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큐 경제학을 위한 변명

Fact/법률-경제 · 2010. 8. 8. 11:14



홍태희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

 

가난을 해결하고 추위와 굶주림을 없애는 학문이 경제학이라 생각한 고등학생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의 대학에서 배우기 시작한 경제학은 딱딱한 한자어와 매끈한 수요·공급 곡선이었다. 균형의 아름다움과 수리와 계량의 유혹, 교수님들의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 타령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은 초장부터 열여덟의 경제학도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탄력성, 부분균형, 일반균형 어디에도 가난한 이들의 밥과 옷은 보이지 않았다. 진짜 경제학은 차라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거나 화염병을 공중에 띄우는 동력이 되었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

그 뒤 학문이란 덫에 걸려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닌 그 경제학도는 세상 인연의 뜬금없음으로 경제학과 교수가 되었다. 돌아온 강의실은 파워포인트 화면과 여학생 젠더들의 존재로 화려해졌다. 오호라 시절은 변해도 경제학은 여전했다. 수요·공급 곡선의 매끈한 자태에 비선형의 세계가 더해지고, 딱딱한 한자어가 야들한 영어로 바뀌었고, 거무칙칙했던 경제원론이 컬러풀하고 크고 두껍게 변하고, 수학·통계적 표현이 일취월장해졌지만 시장주의는 여전히 알파요 오메가였다.

흐르는 세월 속에 여전한 것은 오히려 현실이다. ‘한강의 기적’ 덕분에 세상은 기름져졌지만 대부분에게 펼쳐진 경제적 현실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한 밑 빠진 독 같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실업으로, 주가의 폭등과 폭락으로, 전쟁으로, 환경오염으로, 이자로, 환율로, 기름값으로 세상은 난리다. 경제위기는 화산처럼 잊을 만하며 펑펑 터지고, 숱한 석학들의 대단한 예측 모델은 학술지 속에서 말고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현실 시장과 균형의 미학서인 경제원론 사이의 괴리는 보통 사람도 눈치 챌 만큼 분명해졌다. 경제학 무용론까지 슬슬 고개를 든다.

현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현실 너머의 무언가를 고대하게 된다. 과학으로 해명되지 않으면 신앙으로 극복한다. 현실 경제를 제대로 해명하라는 요구에 주류 경제학은 잠시는 수그리지만 곧 다시 강단지게 화답한다. “무조건 믿고 따르라.” 보이지 않는 손의 전능, 경쟁의 아름다움, 믿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축복과 불신자에게 내려지는 ‘좌빨’이라는 주홍글씨, 주류 경제학은 시장주의 성령의 강림 속에 교주와 교단, 경전과 신도를 확보하고 종교 수준으로 등극했다. 경전도 여러 종으로 갖추었다. 총서인 경제원론에 각론서인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교과서, 사도들의 활약상을 그린 학설사와 각종 방언을 이해하기 위한 수리와 계량경제학, 신도의 지적 수준에 맞게 중등·고등·일반용으로까지 갖추었다. 무엇보다 압권은 경전 읽기에 어려움이 있는 평신도들에게 제공하는 엑기스, 경제학의 10대 원리, 십계명이다(<표> 참조).     

 

경제학과 교수가 된 그 경제학도도 상황을 잽싸게 파악하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다. 이리저리 수소문하고 기웃거려도 신고전파 정통보다 든든한 가문을 만나기는 어렵다. 이렇게 심란한 세상에 시장만을 강조하고 국가의 역할을 폄하한 것은 분명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그들은 정통이고 주류이다. 주류에 밉보였다가는 배곯을 일밖에 없고 다수가 가는 길이니 외롭기도 덜하다. 그의 스승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도 강단에 서서 수요·공급 곡선을 그려가며 균형의 미학을 선보이고, 수학적 표현으로 권위를 겨우 지키며, 종종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 타령으로 노회한 넋두리를 대신한다.

그의 강의실, 풋풋한 경제학도들이 모인 경제학 입문 시간에 1048쪽에 육박해 한 손으로 들기도 어려운 맨큐의 <경제학> 5판을 들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세계에서 제일 많이 사용되는 경제학 교과서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 각층의 동의를 받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군들을 위해 서장에는 경제학의 10대 기본 원리가 제시돼 있습니다. 경제학 원론의 내용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것 10개만 딱 외우면 경제학 공부의 핵심은 다 끝난 것입니다. 미리 말하겠지만 중간고사 시험문제입니다.” 딱 약장수의 멘트지만 학생들은 충분히 긴장하고 집중한다.

 

경제학 공부의 핵심, 맨큐의 10대 경제원리?

10대 기본 원리에 대한 학습을 하면서 학생들이 은혜를 입는 과정은 뚜렷이 감지된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는 첫째 원리는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겨져 학생들을 숙연하게 한다. 모든 일이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라는 셈법을 통해 호모사피엔스를 호모에코노미쿠스로 만드는 원리라고 간파하기엔 학생들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선택의 대가는 그것을 얻기 위해 포기한 그 무엇이라는 둘째 원리는 학생들에게 조금은 어렵다. 그런 학생들에게 경제학적 비용은 회계학적 비용과 다르고, 그것이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라고 가르쳐주면 그만이다. 기회비용을 구체적으로 측정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 따위는 일단은 문제가 아니다.   

합리적 판단은 한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셋째 원리도 이해하긴 다소 어렵다. 그러나 이를 위해 교수는 수학이란 칼을 뽑고 미분 개념 정도 동원하면 학생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고 본다. 첫 번째 범주에서 줄기차게 인간이 무엇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조금만 숙고하면 선택을 했는지 선택을 당했는지도 불분명하다. 판단했는지 판단을 당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래도 학생들은 너무 멀리 가지 않기로 하고 교단을 믿는다.

인간은 경제적 유인에 반응한다는 넷째 원리는 너무나 당연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제 학생들에게 세상의 기준은 돈이다. 물론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는 많은 ‘황희 정승’과, 퍼주기 위해 사는 많은 ‘마더 테레사’들이 신경 쓰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인이고 우리는 범인이다. 

두 번째 범주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원리다. 자유거래는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다섯째 원리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시장의 효율성을 설득한다. 교수는 거래를 하면 사과만 먹지 않고 바나나도 먹고 더욱이 요술방망이 같은 시장이 더 많이 먹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안 믿을 이유가 없다. 커피 농사만 짓다가 쫄딱 망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생각하면 ‘이게 다는 아닌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원리 자체는 맞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일반적으로 시장이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좋은 수단이고 경우에 따라 정부가 시장 성과를 개선할 수 있다는 여섯째와 일곱째 원리에서 새케인시언 맨큐가 케인시언인지 시장근본주의자인지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맨큐란 경제학자의 학문적 입장에 대해서 알 바 없다. 이 원리를 지금까지 초·중등 교육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매체를 통해 늘 들어온 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국가의 개입 없이 어린 그들이 시장이란 정글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생각해보지 못한다. 한우가 사라진 한국의 농가가 무얼 하면 되는지도 당장은 알 바 아니다. 경제원론의 세상에선 국가가 나서면 본전 아니면 손해다. ‘보이지 않는 손’(시장)의 우아함에 비해 ‘보이는 주먹’(정부)의 촌스러움은 분명 격이 떨어진다.

세 번째 범주는 ‘거시경제’다. 거시경제에 와서 학생들의 지적 호기심은 충분히 증폭돼 있지만 원리는 달랑 세 가지다. 한 나라의 생활수준은 그 나라의 생산능력에 달려 있다는 여덟째 원리는 학생들에게 제법 공명을 남긴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못나서고 잘사는 나라가 잘사는 이유는 잘나서다. 기아로 허덕이는 어느 나라의 지지리 궁상은 순전히 제 못난 탓이라고 정리한 학생들은 잉여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는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저항 없이 살아가도 될 정당성을 확보한다.

 

맨큐 통해 경제학 세계에 입성하는 학생들

통화량이 지나치게 늘면 물가는 상승한다는 아홉째 원리는 물가가 무엇인지 개념 정리도 안 된 학생들조차 통화주의자로 만들고, 각국 중앙은행장의 고독한 외침을 시장에 대한 불경으로 정리해준다. 단기적으로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사이에 상충 관계가 있다는 열 번째 원리에서 무엇이 단기인지 장기인지 파악도 못한 학생들에게도 시장의 힘에 굴복해야 하는 인간 세상의 숙명이 확인된다. 이제 이들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다는 계명에 따라 실업자들의 현실적 고통을 필요악 정도로 파악하는 냉철함(?)을 갖춘다. 돈의 가치의 변화(물가)와 사회적 살인(실업)을 어떻게 한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 등의 윤리학적 망상은 이참에 버린다.

이렇게 10대 원리를 학습한 학생들은 원리 속에 담긴 교주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고 경제학의 세계에 입성하게 된다. 맨큐 경제학의 본장의 내용은 물론 대학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각론이 시종일관 10대 원리를 증명하는 터라 학습 뒤 학생들은 확실한 시장경제의 수호자이자 정부 개입의 반대자가 되고, 시장의 유연성과 탈규제, 작은 정부 등을 신조로 삼게 된다.

물론 거기까지다. 조금만 눈을 들고 세상을 보면 신앙에 회의가 온다. 그렇게 큰 경제위기가 온다는 것을 알아맞히지도 못하고, 그렇게 기다려도 노동시장의 초과 공급이 청산되지도 않았다. 물가도 뛰고 실업률도 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합리적인 선택은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시장도 사람도 자주 미친다. 

이처럼 강의실 밖 현실에는 10대 기본 원리로 해명할 수 없는 과거와 현재의 인간들의 삶과 거기에 따른 경제문제가 지천에 널려 있다. 학생 중에는 이런 괴리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안적 경제학을 기웃거리면서 나름대로 경제학 공부의 원형을 찾으려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은 강단과 주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각자의 학문적·현실적 진로를 모색한다.

당장 당면 과제는 십계명을 달달 외워 중간고사 답안지에 그대로 써야 한다. 토씨라도 틀리면 점수가 깎일까 노심초사하면 공들여 외운다. 외우다 보면 정도 들고, 정이 들면 믿게 되고, 믿게 되니 든든해진다. 나중에 어떻게 배반당할지라도 당장 마음은 편하다. 그들에게는 잘 닦인 주류 경제학의 길 외에 달리 가고 싶은 길도 갈 여력도 없다. 유치원에서부터 경쟁에 휘말린 그들 대부분은 강의실에서 배우는 시장균형 사이에서 경제학의 정의나 경제학의 목적 따위를 찾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그들에게는 번듯한 대세(Orthodox Economics)는 힘이고 구질한 이단(Heterodox Economics)은 왕짜증이다. “물론 경제 현실과 원리의 괴리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다. 사실 그들이 그걸 물은 것은 사치다. 세상의 가난이 아니라 당장 본인의 입 하나를 해결하기에도 힘든 현실이다. 그들이 진정 호모에코노미쿠스라면 장래에 백수가 예상할 수 있는 상황하에서 합리적 선택은 학점 관리, 영어 공인점수다. “경제학, 제발 성가시게 하지 말아주세요. 맨큐 경제학만큼만 해주세요. 선배님들, 당신들은 불꽃놀이, 짱돌 던지기 놀이 실컷 하고도 대기업에 금융권에 척척 취직됐지만 저희는 4년 내내 원서 놀이만 해도 백수입니다. 시장근본주의의 한계 같은 기운 빠지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말해주세요. 서양의 잘사는 나라 어느 곳에선가는 학생들이 ‘후자폐적 경제학 운동’(Post-autistic Economics Movement)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시장주의 주류경제학 일색인) 자폐적 경제학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교육과정을 더 경제 현실에 부합하게 바꿔달라고 요구한다지요. 그래서 뭐가 남습니까? 취직만 된다면 교수님, 시장에다 영혼을 골백번이라도 팔고 싶습니다.”

  

시장균형을 넘어선 ‘대안적 해석’

꿈도 젊음도 시장 앞에 무너지는 세상에, 그런데 그 시장이 제대로 성스럽지 못하고 달러에도 흔들리고 주식에도 흔들리고 미국에서도 흔들리고 유럽에서도 흔들리고 온 세상에서 흔들리기만 하면서 균형은 잡지 못하는 세상에 경제 원리는 있는가? 한편으로는 시장의 균형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에 살려내라고 난리를 치는 이 세상에 경제학 원리는 있는가. 교단의 입장은 분명하다. “원리는 있다.” 당면한 경제위기가 잦아들자마자 동굴에 숨어 있던 사도들이 다시 나와 소리치고 있다. “회개하라, 그간 방심한 틈을 타서 누가 감히 신성을 모독했느냐.” 시장에서의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있는 눈빛들에게, 영어로까지 달달 외워서 제출한 그들의 답안지들에 ‘대안적 해석’을 붙인다(위 <표> 참조).