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만들기의 의미와 도전

Fact/귀농-귀촌 · 2013. 8. 18. 15:30

물질과 물질주의에 뿌리를 둔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거대한 진보의 성과를 안겨주었다. 진보의 성과는 부의 추구를 가능케 했고 지구적 차원의 표준화를 이뤄냈다. 표준화는 경제와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상과 문화의 영역까지 동일한 담론을 형성해놓았고 도시화와 생활양식의 획일화를 이끌어왔다. 인류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게 이동하고 자유로이 그 꿈과 야망을 달성해왔지만 빈부격차와 폭력성의 증가, 세상과의 조화로운 관계의 파괴 및 인간성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뚜렷한 세계적 현상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와 마을공동체의 현저한 붕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삶의 고유성과 공동체성을 열망하는 모든 인류는 세상 어디에서든지 자신의 삶과 양식을 고수하면서 마을을 중심으로 존속해왔다. 이제 석양기를 접어든 자본주의의 끝자락에서 도시로 도시로 향하던 사람들이 귀농 ? 귀촌을 꿈꾸고 있고, 돈보다 사회적 가치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무엇보다 물질주의에서 깨달음과 마음의 일치를 추구하며 흙에 뿌리박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사상과 철학과 이념보다 인간성을 회복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구체적인 삶의 건설, 마을의 건설(建鄕)을 요청하는 시대가 되었다.

 


마을의 역사적 경험

 

미국의 유명한 문명 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사회가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인구의 70~80%가 농사를 토대로 한 농업관련 직종에 종사해야 한다며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학설을 주장했다. 나는 이분의 주장을 깊이 생각해보았다.‘그렇다면 농업사회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인가? 설혹 그런 결론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대안으로 나갈 것인가….’루이스 멈포드는 계속 주장하기를 “…인류사회가 출현해서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최선의 문화적 업적은 근본적으로 신석기시대에 확립된 마을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었다”고 한다.

 

사실 마을문화는 모든 문화와 문명의 진정한 세력이었다. 그것은 예술이나 산업이나 과학과 같은 문명의 열매를 낳은 진정한 뿌리이다. 문명의 뿌리는 다음의 몇 가지 특성을 갖는다. 즉 선의, 이웃 간의 정의, 떳떳한 경쟁, 용기, 너그러움, 활달한 물음, 참을성 등이다. 이런 특성이 풍성한 국민은 위대한 예술, 과학, 산업, 정부를 가진 위대한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기초적 특성이 희미해지면 아무리 부가 축적되고,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고, 아무리 문화가 발달한다고 할지라도 그 문명은 힘없이 허물어진다.

 

이런 인간의 특성 중 가장 고귀한 부분은 마을공동체 안에서 장기간 생활하여 오는 동안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 목격되는 것은 인생과 사회의 질적 저하 현상이다. ‘흙에 밀착되어 온 작은 농촌공동체’야말로 진정한 맹아다. 위대한 문명은 일어났다 쓰러지기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그들이 넘어질 때 문명의 정도는 결국 작은 마을공동체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1,500년쯤 영국 옥스퍼드 개혁자의 우수한 집단은 자유사상의 새날을 길잡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왕의 자문인 에라스무스, 영국의 대법관인 토마스 모어, 그 집단의 지도자 콜레트, 그리고 성바울 교회의 감독, 성바울 학교장 릴리 등 쟁쟁한 인사가 그 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의 운동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고 말았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전통은 주로 영국이 내놓은 가장 위대한 영혼의 하나인 위클리프가 그의 롤란드 선교사들을 여러 마을에 파견하여 옛날의 민주적인 마을공동체의 정신을 새 희망의 정수로서 일깨운 데에 있다. 물론 현재 농촌사회의 지방주의와 편협성 그리고 물질주의는 극복해 나가야 할 과제이다.

 

베트남전쟁의 연구 결과인 ‘촌락공동체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막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거대제국주의에 맞선 약소국가들이 어떻게 자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에 의해서 촌락전쟁(Village War)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미군들은 결코 베트콩이 섞여 사는 촌락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M16을 든 이방인들이 어떻게 토지와 전통과 혈연으로 강고히 결합되어있는 공동체에 끼어들 수가 있겠나? 미국은 베트남 촌락 자체를 말살하려는 전략으로 인류역사상 전무한 환경파괴와 무수한 인명살상으로 나아갔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공동체’를 파괴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마을조사를 통한 백승종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이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일본은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 마을을 해체하고 행정 마을로 재편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조선인 마을 공동체의 사회적 유대가 워낙 공고했고, 유기적인 생산 및 소비 생활구조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었다. 백 교수의 결론은 조선/한국의 역사적 실체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그것도 충청도라는 지역 정부 또는 홍성군도 아닌, 자연적 마을 공동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밀려오는 세계적 도전 -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경제적 도전과 다원화된 정치, 문화의 지구적 속화(俗化) 그리고 환경파괴라는 파도 앞에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나는 우리의 지역공동체, 특별히 농촌공동체를 살려야 된다고 믿는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출현한 모든 폭력과 야만 그리고 탐욕적인 체제에 대해 대항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맘몬의 힘이 극대화된 제국의 형태이든, 민족주의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의 형태든 어떠한 모양의 제도와 자연재해에도 먼저 살아내고 물과 식량과 기본적인 의복과 주거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웃을 살려내는 힘이 축적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마을공동체에서 가능한 일이다. 마을 공동체가 인류에게 남은 대안이고 희망이다.

 


여러 나라의 마을만들기 경험

 

산업화를 일찍 경험한 구미선진국들은 낙후된 농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실시해왔다. 유럽의 경우 농업 생산지로서의 마을에 문화, 예술과 역사 및 체험의 요소를 도입해서 농촌관광을 일찍부터 실시해왔고, 각종 보조금 정책과 농업 인력양성에 신경을 써왔다. 일찍부터 생태농업, 유기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가족농중심의 농가와 마을로 성공적인 곳이 많으며, 최근 풍력과 바이오에너지 등을 이용한 에너지 자립마을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필자가 영국에 갔을 때 탐방한 적이 있는 세계적인 대안대학으로 유명한 슈마허 칼리지와 인접한 소도시 토트네스(Totnes)는 피크오일(peak oil)과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적 차원의 위협에서 지역사회 주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대표적인 전환마을(Transition Town)로서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전환마을은 향후 다가올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면서 마을공동체들이 좀 더 자생력을 갖추며 탄력성을 갖추도록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주민 주도의 운동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80년대 이후부터 후기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낙후된 농촌 활성화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역자치단체 수준에서 지속적인 정책이 실시되어왔다. 일촌일품(一村一品)운동이 시작된 오오야마(大山) 지역운동, 마찌쯔꾸리 운동, 일본 최고(마을)만들기, 고향 창생 운동, 풍경 만들기 등 다양한 농촌마을 활성화가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90년대에 ‘일읍면 일명산품(一邑面 一名産品)’ 운동을 반짝 한 적이 있었다. 한 읍면에 내놓을만한 특산품을 중심으로 마을을 활성화하자는 지원 사업을 하였는데 이내 곧 들판에 창고나 흉물만 남게 되었다.

 

원래 일본의 일촌일품(一村一品) 운동의 핵심은 품(品)에 대한 이해다. 이것은 물질로서의 생산품(生産品)을 뜻하지만 또한 인품(人品), 성품(性品)으로서의 품(品)을 뜻하기도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마을에서 사람을 키우고, 사람 중심의 사업이 아니면 마을이 활성화될 수 없다는 이 소중한 사실을 정책은 종종 간과했다.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산업화 이후의 폐해를 복원하자는 마을운동이 일어난 반면 아시아 쪽의 마을운동은 주로 빈곤퇴치와 환경개선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또 이러한 운동은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연관 속에 뿌리를 내려왔다.

 

1958년 아리야라트네와 그의 제자들이 시작한 사르보다야 운동은 스리랑카 중북부 카나토루와라는 가난한 마을에서의 생활 개선과 봉사활동 캠프로 시작했는데 1985년 스리랑카의 총 2만 8천여 개의 마을 중 1만 5천여 개의 마을로 확대되었다. 사르보다야 운동은 개인적인 차원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촌락이라는 농경공동체 사회 차원에서 공동체적 윤리로 재해석해 낸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사르보다야 운동은 권력이나 헤게모니와는 거리를 두고 철저하게 생활 공동체에 뿌리를 둔 민중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태국의 아속(Asoke)공동체 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국 내에서는 불교 갱신과 자급자족의 경제, 대안적 삶을 위한 공동체 운동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태국의 불교 갱신을 위한 개혁운동으로서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영성운동이 아니라 태국의 전통문화와 삶과 결합된 마을공동체 운동이다. 자급자족의 경제(self-sufficiency economy)를 주축으로 한 농업, 대체에너지, 약초 개발, 퇴비 생산, 엔지니어링, 채식식당 운영, 슈퍼마켓 운영, 학교, 방송국, 재활용 사업, 심지어 정치 참여까지 활발하다. 태국의 주요 도시마다 공동체가 설립되어있으며 태국의 자급자족 경제의 모델로서 소개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전부터 두래란 이름으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왔는데 대표적인 예가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의 ‘두레박’이란 말이 그러하고 ‘두레 품앗이’라고 해서 함께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일손을 돕던 좋은 풍습이 있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협동 정신을 기초로 한 농촌마을 환경 개선 운동에서 시작해서 후에는 도시와 산업체까지 확산되었지만 국가 주도의 상의하달식 운동으로서 태생적 한계와 ‘잘 살아보자’는 물질주의 지향에서 크게 벗어나질 못했다. 오히려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매년 최대 60만 명 정도의 이농이 가속화 되었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과 문화가 훼손되는 근대화의 부정적 결과가 남게 되었다.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사업으로 인해 뒤쳐진 농촌 활성화를 위해 처음에는 광역지역 중심 개발, 지역 간 소득 격차 해소 정책, 개별 농가소득 보전 정책 등 다양한 농정을 실시해왔고 최근 들어서는 마을중심의 활성화 정책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마을의 정의

 

마을을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요소로 형성된 것을 마을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을에 관한 전통적 개념과 마을에 관한 현실적 개념을 통합적으로 살펴볼 때 마을연구방법론 정립에 관한 박서호, 박창홍 교수의 분석이 적절하다고 본다.

“마을이란 집들이 모여서 된 하나의 공간적 단위로서 모둠살이이면서, 하나의 사회적 단위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국가에서 파악하는 기초단위인 행정구역이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향으로 자리 잡는 하나의 실체로서 체계를 이룬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마을은 이러한 공간으로서의 모둠살이이자 사회적 단위로서의 공동체 그리고 행정구역이자 고향으로서의 마을의 개념 중 행정구역으로서의 마을의 의미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그 기능과 개념이 약화되어왔다. 한 세대 이상의 이농현상으로 농촌마을은 공동화되어갔고 세대 단절로 인한 농촌의 공간 기능은 기형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도시로부터의 귀농과 귀촌이 이어졌지만 난개발로 인한 농촌마을의 풍경은 때로 해석되지 않는 공간으로서 풍경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사회적 단위로서의 마을은 더욱 치명적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농촌지역 학교의 90% 이상이 100명 미만의 학교이며 마을회관과 노인 중심의 복지와 노후 보장이 관심이지 생산과 가공과 유통을 통한 원활한 인간관계 형성 및 유아, 청장년, 노년의 3대에 걸친 인간성장의 풍요로움은 단절한 곳이 되었다.

 

무엇보다 농촌의 최후의 생명력이라 볼 수 있는 인간 정서의 뿌리이자 참된 인간성 회복의 출발인 고향으로서의 마을의 운명은 이제 그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향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이야기의 곳간이다. 고향에서 경험되어진 자연환경과 그곳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무의식적으로 또는 평화롭게 형성된 유년기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활력과 위로와 이야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현시대는 어쩌면 고향을 잃어버린 최초의 시대가 될 것 같다. 한 인간이 부모를 잃는 경험과 같이 한 사회는 부모로서의 마을공동체를 잃어버린 뿌리 없음 그로인한 불안과 자기정체성의 혼란과 과거 없는 미래라는 단절된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을만들기란 단지 공간을 창설하는 것만이 아니다. 농촌과 사람 사이에서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노력이 요청된다.

 


마을만들기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주제

 

첫째, 전통적으로 마을은 자연재해와 그릇된 정치와 전쟁 등으로 식량 부족과 에너지원의 고갈에 직면해서 살아왔다. 이로 인한 필연적인 과제는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상호협력과 개개인의 탄력성을 키우는 일이었다. 즉 고난을 극복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마을의 역사성과 직결된다.

 

귀농 ? 귀촌자들은 넉넉한 자본으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취미생활 같은 부업을 구하는 꿈을 다들 바라지만 뿌리내리는 삶으로서의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기존 주민과의 교감과 마을의 농사와 주업에 관련된 업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이 공유되어야 한다. 사실 할 수 있으면 가능한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로 들어가서 가난한 생활양식으로 살면서 마을의 언어와 습관을 배우면서 사는 것이 요청된다. 사람의 실핏줄부터 살려놓아야 하듯 농촌의 작은 마을에 희망을 만들 수 있다면 향후 개인 차원과 시민단체 차원 그리고 마침내 정부 차원의 마을활성화는 굳건한 경험과 토대를 확보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둘째로, 마을 중심의 토지 관리 및 활용 방안이다. 토지사유화가 극단적으로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 결코 쉽지 않은 제안이지만 어렵더라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 농촌마을을 다니다보면 흉하게 절개된 산언덕, 생각 없는 시멘트 포장길, 전통과 역사를 무시한 개발행위, 주위환경과 조화롭지 못한 주택건축 등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우선 동회(洞會)에서부터 이러한 마을 토지 사용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마을의 장기발전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을 단위에서 지원하는 수많은 정책 자금과 지원책 중 특정화해서 이제 마을의 장기 발전 계획을 세우는 방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충남 홍성 문당리의 ‘마을 발전 100년 계획’ 같은 기본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 생각 없는 사람,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마을의 공동 유산인 경관과 토지(비록 사유지라 할지라도)의 공공성에 관한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을의 현 세대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생각하며,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창의적이고 생태적이며 경제사회성을 결합한 아이디어로 표현되어져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 풀무전공부 같은 마을대학이 우리나라 마을 곳곳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