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 1. 서론

Fact/역사-고전 · 2009. 12. 4. 00:52
1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국어사전 290쪽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천지현황과 I am a dog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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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

   강의에 앞서서 나와 동양고전과의 인연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고전 강독의 주제와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나는 현재 사회과학 입문, 정치경제학 등 사회과학부 강의를 맡고 있지요. 전공이 경제학이구요. 그런데 왜 동양고전 강독 강의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이 이 강의를 듣고자 하는 이유가 도리어 궁금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하고 있는 분야는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아예 동양고전과 인연이 없는 학과도 많기 때문입니다. 강의에 앞서 동양고전에 대한 여러분과 나의 관심을 서로 견주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동양고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그걸 동양고전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려서 할아버님의 사랑방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 사랑채에 불려간 것이 초등학교 6학년까지였어요. 6학년 때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지요. 그러나 그때의 붓글씨나 한문 공부란 것은 할아버님의 소일거리였다고 해야 합니다. 나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지요. 너무 어렸습니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층의 정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의 대학 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절망적이었습니다. 내가 59학번이거든요. 휴전 협정이 53년에 체결되었지요. 일제 식민지 잔재에서부터 해방 후의 예속적 정치권력, 부정과 부패 그리고 한국전쟁의 처참한 파괴와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환경에서 대학 생활을 하게 되지요.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유일한 탈출구를 근대화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근대 기획’이 우리 사회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문화와 유럽 문화를 다투어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치장하려고 하였지요.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대학 사회와 대학 문화가 당연히 더 적극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지요.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 문화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

   내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성은 동시에 우리 시대에 대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근본적 담론 자체가 실종된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아직도 그러한 반성적 정서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보다는 오히려 덜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방獄房에 앉아서 생각한 것이 동양고전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건 훨씬 더 현실적인 이유였습니다만 당시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지요. 물론 경전과 사전은 권수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집에서 보내주는 책은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 읽은 책을 반납해야 그 다음 책을 넣어주는 식이었어요. 멀리 서울에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책 수발을 받는 나로서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동양고전은 한 권을 가지고도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이지요. 『주역』周易은 물론이고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도 한 권이면 몇 달씩 읽을 수 있지요.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다는 교도소 규정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동양고전 몇 권을 한 권으로 제본해서 보내주도록 아버님께 부탁하여 받기도 했습니다. 나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이처럼 감옥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또 교도소의 현실적 제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국어사전 290쪽

   나의 동양고전 공부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감옥에서 함께 고생하셨던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입니다. 노촌 선생님은 벽초 홍명희, 위당 정인보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분입니다. 작고하신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박사와 동학 고우로 학문적으로 같은 반열에 드시는 한학漢學의 대가입니다. 이 노촌 선생님과 내가 같은 감방에서 무려 4년 이상을 함께 지내게 됩니다. 같은 방에서 하루 24시간을 4년 이상 함께 지냈다는 것은 내겐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에 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최근에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라는 책을 출간하시기도 하였고, 노촌 선생님의 일대기가 KBS의 <인물현대사>에서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노촌 선생님으로부터 내가 배우고 깨달은 것이 동양고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생각하면 노촌 선생님과 한방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 사회, 일제 식민지 사회, 전쟁, 북한 사회주의 사회, 20여 년의 감옥 사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사회를 두루 살아오신 분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시대의 양量이 얼마만큼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이 그 삶의 정직성을 판별하는 기준이라고 한다면 노촌 선생님은 참으로 정직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삶은 어느 것 하나 당대의 절절한 애환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의 한 가지를 예로 들자면 노촌 선생님을 검거한 형사가 일제 때 노촌 선생님을 검거했던 바로 그 형사였다는 사실이지요.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일파들이 오히려 반민특위를 역습하여 해체시켰던 해방 정국의 실상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지요.

   노촌 선생님께서는 옥중에 계시는 동안 가전家傳되던 의병 문헌을 들여와 번역을 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서 번역 일을 도우면서 한문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번역한 초고가 출소하신 후인 19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내가 그 엄청난 동양고전을 비교적 진보적 시각에서 선별하여 읽을 수 있었던 것이나 모르는 구절을 새겨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노촌 선생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공감되는 부분이나 앞으로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표시해두었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같이 공부하고자 하는 예시 문안의 대부분이 그때 표시해두었던 부분인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하게 될 동양고전 강독은 사실 감옥에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촌 선생님의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촌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서 선생님의 일대기인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에 발문을 썼는데, 그 끝부분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동안 노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음을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조금도 적조한 느낌을 갖지 않고 있다. 문득 문득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국어사전을 찾을 때면 일부러라도 290쪽을 펼쳐 본다.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 유연함이었다.

지금도 물론 나의 가까이에 국어사전이 있고 자주 사전을 찾고 있다. 찾을 때면 290쪽을 열어 보고 그 시절의 노촌 선생님을 만나뵙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책의 출간을 기뻐한다.
 




화두話頭와 ‘오래된 미래’

   앞으로 함께 읽게 될 고전의 예시 문안들은 동양고전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우 초보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양고전을 섭렵한다는 것은 평생 걸려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5천 년 동안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문명이 세계에는 없습니다. 이집트만 하더라도 고대 문자 해독이 불가능합니다. 해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 고대 문헌은 마치 현대 문헌처럼 친숙하게 읽히고 있습니다. 전승과 해독에 있어서 세계 유일의 문헌입니다. 그 규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지요. 고전을 읽겠다는 것은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격입니다.

   특히 이 고전 강독 강의는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강의를 하는 나 자신부터 비전공자이구요.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고전에서 문안을 선정했습니다. 『시경』·『서경』·『초사』에서 문안을 뽑기도 하고 『주역』을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과 『중용』의 독법讀法과 함께 송대宋代 신유학新儒學에 대한 논의를 추가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회 변혁기의 사상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회 변혁기는 사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담론談論이 주류를 이룹니다. 주周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의 종법宗法 질서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적 목표 아래 군사력, 경제력, 사회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무한 경쟁 시대입니다. 주 왕실은 지도력을 잃고 대신 중원을 호령하는 패국覇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춘추시대에는 12제후국으로, 전국시대에는 다시 7국으로 그리고 드디어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역사의 격동기입니다.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axial era)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오늘과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과 이러한 열망을 사회화하기 위한 거대 담론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고전 강독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 담론을 재구성하는 과제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특히 그것이 관철하고자 하는 세계 체제와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춘추전국시대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목표가 되고 있는 무한 경쟁 체제라는 점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담론을 통하여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명론文明論 그리고 최대한의 사회 건설 담론이 개화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전 강독은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에 관한 근본적 담론을 주제로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이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입니다. 이 화두는 물론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한 것이지만,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서보다는 오히려 현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라고 하는 것이지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하고 그 모델을 현재와 현실 속에 실현하려고 하는 소위 건축 의지建築意志가 바야흐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지적 상황입니다. 설계 도면을 파기하는 것이지요. 모델을 미리 설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천을 받아오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교조적이거나 관념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입니다.

   ‘관계론’에 대해서는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From Substance-centered Paradigm to Relation-centered One, 『경주문화엑스포 국제학술회의 논문집』)라는 글에서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해두기도 했습니다. 이 서론 부분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 증식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근대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의 운동 원리가 관철되는 체계입니다. 근대사회의 사회론社會論이란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들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 주제를 가지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강독하게 될 예시 문안은 대체로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를 재조명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 강독은 결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당면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란 책을 알고 있지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verg Hodge 교수가 인도 서북부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책의 부제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Learning from Ladakh)입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oxymoron)입니다. 작은 거인(little giant)이나 점보 새우(jumbo shrimp)와 같은 모순된 어법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 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천지현황과 I am a dog

   앞으로 고전의 원문을 함께 읽고 해석하는 형식으로 강의가 진행됩니다. 한자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대체로 한자나 한문을 공부하지 않은 세대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한글 세대인 나 자신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나 역시 한문은 전공과도 멀고 소양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고전 강독에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고전으로부터 당대 사회의 과제를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론의 중심이 됩니다. 물론 그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고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또 관련된 문헌 연구도 필요하겠지만 이 부분은 최소한으로 한정할 작정입니다. 고전 원문은 그러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입니다.

   욕심입니다만 고전 예시 문안을 여러분이 다 암기하면 좋지요. 암기는 못하더라도 혼자서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자나 한문 공부는 여러분에게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문 공부에 왕도는 없습니다. 다른 어학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만 지름길이나 편법은 없습니다.

   옛날에 서당에서 공부하던 방법은 참으로 우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무조건 암기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서당에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록지대자야’땅鹿之大者也가 그 한 예입니다. 미록지대자야란, 미땅는 사슴 중의(鹿之) 큰놈이다(大者也)라는 뜻이지요. 미땅는 ‘큰사슴 미’ 자거든요. 당연히 땅, 鹿之, 大者也라고 띄어 읽어야 맞지요. 그런데 아침에 책방 도령의 글 읽는 소리를 듣자니 땅鹿, 之大, 者也로 읽더라는 겁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 도령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땅, 鹿之, 大者也로 바르게 끊어서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그제야 깨닫는 그런 비능률적인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이 영어 공부 시작한 지가 최소한 10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 논문을 쓰거나 영시英詩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과거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 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시작詩作 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捷徑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왕 내친김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과거의 어학 교육은 어학을 위한 교육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받은 영어 교과서는 I am a boy. You are a girl.로 시작되거나 심지어는 I am a dog. I bark.로 시작되는 교과서도 있었지요.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누님들의 영어 교과서를 가져오라고 해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는 길게 탄식하셨지요.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교과서와는 그 정신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천지현황과 “나는 개입니다. 나는 짖습니다”의 차이는 큽니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기 위한 어학 교재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이 책에는 아마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문장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한자나 한문 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학보다는 그것에 담겨 있는 내용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기만 하면 어학은 자연히 습득되리라고 봅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암기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원문을 해독하고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면 금상첨화지요. 그러나 일단은 고전에 담겨 있는 내용을 이해하고 그 뜻을 재조명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

   과거의 사상과 현대의 사상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는 오래된 과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상의 시간적인 존재 형식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상은 시간적인 존재 형식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존재 형식도 갖습니다. 동양이라는 어휘 그 자체가 공간적 의미입니다. 서양에 대한 동양이란 뜻입니다.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시간적 존재 형식은 물론이고, 그것의 공간적 존재 형식을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동양 사상의 경우 그것의 공간적 존재 형식에 주목하는 경우 우리는 대단히 완고한 선입관에 갇히게 될 위험이 큽니다. 동양 사상을 특수한 것, 전근대적인 것, 그리고 때로는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는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무엇과 무엇의 차이를 비교하는 방식의 접근 방법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시각 즉 비교하고 그 차이를 드러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은 가장 본질적인 것, 핵심적인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러한 경우보다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그 표현에 있어서의 차이, 즉 지엽적인 부분이 비교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부분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본질적인 차이가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른바 차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의 본질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지금 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을 일어서게 하고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본질적인 것이 드러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어떤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그것의 독자성과 정체성을 최대한으로 수용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대등한 비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나 차이는 원천적으로 비대칭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를 보려는 시각은 결국 한쪽을 부당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기껏해야 지엽적인 것이나 표면에 국한된 것을 드러내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결국 차별화로 귀착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논리도 없지 않습니다. 일단 차이를 인식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통합과 공존을 모색한다는 논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존은 차이가 있든 없든 상관없는 것이지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공존이 필요한 것이지요. 어떠한 경우든 차별화는 본질을 왜곡하게 마련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점을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時空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關係網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동양 문화와 서양 문화를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전 강독의 화두인 관계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내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유의해주기 바랍니다.








고전 독법의 참여점(Entry point)

   동양 문화라는 개념은 서양 문화를 기준으로 하여 만들어진 조어造語입니다. 세계를 주도하는 문화는 서양 문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양 문화는 그 자체로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문화 일반의 준거準據가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 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주변적 위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 문화가 조명되는 구도이지요.

   근대사는 서구 문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 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대 세계의 기본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현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를 서양 문명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還元主義라는 반론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근대사가 서양 문명의 기본적 구성 원리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오늘날의 패권적 세계 질서 역시 서구의 근대사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더구나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조명해내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일련의 모색 과정에 우리의 고전 강독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서양 문화의 기본적 구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 명제(合)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흄과 칸트의 견해입니다.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 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과학과 종교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학은 진리를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은 선善을 추구합니다. 과학 정신은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의 갈등을 조정합니다. 서양 문명은 과학과 종교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구조이며 이처럼 조화된 구조가 바로 동아시아에 앞서 현대화를 실현한 저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모순에 관한 역사적 사례는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기독교 교리를 벗어난 과학자들이 이단으로 박해를 받았지요. 여러분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전에 지동설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갈릴레이가 재판정에서 지동설을 포기하고 법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말은 지금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과학에 대한 억압이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이 인간적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신무기나 신상품의 생산 기술이 과학 발전의 동기가 되고 있으며, 과학은 다시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높은 범죄율, 생명 경시 풍조는 종교의 역할이 무너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對立面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분자 화합물, 전자파 오염 물질 등으로 말미암아 생태계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과학은 희망을 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 제기의 형태를 띠면서 동시에 서양 문명의 구조 자체의 모순과 불완전성에 대한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서구 문명의 기본적인 구조, 즉 과학과 종교라는 이원적 구조와 모순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 이성에 대한 종교의 지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그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패권 국가의 일방주의적 세계 전략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첨예화하고 있습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 말하자면 대립면을 상실한 질주입니다. 자기 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존재론의 필연적 귀결입니다. 패권주의적 세계 전략은 자기 증식 운동의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러한 전략은 결국 위기를 심화할 뿐이라는 것이 모순이지요. 이를테면 패권주의적 질주는 자기의 목표를 부단히 허물어버리는 모순 운동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담론들이 동양과 서양의 사회 구성 원리에 주목하는 까닭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근대사회, 나아가서는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로부터 연유한다는 반성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서구 문명의 구성 원리에 대한 반성이 주목하는 것이 바로 동양적 구성 원리입니다.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人文主義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순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인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신중해야 합니다. 최근 동양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은 이와 같은 성찰적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가 인문주의인 것은 사실이며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는 구조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신대륙에 대한 콜럼버스의 관심입니다. 과도하게 축적된 초국적 자본이 자본주의 시장권에서 분리되어 있던 동구권과 러시아 대륙에 이어서 다시 광범한 중국 시장에 쏟는 관심, 이것이 주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死活的 공세攻勢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대립면을 상실한 일방적 질주에 다름 아니지요. 미국과 유럽이 주도해왔고 또 당분간 주도해갈 세계 질서 역시 동일한 모순 과정을 답습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

   서구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성과 중립성을 주장하는 반론이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을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entry point)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동양적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우리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不忍人之心),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溫故知新)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언급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停滯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버의 동양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적 의미 이상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곳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는 한마디로 적게 소비하고 많이 저축하여 자본 축적을 이루어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라는 최선의 사회 제도를 가능하게 했다는 논리입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금욕주의가 바로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라는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양적 현실주의에는 바로 이 합리적 제어 장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근검절약이라면 오히려 거꾸로 된 주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낭비 체제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양 사상이 비록 윤리적 차원의 현실주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실주의가 곧 현세에 대한 탐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기서 자본주의가 과연 프로테스탄티즘의 근검절약에 의해서 성립하고 발전해왔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기준으로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이 근본에 있어서 비대칭적 구조가 아닌가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를 개진한 것이기보다는 자본 논리를 합리화하는 맥락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 저급한 이해의 층위를 드러냈을 뿐이지요. 다만 그처럼 예찬한 자본 축적 과정이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과연 어떠한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베버는 최소한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양 사상이 비종교적이며 현실주의적이라는 점은 베버가 옳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주의를 현세적 향락과 체면의 문화로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 무리인 것이지요.

   동양 사상은 물론 사후死後의 시공時空에서 실현되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세를 신의 소명(Beruf, Calling, Vocation)과 직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단선적인 신학적 사유 체계가 아닙니다. 비종교적이고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버의 주장이 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형식주의와 체면에 대하여 지적한 것 역시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담겨 있는 의미를 온당하게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체면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관계를 내용으로 합니다. 그런 점에서 체면은 사회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형식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를 일정하게 사회화해야 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일정한 형식이 요구됩니다. 어떤 형식을 부여하여 전범典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종교적 형식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형식은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의 부정적이고 경직된 측면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베버의 체계에는 동양 사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관계론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애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beaten pass)입니다. 도道 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首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착?은 머리카락 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입니다. 수首는 물론 사람의 머리 즉 생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도의 어원에 대한 논의도 많습니다. 도道는 도導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경우의 도導는 이민족의 머리를 손에 지니고 재액災厄을 막으며 선도先導하여 적지敵地로 나아가는 의미라고 합니다. 대단히 무서운 글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도道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된 예는 『서경』書經에 와서야 처음 그 용례가 발견되고 있으며, 도의 의미를 철학을 의미하는 이른바 존재에 대한 인식 방식이나 나아가 형이상학적 의미로 발전시킨 것은 장주莊周 일파의 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원이나 용례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도는 그것이 철학이든 도덕이든 어느 경우에나 도로와 길의 의미입니다. 도는 길처럼 일상적인 경험의 축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의 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이 조각은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묵상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묵상적인 자세가 상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이미 기성의 형태로 우리의 삶의 저편에 또는 높은 차원에 마치 밤하늘의 아득한 별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하고 관조하는 구도 속에 진리는 존재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입니다. 진리가 서양에서는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임에 반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도재이道在邇, 즉 도는 가까운 우리의 일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최고의 질서란 그것의 상위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자연 이외의 어떠한 힘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연에 대하여 지시적 기능을 하는 어떠한 존재도 상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란 본디부터 있는 것이며 어떠한 지시나 구속을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것(self-so)입니다. 글자 그대로 자연自然이며 그런 점에서 최고의 질서입니다.

   질서라는 의미는 이를테면 시스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장場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자력장磁力場, 중력장重力場, 전자장電磁場과 같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체계이며 질서입니다. 장은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조화 통일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조화 통일됨으로써 장이 되고 그래서 최고의 어떤 질서가 됩니다. ‘관계들의 총화’(the ensemble of relations)입니다. 중요한 것은 장을 구성하는 개개의 부분은 부분이면서 동시에 총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집합集合과 장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은 ‘부분적 총체들의 복합체’(the complex of partial totalities)이며 개개의 부분이 곧 총체인 구조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장의 개념이 3차원의 공간적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생멸生滅 유전流轉이 이루어지는 4차원의 질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학에서 자연이란 자원資源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對象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무궁한 시공으로 열려 있는 질서입니다. 우주宇宙라는 개념도 우宇와 주宙의 복합적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宇는 물론 공간 개념입니다. 상하사방上下四方이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주宙는 고금왕래古今往來의 의미입니다. 시간적 개념입니다. 무궁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生氣의 장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生住移滅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마을에서는 도자기가 익고 난 다음 가마를 열면 맨 먼저 도공이 망치를 들고 들어가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깨트린다고 합니다. 열을 잘못 받아서 변색이 되었거나 비뚤어진 것은 가차 없이 망치로 깨트리는 거지요. 예술가 특유의 고집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문에 쌓이는 도자기 파편으로 산천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그릇이 진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생성의 질서가 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진흙(空)이 그릇(色)이 되고 그릇은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主我)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 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 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근대사회의 신념 체계인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는 물론이고,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서구의 인본주의人本主義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인간뿐만이 아니라 우주의 어떠한 지점도 결코 중심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특정 분야의 불균형적인 자기 확대가 곧바로 다른 것과의 생성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도성장과 과잉 축적이 이러한 생기의 장을 파괴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생기의 장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현실적인 삶에서 욕망의 절제로 나타납니다. 절용휼물節用恤物,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삶의 철학으로 나타납니다.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맹자』) 것이지요. 동양 사상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학에서는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존재하고 있는 것 중의 최고最高, 최량最良의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일반적으로 동양 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주의라고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인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성人性의 고양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사회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고 모든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부에 어떤 초월적 가치를 상정하고 그 아래에 인간적 가치를 배치하는 그런 구도가 아닙니다. 최고의 가치가 바로 사람과 관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의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成)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동양적 가치는 어떤 추상적인 가치나 초월적 존재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동양 사상의 핵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인仁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인이 무엇인지는 한마디로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논어』에서 그것을 묻는 제자에 따라 공자는 각각 다른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만, 인仁은 기본적으로 인人+인人 즉 이인二人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人間, 즉 인人과 인人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혹시 여러분 중에 간間에다 초점을 두는 ‘사이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중심을 두는 개념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존재’와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여하튼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습니다만 요컨대 동양적 인간주의는 이처럼 철저하게 관계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면 나의 자식과 남의 자식, 나의 노인과 남의 노인을 함께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는 것(成人之美)을 인仁이라 합니다. 자기가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세워야 한다는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禾)을 함께 먹는(口)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皆)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言)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 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모순의 조화와 균형

   서양 문명이 과학과 종교를 두 개의 축으로 하는 구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 사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나타나는 그러한 모순이 없다고 했지만 이것은 동양 사상의 내부에 모순 구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中庸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동양 사상의 조화와 균형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견제입니다. 유가는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적입니다. 따라서 유가적 가치는 인문 세계人文世界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 문화 생산자로서의 인간의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극 의지는 하늘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부리는 이른바 감천역물勘天役物 사상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그 오만한 지점에 인간의 좌절과 인성의 붕괴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事前에 견제하고 사후事後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노장老莊을 중심으로 하는 도가는 기본적으로 자연주의입니다. 자연을 최고, 최량의 질서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이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그것을 입증하고 있고 지구과학의 역사가 임상학적으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무욕無爲無欲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것의 독선과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바로 도가입니다. 유가와 도가는 이로써 서로 견제하고, 이로써 중용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은 비단 동양 사상에 관한 설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상이란 다른 사상과의 모순 관계에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서의 체계가 완성된다는 원칙론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존재存在와 인식認識 일반의 존재 형식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그 존재 형식에 내재하는 관계론적 구조의 확인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동양 사상은 과거의 사상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사상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뛰어난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론 부분에서 고전 강독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짧은 강의 시간으로는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끝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처음이 그렇듯이 각오가 지나쳐서 우리는 지금 너무 엄청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친김에 하나만 더 합의하고 시작하지요. 고전 강독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미래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대한 객관적 전망이 아니라 자기의 입장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망이 전망의 형식을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 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한 그것이 아무리 새로운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새로운 담론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구성 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중국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와 지양에 의하여 과연 새로운 문명이 모색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근대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성 원리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사적 과제와 직결되는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민족 문제이면서 동시에 문명사적 과제일 뿐만 아니라, 분단과 냉전 질서의 청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 극복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적 주제로서의 화和와 동同에 관한 논의이기도 합니다. 화동 논의和同論議는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심화시켜가도록 하겠습니다. 동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同의 논리를 화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를 성찰하고 21세기를 전망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 문제를 세계사적 과제와 연결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전 강독을 진행하면서 적절한 곳에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