 기다리다 숨을 거두었습니다.

▲ 안암대교 현판
ⓒ 이정근
다리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한강인도교, 광진교라고 불리던 다리 이름이 언제부터인가 대(大)자가 붙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동대문 밖 신설동과 청량리 사이에 안암천이 흐르는데 여기에 건설된 다리도 안암대교 입니다. 폭 40m에 길이 30m 정도 되는데 대교라는 명판이 붙어있습니다. 대교(大橋)의 의미가 너무나 남발된 느낌입니다. 아마도 과시와 전시행정을 좋아하는 군사문화의 잔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6-05-23 11:31
ⓒ 2006 OhmyNews 이정근(ensagas)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