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을 가르치는 장치, 학교를 버려라

Fact/자녀-교육 · 2011. 5. 20. 09:32


‘교육, 그것은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말이 소수에게나마 좀더 평등한 사회를 향한 투지를 갖게 하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 중 하나가 성립해야 한다. 하나는 교육을 통한 계급 이동이나 순환 가능성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계급이 순환되거나 바뀐다면 교육을 계급(에 진입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계급 이동 가능성이 없을 때, 그래서 ‘교육과정이 계급·계층의 단순 대물림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면(1), 교육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권력·부·명예를 독식하지 않도록 사회의 견제력 또는 자기 보호력으로 구성원 사이 배분이 덜 불평등하게 이뤄지도록 교육이 작용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 계급적 이해관계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예다. 북유럽 사회에서 노동자가 계급투쟁으로 획득한 보편적 복지는 그들의 노동친화적 교육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교육이 계급의 순환이나 이동을 이룰 수 없다면 최소한 이 조건이라도 채워야 계급투쟁의 장으로서 교육을 말할 수 있다. 만약 한국 교육이 이 두 가지를 모두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교육은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교육이 가져온 북유럽 보편적 복지

 

잔상 때문일까, 아니면 끝내 기대를 접을 수 없는 데서 오는 착시 때문일까? ‘이젠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계속 회자된다는 점부터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래서 수많은 젊은 부모들이 ‘혹시 내 자식이 영재 아닐까?’ 하는 부푼 꿈을 품는데, 설령 모든 부모가 자식이 영재이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만큼 자녀 교육 열기가 뜨거운 나라를 찾기 어렵다. 우리에게 계급·계층 상승에 대한 잔상 또는 착시 현상이 남아 있는 데는 일제강점기와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피라미드 상층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거나 크게 흔들렸고, 경제성장 효과로 사회귀족에의(한국의 사회귀족과 그 성채 구조에 관해서는 ‘사회귀족의 나라’(2) 진입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계급의 대물림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 코앞에 와 있다. ‘개천에서 용 난’ 1세들이 천수라는 자연법칙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대물림한 2·3세 사회귀족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 확산’이라는 역사의 퇴행과 맞물려 일어났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식에게 “나처럼 살면 안 돼!” 하던 노동자가 이젠 자식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기 바란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건 애당초 없거나 부족하던 노동자 계급의식이 갑자기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다. 거꾸로 계급배반 의식 강화에 따른 변화로 봐야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사회의 높은 교육열을 계급 상승의 기대나 욕구로만 설명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다. 사람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자기 몸이 놓이는 자리에 관심이 있는데, 사회 안전망이 거의 없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 인간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사회귀족이 자식에게 대물림할 수 있도록 유리하게 장치해놓은 교육경쟁 구조에 모든 사회 구성원을 끌어들이는 게 이 ‘불안’이라는 유령이다. 군림하되 책임지지 않는 사회귀족은 불안 요인을 줄이는 데 관심이 없다. 구성원의 불안이 클수록 사회귀족에 대한 자발적 복종 또는 굴종이 강화돼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이 제3노총의 길을 택한 것도 격심해지는 불안이 부른 굴종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불안은 동시에 경쟁을 강조하는 빌미가 된다. 불안이 경쟁을 강화하고 경쟁이 불안을 가중하는 악순환인데, 불안 요인을 해체하고 줄이지 않는 사회귀족이 오로지 경쟁만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이나 서민 계층은 계급이나 계층 상승의 길이 막혀 있음을 인식하더라도 교육경쟁 구조에 들러리가 되도록 강요받는다. 이 경쟁 구조는 과거 봉건사회의 신분질서처럼 대물림이 구조화된 사회귀족 체제를 가리는 부수적 효과를 거둔다. 차라리 사회 구성원이 신분질서가 공고하게 대물림된다고 인식한다면 신분질서 체제를 부수려는 사회폭발의 동력이 될 수 있겠지만, 교육경쟁 구조는 누가 이기고 패배하는지 분명함에도 사회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김 빼는’ 기능을 수행한다.

 

‘불안’이라는 유령이 부른 무한경쟁

 

사회귀족이 막강한 경제자본을 바탕으로 교육자본, 문화자본까지 독점하려고 동원한 것 중 하나가 영어다. 영어는 ‘매판성’과 ‘대미종속성’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가진 사회귀족의 공유 자산이기도 하다. 교육경쟁에서 영어의 비중이 클수록 노동자 계급과 서민 계층에게 그만큼 높은 진입장벽이 된다. 사회귀족의 요구대로 영어라는 황사바람이 전국을 휩쓸기 시작한 지 오래다. 카이스트에서 보듯이,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한다는 사실은 ‘영어를 통한 여과망’이라는 ‘아륀지’족의 합의를 빼면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가 한국 사회 구성원인 것은 한국어로 생각하고 추론하며 소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성이나 상상력이라는 경쟁력의 원천은 한국어로 상상하거나 담을 수 있는 창조성이어야 한다는, 인문학의 기본 인식조차 외면한 그들의 집단 합의는 영어를 통한 배제를 위한 게 아니라면 납득할 수 없다. 사회귀족이 주장하는 경쟁력이 한국 사회의 경쟁력이 아니라 세계화된 곳에서 그들만의 경쟁력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가령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나 김현종 전 외교통상교섭본부장에게 경쟁력이 있다면 그것이 한국의 경쟁력인지, 사회귀족이 되기 위한 개인의 경쟁력인지, 아니면 미국의 경쟁력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설사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해도 승자독식 구조 아래 배분되지 않을 때 그것을 한국의 경쟁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영어 강의를 강요하는 이유

 

한국 교육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은 차라리 ‘로또복권’이다. 서민과 노동자는 로또복권을 사지만 사회귀족은 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교육경쟁에서 사회귀족은 서민이나 노동자 계급과 다른 트랙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구별짓기’는 영어를 통해 유치원 때나 이전부터 각종 연수와 고액 개별 지도로 이뤄진다. 서민 계층과 노동자 계급 전체로 보면 로또복권에 대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로또복권에 매달리듯이, 서민 계층과 노동자 계급은 빼앗기기만 할 뿐 이기지 못하는 교육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난해 ‘학벌 없는 사회’라는 단체가 펴낸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메이데이 펴냄·2010)는 신자유주의 열풍이 강요한 교육경쟁 속에서 인성마저 파괴되는 점을 주목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제목이 나에게 도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배경에는 교육이 서민 계층과 노동자 계급에게 교육경쟁에 들러리를 서도록 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문제의식이 있다. 서민과 노동자 계급은 불안 때문에 관성에 따라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만 학교에서 형성하는 의식은 주체화의 가능성을 애당초 불가능하게 만든다. 비근한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초·중·고 사회 교과 시간에 자본주의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것에 물음을 제기할 줄 아는 비판적 사회인식 대신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하는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 학교다. 요컨대, 자기 돈 들여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결과를 빚는 것이다. 몇 해 전 파업을 벌인 서울지하철노조를 오늘 제3노총으로 가도록 이끈 것은 파업 노동자에게 뭇매를 가한 시민들의 사회라고 해야 옳은데, 그와 같은 반노동자적 의식은 존재가 규정하는 벌거벗은 의식이 아니라면 어디서 주입된 것일까. 1980~90년대 이른바 ‘운동권’의 착각과 달리, 의식화는 본디 지배세력의 전유물이고 학교는 그 가장 손쉬운 터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자리잡은 한국의 근대식 교육제도 아래 학교는 학생에게 인간과 사회에 관해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는 대신, 지배세력이 기획하고 선택한 생각을 주입받아 획일적으로 암기하는 경쟁의 장이 되도록 했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왜곡은 ‘반(反)학문’이 되었다고 말할 지경이다. 인문사회과학이란 본디 인간과 사회에 관한 학문이다. 이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인간과 사회에 관한 지배세력의 생각을 얼마나 잘 숙지했는지에 따라 공부를 잘하는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구조가 되고 말았다. 과거에 이 경쟁에서 선택된 자가 일본 지배세력의 마름이 되었다면, 오늘날엔 ‘전문가’라는 이름을 가진 사회귀족의 이익에 복무하는 청지기가 되는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반노동자적·노동배제적 의식화는 일제강점기보다 분단 상황 아래 지금이 더 심할지 모른다.

 

제 돈 들여 자기 계급 정체성 버리기

 

계급의식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1948년 민주공화국이 섰다면 공교육의 일차적 소명은 국민을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형성하는 일임을 거듭 강조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학교가 이 소명을 계속 배반하고 있음은 학교가 민주적 공간이 아니라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국가권력의 마름이면서 단위 학교의 영주로 군림하는 교장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 아래 민주적 공간이 되지 못한 학교에서는 국가주의 교육이 관철될 뿐, 시민적 주체성을 가진 구성원을 형성할 수 없다. 강고한 대학서열 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성년자인 학생들에게 석차를 주면서 차별하는 우리는 ‘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학습노동을 하는 학생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노동자가 되고, 차별과 억압의 공간인 학교에서 차별과 억압의 사회를 예습한다.

 

관계를 옹위하고 사회를 보호하라

 

최근의 카이스트 사태는 퇴로 없는 불안이 강요한 경쟁 속에서 파편화·원자화된 개인의 슬픈 자화상과, 학문 공동체라는 대학에서 학문은 질식되고 공동체는 파괴된 현실을 드러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서사는 생략된 채여서, ‘젊은 죽음’들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3) 않는 원형경기장 사회를 무감하게 드러낼 뿐이다.

 

‘관계를 옹위하고 사회를 보호하라.’ 교육은 이 요청에 귀 기울여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교육이라면 당연히 이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제도교육에 충격을 주면서 안간힘으로 교육을 붙잡는 것은, 교육 없이는 사회에 자기보호력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성원이 불안에서 벗어나고 주견을 갖도록 이제 교육이 작용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공격 앞에 자기보호력이 없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사회 곳곳에서 구성원들의 추락하는 모습이 참담하다.

 

글 · 홍세화

 

<각주>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유럽의 좌파 교육사회학자들이 행한 연구 작업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이 연구 결과가 프랑스의 68혁명 과정에서 대학평준화와 함께 노동자와 농민 출신 자녀의 대학 입학을 확대하도록 작용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2002 참조.

 

(3) 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낮은산·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