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주역(周易)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경經과 전傳
-효爻와 괘卦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위位와 응應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지천태地天泰
-천지비天地否
-산지박山地剝
-화수미제火水未濟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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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역(周易)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물 긷는 그릇이라느니 안경이라느니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 것 같군요. 아무튼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이라고 명명하여 유가 경전의 하나로 그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왕필王弼도 『주역』과 『노자』를 회통會通하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 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귀신이 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귀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의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올라갑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내려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 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나 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아마 복도가 캄캄해서 올라가는 버튼을 잘못 눌렀나 보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올라간다는 여자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여자 귀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귀신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庶人)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경經과 전傳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經)를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가 해설한(傳)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卜筮迷信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해설이 있기 이전의 『주역』이 복서미신의 책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주역』의 경, 즉 텍스트 자체가 미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미신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점占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자의성을 지적하여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괘卦의 구성과 괘사卦辭, 효사爻辭에 동양적 사고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공자학파의 철학적 해석 방식뿐만 아니라 경 속에 담겨 있는 관계론에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주역』의 경은 8괘,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8괘를 소성괘小成卦라 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大成卦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傳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뜻으로 십익十翼이라 합니다. 공자의 저작이라고 전하지만 대체로 훨씬 후대인 진한秦漢 초기의 공동 창작으로 추측됩니다.
여러분이 혹시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효爻와 괘卦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8괘八卦를 낳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8괘 중에서 태극기에 있는 네 개의 괘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를 효爻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효와 괘를 중심으로 『주역』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괘는 ‘걸다’라는 뜻입니다. 걸어놓고 본다는 뜻이지요. 괘에다가 어떤 의미를 담아놓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를 들어봅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고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여 이루어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상사태 또는 공황 상태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물이 사건으로 발전하고 사건이 사태로 발전하는 여러 가지의 경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효와 괘를 이러한 사물 또는 사물의 변화를 담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효爻가 사물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괘卦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난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각 구성 부분은 어느 경우든 사물, 사건, 사태와 같은 범주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역』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범주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연관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세계의 변화를 추상화하고 단순화한 법칙 즉 간이簡易이기 때문에 세계의 복잡한 연관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위에서 지적했듯이 각 구성 부분을 여러 범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판단 형식은 대단히 중층적이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판단 형식에 비하여 훨씬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서구적 사고 양식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서구적 판단 형식과 주역의 판단 형식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사회관이 있습니다. 사회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인식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관과 인간관 등 우리가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고 있든 익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인식 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다” 또는 “인간은 이기적이다”와 같은 인식 틀을 봅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분석함으로써 개인의 집합인 사회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틀입니다. 사회가 개인의 집합이라고 하는 경우 인간이 집합 속에 있든 개인으로 있든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면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장 골목에 있건 가정에 있건 변함없이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존재론의 폭력적 단순성이라 할 만한 것이지요. 이것은 『주역』의 구성과 비교하자면 효爻로써 소성괘를 설명하고 나아가 대성괘마저도 효의 단순한 집합으로 설명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1차원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와는 달리 이를테면 계급적 관점으로 사회 구성을 인식하는 소위 좌파적 인식 틀도 있습니다. 신분, 민족성, 경제구조 등 다양한 인식 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인식 틀을 조합하여 새로운 틀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사회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틀을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효와 괘를 설명하면서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 예를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단순한 인식 구조를 반성하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이러한 우리들의 인식 구조에 비하여 『주역』의 판단 형식은 객관적 세계의 연관성을 훨씬 더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주역』에는 8개의 소성괘와 64개의 대성괘가 있습니다. 이 64개의 대성괘마다 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마다 효사가 붙어 있습니다. 『주역』의 경經은 8괘, 64괘, 괘사, 효사의 네 가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경의 양만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역』을 64개의 대성괘를 중심으로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판단 형식이 바로 이 대성괘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대성괘에는 그 괘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고 괘 전체의 의미를 나타내는 괘사가 달려 있으며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효와 그 효를 설명하는 효사가 달려 있습니다. 이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 범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적 범주로 이해하는 경우 우리는 칸트나 헤겔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주들과는 그 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범주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 형식의 단순함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주역』을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만 최소한의 개념만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효()는 하늘(天) 또는 남자(男)를 나타내고 음효()는 땅(地) 또는 여자(女)를 나타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세 개의 효로 한 개의 괘를 만듭니다. 세 개의 효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세 개의 효로 이루어진 괘를 소성괘라 하고, 소성괘 두 개가 대성괘가 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집니다. 효의 명칭은 아래에서부터 초효初爻, 이효二爻, 삼효三爻, 사효四爻, 오효五爻, 상효上爻로 읽습니다. 양효를 구九, 음효를 육六으로 씁니다. 그래서 초효가 양효인 경우에는 그것을 초양初陽이라 읽지 않고 초구初九라 읽습니다. 그리고 이효가 음효인 경우에는 이음二陰이라 읽지 않고 이륙二六이라 읽습니다.
양을 구라고 하고 음을 육이라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9가 홀수이고 6이 짝수여서 각각 양과 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정도 이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제1효를 초효라 하고 제6효를 상효라 합니다. 그래서 초륙初六, 상구上九 등으로 씁니다.
8괘의 모양·이름·작용·형상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8괘의 이름과 성격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역』 독법의 기본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분들은 이 8괘를 손가락으로 자유자재로 표현했습니다. 엄지손가락은 손가락이 한 개이지만 그것을 손가락 세 개로 칩니다. 이 엄지를 나머지 검지, 중지, 무명지 이 세 개의 손가락과 연결하거나 뗌으로써 8괘를 표현합니다.
건괘乾卦()는 엄지와 나머지 세 손가락을 전부 연결하여 표시합니다. 그리고 읽기는 건삼련乾三連으로 읽습니다. 건괘는 효 세 개가 모두 연결된 모양 즉 양효 세 개라는 뜻입니다.
태괘兌卦()는 엄지와 중지, 무명지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검지는 떼어놓습니다. 읽기는 태상절兌上絶이라 읽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효만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즉 제일 위에 있는 효가 음효이고 나머지 두 효는 양효라는 뜻입니다.
감괘坎卦()는 중지와 엄지가 연결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검지와 무명지는 엄지와 떨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감중련坎中連이라 읽습니다. 감괘는 가운데만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지요. 가운데 효가 양효라는 뜻이지요. 부처님의 손가락을 표현할 때 “감중련한 손가락”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괘离卦()는 엄지와 검지, 무명지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중지만 엄지와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허중离虛中이라 읽습니다. 이괘는 가운데가 비었다는, 즉 가운데가 음효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괘들을 손가락으로 한번 표시해보세요. 진하련震下連(), 손하절巽下絶(), 간상련艮上連(), 곤삼절坤三絶() 등으로 읽습니다.
이 8괘 하나하나는 각각 음양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양을 결정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합니다.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효 중에서 양효가 홀수이면 양괘, 음효가 홀수이면 음괘가 됩니다. 셋 중에서 언제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인 집합에서 결국 여자의 의견이 관철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남자 2대 여자 1의 구성이기 때문에 결합의 주도권은 당연히 여자가 행사하고, 결합된 2가 결정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반대로 여자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인 집합에서는 남자가 주도권을 잡고 전체 성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괘의 음양을 결정하는 방법이 매우 실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성괘는 상하 두 개의 소성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괘를 상괘上卦 또는 외괘外卦라 하고 아래 괘를 하괘下卦 또는 내괘內卦라 합니다.
대성괘는 두 소성괘의 성질, 위치에 따라 그 성격과 명칭이 정해지기도 하고 두 소성괘가 이루어내는 모양에서 명칭과 뜻을 취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괘頤卦는 간艮()과 진震()을 상하로 겹쳐놓은 것이지요. 이괘의 모양은 입니다. 그 모양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하의 입술과 그 가운데 치아가 있는 형상입니다. 그 형상이 턱과 같아서 괘의 이름을 이頤라 하고 그 뜻을 기를 양養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방법이나 그 이름에 담는 뜻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괘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간은 산山이고 진은 뢰雷입니다. 산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입니다. 땅속에 잠재력을 묻어두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양養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지요. 진괘晉卦는 곤괘坤卦() 위에 이괘离卦()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진괘의 모양은 입니다. 곤은 땅(地)을 의미하고 이는 불(火)을 뜻합니다. 땅 위에 불이 있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이 진괘는 지평선에 해가 뜨는 형상으로 풀이하여 이름을 진晉으로 하고 그 뜻을 나아갈 진進으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역』에는 대단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位와 응應
『주역』 사상의 핵심을 관계론이라고 하는 경우 지금 설명하려는 위位와 응應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위와 응 이외에도 『주역』의 관계론을 읽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만 위와 응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初), 2, 3, 4, 5, 6(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 중에서 1, 3, 5는 양효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의 자리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失位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거나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가 실위입니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 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도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념은 없습니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地氣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땅에 건물을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도쿄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위位와 응應에 대해서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몇 가지 개념을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중中의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 중에서 제2효와 제5효를 ‘중’이라 합니다. 2효와 5효는 각각 하괘와 상괘의 가운데 효입니다.
『주역』에서는 이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여러분도 강의 시간에 질문하라고 하면 묵묵부답인 경우가 많지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것이지요. 중간은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산전수전을 두루 겪으신 노인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키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물론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내가 무기징역 받고 감옥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헌옷 입고 햇볕에 앉아 있을 때의 심사가 무척 편했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비록 편안하고 한적한 달관達觀의 공간이긴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매우 적막한 처소處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막상 가장 위에 있는 제6효인 상효는 물러난 사람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 즉 중中이 득위했는가 득위하지 못했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음 2효와 양 5효는 중이면서 득위했기 때문에 이를 중정中正이라 합니다.
중정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칩니다. 아마 여러분은 ‘중정’이란 현판이나 붓글씨를 많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중정이지만 양 5효를 더욱 중요하게 봅니다. 음 2효가 하괘를 주도하는 효임에 비하여 양 5효는 상하 괘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는 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응應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위位가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응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효가 다른 효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괘의 1, 2, 3효와 상괘의 1, 2, 3효가 서로 음양 상응 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응입니다.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이다”라고 합니다. 실위도 허물이고 불응도 허물이어서 좋을 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를 못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지요.
위보다 응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개념으로 비比가 있습니다. 이 비는 인접한 상하 두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응이 하괘와 상괘 간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 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에 비해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하고 시간대가 짧습니다. 그러나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에서 『주역』 독법의 몇 가지 개념을 소개했습니다만, 그나마 너무 간략한 설명이었습니다. 『주역』의 주석서註釋書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주역』 이해에 더 장애가 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관계론의 재조명이라는 강의 목적의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것만을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효의 명칭에 관한 것입니다.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음효 위에 있는 양효 즉 양재음상陽在陰上인 경우를 거據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控制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는 승承이라 합니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이라 하고 그 의미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 위에 있을 때 즉 음재양상陰在陽上일 때 승乘이라 호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습니다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位)와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應과 비比, 그리고 괘와 괘의 관계 등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일 정도로 매우 왜소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事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주역』의 이러한 관계론적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자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공자학파가 십익을 이루어놓음으로써 복서미신의 책이 비로소 철학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장의 서두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점占은 상相이나 명命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을 엿보려는 것이 아니라 의난疑難을 당하여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이 복서卜筮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역』 사상에 담겨 있는 관계론의 철학적 내용을 특정 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 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 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주역』周易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와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하였습니다.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제 대성괘를 예시 문안으로 읽겠습니다. 그 구성이 어떤지, 그리고 괘사와 단전彖傳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천태地天泰
64개 대성괘 중에서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중 한 개의 괘는 경經과 전傳을 온전하게 다 읽어보겠습니다. 『주역』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괘는 핵심적인 의미만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주역』의 효사爻辭, 상전象傳의 해설은 주로 왕필의 주를 참조하고 주자본朱子本의 풀이도 참조했음을 밝혀둡니다.
먼저 지천태괘를 보기로 하지요. 우선 여러분이 지천태괘를 그려보시지요. 천天() 위에 지地()를 올려놓은 모양이고, 괘의 이름은 태泰입니다.
이제 이 태괘의 경과 전을 모두 소개합니다. 먼저 괘사입니다. 이 괘사는 물론 경입니다.
泰 小往大來 吉亨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온다. 길하고 형통하다.
단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彖은 판단한다는 뜻이며 단전은 물론 경이 아닙니다. 전입니다.
彖曰 泰 小往大來 吉亨 則是天地交 而萬物通也 上下交 而其珍也 內陽而外陰 內健而外順 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
단에 이르기를,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기 때문에 길하고 형통하다. 이것은 천지가 만나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하가 만나고 그 뜻이 같다. 내괘는 양이고 외괘는 음이다. 안은 강건剛健하고 바깥은 유순柔順하다. 군자가 안에 있고 소인이 바깥에 있다. 군자의 도는 장성長成하고 소인의 도는 소멸消滅한다.
『주역』의 풀이에서 대大는 양陽을 의미하고 소小는 음陰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함의는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天地交泰 后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왕자는 이 괘를 보고(后以) 천지의 도에 천지(사람)의 마땅(正義)함을 보태어 대성하게 하고 인민을 (태평하게) 인도해야 한다.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다음 예시 문안인 천지비괘天地否卦는 이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지천태괘는 역지사지와 같은 의미입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라는 금언이 바로 이 태괘의 사상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역지사지가 태화의 근본입니다.
경복궁에 가본 사람은 기억할 것입니다. 교태전交泰殿이 있습니다. 중전 마마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흔히 중전이 교태嬌態를 부려 임금과 침소에 드는 곳이라고 오해합니다만, 경복궁 교태전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天地交泰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천지가 뒤바뀐 모양을 태화의 의미로 풀이하는 까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나라는 이미 이야기했듯이 쿠데타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천태괘를 태화의 괘로 풀이하는 것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풀이라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혁명의 괘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지천태괘를 이러한 혁명의 관점으로 읽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효사를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도록 합니다. 한 개인의 일생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도 좋고 전위 조직前衛組織의 건설과 개혁의 전개 과정을 상정하고 읽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국가의 흥망성쇠라는 일반적 의미로 읽어도 좋습니다.
初九 拔茅茹 以其彙 征吉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
띠풀을 뽑듯이 떨기로 가야 길하다는 뜻입니다. 띠풀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풀입니다. 한 포기를 뽑으려 하면 연결되어 있는 줄기가 함께 뽑힙니다. 모든 시작은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창건이든, 회사 설립이든, 또는 전위 조직의 건설이든 많은 사람들의 중의衆意를 결집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형제와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象曰 拔茅征吉 志在外也
띠풀을 뽑듯이 함께 나아감이 길한 까닭은 뜻이 밖에 있음이다.
이것은 효(初九)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소상小象 즉 전傳입니다. ‘발모정길’拔茅征吉의 까닭은, 즉 띠풀을 뽑듯이 가야 길하다는 의미는 그 뜻하는 바가 바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뜻하는 바가 바깥에 있다는 것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자기 집단의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대의와 정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도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九二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 得尙于中行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는 사람도 포용하고,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으며 붕당이 없으면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으리라.
제2효인 이 효는 시간적으로 아직도 초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그 세를 계속해서 불려 나가야 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제2효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 오랑캐 족속을 포섭해서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간다. 먼 데 남아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친구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면 중용의 덕행을 숭상함으로써 그를 얻는다”는 해석도 나와 있습니다.
제2효의 의미는 다음의 소상小象에서 풀이하고 있듯이 그 뜻을 널리 천명하고(光), 그 세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가 기본입니다. 따라서 오랑캐에 국한하기보다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받아들이며,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듯이 초기 단계에서 흔히 요구되는 과단성도 잃지 말아야 하고, 남아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있는 비주류도 멀리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붕망朋亡 즉 붕당朋黨이 없어야(亡) 한다, 곧 항상 중용의 정도를 행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象曰 包荒 得尙于中行 以光大也
거친 것을 포용하고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음으로써 광대하게 한다.
제2효를 풀이하는 소상입니다. ‘이광대야’以光大也의 의미는 그것으로써 빛내고 크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목적을 널리 알리고 조직을 확대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恤其孚 于食有福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제3효는 하괘의 상효입니다. 한 단계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孚)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象曰 无往不復 天地際也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際)이다.
‘제’際는 만남의 의미입니다. 천은 양, 지는 음입니다. 따라서 ‘천지제야’天地際也라는 의미는 음양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천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법칙, 즉 천지의 운행 법칙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六四 翩翩 不富以其隣 不戒以孚
왕필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훨훨 날듯이 부유해지지 않아도 이웃과 (부를) 함께하여 경계하지 않아도 믿는다.
왕필은 ‘翩翩 不富以其隣’을 ‘翩翩不富 以其隣’으로 끊어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제4효가 상괘의 첫 효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5효와 6효의 효사에서 읽을 수 있듯이 흥망성쇠의 사이클이 하향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편편’翩翩은 세력이 분산되고 세가 약화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새들이 흩어지듯 그 세가 약화되는 것은 그 부를 이웃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믿음으로써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읽어서, 그 세가 약화되는 이유를 짚어보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상향 곡선을 그려온 과정에서 즉 세력이 장성되어온 과정에서 그 성과를 공정하게 나누지 않았고 최초의 공명정대했던 뜻, 즉 ‘지재외’志在外가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象曰 翩翩不富 皆失實也 不戒以孚 中心願也
소상은 “편편불부翩翩不富는 실질을 모두 잃음이요 불계이부不戒以孚는 중심으로 원함이다”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편편불부’를 붙여서 읽고 있다는 사실과 ‘불계이부’를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불계이부’는 구태여 경계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편편불부’를 왕필 주에서처럼 “훨훨 날듯이 부유해지지 않아도”라고 읽는다면 그것이 ‘개실실야’皆失實也 즉 모두 잃는다는 뜻과는 상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六五 帝乙歸妹 以祉元吉
제을이 누이를 시집보냈다. 복되고 크게 길하리라.
제5효는 임금의 자리입니다. 괘 전체를 두량斗量하는 자리입니다. 양효의 자리에 음효가 있어서 비록 득위는 못했지만 음효의 공능功能인 유순함과 겸손함이 있어서 크게 길할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象曰 以祉元吉 中以行願也
크게 길할 것이라 함은 중中 즉 제5효가 행원行願 곧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上六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
제6효인 상효는 전 과정의 종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城이란 글자 그대로 흙(土)을 쌓은(成) 것입니다. 평지의 흙을 파서 쌓으면 성이 되고 흙을 파낸 자리는 황隍이 됩니다. 그 구덩이에 물을 채워서 해자를 만들지요. 이제 그 쌓은 흙이 황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성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대를 움직이지 마라, 즉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자읍고명’自邑告命은 자기의 마을에서만 명을 받든다, 즉 왕명이 널리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린’貞吝은 바른 일도 비난받는다는 뜻입니다. 한 나라의 마지막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고 일생이 그렇고 모든 과정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象曰 城復于隍 其命亂也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명령이 통하지 않음이다.
이상으로 지천태의 경과 전을 모두 읽었습니다. 한 개인의 일생 또는 전위 조직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라는 관점에서 읽었습니다. 또 역지사지와 천지개벽이라는 혁명적 의미로 읽기도 했습니다.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간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광범한 민주적 지반 위에 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단계의 실천은 철저히 대중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으며 조직의 내포內包를 어떻게 공고히 하고 외연外延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를 경계하지 않고 진실로 결속해야 하고 이해관계로 결속하기보다는 초기의 이념적 목표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 등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단계의 어려움을 극복한 이후에 다음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와 보수적 경향에 대한 경계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비天地否
천지비괘는 좋지 않은 괘의 예로 듭니다. 지천태괘와는 그 모양이 반대입니다. 지地() 위에 천天()을 올려놓은 모양입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괘를 비괘否卦라 이름 하고 그 뜻을 “막힌 것”으로 풀이합니다. 비색否塞, 즉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天地閉塞의 괘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저 혼자 높고 땅은 하늘과 아무 상관없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지가 불교不交하고 만물이 불통不通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천지비괘는 그 요지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효사를 읽지 않겠습니다. 괘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비否는 인人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펴기에는 이롭지 않다.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
‘비인’匪人이라고 하는 뜻은 천과 지가 서로 불교不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人의 의미에는 글자의 모양처럼 서로 기대고 돕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비괘의 경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비인, 즉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대왕소래’大往小來의 의미 역시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는 양이고 소는 음입니다.
이 괘를 해석하는 단彖 역시 지천태괘와 같은 논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彖曰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則是天地不交 而萬物不通也 上下不交 而天下无邦也 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內小人而外君子 小人道長 君子道消也
비否는 인人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펴기에는 이롭지 못하다.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을 것이다. 천과 지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만물은 서로 통하지 못한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화합되지 못한다. 천하에 나라가 없는 형국이다. 내괘內卦가 음陰이고 외괘外卦가 양陽이다.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겉으로는 강강剛强함을 가장하는 것이다. 권력의 핵심은 소인들 차지가 되고 군자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무방无邦, 즉 나라가 없다는 뜻은 나라를 공동체로 이해할 경우 약육강식의 패권적 질서가 판을 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또는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불교不交, 불통不通이야말로 정의 실현이나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인 장애라고 보는 것이지요.
천지비괘의 대상大象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天地不交 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
천지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막혀 있다. 군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유덕有德함을 숨김으로써 난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관록官祿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천지비괘는 한마디로 폐색閉塞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식민지 상황은 물론이고 해방 후의 현대사를 통하여 줄곧 이러한 상황을 경험했지요. 이러한 폐색의 상황에서는 지혜를 숨기고 어리석음(愚)을 가장하여 권이회지卷而懷之하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처세였습니다. 나아가기(進)보다는 물러나(退) 강호江湖에 묻히는 것이 난세를 살아온 사람들의 처세였습니다. 이러한 처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직언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당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지요. 인적 자원의 재생산 구조가 복원되기 위해서는 삼대三代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제도권 전체가 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否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지천태괘가 가장 좋은 괘이고 반대로 천지비괘는 가장 좋지 않은 괘인 것은 위에서 본 대로입니다. 그러나 태괘와 비괘의 내용을 검토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즉 태괘의 전반부는 매우 순조롭고 상승적인 반면에 후반부는 쇠락 국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비괘는 전반부가 간난艱難의 국면임에 비하여 후반부가 오히려 순조롭고 상승 국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태괘의 후반과 비괘의 전반이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괘가 흉하고 비괘가 길하다는 길흉 도치의 독법도 가능한 것이지요.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지박山地剝
산지박괘의 상괘는 산山(☶, 艮)이고 하괘는 지地(☷, 坤)입니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박괘는 괘사와 상구上九의 효사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괘가 나타내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독법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剝 不利有攸往
박괘는 이로울 것이 없다. 잃게 된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입니다. 초효부터 5효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효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형상입니다. 양을 선善, 음을 악惡으로 보면 악이 득세하고 있는 말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붕괴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박괘를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이지만 천지비괘와 마찬가지로 막힌 괘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효사를 전부 싣지는 않았습니다만 초효에서 5효까지의 효사는 상床이 그 다리부터 삭아서 무너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절망의 괘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구上九의 효사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상구의 양효는 관어貫魚의 꿰미 또는 ‘씨 과실’ 혹은 최후의 이상으로 읽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먹지 않는다’보다는 ‘먹히지 않는다’(不見食),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紅)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산지박 다음 괘가 지뢰복괘地雷復卦입니다. 다음과 같은 모양입니다.
지뢰복地雷復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雷)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광복절光復節의 복復입니다. “일양복래一陽復來 일양생一陽生 붕래무구朋來无咎 반복기도反復其道 춘래春來”가 괘사입니다. 친구가 찾아오고 다시 봄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천지비괘를 설명하면서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만 산지박괘는 그 다음 괘인 이 지뢰복괘와 함께 읽음으로써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바뀌고 있습니다.
산지박괘에서는 상구가 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의 양심과 이상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세란식충신世亂識忠臣,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IMF 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은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의식을 청산하고 4, 5천 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괘는 64괘의 제일 마지막 괘입니다. 마지막 괘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화수미제괘는 물() 위에 불()이 있는 모양입니다.
화수미제괘의 경우도 괘사와 단전, 상전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괘사를 읽어보지요.
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강을 거의 다 건넜다는 것은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꼬리를 적신다는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작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효사에 머리를 적신다(濡其首: 上九)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분명 꼬리를 적시는 것에 비하여 더 큰 실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彖曰 未濟亨 柔得中也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 无攸利 不續終也 雖不當位 剛柔應也
미제괘가 형통하다고 하는 까닭은 음효가 중中(제5효)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다 함은 아직 강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까닭은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효가 득위하지 못하였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
미제괘에서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제5효가 음효라는 사실을 이 괘가 형통하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5효는 양효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괘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자리입니다. 그래서 중中이라 합니다. 대체로 군주의 자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중의 자리에 음효가 있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제괘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중에 음효가 오는 경우를 길형吉亨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전의 해석에 근거하여 동양 사상에서는 지地와 음陰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 때 양음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는 일련의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든 효가) 마땅한 위치를 얻지 못하였으나 강유剛柔, 즉 음양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위位와 응應을 설명하면서 비록 실위失位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 즉 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위位가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은 개체 간의 관계론으로 보다 상위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상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以 愼辨物居方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해야 한다.
이상에서 본 것이 미제괘의 괘사와 단전, 상전입니다. 나는 이 괘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미제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주역』을 읽었을 때는 미제괘가 꼭 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끝판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얼른 마무리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미제괘를 읽고 난 후로는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여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했지요. 그러나 미완성 괘가 『주역』의 마지막 괘라는 사실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수미제괘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냈습니다. 『주역』 강의가 아니더라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範疇的(kategorie)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4괘를 칸트의 판단 형식判斷形式과 같은 철학적 범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주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형식陳述形式이나 최상위의 유개념類槪念과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장의 전반부에서 잠시 이야기했다고 기억합니다만 요컨대 『주역』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역』에서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철학적 구도 이외에 매우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節制 사상입니다. 일례로 건위천괘乾爲天卦의 상구 효사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警戒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범주는 그것이 판단 형식이든 아니면 객관적 존재에 대한 진술 형식이든 그것이 망라하는 세계는 결과적으로 왜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이것으로 『주역』을 마칩니다. 대성괘 몇 개를 그것도 일부만 읽어보는 것으로 『주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주역』을 두고 일컬은 말입니다.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었다는 책이 바로 이 『주역』입니다. 그만큼 공자가 심혈을 기울여 『주역』을 읽었다는 뜻이지요. 물론 당시의 책은 죽간竹簡이기 때문에 가죽 끈이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를 묶었건 대나무 쪽을 묶었건 가죽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진다는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역』 강의를 마치면서 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나로서는 『주역』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은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影幀에 쓴 시입니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바닷물을 뜨는 그릇
-경經과 전傳
-효爻와 괘卦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위位와 응應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지천태地天泰
-천지비天地否
-산지박山地剝
-화수미제火水未濟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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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역(周易)의 관계론
바닷물을 뜨는 그릇
『주역』周易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강의 서두에서 합의한 바와 같이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기로 합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지요. 여러분도 물 긷는 그릇을 한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서로 비슷한 그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에 대한 아무 설명 없이 물 긷는 그릇이라느니 안경이라느니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 것 같군요. 아무튼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보편적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경』易經이라고 명명하여 유가 경전의 하나로 그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왕필王弼도 『주역』과 『노자』를 회통會通하려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거론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 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역』은 물론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귀신이 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귀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의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올라갑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내려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 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나 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지요. 아마 복도가 캄캄해서 올라가는 버튼을 잘못 눌렀나 보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올라간다는 여자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여자 귀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귀신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敬畏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神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의난疑難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 대신에게 묻고 그 다음 백성들(庶人)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 대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백성들의 의견과 조정 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대학의 축제인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 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경經과 전傳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이지요.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占卜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經)에 대한 해석(傳)의 시대입니다. 경經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傳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란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經)를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가 해설한(傳) 책이란 의미입니다. 공자학파가 경에 대한 해설을 이루어놓기 이전에 『주역』은 복서미신卜筮迷信의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설의 의미는 대단히 큽니다. 그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적 해석이 곧 사물과 사물의 변화를 바라보는 판단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해설이 있기 이전의 『주역』이 복서미신의 책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주역』의 경, 즉 텍스트 자체가 미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텍스트로서의 경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였지요. 유구한 삶의 역사적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코 미신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점占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자의성을 지적하여 미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괘卦의 구성과 괘사卦辭, 효사爻辭에 동양적 사고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공자학파의 철학적 해석 방식뿐만 아니라 경 속에 담겨 있는 관계론에 주목해야 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주역』의 경은 8괘, 64괘와 괘사, 효사의 네 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 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8괘를 소성괘小成卦라 하고 이 소성괘를 두 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大成卦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傳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뜻으로 십익十翼이라 합니다. 공자의 저작이라고 전하지만 대체로 훨씬 후대인 진한秦漢 초기의 공동 창작으로 추측됩니다.
여러분이 혹시 『주역』을 읽고자 할 때는 십익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십익은 해설서기 때문에 『주역』의 전체 구성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주역』은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 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였습니다.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수립되기 이전의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한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 시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 이론에 대한 근본적 담론이 가장 왕성하게 개진되었던 시기였음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효爻와 괘卦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8괘八卦를 낳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8괘 중에서 태극기에 있는 네 개의 괘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를 효爻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효와 괘를 중심으로 『주역』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괘는 ‘걸다’라는 뜻입니다. 걸어놓고 본다는 뜻이지요. 괘에다가 어떤 의미를 담아놓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를 들어봅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물이 있고 사물과 사물이 관계하여 이루어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상사태 또는 공황 상태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물이 사건으로 발전하고 사건이 사태로 발전하는 여러 가지의 경로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효와 괘를 이러한 사물 또는 사물의 변화를 담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효爻가 사물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괘卦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난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각 구성 부분은 어느 경우든 사물, 사건, 사태와 같은 범주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역』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이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의 범주는 기본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연관성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세계의 변화를 추상화하고 단순화한 법칙 즉 간이簡易이기 때문에 세계의 복잡한 연관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제한성 때문에 위에서 지적했듯이 각 구성 부분을 여러 범주로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판단 형식은 대단히 중층적이며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판단 형식에 비하여 훨씬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서구적 사고 양식과 대단히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적 사유에 기초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서구적 판단 형식과 주역의 판단 형식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관계론적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사회관이 있습니다. 사회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인식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관과 인간관 등 우리가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않고 있든 익숙하게 구사하고 있는 인식 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다” 또는 “인간은 이기적이다”와 같은 인식 틀을 봅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분석함으로써 개인의 집합인 사회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틀입니다. 사회가 개인의 집합이라고 하는 경우 인간이 집합 속에 있든 개인으로 있든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면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장 골목에 있건 가정에 있건 변함없이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존재론의 폭력적 단순성이라 할 만한 것이지요. 이것은 『주역』의 구성과 비교하자면 효爻로써 소성괘를 설명하고 나아가 대성괘마저도 효의 단순한 집합으로 설명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극히 1차원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와는 달리 이를테면 계급적 관점으로 사회 구성을 인식하는 소위 좌파적 인식 틀도 있습니다. 신분, 민족성, 경제구조 등 다양한 인식 틀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인식 틀을 조합하여 새로운 틀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사회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틀을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효와 괘를 설명하면서 어쩌면 적절하지 않은 예를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단순한 인식 구조를 반성하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이러한 우리들의 인식 구조에 비하여 『주역』의 판단 형식은 객관적 세계의 연관성을 훨씬 더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지요.
『주역』에는 8개의 소성괘와 64개의 대성괘가 있습니다. 이 64개의 대성괘마다 괘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마다 효사가 붙어 있습니다. 『주역』의 경經은 8괘, 64괘, 괘사, 효사의 네 가지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경의 양만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역』을 64개의 대성괘를 중심으로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판단 형식이 바로 이 대성괘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대성괘에는 그 괘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고 괘 전체의 의미를 나타내는 괘사가 달려 있으며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효와 그 효를 설명하는 효사가 달려 있습니다. 이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 범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적 범주로 이해하는 경우 우리는 칸트나 헤겔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주들과는 그 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범주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 형식의 단순함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 읽기의 기초 개념
『주역』을 읽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만 최소한의 개념만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효()는 하늘(天) 또는 남자(男)를 나타내고 음효()는 땅(地) 또는 여자(女)를 나타냅니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세 개의 효로 한 개의 괘를 만듭니다. 세 개의 효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세 개의 효로 이루어진 괘를 소성괘라 하고, 소성괘 두 개가 대성괘가 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집니다. 효의 명칭은 아래에서부터 초효初爻, 이효二爻, 삼효三爻, 사효四爻, 오효五爻, 상효上爻로 읽습니다. 양효를 구九, 음효를 육六으로 씁니다. 그래서 초효가 양효인 경우에는 그것을 초양初陽이라 읽지 않고 초구初九라 읽습니다. 그리고 이효가 음효인 경우에는 이음二陰이라 읽지 않고 이륙二六이라 읽습니다.
양을 구라고 하고 음을 육이라고 하는 까닭에 대하여 많은 논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9가 홀수이고 6이 짝수여서 각각 양과 음을 표시하는 숫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하는 정도 이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제1효를 초효라 하고 제6효를 상효라 합니다. 그래서 초륙初六, 상구上九 등으로 씁니다.
8괘의 모양·이름·작용·형상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8괘의 이름과 성격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역』 독법의 기본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분들은 이 8괘를 손가락으로 자유자재로 표현했습니다. 엄지손가락은 손가락이 한 개이지만 그것을 손가락 세 개로 칩니다. 이 엄지를 나머지 검지, 중지, 무명지 이 세 개의 손가락과 연결하거나 뗌으로써 8괘를 표현합니다.
건괘乾卦()는 엄지와 나머지 세 손가락을 전부 연결하여 표시합니다. 그리고 읽기는 건삼련乾三連으로 읽습니다. 건괘는 효 세 개가 모두 연결된 모양 즉 양효 세 개라는 뜻입니다.
태괘兌卦()는 엄지와 중지, 무명지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검지는 떼어놓습니다. 읽기는 태상절兌上絶이라 읽습니다. 제일 위에 있는 효만 떨어졌다는 것이지요. 즉 제일 위에 있는 효가 음효이고 나머지 두 효는 양효라는 뜻입니다.
감괘坎卦()는 중지와 엄지가 연결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검지와 무명지는 엄지와 떨어져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감중련坎中連이라 읽습니다. 감괘는 가운데만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지요. 가운데 효가 양효라는 뜻이지요. 부처님의 손가락을 표현할 때 “감중련한 손가락”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괘离卦()는 엄지와 검지, 무명지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중지만 엄지와 떨어진 모양입니다. 이허중离虛中이라 읽습니다. 이괘는 가운데가 비었다는, 즉 가운데가 음효라는 뜻입니다.
나머지 괘들을 손가락으로 한번 표시해보세요. 진하련震下連(), 손하절巽下絶(), 간상련艮上連(), 곤삼절坤三絶() 등으로 읽습니다.
이 8괘 하나하나는 각각 음양의 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양을 결정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합니다. 8괘를 구성하는 세 개의 효 중에서 양효가 홀수이면 양괘, 음효가 홀수이면 음괘가 됩니다. 셋 중에서 언제나 소수가 전체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 두 사람과 여자 한 사람인 집합에서 결국 여자의 의견이 관철되는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남자 2대 여자 1의 구성이기 때문에 결합의 주도권은 당연히 여자가 행사하고, 결합된 2가 결정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반대로 여자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인 집합에서는 남자가 주도권을 잡고 전체 성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괘의 음양을 결정하는 방법이 매우 실제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성괘는 상하 두 개의 소성괘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의 괘를 상괘上卦 또는 외괘外卦라 하고 아래 괘를 하괘下卦 또는 내괘內卦라 합니다.
대성괘는 두 소성괘의 성질, 위치에 따라 그 성격과 명칭이 정해지기도 하고 두 소성괘가 이루어내는 모양에서 명칭과 뜻을 취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이괘頤卦는 간艮()과 진震()을 상하로 겹쳐놓은 것이지요. 이괘의 모양은 입니다. 그 모양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하의 입술과 그 가운데 치아가 있는 형상입니다. 그 형상이 턱과 같아서 괘의 이름을 이頤라 하고 그 뜻을 기를 양養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방법이나 그 이름에 담는 뜻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괘의 구조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간은 산山이고 진은 뢰雷입니다. 산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입니다. 땅속에 잠재력을 묻어두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양養이기도 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지요. 진괘晉卦는 곤괘坤卦() 위에 이괘离卦()를 올려놓은 것입니다. 진괘의 모양은 입니다. 곤은 땅(地)을 의미하고 이는 불(火)을 뜻합니다. 땅 위에 불이 있는 형상입니다. 따라서 이 진괘는 지평선에 해가 뜨는 형상으로 풀이하여 이름을 진晉으로 하고 그 뜻을 나아갈 진進으로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역』에는 대단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位와 응應
『주역』 사상의 핵심을 관계론이라고 하는 경우 지금 설명하려는 위位와 응應의 개념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위와 응 이외에도 『주역』의 관계론을 읽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만 위와 응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주역』의 독법에서 가장 먼저 설명해야 하는 것이 위位입니다. 즉 ‘자리’입니다. 어떤 효의 길흉화복을 판단할 때 그 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효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가를 보고 판단합니다. 대성괘는 여섯 개의 효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初), 2, 3, 4, 5, 6(上)의 여섯 개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자리 중에서 1, 3, 5는 양효의 자리이고 2, 4, 6은 음효의 자리입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 즉 1, 3, 5에 있는 경우와 음효가 음효의 자리인 2, 4, 6에 있는 경우를 득위得位라 합니다. 효가 그 자리를 얻지 못한 경우 이를 실위失位라 합니다. 양효가 음효의 자리 즉 2, 4, 6에 있거나 마찬가지로 음효가 양효의 자리인 1, 3, 5에 있는 경우가 실위입니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 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음효도 어떤 자리에 있거나 음효일 뿐이라고 하는 고정된 관념은 없습니다.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눈이 얼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달려 있다는 뜻이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인에게 있어서 그 자리(位)가 갖는 의미는 운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됩니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트리고 나아가서는 일을 그르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氣가 건물에 눌립니다. 고층 빌딩은 지기地氣를 받지 못하는 건축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땅에 건물을 너무 많이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도쿄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터와 집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집이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립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조금 작은 듯한 집이 좋다고 하지요.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잘못된 사람이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여담이었습니다만 자기의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동양학에서는 그것보다는 먼저 자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의 길흉화복이 그 사물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역』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득위得位와 실위失位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서구의 존재론과는 다른 동양학의 관계론입니다.
위位와 응應에 대해서만 설명하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몇 가지 개념을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중中의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대성괘를 구성하고 있는 여섯 개의 효 중에서 제2효와 제5효를 ‘중’이라 합니다. 2효와 5효는 각각 하괘와 상괘의 가운데 효입니다.
『주역』에서는 이 ‘가운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제일 위에 있거나 제일 앞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사회의 원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여러분도 강의 시간에 질문하라고 하면 묵묵부답인 경우가 많지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것이지요. 중간은 무난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산전수전을 두루 겪으신 노인들은 대체로 모나지 않고, 나서지 않고, 그저 중간만 지키기를 충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과 가운데를 선호하는 정서는 매우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도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둑 7급이 바둑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바둑 1급은 비슷한 상대를 만나기가 쉽지 않지요. 중간은 그물코처럼 앞뒤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고 영향을 많이 미치게 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선망의 적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물론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경쟁으로 인한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걸리는 곳이 선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두가 전체 국면을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두는 겨우 자기 한 몸 간수에 여력이 있을 수 없는 고단한 처지입니다. 그와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실제로 내가 무기징역 받고 감옥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헌옷 입고 햇볕에 앉아 있을 때의 심사가 무척 편했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비록 편안하고 한적한 달관達觀의 공간이긴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매우 적막한 처소處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막상 가장 위에 있는 제6효인 상효는 물러난 사람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음효가 음의 자리에 양효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을 정正이라고 하면서도, 가운데 효 즉 중中이 득위했는가 득위하지 못했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음 2효와 양 5효는 중이면서 득위했기 때문에 이를 중정中正이라 합니다.
중정은 매우 높은 덕목으로 칩니다. 아마 여러분은 ‘중정’이란 현판이나 붓글씨를 많이 보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중정이지만 양 5효를 더욱 중요하게 봅니다. 음 2효가 하괘를 주도하는 효임에 비하여 양 5효는 상하 괘 전체의 성격을 주도하는 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응應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위位가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응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효가 다른 효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효 중에서 1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6효의 음양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괘의 1, 2, 3효와 상괘의 1, 2, 3효가 서로 음양 상응 관계, 즉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 응입니다.
『주역』 사상에서는 위보다 응을 더 중요한 개념으로 칩니다. 이를테면 ‘위’의 개념이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의 개념은 개체와 개체가 이루어내는 관계론입니다. 이를테면 개체 간의 관계론이지요. 그런 점에서 위가 개인적 관점이라면 응은 사회적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보다는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위失位도 구咎요 불응不應도 구咎이다. 그러나 실위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이다”라고 합니다. 실위도 허물이고 불응도 허물이어서 좋을 것이 없지만 설령 어느 효가 득위를 못했더라도 응을 이루고 있다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지요.
위보다 응을 더 상위의 개념으로 치는 것이 『주역』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집이 좋은 것보다 이웃이 좋은 것이 훨씬 더 큰 복이라 하지요. 산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보면 응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의 개념도 바뀌어서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이 좋은 곳을 좋은 직장으로 칩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德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응 이외에도 효와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개념으로 비比가 있습니다. 이 비는 인접한 상하 두 효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응이 하괘와 상괘 간의 상응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이 비는 인접한 두 효의 음양 상응을 본다는 점에서 응에 비해 다소 그 관계의 범위가 협소하고 시간대가 짧습니다. 그러나 기본적 성격은 관계론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상에서 『주역』 독법의 몇 가지 개념을 소개했습니다만, 그나마 너무 간략한 설명이었습니다. 『주역』의 주석서註釋書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해석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오히려 『주역』 이해에 더 장애가 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관계론의 재조명이라는 강의 목적의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것만을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효의 명칭에 관한 것입니다. 효가 처하는 위치 즉 아래위에 있는 효와의 관계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마저 달라지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성격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음효 위에 있는 양효 즉 양재음상陽在陰上인 경우를 거據라고 하고 그 의미는 공제控制입니다.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음효가 양효 아래에 있는 경우는 승承이라 합니다. 즉 음재양하陰在陽下인 경우를 승이라 하고 그 의미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같은 음효라 하더라도 그것이 양효 위에 있을 때 즉 음재양상陰在陽上일 때 승乘이라 호칭하고 그 의미를 반상反常 즉 역逆으로 읽습니다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관계론적입니다.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位)와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應과 비比, 그리고 괘와 괘의 관계 등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일 정도로 매우 왜소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事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주역』의 이러한 관계론적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가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공자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설명되기도 합니다. 공자학파가 십익을 이루어놓음으로써 복서미신의 책이 비로소 철학적 내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장의 서두에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점占은 상相이나 명命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운명을 엿보려는 것이 아니라 의난疑難을 당하여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이 복서卜筮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역』 사상에 담겨 있는 관계론의 철학적 내용을 특정 학파의 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주역』은 사회 경제적으로 농경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는 유한 공간有限空間 사상이며 사계四季가 분명한 곳에서 발전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반복적 경험의 축적과 시간 관념의 발달 위에서 성립할 수 있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겨울이 지속되는 극지極地나 반대로 상하常夏의 열대 지역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 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주역』周易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와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하였습니다. 죽간竹簡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제 대성괘를 예시 문안으로 읽겠습니다. 그 구성이 어떤지, 그리고 괘사와 단전彖傳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천태地天泰
64개 대성괘 중에서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중 한 개의 괘는 경經과 전傳을 온전하게 다 읽어보겠습니다. 『주역』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괘는 핵심적인 의미만을 읽기로 하겠습니다. 『주역』의 효사爻辭, 상전象傳의 해설은 주로 왕필의 주를 참조하고 주자본朱子本의 풀이도 참조했음을 밝혀둡니다.
먼저 지천태괘를 보기로 하지요. 우선 여러분이 지천태괘를 그려보시지요. 천天() 위에 지地()를 올려놓은 모양이고, 괘의 이름은 태泰입니다.
이제 이 태괘의 경과 전을 모두 소개합니다. 먼저 괘사입니다. 이 괘사는 물론 경입니다.
泰 小往大來 吉亨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온다. 길하고 형통하다.
단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彖은 판단한다는 뜻이며 단전은 물론 경이 아닙니다. 전입니다.
彖曰 泰 小往大來 吉亨 則是天地交 而萬物通也 上下交 而其珍也 內陽而外陰 內健而外順 內君子而外小人 君子道長 小人道消也
단에 이르기를, 태괘는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오기 때문에 길하고 형통하다. 이것은 천지가 만나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하가 만나고 그 뜻이 같다. 내괘는 양이고 외괘는 음이다. 안은 강건剛健하고 바깥은 유순柔順하다. 군자가 안에 있고 소인이 바깥에 있다. 군자의 도는 장성長成하고 소인의 도는 소멸消滅한다.
『주역』의 풀이에서 대大는 양陽을 의미하고 소小는 음陰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함의는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天地交泰 后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왕자는 이 괘를 보고(后以) 천지의 도에 천지(사람)의 마땅(正義)함을 보태어 대성하게 하고 인민을 (태평하게) 인도해야 한다.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泰和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다음 예시 문안인 천지비괘天地否卦는 이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지천태괘는 역지사지와 같은 의미입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라는 금언이 바로 이 태괘의 사상입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역지사지가 태화의 근본입니다.
경복궁에 가본 사람은 기억할 것입니다. 교태전交泰殿이 있습니다. 중전 마마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흔히 중전이 교태嬌態를 부려 임금과 침소에 드는 곳이라고 오해합니다만, 경복궁 교태전은 바로 『주역』의 지천태괘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천지교태天地交泰입니다.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천지가 뒤바뀐 모양을 태화의 의미로 풀이하는 까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나라는 이미 이야기했듯이 쿠데타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세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천태괘를 태화의 괘로 풀이하는 것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풀이라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혁명의 괘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태화의 근본임에 틀림없습니다. 혁명은 한 사회의 억압 구조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억압당한 역량을 해방하고 재갈 물린 목소리를 열어줍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잠재적인 역량을 해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혁명은 흔히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여러분은 지천태라는 뒤집힌 형국, 즉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태화의 근본일 수 있을까 다소 납득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치르지 않은 나라가 진정한 발전을 이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혁명을 치르지 않은 사회가 두고두고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는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 현장이기도 하지요. 지천태괘를 이러한 혁명의 관점으로 읽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효사를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도록 합니다. 한 개인의 일생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도 좋고 전위 조직前衛組織의 건설과 개혁의 전개 과정을 상정하고 읽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국가의 흥망성쇠라는 일반적 의미로 읽어도 좋습니다.
初九 拔茅茹 以其彙 征吉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가야 길하다.
띠풀을 뽑듯이 떨기로 가야 길하다는 뜻입니다. 띠풀은 잔디나 고구마처럼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풀입니다. 한 포기를 뽑으려 하면 연결되어 있는 줄기가 함께 뽑힙니다. 모든 시작은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의 창건이든, 회사 설립이든, 또는 전위 조직의 건설이든 많은 사람들의 중의衆意를 결집해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형제와 함께 인생을 시작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象曰 拔茅征吉 志在外也
띠풀을 뽑듯이 함께 나아감이 길한 까닭은 뜻이 밖에 있음이다.
이것은 효(初九)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소상小象 즉 전傳입니다. ‘발모정길’拔茅征吉의 까닭은, 즉 띠풀을 뽑듯이 가야 길하다는 의미는 그 뜻하는 바가 바깥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 뜻하는 바가 바깥에 있다는 것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자기 집단의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대의와 정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럿이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도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九二 包荒 用馮河 不遐遺 朋亡 得尙于中行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는 사람도 포용하고,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으며 붕당이 없으면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으리라.
제2효인 이 효는 시간적으로 아직도 초기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그 세를 계속해서 불려 나가야 하는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제2효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 오랑캐 족속을 포섭해서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간다. 먼 데 남아 있는 사람까지 버리지 않고, 친구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으면 중용의 덕행을 숭상함으로써 그를 얻는다”는 해석도 나와 있습니다.
제2효의 의미는 다음의 소상小象에서 풀이하고 있듯이 그 뜻을 널리 천명하고(光), 그 세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미가 기본입니다. 따라서 오랑캐에 국한하기보다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도 받아들이며, 황하를 맨몸으로 건너듯이 초기 단계에서 흔히 요구되는 과단성도 잃지 말아야 하고, 남아 있는 사람 즉 주변에 있는 비주류도 멀리하지 말아야 하며, 특히 붕망朋亡 즉 붕당朋黨이 없어야(亡) 한다, 곧 항상 중용의 정도를 행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象曰 包荒 得尙于中行 以光大也
거친 것을 포용하고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음으로써 광대하게 한다.
제2효를 풀이하는 소상입니다. ‘이광대야’以光大也의 의미는 그것으로써 빛내고 크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렇게 함으로써 목적을 널리 알리고 조직을 확대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九三 无平不陂 无往不復 艱貞无咎 勿恤其孚 于食有福
평탄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평지는 없으며 지나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어렵지만 마음을 곧게 가지고 그 믿음을 근심하지 마라. 식복이 있으리라.
제3효는 하괘의 상효입니다. 한 단계가 끝나는 시점입니다.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은 어려움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마음을 곧게 가지고 최초의 뜻, 즉 믿음(孚)을 회의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象曰 无往不復 天地際也
되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없다. 이것은 천지의 법칙(際)이다.
‘제’際는 만남의 의미입니다. 천은 양, 지는 음입니다. 따라서 ‘천지제야’天地際也라는 의미는 음양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천지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의 법칙, 즉 천지의 운행 법칙이라는 의미로 풀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춘하추동이 반복됩니다. 인간의 화복도 대체로 다시 반복됩니다. 그런 의미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六四 翩翩 不富以其隣 不戒以孚
왕필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훨훨 날듯이 부유해지지 않아도 이웃과 (부를) 함께하여 경계하지 않아도 믿는다.
왕필은 ‘翩翩 不富以其隣’을 ‘翩翩不富 以其隣’으로 끊어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제4효가 상괘의 첫 효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5효와 6효의 효사에서 읽을 수 있듯이 흥망성쇠의 사이클이 하향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편편’翩翩은 세력이 분산되고 세가 약화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새들이 흩어지듯 그 세가 약화되는 것은 그 부를 이웃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믿음으로써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로 읽어서, 그 세가 약화되는 이유를 짚어보는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상향 곡선을 그려온 과정에서 즉 세력이 장성되어온 과정에서 그 성과를 공정하게 나누지 않았고 최초의 공명정대했던 뜻, 즉 ‘지재외’志在外가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象曰 翩翩不富 皆失實也 不戒以孚 中心願也
소상은 “편편불부翩翩不富는 실질을 모두 잃음이요 불계이부不戒以孚는 중심으로 원함이다”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편편불부’를 붙여서 읽고 있다는 사실과 ‘불계이부’를 긍정적인 의미로 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불계이부’는 구태여 경계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편편불부’를 왕필 주에서처럼 “훨훨 날듯이 부유해지지 않아도”라고 읽는다면 그것이 ‘개실실야’皆失實也 즉 모두 잃는다는 뜻과는 상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六五 帝乙歸妹 以祉元吉
제을이 누이를 시집보냈다. 복되고 크게 길하리라.
제5효는 임금의 자리입니다. 괘 전체를 두량斗量하는 자리입니다. 양효의 자리에 음효가 있어서 비록 득위는 못했지만 음효의 공능功能인 유순함과 겸손함이 있어서 크게 길할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象曰 以祉元吉 中以行願也
크게 길할 것이라 함은 중中 즉 제5효가 행원行願 곧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上六 城復于隍 勿用師 自邑告命 貞吝
제6효인 상효는 전 과정의 종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城이란 글자 그대로 흙(土)을 쌓은(成) 것입니다. 평지의 흙을 파서 쌓으면 성이 되고 흙을 파낸 자리는 황隍이 됩니다. 그 구덩이에 물을 채워서 해자를 만들지요. 이제 그 쌓은 흙이 황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성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군대를 움직이지 마라, 즉 전쟁을 일으키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자읍고명’自邑告命은 자기의 마을에서만 명을 받든다, 즉 왕명이 널리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정린’貞吝은 바른 일도 비난받는다는 뜻입니다. 한 나라의 마지막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대부분의 역사가 그렇고 일생이 그렇고 모든 과정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象曰 城復于隍 其命亂也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명령이 통하지 않음이다.
이상으로 지천태의 경과 전을 모두 읽었습니다. 한 개인의 일생 또는 전위 조직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라는 관점에서 읽었습니다. 또 역지사지와 천지개벽이라는 혁명적 의미로 읽기도 했습니다. 띠풀을 뽑듯이 함께 간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공유하는 광범한 민주적 지반 위에 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단계의 실천은 철저히 대중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으며 조직의 내포內包를 어떻게 공고히 하고 외연外延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료를 경계하지 않고 진실로 결속해야 하고 이해관계로 결속하기보다는 초기의 이념적 목표를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 등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기 단계의 어려움을 극복한 이후에 다음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관료주의와 보수적 경향에 대한 경계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비天地否
천지비괘는 좋지 않은 괘의 예로 듭니다. 지천태괘와는 그 모양이 반대입니다. 지地() 위에 천天()을 올려놓은 모양입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입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괘를 비괘否卦라 이름 하고 그 뜻을 “막힌 것”으로 풀이합니다. 비색否塞, 즉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풀이합니다. 천지폐색天地閉塞의 괘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저 혼자 높고 땅은 하늘과 아무 상관없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지가 불교不交하고 만물이 불통不通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천지비괘는 그 요지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효사를 읽지 않겠습니다. 괘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비否는 인人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펴기에는 이롭지 않다. 큰 것이 가고 작은 것이 온다.
‘비인’匪人이라고 하는 뜻은 천과 지가 서로 불교不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人의 의미에는 글자의 모양처럼 서로 기대고 돕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비괘의 경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비인, 즉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이지요. ‘대왕소래’大往小來의 의미 역시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는 양이고 소는 음입니다.
이 괘를 해석하는 단彖 역시 지천태괘와 같은 논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彖曰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則是天地不交 而萬物不通也 上下不交 而天下无邦也 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內小人而外君子 小人道長 君子道消也
비否는 인人이 아니다. 군자가 올바름을 펴기에는 이롭지 못하다. 큰 것을 잃고 작은 것을 얻을 것이다. 천과 지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만물은 서로 통하지 못한다. 상하의 마음이 서로 화합되지 못한다. 천하에 나라가 없는 형국이다. 내괘內卦가 음陰이고 외괘外卦가 양陽이다.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겉으로는 강강剛强함을 가장하는 것이다. 권력의 핵심은 소인들 차지가 되고 군자는 변두리로 밀려난다. 그리하여 소인의 도는 장성하고 군자의 도는 소멸한다.
무방无邦, 즉 나라가 없다는 뜻은 나라를 공동체로 이해할 경우 약육강식의 패권적 질서가 판을 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또는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뜻으로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불교不交, 불통不通이야말로 정의 실현이나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인 장애라고 보는 것이지요.
천지비괘의 대상大象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天地不交 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
천지는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막혀 있다. 군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유덕有德함을 숨김으로써 난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관록官祿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벼슬에 나아가서는 안 된다.
천지비괘는 한마디로 폐색閉塞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식민지 상황은 물론이고 해방 후의 현대사를 통하여 줄곧 이러한 상황을 경험했지요. 이러한 폐색의 상황에서는 지혜를 숨기고 어리석음(愚)을 가장하여 권이회지卷而懷之하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처세였습니다. 나아가기(進)보다는 물러나(退) 강호江湖에 묻히는 것이 난세를 살아온 사람들의 처세였습니다. 이러한 처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직언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희생당했지요.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히는 것이지요. 인적 자원의 재생산 구조가 복원되기 위해서는 삼대三代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제도권 전체가 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이지요.
지천태괘와 천지비괘에서 공통적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같이 교交와 통通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와 통이 곧 ‘관계’입니다. 이것이 『주역』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그것이 태泰인 까닭, 그것이 비否인 까닭이 오로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소통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판단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지천태괘가 가장 좋은 괘이고 반대로 천지비괘는 가장 좋지 않은 괘인 것은 위에서 본 대로입니다. 그러나 태괘와 비괘의 내용을 검토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즉 태괘의 전반부는 매우 순조롭고 상승적인 반면에 후반부는 쇠락 국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비괘는 전반부가 간난艱難의 국면임에 비하여 후반부가 오히려 순조롭고 상승 국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태괘의 후반과 비괘의 전반이 같은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태괘는 선길후흉先吉後凶임에 비하여 비괘는 선흉후길先凶後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고에서는 선흉후길이 선호됩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가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태괘가 흉하고 비괘가 길하다는 길흉 도치의 독법도 가능한 것이지요. 『주역』은 이처럼 어떤 괘를 그 괘만으로 규정하는 법이 없고 또 어떤 괘를 불변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법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존재론적 관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지박山地剝
산지박괘의 상괘는 산山(☶, 艮)이고 하괘는 지地(☷, 坤)입니다.
박剝은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박괘는 괘사와 상구上九의 효사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괘가 나타내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독법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剝 不利有攸往
박괘는 이로울 것이 없다. 잃게 된다.
박괘는 64괘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괘입니다. 초효부터 5효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효입니다. 음적양박陰積陽剝의 형상입니다. 양을 선善, 음을 악惡으로 보면 악이 득세하고 있는 말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입니다. 붕괴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박괘를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산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형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상이지만 천지비괘와 마찬가지로 막힌 괘로 읽고 있습니다. 이 책에 효사를 전부 싣지는 않았습니다만 초효에서 5효까지의 효사는 상床이 그 다리부터 삭아서 무너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박괘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표현하는 절망의 괘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구上九의 효사가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象曰 君子得輿 民所載也 小人剝廬 終不可用也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앗긴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백성의 추대를 받게 되고, 소인은 거처를 앗기고 종내 쓰일 데가 없어진다.
상구의 양효는 관어貫魚의 꿰미 또는 ‘씨 과실’ 혹은 최후의 이상으로 읽습니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내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붓글씨로 쓰기도 했습니다. 왕필 주에서는 이 석과불식을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독전불락獨全不落 고과지우석故果至于碩 이불견식而不見食”, 즉 떨어지지 않고 홀로 남아 씨 과실로 영글고 먹히지 않는다고 풀이합니다. ‘먹지 않는다’보다는 ‘먹히지 않는다’(不見食),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괘의 상황은 흔히 늦가을에 가지 끝에 남아 있는 감(紅)을 연상하게 합니다. 까마귀밥으로 남겨두는 크고 잘생긴 감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비단 감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을 먹지 않고 씨 과실로 남기지요. 산지박 다음 괘가 지뢰복괘地雷復卦입니다. 다음과 같은 모양입니다.
지뢰복地雷復
땅 밑에 우레가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씨가 땅에 묻혀 있는 형상입니다. 잠재력(雷)이 땅 밑에 묻혀 있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광복절光復節의 복復입니다. “일양복래一陽復來 일양생一陽生 붕래무구朋來无咎 반복기도反復其道 춘래春來”가 괘사입니다. 친구가 찾아오고 다시 봄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천지비괘를 설명하면서 대성괘 역시 다른 대성괘와의 관계에 의하여 재해석되는 중첩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했습니다만 산지박괘는 그 다음 괘인 이 지뢰복괘와 함께 읽음으로써 절망의 괘가 희망의 괘로 바뀌고 있습니다.
산지박괘에서는 상구가 최후의 양심, 최후의 이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한 사회, 한 시대의 양심과 이상은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은 있는 법이지요. 그런 점에서 박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상징하는 괘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언어로 읽을 수 있다는 변증법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박괘는 흔히 혼돈 세상에서 사상적 순결성과 지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풀이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때일수록 현명한 판단과 의지가 요구된다는 윤리적 차원에서 읽힙니다.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 세란식충신世亂識忠臣,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 등이 그러한 풀이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때 좋은 아내가 생각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충신을 분별할 수 있으며, 세찬 바람이 불면 어떤 풀이 곧은 풀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박괘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망 만들기입니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비록 박괘의 상전과 단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괘는 늦가을에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끝에 빨간 감 한 개가 남아 있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裸木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나목으로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IMF 사태’ 때 내심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IMF 사태는 우리의 취약한 경제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식량 자급률이 27%에 못 미치는 반면 철광석, 원면, 섬유, 에너지 등은 거의 100%를 수입하는 구조입니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고 취약한 구조의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 소위 문민정부 출범 때에도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만 불 소득이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거품과 허위의식을 청산하고 4, 5천 불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단이 필요했지요. 그러나 그때나 IMF 때나 미봉책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물론 우리가 주체적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종속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구조의 중하위권에 편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모든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그러한 인식 능력과 의지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을 박괘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추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 우리의 실상을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엽락이분본’葉落而糞本, 잎은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자립성, 정치적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괘는 64괘의 제일 마지막 괘입니다. 마지막 괘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화수미제괘는 물() 위에 불()이 있는 모양입니다.
화수미제괘의 경우도 괘사와 단전, 상전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괘사를 읽어보지요.
未濟亨 小狐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괘는 형통하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을 즈음 그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
강을 거의 다 건넜다는 것은 일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꼬리를 적신다는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작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효사에 머리를 적신다(濡其首: 上九)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분명 꼬리를 적시는 것에 비하여 더 큰 실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전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彖曰 未濟亨 柔得中也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 无攸利 不續終也 雖不當位 剛柔應也
미제괘가 형통하다고 하는 까닭은 음효가 중中(제5효)에 있기 때문이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다 함은 아직 강 가운데로부터 나오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그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다고 한 까닭은 끝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효가 득위하지 못하였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
미제괘에서 중요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제5효가 음효라는 사실을 이 괘가 형통하다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5효는 양효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괘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자리입니다. 그래서 중中이라 합니다. 대체로 군주의 자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중의 자리에 음효가 있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미제괘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중에 음효가 오는 경우를 길형吉亨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전의 해석에 근거하여 동양 사상에서는 지地와 음陰의 가치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음과 양을 합하여 지칭할 때 양음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음양이라 하여 음을 앞에 세우는 것도 그러한 예의 한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 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는 일련의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든 효가) 마땅한 위치를 얻지 못하였으나 강유剛柔, 즉 음양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봅니다. 위位와 응應을 설명하면서 비록 실위失位이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 즉 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위位가 개체 단위의 관계론이라면 응은 개체 간의 관계론으로 보다 상위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지요.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응, 즉 인간관계를 디딤돌로 하여 재기하는 것이지요. 작은 실수가 있고, 끝남이 없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등등을 우리는 이 단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상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以 愼辨物居方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해야 한다.
이상에서 본 것이 미제괘의 괘사와 단전, 상전입니다. 나는 이 괘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미제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주역』을 읽었을 때는 미제괘가 꼭 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끝판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얼른 마무리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서 미제괘를 읽고 난 후로는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여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했지요. 그러나 미완성 괘가 『주역』의 마지막 괘라는 사실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괘가 완성 괘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흘러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만나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 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나는 이 미제괘에서 우리들의 삶과 사회의 메커니즘을 다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노동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생산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현실을 생각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면 우리는 생산물의 분배에 주목하기보다는 생산 과정 그 자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화수미제괘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냈습니다. 『주역』 강의가 아니더라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절제와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
『주역』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사전에서 요약하고 있는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範疇的(kategorie)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64괘를 칸트의 판단 형식判斷形式과 같은 철학적 범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주적 판단 형식은 근본에 있어서 객관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형식陳述形式이나 최상위의 유개념類槪念과 통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장의 전반부에서 잠시 이야기했다고 기억합니다만 요컨대 『주역』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역』에서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철학적 구도 이외에 매우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節制 사상입니다. 일례로 건위천괘乾爲天卦의 상구 효사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警戒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란 바로 이 변화의 조직,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 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논의를 불필요하게 확대하는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범주는 그것이 판단 형식이든 아니면 객관적 존재에 대한 진술 형식이든 그것이 망라하는 세계는 결과적으로 왜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이것으로 『주역』을 마칩니다. 대성괘 몇 개를 그것도 일부만 읽어보는 것으로 『주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자의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주역』을 두고 일컬은 말입니다.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었다는 책이 바로 이 『주역』입니다. 그만큼 공자가 심혈을 기울여 『주역』을 읽었다는 뜻이지요. 물론 당시의 책은 죽간竹簡이기 때문에 가죽 끈이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를 묶었건 대나무 쪽을 묶었건 가죽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진다는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역』 강의를 마치면서 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나로서는 『주역』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만, 여러분은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있을 때 자신의 영정影幀에 쓴 시입니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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