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돌아갈래, 다 따져보고” … 귀농자 80%가 준비된 농군

Fact/귀농-귀촌 · 2013. 4. 2. 17:00

[J Report] 신 귀농러시, 내가 원해서 간다
작년 2만7000가구 … 2년 새 6배↑
지원센터 참가 경쟁률 10 대 1
떠밀려 가던 외환위기 때와 달라
 
 
1일 시작한 천안연암대 귀농지원센터의 두 달 합숙 교육 프로그램에는 30명 모집에 290명이 몰렸다. 센터장 채상헌 교수는 “장군·대학총장 등 다양한 경력의 지원자가 삼수·사수까지 도전하는 인기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통계청은 “지난해 2만7008 가구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겼다”고 발표했다. 최근 귀농·귀촌인구가 급증하자 올해부터 통계청에서 이를 집계해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그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귀농·귀촌인구는 2005년 1240가구에서 지난해까지 20배가 넘게 늘었다. 2010년부터는 6배 넘게 늘었다. 지난해 3월 농식품부와 농촌진흥청·농협·농어촌공사 등이 연합해 귀농귀촌종합센터(returnfarm.com)도 출범했다. 이 센터 김부성 지도관은 “하루 100건꼴로 상담이 쏟아진다”며 “상담자 3000여 명을 무작위 조사했더니 81%가 귀농하거나 준비 중이었다”고 말했다. 김 지도관은 “외환위기(IMF 구제금융) 때 직장을 잃거나 사업에 실패해 피난 오듯 농촌으로 밀려들던 때와는 다르다”며 “2010년부터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와 시골식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준비된’ 귀농 희망자들이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술을 발효시키는 전통방식으로 오곡식초를 만들고 있는 한상준(44)씨도 새로운 삶을 찾아서 2006년 고향으로 돌아온 ‘귀농인’이다. 경북 예천시 용궁면 한씨의 작업장에 들어서자 시큼한 식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무실 책상에는 전통주 제조법에 관한 책이 잔뜩 쌓여 있다. “보리는 섬유질이 많아 애벌로 더 쪄야 하고, 기장·차조는 알갱이가 작으니까 열 받는 온도가 다르고요….” 개량 한복을 입고 오곡식초 만드는 법을 열심히 설명하는 한씨에게서 전직 육군 대위,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인상을 찾기 어렵다.

 

한씨는 ‘제복 입은 사람이 멋있어서’ ROTC 출신 포병장교가 됐다가 2000년 대위로 제대했다. 군에서 정보기술(IT) 자격증 10여 개를 따는 등 전직을 준비해 서울 강남의 한 교육 전문 IT 업체에 프로그래머로 취직했다. 마음 편한 고향에 돌아가 살겠다는 꿈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땡볕에서 고추 농사를 짓던 어렸을 때처럼 생활할 순 없었다. ‘남과 다른 농사’로 부가가치를 올려야 했다. 전통 식초를 ‘나만의 아이템’으로 잡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3년을 꼬박 쏟았다. 누룩을 만들고, 술을 빚고, 식초로 발효시켰다. 한씨가 보여 준 실험노트에는 “11월 23일 18 밀누룩 쌀누룩 한 움큼…. 29일 큰 항아리에 분말 같은 흰색이 껴 있음…”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25평짜리 아파트 방 하나에 50여 개 식초병이 꽉 찼다. 여름에는 초파리가 들끓었다. 온몸에 식초 냄새가 뱄다. 2006년 2월 “시골로는 못 내려가겠다”는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천으로 내려왔다. 직장 생활 내내 아껴 모은 5000만원이 전부였다. 버려진 빈집에 식초 공장을 차렸다. 빚은 술이 식초로 발효되는 1년 동안 생활비는 빠른 속도로 줄어 갔다. “은행에서 500만원도 안 빌려 주더군요. 밖에서 밥 한 끼 사 먹는 게 소원이었어요.” 큰 결심 하고 짜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탕수육이 맛있어 보인다’는 아내 말에도 차마 지갑을 열지 못했던 기억을 얘기하며 한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침내 식초가 완성됐을 땐 하늘을 나는 듯했다. 프로그래머 실력을 살려 홈페이지도 열었지만 알려지질 않았으니 아무도 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자동으로 팔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식초병을 들고 문경새재 같은데 버스 관광객을 찾아 뛰어다녔다. 방송국 홈페이지에 ‘예천에 전통 식초 만드는 이가 있다’고 글도 올렸다. 입소문이 퍼지고 지역신문에 보도되면서 식초가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2011년부터 현대백화점의 프리미엄 장인 브랜드 ‘명인명촌’에도 납품한다. 매년 100% 매출이 신장해 지난해에는 7억원, 올 설 명절 기간에만 6000만원어치를 팔았다. “시골 와서 용 됐죠. 아내에게 용돈만 월 150만원씩 줍니다”며 한씨는 활짝 웃었다.

 

한씨는 어렵게 익힌 식초 기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르쳐 준다. 식초 장인이 여럿 늘어나면 협동조합을 만들어 대기업과도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문화가정 주부와 조선족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데도 열심이다. “농민도 부자가 되는 세상, 농민이 주인이 되는 기업을 만들 겁니다.”

 

오랜 귀농 준비는 순조로운 정착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충남 보령시에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친정인 전남 여수시 돌산읍으로 돌아와 갓김치를 담가 파는 ‘촌장네 농원’ 손춘희(58·여)씨.

 

그는 “막내아들이 대학 갈 때를 목표로 정하고 10년 동안 귀농을 준비했다”며 “그냥 농사짓겠다고 덜컥 가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손씨는 ‘귀농 후 3년간 쓸 경비’를 계산해 10년 동안 꾸준히 모았다. 약용식물을 재배하기 위해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도 막상 내려오니까 약용식물은 3년 정도는 수익이 안 나고 투자만 해야 하더라고요. 현금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갓김치를 동네에서 추천해 주셨어요.” 귀농 직전까지도 시어머니표 김치만 먹던 손씨였지만 농업기술센터와 이장댁으로부터 염도측정계까지 동원해 김치 담그는 법을 철저히 전수받았다. 시행착오를 수없이 거치며 돌산갓을 직접 키워 냈다. 연매출 5000만원까지도 올렸다. “올해부터는 약용식물도 키워 보려고요. 철저한 계획과 함께 이웃과 어울려야 귀농에 성공할 수 있어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서 ‘인제청정농원’을 운영하는 박범주(51)씨는 IMF사태 전인 1995년 인천에서 운수업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원조 귀농인’이다. 파프리카를 키워 연매출 약 10억원을 올리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파프리카 구좌’를 만들어 1000명 넘게 직거래도 한다. 그러나 정작 박씨는 “시골 생활은 각박하지 않고 마음이 편하기 때문에 좋다”며 “수익만 바라고 귀농하면 못 버틴다”고 강조했다. 지자체 지원 등을 기대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왔다가 낭패를 당하고 가는 경우도 종종 봤다는 것이다. 그는 “농사라는 게 시세가 공산품 같지 않고 판로 확보도 쉽지 않다”며 “우리도 매출이 높지만 일본 수출량이 많아 엔저에 흔들리고 시설 투자에도 매년 비용이 많이 든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 비우고 와서 서로 돕고 살아가면 참 좋아요.”

 

예천=구희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